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박완서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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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ㄴㄹ

내가 정말로 보고 싶었던 것은 옥살이하는 그도, 재판받는 그도 아닌, 한모의 두부를 향해 고개 숙인 그, 입술 주변에 허연 두부파편을 붙인, 적나라하게 초라해진 그였다. - P29

젊은이는 고분고분 두부를 받아먹으면서 먹물처럼 계속해서 어둠을 풀어내고 있었다. - P31

그런 날이 오기전에 그가 먼저 세상을 떴고, 그가 땅에 묻힐 때 그 옆에 내 자리까지 잡아놓고 나니, 내 여생은 6.25같은 국난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눈 팔 것도 샐 구멍도 없이 막힌 길이나 다름없었다. 나느 그 빠져나갈 길 없는 정해진 통로에 문득문득 공포를 느꼈다. 그건 죽음의 공포하고는 또다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따분한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이렇게 메마르고 삭막해도 되는 것일까. - P41

노망이란 무엇일까? 돌이킬 수 없는 옛날을 돌이킬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착란, 변하게 되어 있는 것을 안 변하는 것으로 붙잡아두려는 고통스러운 망상, 죽음이 보이는 시점에서 어린시절로 돌아가려는 퇴영에 지나지 않는 것을. - P43

건강한 육신에도 얼마든지 망령된 생각이 깃들이는데 나이와는 상관없이 상상력이 자유롭고 또 그걸 곧장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졋다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 P47

나처럼 오랫동안 변치 않은 고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만도 얼마나 큰 복인가. 그리고 그건 나에게 맞는 복이었다. 만약 내가 고향을 방문할 수 있게 된다면 그날이 바로 마음속에 있는 내 고향, 이상화된 농경사회의 평화와 조화를 상실하는 날이 될 게 뻔하지 않은가. 어떻게 변했나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보아버리면 다시는 안 보았을때로 돌아올 수 없을 테니까. 일단 글을 깨치고 나면 문맹산태가 되는것이 불가능하듯 말이다. - P51

병을 앓고 있다고 하지 않고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병다운 고통이나 자각증상이 거의 없는 대신 남이 눈치채지 않도록 고이 간직해야 하는 부담감이 소유의 불편과 맞먹기 때문이다. - P53

처음 그 병의 진단을 받고 선뜻 믿기지 않았던 것은, 아니 벌써 성인병이라니. 하는 아직 젊은 마음 때문이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어차피 노년의 문지방이란 누구나 그렇게 떠다밀리듯이 넘게 되어 있는 게 아닐까. - P55

대개 성인병의 내방을 받는 것은, 제 몸 안 돌보고 길러낸 자식들이 제각기 거들먹거리며 부모 슬하를 떠나갈 무렵이다. 애면글면 돌보고 사랑하고 책임져야 할 대상이 없어진 허탈감을 메워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몸이 그 존재를 드러낸다. - P56

나는 이제 소주 한잔에 삼겹살 한점을 먹고 싶어도 그 전에 내 몸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아부까지 해야 한다. - P56

옛날사람이면 늙은이보다도 더 오래된 사람이 아닌가. 나는 현란하게 흥청대는 첨단의 소비문화 한가운데서 미아가 된 것처럼 우두망찰했다. 그때 그 미아의 느낌은 공간적인 게 아니라 시간적인 거여서 어딜봐도 귀로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막하고 절망적인 것이었다. - P68

실루엣만으로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게 바로 피붙이의 징그러움이다. 달려가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오냐고 다짜고짜 때리기부터 한다. 내 손바닥의 아픔으로 내 새끼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비로소 타들어가던 애간장이 스르르 녹게 된다... 최고의 엑스터시도 육신을 통하지 않고는 이를 수 없는 걸 어이하리 - P75

담장 밖 시냇가에 황금갑옷을 입은 듯 장엄하게 물들엇던 은행나무가 엊그저께 아침에 보니 마지막 잎새도 안 남기고 황량하게 옷을 벗어던져 내가 본 찬란한 영광이 꿈인 듯 허전하더니, 살구나무는 천천히 질 모양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뚝뚝 떨어지는 낙엽은 은행나무처럼 찬란하지 않은 소박한 누런색이지만, 가지 끝의 잎들은 부끄럼 타듯이 살짝 붉다. - P78

차가 긴 강변북로를 벗어나 구리 쪽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진지한 가로수가 나타났다. 평소 무자비할 정도로 뭉턱뭉턱 전지한 가로수를 꼴 보기 싫어했는데 하나같이 박수근이 그린 겨울나무들이 거기 나와 서 있는 것처럼 반갑고 정겨웠다. - P97

잎과 꽃과 열매까지 포함해야 나무의 전체가 되는 줄 알았다. 이제 보니 그것들을 다 떨구고 맨몸으로 서 있는 나목이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없다는 게 바로 저런 게 아닐까 싶게 거침없이 당당하고 늠름해 보엿다. 나무의 맨몸의 아름다움에 배하면 꽃이나 잎은 한낱 가식이나 방편에 지나지않은 것처럼 부질없게 여겨졌다. 사람도 만일 일생 쓰고 살던 위선이나 허위를 떨어버릴 수 있다면 무엇이 남을까. - P98

흙의 에센스가 바로 이런 거다 싶은 강한 냉이맛이 수액처럼 고루 펴지면서 마치 내가 한그루 나무가 된 양 싱그러워지는 걸 느꼈다. - P106

기상이변이란 바로 하늘을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하늘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원초적인 공포감을 자아내는 것도 없다. 덮어두엇던 죄의식까지 불러내기 때문이다. - P116

한결 성기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굵은 빗줄기는 마치 은빛 회초리처럼 대지를 향해 강한 적의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119

가을이 산을 내려오고 있다. 대총봉이나 내장산처럼 자지러지는 단풍은 아니었지만 산정에만 드문드문 보이던 황갈색이 어느 틈에 중턱까지 퍼졌다. 봄은 기를 쓰고 올라가더니 가을은 이렇게 신속하게 내려오고 있다. - P132

내 안에는 아직도 내 힘으로는 다스려지지 않는 떨림이 남아있다.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모진 세상, 미지의 운명 앞에 이리도 알몸인듯 시린가. - P134

노을이 너무도 핏빛으로 선열하여 영웅호걸의 낭자한 출혈처럼 비장할 적이 있는가 하면, 가인의 추파처럼 요요할 적도 있다. - P136

아침에도 노을이 지지만 그건 곧 눈부신 햇살을 거느리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잊혀진다. 그러나 저녁노을은 언제 그랫더냐 싶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끝이 어둠이기에 순간의 영광이 더욱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집착 없음 때문이다. - P137

소설은 허가맡은 거짓말 - P202

늙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산천이나 초목처럼 저절로 우아하게 늙고 싶지만 내리막길을 저절로 품위잇게 내려올 수 없는 것처럼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이 나이가 좋다. 마음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안하고 싶은 건 안할 수 있어서도 좋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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