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3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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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구매하고 완독하기까지 거의 일 년이 걸린 것 같다. 책 이름은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워낙에 박영규 작가의 한 권으로 읽는 시리즈는 좋아한다.

제일 처음 꽂힌 책은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두 번을 읽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두 번 독파하고 나서 나는 고려시대로 이동했다. 애정을 갖고 책을 보니 어려운 단어도 왕 계보도 너무나 재미있었다. 고려시대가 이렇게나 재미있었다니. 2018년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을 본 후 나는 '한 권으로 읽는' 전 시리즈를 다 봐야 겠다고 다짐했다.

작년에 신라왕조실록을 거의 일 년에 걸처 완독을 했다. 조선, 고려와는 달리 따로 접해 본 적이 없는 역사라 많이 생소하였다. 아는 것이라고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나왔던 인물과 김유신, 김춘추, 첨성대 등등. 하지만 고향이 신라 지역인지라 그래도 왠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신라를 다 읽을 무렵 나는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과 <한 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을 동시 구매했다. 그 중에서 백제왕조실록에 먼저 손을 대었다. 그리고 이제야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을 다 읽고 난 소감은, 그저 놀라움이다.

우리는 백제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있다. 그리고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책의 저자인 박영규 작가가 다 옳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고대사라는 것이 워낙 사료도 풍부하지 않고 있는 사료도 훼손, 왜곡된 것이 많아서) 드 넓은 대륙에 영토를 가졌던 백제, 선진 문물을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 나누어 주는 것에 상당히 개방적이었던 선진국 백제에 대하여 많은 편견과 선입견을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백제의 비밀을 풀면 우리 고대사가 엄청나게 달라지고 역사를 새로이 배워야 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실들을 나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배운 학자들이 분명 많을진대 왜 논의와 연구가 더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백제왕조실록을 보다 보니 문득 '가야'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일었다.

가야는 백제보다도 더 비밀을 많이 간직한 고대국가이다. 가야는 백제, 왜, 신라가 모두 얽혀있는 미스터리한 나라로 남아있다. 오죽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취임직 후 학자들에게 '가야에 대해서 연구를 좀 해달라'고 했을까? 그때는 무슨 대통령이 역사 부문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나, 며 쪼잔하게 생각했는데 백제왕조실록을 읽고 가야에 대하여 궁금증이 일다 보니 문 대통령의 당부가 새삼 이해가 된다. 다 내가 모르기 때문에 생긴 편견이다.

어느 미술사학자의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인는 법인가 보다.

겨우 요약된 책 한권 읽었다고 해서 내가 마치 백제역사 통이라도 된 것은 전혀 아니올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하여 백제왕의 계보 정도는 스스로 정리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다. 이렇게 정리해놓으면 다음에 다시 책을 들쳐볼 때에는 해당 왕의 시대에 생긴 사건과 인물들도 사이사이 빈 공간에 집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접촉은 호기심을 유발하고 호기심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관심은 애정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애정은 결국 지식과 정보와 데이터의 축적으로 이어지니 나중에 나는 축적된 것들을 맥락에 맞춰 편집만 하면 된다.

나는 믿는다. 검색된 데이터와 내 안에 소화된 데이터에는 분명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역사 공부를 느리지만 계속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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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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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는 풍부한 시간을 유일한 재산으로 가진 나이를 모르는 소녀이다. 마찬가지로 필요한 만큼 노동을 하고 노동을 하기에 필요한 시간만큼 여유를 가질 줄 알았던 동네 사람들과 함께 모모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모두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빈 공터에서 멋진 함선과 폭풍을 만들며 즐겁게 놀곤 했다. 모모와 친구들은 별것없지만 행복한, 아니 행복이 행복인지도 모를만큼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매트릭스'의 스미스요원같이 생긴 시간저축은행의 회색인간들이 나타났다. 회색인간들은 모모의 친구들에게 '시간'을 아껴 자기들의 시간저축은행에 시간을 저금하라고 영업을 했다. 아낀 시간은 나중에 이자에 이자를 붙여서 더 크게 더 많이 삶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더 크게 더 많이' 즐길 수 있다는 말에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기 시작했다. 모모의 친구들이 아낀 시간은 회색인간의 시간저축은행에 저축되기 시작했다. 모모의 친구, 식당을 운영하던 푸지씨도 회색인간에게 영업당하여 시간을 아끼기 시작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아끼고 있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시간을 아끼고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아끼고 많은 경험을 하기 위해서 시간을 아낀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아꼈다. 나의 과거는 푸지씨의 하루와 다르지 않았다. 아침 6시 기상. 1시간의 출근시간. 7:30 출근. 오전 업무. 점심. 오후 업무. 운동. 독서. 사교. 영어. 육아.요리.살림. 승진. 회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반복 반복 반복.

