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펭귄클래식 7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전은 실제로는 읽지도 않았으면서 읽은 것 같은 책이다. 오랜 세월동안 여러 곳에서 이야기되고 변형되다보니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나 구전 동화처럼 내가 다 아는 줄거리 같다. 디테일을 얘기하다 보면 , 그게 그런 내용이었나?“ 하게 되고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네.“ 라며 양쪽 어깨를 그저 으쓱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20살의 장미처럼 순백한 청년이 있었다. 청년이 너무 아름답고 매혹적이어서 어느 화가는 커다란 캔버스에 그를 그렸다. 청년의 초상을 본 화가의 친구는 간직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 중 하나인 젊음의 한가운데에 있는 청년이 머지않아 세월에 굴복하여 추악한 인형으로 쇠퇴할 것을 안타까워했다. 화가의 친구 말에 어느 순간 동의해버린 청년은 이 특별하게 젊은 순간의 그림이 그 대신 나이를 먹는다면 기꺼이 영혼이라도 내어줄 것을 고백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6월의 특별한 젊음을 가졌던 초상화는 세월을 먹게 되고 청년은 소멸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소유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청년은 도리언 그레이, 어느 화가는 바질 홀워드, 화가의 친구는 헨리 워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초상화에 젊음을 대가로 영혼을 판 도리언 그레이는 꿀에 취해 꿀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파리처럼 감각과 쾌락을 숭배하며 낮에는 믿기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밤에는 있음직하지 않은 일들을 실천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럴수록 청년의 영혼을 받은 초상화 속의 청년은 노화의 징후인 주름과 함께 감각과 쾌락의 찌꺼기인 죄악의 징후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부도덕과 타락 속에서 허우적대던 도리언 그레이는 죄악으로 물든 자신의 양심인 동시에 인생을 더럽힌 아름다움과 젊음을 파괴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자 칼로 자신의 초상화를 베었다. 동시에 자신이 저지른 죄의 징후와 노후의 징후가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 도리언 그레이가 온몸이 피로 물들어 쓰러졌고 순백의 영혼을 되찾은 초상화는 그 앞에서 장미의 순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위의 줄거리로 인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내게 고전소설의 전형적인 정의를 확인시켜주었다. 처음으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제대로 읽어보았더니 역시나 이미 알고 있던 내용 그대로이다. 줄거리 면에서는 디테일로 들어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네.” 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알고 있던 내용 그대로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미주의자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유미주의자인 작가의 정신과 사상이 그대로 녹아있다. 작가가 추구하던 사상과는 별개로 어쨌든 이 작품은 청춘의 순간을 향락과 쾌락으로 채우고 난후 아름다움은 가면에 불과했고 젊음은 조롱과도 같았던 것임을 말하면서 왜 청춘의 제복을 이다지도 입으려고 했는지에 대해 후회하는 도리언 그레이를 보여주고 있다. 도리언 그레이는 소설 막바지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선행을 시작하면서 헨리의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이 부분은 오스카 와일드가 평소의 소신(헨리의 말을 통해 본 유미주의적 소신)을 당시 영국 사회의 대세적 여론와 적당한 타협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도리언 그레이에게 영혼을 팔도록 영향을 끼치고 방관한 인물로 화가의 친구 헨리가 소설 속에 등장한다. 소설에서 대사의 대부분은 헨리의 것으로 7할을 넘게 차지하고 있다. 소설의 결말로 보자면, 헨리의 아름다움과 쾌락에 대한 생각은 결국 도리언의 인생을 실패로 만들었고 죄를 범하게 했다는 것이며 도리언은 죄를 범할 때마다 즉각적인 처벌을 받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지성과 교육에 의하여 내 머리는 소설의 결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소설을 읽는 내내 초반부터 등장하는 헨리의 생각에 나는 많은 부분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었다. 소설의 결말은 타당해보이지만 그래서 뭐가 잘못됐지? 누가 잘못된 거란 말이지?’라고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헨리의 생각은 대강 이러하다.

세상에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보다 나쁜 건 단 하나뿐일세. 그건 남의 입에 전혀 오르내리지 않는 거라네.”

나이 든 주교는 그가 열여덟 살 청년일 때 들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니까 당연히 그는 항상 기쁨이 넘치지.”

우리가 모두 과도한 교육을 받느라 고통을 무릅쓰는 것은 바로 생존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어리석은 희망에 따라 더 오래 지탱할 수 있는 뭔가를 찾으려 하는데 그래서 우리 머릿속을 온갖 쓰레기와 사실들로 채운다네.”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깨닫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유인 셈이라오.”

사회의 공포는 도덕의 기초인데 그것은 신에 대한 공포가 종교의 비밀인 것과 같다.”

