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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평점 :
우리나라에는 홧병’이라고 알려진 다른 나라에는 없는 질병이 있다. 특히 주부들과 직장인들에게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나도 대한민국 주부이고 직장인 생활도 20여년을 넘게 했기에 생활 속 울화를 종종 겪고 품고 사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짜증이 쌓이고 화가 치미면 마음속으로 욕을 하는 것으로 일정 부분 해소를 하곤 했다. 욕이라는 것이 묘한 것이어서, 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속으로나마 욕지거리를 하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은 확실했다.
모든 종류의 중독은 시간이 갈수록 강도가 세지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나의 마음 속 욕도 차츰 강도가 세진 것은 당연한 일 일터. 마음 속 욕으로는 울화가 해소가 되지 않는 것이다. 화가 가슴속에 쌓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곤, ‘야! 이 XXX !@#$#^#$&$&~~~~!’며 입 밖으로 터트려야 속이 시원해지는 단계가 되었다.
급기야 이제는 남이 안본다고 생각되면 작은 소리로 욕을 직접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면 순간 주위에 사람이 있어도 작은 소리로 ‘ㅅㅂ, 지가 뭐 잘났다고 지랄이야 지랄이. AC~~~’같은 말을 입 밖에 내곤 하는 것이다. 물론 딴에는 주위를 확인하고 속삭이며 몰래 한다!고 자신했다.
사건은 친언니들과의 여행에서 발생했다. 동유럽으로 자매들끼리-나는 2명의 언니가 있는 막내다- 8박 9일 여행을 갔다. 패키지 여행이라고 해도 나이 50이 훌쩍 넘은 언니 둘을 모시고(?) 빡빡한 일정의 여행을 다니다 보니 말미에는 몸이 많이 지쳐갔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언니들보다 젊고 영어를 좀 한다는 이유로 자유시간이 주어지거나 식당엘 가거나 쇼핑을 할 때 늘 언니들과 동행을 했고 많은 뒤치닥꺼리를 해야 했다. 여행 초기 봉사정신으로 무장한 나의 상냥한 말투와 솔선수범한 행동은 여행의 후반기 즈음엔 나 살기가 힘들어 더 이상 상냥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나는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외에서 쇼피은 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울 언니 둘은 글쎄 나와 정반대이지 않은가! 하긴 어릴적 같은 방을 쓸 때도 서로 스타일이 달라 티격태격(하고 싶었으나 막내로 당하기 일쑤였다.)했으니 머리가 허~연 중년이 되어서야 말해 무엇하리.
이런 저런 일들로 짜증이 쌓이고 울화가 차곡 차곡 단전에서부터 쌓여가고 있던 어느 날 식당에서였다. 주문을 하고 큰 언니가 ‘막내야, 저 가서 이것 저것 좀 갖고 온나. 내는 다리가 아파 좀 쉴란다.’ 하는데 그만 거기서 쌓여있던 울화가 뇌를 거치지 않고 중독증상인 욕지기로 교환되어 입 밖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언니가 요구한 물건을 가지러 가서 주섬 주섬 챙기면서 ‘ㅅㅂㄴ, 지만 피곤하나. 나는 더하거든! 저거들 수발한다고 피곤해 죽겠고만. 에잇 ㅅㅂ!!!’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는데 뒤돌아보니 언니가 바로 내 뒤에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ㅅㅂ, ㅈ됐다!’는 생각이 들다. 그런데 언니는 내 말을 못들은 건지 아니면 못들은 척 하는건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계속 서있었다.
이 순간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딱 그 꼴이었던 것이다.
나는 언니들보다 많이 배웠고 많이 읽었다. 가족들도 친구도 나를 일명 ‘배운 사람’ 취급을 해주었고 나름 동네 엘리트라고 자타가 인정해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앞과 뒤가 같은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 그것이 친언니를 욕하는 나쁜 사람도 되고 맘 속에선 온갖 짜증과 불만을 터트리는 몹쓸 막내도 되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선생님’이 ‘머리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그 자신이 훌륭해지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것처럼, 나도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머릿속을 훌륭한 생각으로 채워도 나 스스로가 훌륭해지지 않으면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 이었다.
소세키의 <마음>속 선생님이 과거 친구 k에게 한 행동들이 이런 이유로 나는 이해가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한 갈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 물길과 같아서 어디로 흘러갈지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와 차단하고 은둔의 삶을 살았던 소세키의 선생님과는 달리 나는 다이내믹한 대한민국 사람이라 책도 읽고 외부와 접촉하며 조금이라도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