처음에는 자기계발에 시간을 투자한다고 생각했다. 조금 지나서는 자아실현에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투입하였다. 강산이 두 번 정도 바뀌고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계발이 되고도 충분히 여유가 남았어야 했을 '자기'는 계발이 아니라 방전이 되었다. 실현되었어야 할 내 '자아'는 여전히 어디있는지 모른 채 아직까지 흩어진 자아를 찾기에 분주했다. 결단의 시간이 왔다. 나는 노력과 시간의 투자와 투입 대신 이제 그것을 꺼내 쓰기로 하였다. 그래서 반복되는 하루 일과를 버렸고 모모와 모모의 친구들처럼 하나를 해결하는데 느린 행동과 많은 시간을 들이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니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무슨 일을 하든 필요한 만큼 시간이 풍부해진 나는 모모와 모모의 친구들처럼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었을까? 풍부해진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길을 잃었다. 넘쳐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시간은 금이다. 시간을 아껴라는 교육을 받았을 뿐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시간 안에서 어떻게 자유를 누리는지를 미처 배우지 못했다. 풍부해진 시간 안에서 불안을 느꼈다. 시간 저축은행에 저축해둔 내 시간을 꺼내 쓰는 것인데도 마치 남의 시간을 훔쳐 쓰는 것처럼.

하지만 세월은 저절로 흐른 것만은 아니다. 지금 내가 가진 시간은 과거의 내가 가진 시간과는 다르다. 무작정 시간을 아끼고 돈을 모으고 먼 미래를 계획하면서 시간을 저당 잡히지는 않겠다. 막연히 불안한 미래를 위해 하루를 견디지 않겠다. 그저 이 순간에 충실하며 바로 다음 단계만을 그릴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강산이 두 번씩이나 바뀌면서 터득한 내 시간의 운영의 묘미이다.

<모모>에서 가장 마음이 갔던 캐릭터인 베포 씨. 느리지만 늘 신중하고 말을 아끼며 서두르지 않은 청소부 베포 할아버지. 그가 모모에게 했던 말을 가슴속에 담아본다. , 원하는 만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나의 시간이 어린 시절처럼 다시 풍부해진 것이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P5

과연 모모는 저축당한 시간을 회색 인간에게서 되찾아왔을까? 모모와 친구들은 풍부한 시간을 누리며 다시 행복한 나날을 맞이하였을까?


가벼운 어른을 위한 동화로 책을 열었다면 삶을 풍부하게 할 철학적인 질문으로 책장을 덮게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러니, 시간을 저축하고 있는 친구들이여 <모모>를 만나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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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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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때문에 친정엄마가 두 아이의 육아를 맡게 되었으며 친정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된 것이 나에게는 아주 큰 행운이었다. 당신이 우리를 키웠던 방법 그대로 손자와 손녀를 키워내셨다.

내가 첫 애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러 친정집에 온 지 열흘쯤 지났을 때 아이 탯줄이 마침내 떨어졌다. 탯줄을 집어놓은 집게에 말라붙은 탯줄은 흉측하게 보였지만 엄마는 이 역시 색깔 고운 헝겊에 잘 싸더니 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니 애가 뱃속에서부터 온갖 기운과 양분을 한데 모은 거다. 아이가 큰 일 있을 때마다 같이 하게 해라. 엄마 뱃속에서 힘을 모은 것 같이 온 힘을 모아주는 거다. 흉하다고 함부로 대하지 말고 애 낳을 때마다 잘 보관해라." 과학적 근거도 없는 탯줄의 영험함을 내 대학입시에서 이미 한번 겪은 나는 엄마의 간절한 기원과 말씀 때문이라도 탯줄을 잘 보관해야겟다고 생각했고 아직까지 잘 간직하고 있다.