세상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충만하고 온전하게 살려고 한다면, 자신의 모든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고, 모든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꿈꾸는 것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어요.”

감각만큼 영혼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없다오. 영혼만큼 감각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

젊은 시절에 그 젊음을 만끽하시오. 지루한 것들에 귀를 기울이느라 황금 같은 시절을 허비하지 마시오. 젊음은 되찾을 수 없는 것이라오.”

도대체 누가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로 정의했는지 궁금하군. 인간은 여러 속성을 지녔지만 결코 합리적이지 않아.”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일은 대단히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가 있다네.”

남자가 결혼하는 이유는 피곤하기 때문이며 여자가 결혼하는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네. 피차 실망할 뿐이야.”

충실함 속에는 소유에 대한 욕구가 감춰져 있지. 혹시 남들이 집어 갈 거라는 걱정만 없으면 우리가 스스로 내팽개칠 것들이 많이 있다네.”

우리가 타인을 좋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염려하기 때문이네.”

사람들은 자신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상대에 대해서만 항상 친절할 수 있다네.”

무슨 일이든 너무 자주 반복하면 쾌락이 된단 말일세.”

 

직설적이고 도덕적으로 그릇된 말들일지는 몰라도 인간 내면 깊은 곳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결과적으로 헨리는 나쁜 사람이지만 부분적으로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헨리는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인생의 큰 기쁨으로 여겼고 그 대상이 도리언 그레이였다. 20살이나 된 도리언은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고 헨리의 말과 생각에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도리언은 말미에 그가 말했던 거처럼 인생에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할 때마다 합당한 처벌을 받았어야했다. 아름답다는 이유로 부자라는 이유로 도리언은 쉽게 용서를 받았다. 그 결과,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도 화가 바질도 화가의 친구 헨리까지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겪게 된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꽃님에게,

어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실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책 내용이 자꾸 줄어들어서 책장을 넘기는 손이 자꾸 떨렸습니다. 빨리 줄거리를 알고 싶고 끝까지 다 읽고 싶지만 읽을 분량이 줄어들어서 슬픈 느낌, 아시죠? 더불어 안타까운 제 마음을 제 뇌와 손이 알맞게 표현할 능력이 충분치 않다는 슬픔이 또 나를 덮치네요. 이래 저래 우울하네요.


하지만, 들꽃님에게 오늘 내 이런 우울감을 투정부리려고 글을 쓰는 건 아니에요.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고 글을 씁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알게 해 주어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이 책은 2020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넘버 1이 될 것이 확실해보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책의 주인공인 줄리엣 흉내를 내어 이런 서간체 글을 다 쓰기까지 할까요? 실은 저는 오글거리는 것을 못 견뎌해서 평소의 나라면 이렇게 쓰지 못할텐데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다 읽고는 서간체의 글을 쓰지 않고는 책을 다 읽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았아요.


처음에 책 제목을 들었을 때는 건지 감자껍질이라고 해서 - 감자껍질 말린 것으로 만든 파이라는 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건지가 섬이름이었네요! 세상은 참, 아니 살면 살수록 '나는 참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요. 건지 섬만 하더라도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 아니겠어요? 반백년을 살면서 나름 좀 배운 사람이고 책 좀 읽은 사람인 척 행세를 하기도 했는데 정말 부끄러웠어요. '정말 겸손하게 행동해야지!'하고 다짐하지만 이 다짐이 그리 오래 갈 것 같진 않아서 걱정되기도 하네요.


이 책의 저자 메리 앤 셰퍼에 대해 궁금해졌어요. 저자는 7년에 걸쳐 이 책을 썼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 책이 저자의 유일한 작품이라죠? 우연한 기회에 건지 섬을 알게 되고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면서 7년을 거쳐 이야기를 완성했다는데, 저는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저자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한 작품을 7년씩이나 다듬어야 하는 작가의 신세에 무섭기도 해요. 왜냐하면 저는 금방 성과를 보아야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나의 아야기에 꽂히면 그것만 생각하고 빨리 쓰고 깊은 고민도 없이 마무리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랬다가 칭찬을 덜 받으면 금세 풀이 죽어서 혼자 방구석을 긁고 있구요. 구상부터 마무리까지 꼼꼼히 7년을 한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알게 되어서 행복했지만 그래서 한편으로 조금 우울했어요. 자신감도 없어지구요.