 

아이가 두 어달쯤 지나 목을 스스로 가눌 수 있게 되자 엄마는 이내 애를 들쳐 업고 다녔다. 서서 부엌일을 할 때도 가벼운 손빨래를 할 때도 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도 친구분들과 마실을 나갈 때도 포대기에 애를 업고 낭창낭창하게 걸으며 동네를 활보하였다. 시간이 흘러 아이의 무게가 제법 무거워졌음에도 주로 업고 많이 다니셨다. 반면 나는 허리가 아파 주로 걷게 하거나 유모차를 태우기를 선호했다. 내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들이를 나서면 엄마는 말하곤 했다. "유모차에 앉아있으면 어른들 발 밖에 더 보겠나? 엄마 등에 업히면 사람들 얼굴도 보고 경치도 보고 엄마 등에 기대서 자고 싶을 때는 폭닥 시리 편안하게 잠도 자고. 애가 세상을 보게 해야지 땅 하고 발만 보게하믄 되겠나? 엄마 편할라고 자꾸 유모차에 태우면 안 되지." 나는 내가 불편한데 아이인들 편하겠냐며 몇 번을 유모차를 고집했지만 사람은 평소 보고 듣는 게 무서운 것이다. 인이 박히도록 엄마에게서 들었던 포대기와 업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어느덧 유모차보다 업는 것을 선호하게 하였다.

 

"아이고 우리 되련님, 진지를 많이 자셨는 가베? 이렇게 이쁜 똥을 많이도 맹글었네!" "왕자님, 밥 잡수이시더. 많이 자시고 어서어서 크셰이." "되련님요, 목욕 하입시더. 따땃한 물에 노곤 노곤하니 목욕하고 한숨 주무이소." 엄마는 돌도 안된 아이와 끊임없이 대화하였다. 말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였다. 아이라고 낮춰하는 대화가 아니라 한 인격체로 존중하면서 끊임없이 아이의 낯빛을 살피고 눈을 맞추며 몸을 어루만지며 대화를 하였다. 혼자 하는 말이었으면 두어 마디 하다 말았을 것이지만 엄마는 아이가 눈으로 몸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고 믿으셨다. '잼잼''곤지곤지''까꿍'도 그저 놀이가 아닌 대화의 하나로 힘들어하지 않고 아이와 교감을 하였다. 엄마는 손주가 아닌 자식에게도 저리 하셨을까? 기억이 없는 나는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키웠던 아들아이와 얼마 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TV에서 한 엄마가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가는 장면이 지나갔다. "요새 엄마들은 애를 대개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드라. 포대기에 업고 다니는 게 훨씬 좋은데."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이 불쑥 입 밖으로 나왔다. 아들은 업고 다니는 게 뭐가 좋으냐고 유모차로 다니는게 몸도 안 아프고 아이도 앉아 있으니 더 편하고 좋지 않냐고 하면서 과학적으로 따지지도 않고 옛 것이 좋다는 꼰대 같은 어른들의 생각 아니냐고 퉁을 쳤다.

무슨 말이든 어떤 일이든 근거를 대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논리적으로 타당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요즘 세대인 아들에게 나는 근거를 대지 못했고 증명을 하지 못했으며 타당한 논리를 말하지 못했다. 그저 "너거 할매한테 들었고 할매의 할매를 통해 다 증명되고 전수된 내용이다"라고만 옹색하게 받아쳤다. 아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을 눈으로 표정으로 양껏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내 말이 옳다고 자신하는데 근거와 논리를 대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속이 상했다. 부모님의 말씀이면 논리적이지 않아도 일단 수용하고 다만 내가 생활해나가면서 그분들의 말씀을 알아서 취사선택하여 사용했던 우리와 달리 논리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으면 용납을 하지 않고 보는 아이들 보면서 전통의 대물림이 이제 정말로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도 이제 나이라고 한 해 두 해 먹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몸의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나이도 먹어가는 것인지 어릴 때 듣던 엄마의 말씀이 세월이 지나고 보니 옮은 말씀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엄마의 생활 모습이 현명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엄마 아버지가 내 나이 때 하시던 것들이 내가 내 아들 딸의 나이었을 때는 조금은 어리석고 오래된 인습처럼 나도 느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도 그들의 나이가 되고 보니 모든 것이 다 버리고 폐기해야 할 것들만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있다. 배움과 깨달음은 왜 매번 뒤늦게 찾아오는 건지. 보고 듣고도 느끼지 못하는 온전한 내 탓인지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잘 가르치지 못한 내 어머니 아버지의 부족함때문인지. 온전한 젊었던 내 탓이라고 하자니 지금 내 아이들의 모자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내가 잘못한 것이 아예 없다고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부모님 탓 조상 탓으로 돌리자면 지금 내가 또한 부모가 되었기에 곧 내 탓이 되는 것이다. 이래 저래 진퇴양난의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이어령 교수의 글을 좋아한다는 지인의 추천으로 <한국인 이야기-탄생: 너 어디에서 왔니>를 읽었다.

나이 80이 훨씬 넘은 노교수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국인의 좋은 습성과 풍습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따져가며 우리가 얼마나 영민하고 자랑스러운 민족인지 모두 12가지 것들을 경험과 옛 글과 서양 문화와의 상호 비교를 통해서 연구하고 그것들을 한 권의 책으로 풀어놓았다. 원래는 중앙일보에 칼럼으로 썼던 글들을 묶어 새로 다듬어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이 책을 미리 읽고 아들과 대화를 했더라면 적어도 포대기 문화에 대해서만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던 업는 것의 위대함을 잊지 않고 기억에 품었다가 할머니의 논리를 당신의 손자에게 근거로 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탄생: 너 어디에서 왔니>는 뒷부분에 가서는 동의어의 반복과 약간은 요즘 말로 '국뽕'에 차오른 과장된 논리도 간간이 섞여 있긴 하지만 이것은 온갖 시대적 어려움을 넘고 헤쳐온 80이 넘은 노학자가 가진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길 수도 있는 정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20~30대의 젊은 세대, 특히 아이를 낳고 키우는 혹은 막 낳으려고 하고 키울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세상의 속도에 맞추느라 이런 콘텐츠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인생은 항상 뒤늦게 깨달음을 주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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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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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찬양을 받는 콘텐츠라고 해서 꼭 나도 그것을 찬양할 필요는 없다. 이효리가 집에서 로브를 입는 것이 멋져 보인다고 해서 나도 따라 입어 보지만 내가 입은 로브는 그저 한 조각의 넝마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에게서 고전이라고 인정받은 소설이라고 해서 나도 그 작품을 반드시 칭송할 필요는 또한 없을 것이다. 세상에 취향은 다양하고 다양한 취향은 존중되어야 하니까.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25살에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일주일도 훨씬 전에 다 읽었건만, 도대체 이 책과 관련하여 어떤 말로 내 감상을 끄집어내야 할지 갈팡질팡하였다. 더 이상 꾸물대다간 갈팡질팡하는 이런 마음조차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도화지만 덩그러니 남게 될 것 같기에 정리 못한 내 마음이라도 남기자고 일단 끄적여보기로 했다. 


소설을 쓴 괴테와 같은 25살로 설정된 주인공 베르테르는 불구하고 오해와 게으름이 불러일으킨 많은 갈등과 다툼을 뒤로하고 발하임이라는 조용한 마을로 내려간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베르테르의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주는 지상과 하늘을 품고 있는 발하임 계곡의 언덕배기에 앉은 베르테르는 호메로스를 읽으며 이따금 상념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무한한 신의 영혼의 거울인 자신의 영혼을 신이 발하임을 그린 것처럼 자신도 종이 위에 잘 그려서 종이를 자신의 영혼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행복하게 고민하곤 하였다. 