책을 보면 작가가 7년씩이나 걸린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주요 등장인물만 15명정도 되잖아요? 근데 그 사람들 모두 다 내 주변에서 한 번쯤은 만난 실재하는 사람들 같아요. 캐릭터가 하나같이 다 살아있구요, 인물들 마다 개인 역사가 다 있잖아요? 캐릭터 창조에만 3년은 걸릴 것 같아요. 그리고 책에서 다루어진 책들도 그래요. 이렇게 자유자재로 다룰려면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할 것 같은데,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요? 물론 저자는 책을 쓰려는 목적만으로 책에 나온 도서를 읽지는 않겠지요. 도서관과 서점에서 일하면서 꾸준히 많은 책들을 읽고 저자만의 기억저장 장치속에 보관을 해두고 있었을 테지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 은근한 로맨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손끝이 짜릿해져왔어요. 어릴 때 하이틴 로맨스를 많이 읽어서 그럴까요? 아님 순정만화를 너무 많이 봤을까요? 고백하지면 저는 로맨스가 좋아요. 특히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은근하고 약간은 눈치채지 못하는 그런 로맨스가 더 끌려요. 그래서 이 책이 더 제게 감동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한동안은 모든 글을 서간체로 쓰고 싶어 질 것 같아요. 남 흉내만 내어서는 안되는데, 지금 이 문체도 줄리엣의 것이라는 거 혹시 눈치채셨나요? 그랬더라도 그냥 모른체 해주세요. 칭찬도 부족한데 비평부터 받으면 또 슬플 것 같아요.

아무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만나게 해 준데에 대해 다시금 감사를 드리며 이만 두서없는 글을 마칠께요.

햇살이 너무 좋아요. 빨리 같이 얼굴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hikelly 드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 ⓔ -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역사 ⓔ 1
EBS 역사채널ⓔ.국사편찬위원회 기획 / 북하우스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식의 영향력은 디테일에 있다. 가장 우선은 역사의 전체 흐름을 관통하는 것이겠지만 역사가 우리에게 재미있고 구체적이고 현실감있게 다가오려면 작은 사실과 진실을 알아채는 것 - 그러면 역사는 저 멀리 과거가 아니라 내 옆, 지금 현재가 역사가 될 수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운 미래가 온다 - 미래 인재의 6가지 조건, 개정증보판
다니엘 핑크 지음, 김명철 옮김, 정지훈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다가오는 하이컨셉, 하이터치 시대에 필요한 6가지 인재의 조건 - 디자인, 스토리, 공감, 유희, 의미, 조화-에 대해 강조하는 책. 우뇌의 역할을 중요시하고 있다. 하지만, 책을 너무 늦게 읽었다. 2012년 책을 2020년에 읽자니 이제는 새로운 미래와 인재가 아닌 뻔한 시대와 인재 이야기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로나19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다시 베스트셀러로 등극하였고 현 상황과 유사한 콘텐츠를 접하고 싶다는 생각에 읽기로 한 소설이다. 실은 코로나로 감금(?)당하면서 현재와 유산한 상황을 다룬 콘텐츠를 많이 보았다. 한국영화 <감기>와 <괴물>를 다시 보고, 외화 <컨테이젼>과 <눈 먼자들의 도시>도 시청하였다. 이제는 소설로 눈을 돌렸는데 그것이 <페스트>이다. 


책을 읽고 나니 생각이 많아진다. 소재와 줄거리는 분명 <페스트>라는 질병을 다루고 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질병 너머 다른 것도 보인다. 위의 영화들에서처럼 단순히 질병과 바이러스, 그로 인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페스트>의 주요 등장인물은 의사 리유, 기자 랑베르, 말단 공무원 그랑, 천주교 신부 파늘루, 자살을 시도하던 코타루 그리고 사람 타루이다. 어느 4월 갑자기 알제리 오랑이라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도시에 페스트가 유행한다. 지금 코로나가 우리를 갑자기 찾아온 것 처럼. 오랑시 당국은 도시 폐쇄를 놓고 책임소재와 대처방안에 대해 답없는 회의만을 하고 아무튼 퍼져가는 사망자에 오랑시는 폐쇄를 당하고 폐쇄된 오랑 시민들이 만연한 페스트를 대처하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의사 리유는 직업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환자를 치료하고, 오랑 사람이 아니었던 랑베르는 탈출을 시도하고 그랑은 자기가 할 수있는 자질구레한 일을 자처하고 파늘루는 열심히 신이 우리에게 반성의 형벌을 내리니 견뎌내자는 설교를 하고 페스트 직전 삶이 피폐로 자살하려던 코타루는 페스트 상황에서 오히려 활력을 찾고 있고, 타루는 당국은 그들의 할일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할일 - 민간 보건대를 청설한다. 소설은 보건대에서 각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오랑시민들은 감금된 도시 안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감염된 환자들이 어떻게 죽고 처리되는지를 심하게 무미건조한 문체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소설은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감기>나 <컨테이전>만큼 긴장되지도 않고 초조하지도 않다. 오히려 건조한 서술로인해 조금은 지루하다고나 할까? 왜냐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페스트에 찾아온 후 사람들의 삶은 지금 2020년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겪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며 고통받고 있는 나의 모습과 이웃의 모습을 다양해진 매체로 인해 우리는 생생하게 보고 듣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그대로이다. 