어느 날 베르테르는 발하임 마을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하는 길에 그만 그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보지 못했던 가장 매혹적인 것을 보고야 말았는데 그것은 마을에 살고 있는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여인 샤를로테였다. 첫 만남에서부터 샤를로테가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가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것. 베르테르는 샤를로테의 약혼자가 출장을 나가 있는 몇 주동안 샤를로테의 집을 방문하고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였는데 이것은 해와 달과 별들은 고요히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베르테르는 낮인지 밤인지 모르고 그를 둘러쌌던 세계가 사라져 버린 듯하였다. 


로테와 함께 하는 충만하고 행복한 나날은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토가 돌아오면서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로테는 엄연히 약혼자가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인지하고 있던 베르테르는 이제 그 사실을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25살의 피 끓고 감성 충만한 성정의 베르테르는 이미 너무 깊이 로테를 사랑하게 되었다. 베르테르에게 로테는 헤라이자 아프로디테였고 아르테미스이자 아테나였다. 사랑과 숭배와 헌신을 이미 바쳐버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렇듯 감성이 지배하는 성정을 지닌 베르테르와는 달리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토는 훌륭한 인품에 근본적인 성실함을 가진 사람인 동시에 당시 독일 사회에 지배적이었던 계몽의식의 영향을 받았던 듯 이성이라는 것이 그를 대부분 잠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알베르토와 베르테르의 아주 다른 성향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잘 지내는 듯했던 그들의 관계는 점차 부딪히게 되고 게다가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마음이 줄기는커녕 점점 더 켜져 가면서 두 사람의 대립은 한번 크게 부딪히게 된다.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현실 속에서 괴로움을 잊으려 일 속으로 자신을 던져보지만 속세에 찌들어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은 그가 추구하던 삶이 아니었다. 자신의 안식처인 로테에게로 다시 돌아간 베르테르. 하지만 이미 유부녀가 되어버린 로테는 이제 베르테르의 안식처가 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종교와도 같이 되어버린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숭배는 공존할 수 없었다. 얄궂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초조함과 불안이 베르테르의 영혼에 뿌리내리며 잠식해갔고 그의 생기와 명민함은 소멸되갔다. 베르테르는 신변을 정리하고 알베르토에게서 빌린 권총으로 자신의 서재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 출판사의 거절을 겪은 다음 가까스로 출판된 처지였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출판되자마자 독일과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가져왔다. 18세기 계몽주의와 지독한 이성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억눌려 있던 젊은 감성들은 베르테르의 내면이 말하던 감성과 감정의 솔직함 풍부한 감수성에 열광했다. 냉철한 이성과 지식을 당연한 진리로 여겼던 당시의 풍조에 그들은 지쳤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떤 사조이든 경향이든 하나의 시간과 공간을 그것으로만 채워지게 되면 반드시 반대편의 억눌린 기류가 빈 곳을 비집고 나오게 되어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당시 사회에서 반대편 억눌린 기류였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말할 때 ‘이건 좋다. 저건 나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어떤 행동에 특별한 속사정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나 했나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 P89

충분히 이성적인 알베르토에게 베르테르는 이와 같이 항거하며 감정이 이끄는 대로 하는 것이 어찌해서 나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되묻고 있는 것이다. 아마 베르테르의 이 주장은 당시 유럽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목소리였을 수도 있겠다. 


'젊은 베르테르'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나 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나는 너무도 늦게 읽어나보다. 

베르테르의 우유부단함에 못내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처음부터 샤를로테가 약혼자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유부녀가 되어 버린 로테에 대한 사랑을 계속 키워가고만 있었다. 처음부터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는 베르테르가 나는 불만이었다. 

그 끝이 해피엔드가 아님을 베르테르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인데 '로테'라는 여신에 대한 숭배는 여전하고 스스로 초조함과 불만과 불안을 내부에서부터 키워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모든 비관적인 감정 덩어리는 독자들이 예상한 바 그리고 현대의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베르테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주인공은 초조함과 불안과 그리운 사랑으로부터 구원하는 방법으로 왜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감정은 이미 과거 저 편에 묻어버리고 오로지 현실과 이성만이 살 길이라는 듯 2020년 이 해를 살고 있는 나는 베르테르를 이해는 하지만 용납하지는 못하겠다. 예상되는 결말이 오기 전에 나를 보호해야만 했다, 고 생각한다. 베르테르는 로테는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베르테르는 대화를 나누지 않아야 했다. 베르테르는 로테와는 거리를 두고 알베르토와만 사교를 지속하여야 했다. 그랬더라면, 적어도 그는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 베르테르의 처연한 사랑과 끝 모를 슬픔을 용납하지 않고 '안전'부터 생각하는 나는, 이제  정말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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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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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우리나라에 그리스 로마신화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그 중심에 번역가 이윤기가 있었다. 동화 같은 신화를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성인들이 신화를 읽게 한 장본인, 바로 이윤기이다.


나도 그 열풍에 같이 뛰어들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를 1,2권을 사서 탐독하였다. 아쉽게도 수많은 헷갈리는 신들의 이름과 범람하여 한꺼번에 몰려드는 강물처럼 쏟아지는 신들의 사건들에 치여 후속 책들은 읽지 못했지만.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을 때 받은 느낌은, '이 사람 글 참 쉽게 쓴다'였다. 이후로 나는 이윤기가 소설이면서도 전문 번역가로 아주 유명한 사람인 것을 알았다.


작년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었다. 이윤기가 번역한 책이었다. 46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이 2권이나 되는 책이었는데 내용 또한 난해하여 서양 중세의 종교와 철학, 기호학, 시학이 책 속에 넘쳐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책을 다 읽고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당시 나는 "뭔 번역을 좀 쉽게 하지. 이야기를 이해를 못 하겠잖아!"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집 앞에 알라딘 중고 서점이 있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다 시간이 남아서 정말 오랜만에 실물 서점에 들어갔다. 책을 사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서점을 막 나오는 순간 이 책이 내 눈에 띄었다. 눈에 잘 띄는 노란 표지였다. 책값은 단돈 5천 원. 바로 책값을 지불하고 말았다.


책을 읽고 보니 이윤기가 <장미의 이름> 번역을 어렵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냥 책의 내용을 이해할 만큼의 수준이 안되었던 것임을 알았다. 스스로 1.5세대 번역가임을 자처했던 이윤기는 장미의 이름을 번역하기 위해서 철학 전공자가 아님에도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학, 철학과 무수한 철학의 개념을 일일이 찾았다. 또 그는 애초 원문인 이탈리아어가 아닌 영문판으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놓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오독과 오역은 필수불가결하게 따라왔기에 2000년대 들어 그의 오독과 오역이 지적을 당하자 두말 않고 지적을 흡수하고 수정하여 더 나은 품질의 번역으로 다시 책을 출간하였다. 번역은 소설 창작을 두 번을 동시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장미의 이름>이 어려웠던 건 그의 번역이 부실함이 아니라 내가 중세의 종교와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윤기도 처음에 그러했던 것처럼.


소설가이자 번역가였던 이윤기가 살아있을 때 썼던 글들을 모아 만든 책이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이다. 부제는 '땀과 자유로 범벅이 되게 써라!'. <그리스인 조르바>를 번역했던 이윤기는 '조르바'와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던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작품과 작가라고 칭송하였다. 카잔차키스가 묻힌 크레타 섬에 두 번이 찾아가서 그의 무덤에 묵념할 정도로 좋아하였다. 그랬던 그가 '조르바'를 사랑하고 '조르바'와 카잔차키스가 숭배해 마지않았던 "자유"를 찬양하고 애정했다는 것은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다.