많은 고전들이 그러하겠지만 <페스트> 역시 줄거리를 따라가기 보다 등장인물의 생각에 집중해야 제대로 이 작품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사 리유는 환자를 진료하는 동안 이동하는 동안 회의하는 동안 대화하는 동안 페스트에 대한 생각,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한다. 타루는 리유와 대화를 자청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학을 피력하고 그랑과 랑베르도 보건대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들을 발언한다. 여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발언과 생각은 그대로 카뮈의 생각과 사고의 결과물일 것이다. 


리유는 머리를 흠칫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 매일매일의 노동, 바로 거기에 확신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무의미한 실오라기와 동작에 얽매여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멎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일이었다. (60쪽)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만큼,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 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172쪽)



˝제일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하면 좋으련만!˝(184쪽)



랑베르가 말했다. ˝그러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272쪽)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 의식을 느낍니다. 아마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자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332쪽)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잇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서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제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402쪽)



알베르 카뮈는 1913년 프랑스 본토가 아닌 프랑스가 통지하고 있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를 꾸려야 했던 어머니와 외할머니 집에서 기거했던 그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유햑을 갔다. 문학적 자질을 알게된 카뮈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당시 프랑스 문학은 최고 문학 학교인 그랑제꼴의 에꼴로망 출신이 다수였는데 알제리 출신이면서 에꼴로망 출신도 아니었던 카뮈는 많은 이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독일의 히틀러가 전쟁에 한창일 때 카뮈는 <이방인>을 발표했고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프랑스의 유명 작가 사르트르와 친하게 지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 단체에서 아주 열렬히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레지스탕스 단체 '에서 꽁바'라는 기관지를 펴내며 직접 투쟁의 글을 써서 많은 프랑스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활동 당시에 사람들은 그 기고문들이 카뮈의 것인지 몰랐다가 전쟁이 끝난 후 알려졌다고 한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카뮈는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 또다시 이방인 취급을 받고 속칭 왕따를 당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프랑스 내 변절자 처단 문제였는데, 레지스탕스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사르트르 및 다수 지식인들은 프랑스 혁명 후 과격파 쟈코뱅당과 로베스 피에르가 그러했던 것처럼 "전부 다 처단"을 주장한 반면 카뮈는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고 포용을 하자"는 입장이어서 당시 다수를 지배했던 프랑스 여론에 반하였기 때문에 카뮈는 프랑스 사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배제되었다. 

부조리를 주장했던 카뮈는 사실, 동양적인 중용을 좋아했던 투사이자 소설가로서 좌와 우 모두에게서 변절자, 회색 분자 취급을 받았는데 카뮈는 극단을 싫어하고 영웅주의를 혐오했으며 주어진 운명에 끊임없이 반항하며 살아가는 일반 대중들을 좋아한 아나키스트 기질이 있던 사람이었다. 


<페스트>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바이러스에 대항하던 타루, 영웅으로 대접받을 수 있던 타루의 결말을 그렇게 된 것도 카뮈의 깊은 계산이 있었던 것 같고, 열심히 자질구레한 자기 할일을 하는 그랑을 영웅의 반열에 올리고 싶어햇던 것도 카뮈의 성향을 잘 드러낸다. 


전후 그가 목격했던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 일부 영웅주의에 쩔은 사람들의 행보, 신념을 위해 가졌던 권력이 나중에는 권력을 쥐기 위해 신념이 변질되는 것을 보면서 느낀 그의 생생한 감정과 생각이 <페스트>라는 질병으로 은유하여 등장인물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다. 

실제로 <페스트>에 대하여 절친 사르트르는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고 평을 할 수준에는 택도 없지만 나는 카뮈가 느꼈을 당시의 외로움과 일종의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이해가 되었다. 


코로나때문에 <페스트>를 읽었다가 <카뮈>에 매료되어 이번 독후감은 중언부언해버렸다. <이방인>도 다시 봐야겠고 <시지프의 신화> <티파사의 결혼>등도 찾아보아야 겠다. 

아, 할 일은 많고 나는 여전히 게으르고 - 여기서 나는 카뮈의 <부조리>를 이해하게 되는구나!


마지막에 사족을 달자면, 민음사판 <페스트>말고 다른 버전으로 읽어보기를 권유한다. 자주 느끼는 것인데 민음사 고전 시리즈는 번역과 편집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다. 순전한 개인 의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