이 책은 글쓰기와 번역하기에 대해서 이윤기가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글과 말로 나누었던 느낌들을 가벼운 필치로 써 내려간 책이다. 메모장과 연필 없이 나도 가볍게 읽어내렸어갔지만 두 가지 지점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미국에 자리 잡은 뒤부터 번역 일을 줄였다. 내가 가장 힘써서 한 일은 '노는 일'이었다. 푹 놀았다. 노는 틈틈이 책 읽고, 영어 입말 배우고, 미국을 배웠다. 하지만 그것은 영어라는 특정 언어 배우기와 미국이라는 특정 국가 배우기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에 새롭게 적응하는 방법 배우기였다. 나는 개인의 힘은 자기를 바꾸어보려는 의지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나는 바닥부터 박박 기었다.

(93쪽)

이윤기는 나이 마흔다섯에 한국에서 안정적인 직업 잘나가는 번역가라는 신분을 걷어차고 스스로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뛰어들어갔다. "그는 문득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싶었다"라고 했다. 잘나가는 번역가로 남아있어도 되지만 그에게 글쓰기이라는 동반자를 있게 해준 소설과 소설 쓰기가 아직 내지 못한 숙제처럼 계속 뇌리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는 밀린 숙제를 내기 위해서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낯선 곳에서 아침'을 맞았다. 모두 다 그처럼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어쨌든 익숙한 것과 결별을 하여서 꿈꾸던 것을 이루었다. 밀린 숙제를 마침내 다 해서 제출한 것이다. 그렇게 낸 밀린 숙제는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 동인문학상이라는 큰 상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는 말했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흐르려면 바닥을 기어야 한다. 사람 또한 그렇다. 사람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94족)

나는 흐르는 물일까, 고여있는 물일까. 나는 바닥을 기고 있는 걸까, 아직 바닥에 도달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바닥을 무사히 지나온 것일까. 

- 나는 이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숱한 외국의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이윤기는 어쩔 수 없이 우리말을 공부하고 우리말 어법에 맞게 쓰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런 그가 글을 읽거나 말을 들을 때 못 견뎌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게 쓰는 말과 글이었다. 요즘 우리가 흔히 쓰거나 들을 수 있는 표현들, 책에서 가져온 예를 들어보자면

"보여지는 것으로는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은데요."

"오늘은 00팀이 우세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의 말을 빌면, 위 표현은 잘못되었다. "보이는 것으로는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은데요.", "오늘은 00팀이 우세한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우리는 영어를 공부하면서 국어에 영어식 표현을 갖다 쓰다 보니 영어의 사역어법을 우리말에도 많이 쓰고 있다. "~보여지는 것은" "~되어진 것은" "그것은 나로 하여금 ~하게 했다" 등이 그것인데 이것은 "~보이는 것은" "된 것은" "나는 ~을 했다"등으로 표현해야 맞는 것이라고 했다. 이 외에도 '~에 있어서"같은 일본식 표현도 아직까지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나도 꽤나 많이 "~하게 되다" "보여진다" 등의 글을 말이 쓰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할 때는 별로 그렇지 않은데 글을 쓸 때는 이런 어미의 표현을 더 많이 쓰고 있었다. 글자 수를 늘려보려는 꼼수가 버릇이 된 것일 수도 있겠고, 직접적으로 쓰는 위험을 줄이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겸손해 보이는 효과가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고 난 후 이런 내가 글을 이런 어미로 마무리하는지 어떤지를 한 번 더 검토하곤 한다. (방금도 검토하게 되었다. 라고 썼다가 고쳤다. 이게 정확히 문법적으로 잘못된 건지 아닌지 다시 한번 알아보아야겠다.)


글을 많이 쓰고 싶고 잘 쓰고 싶어서 '글쓰기'에 관련한 책을 종종 읽는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는 주제 정하기, 소재 고르기, 비유, 묘사 등 글 쓰는 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작가가 평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갖고 있던 생각을 가벼운 수필로 쓴 책이다. 하지만 나는 마냥 가볍게 느껴지진 않았다. 나는 여전히 조르바가 어렵고 춤추는 것은 더더욱 못하기 때문에 조르바를 춤추게 하기는커녕 춤 못 춘다고 조르바에게 역정이나 듣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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