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발명 - 당신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습니까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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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내 친구처럼 뭔가를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한 인간이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자 힘이다. - P23

조선인 전범 149명 중 90퍼센트는 포로감시원이었다. - P32

인간은 애절할 정도로 정의를 갈구하지만 분별력을 갖기는 힘들다. - P32

이 짧은 일생 동안 무엇을 했는가. 완전히 나를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이 흉내와 허망. 왜 좀 더 잘 살지 않았던가? 자신의 것이라고 할 만한 삶을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친구야! 아우야! 자신의 지혜와 사상을 가져라. 나는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나의 것이 거의 없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 P48

무지가 얼마나 쉽게 억압으로 이어지고 삶을 잃게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한다. - P54

두려움 없이 살기 위해서라도 세계에 대한 앎이 바뀌어야 한다. 세상을 이전과는 다르게 알아야 한다. 알았던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다행히 어떤 앎은 지도다. 새로운 앎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어야 가능성이 태어난다. - P56

나는 복 피디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사고 이후 처음으로 새가 날아간 쪽을 향해 절뚝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내 몸만 생각하던 에너지의 방향과 흐름이 바뀌었다. 에너지가 바깥을 향하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일수록 바깥을 바라보는 힘-내가 그토록 절실하게 의지하던 힘, 나를 수차례 살려준 힘-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세상의 아름다운 장소들은 무거운 영혼을 가진 사람의 발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내밀게 돕는다.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한다. 나는 나이면서 나 자신 너머, 내 바깥에 있는 존재가 되어갔다. 내 생각이 아니라 내 바깥 세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 P71

살 수 있었던 세계보다 더 작은 세계의 한 부분으로 맞춰 살려면 좁은 틀에 자신을 억지로 구겨 넣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꽤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 결과는 좋지 않다. 억지로 맞추는 데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자신이 진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게리 퍼거슨도 회복은 "현실을 작게 만들고 싶은 욕구룰 내려놓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는 표현을 쓴다. 어쨋든 "더 큰 사랑과 더 큰 세상"은 내 가슴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입 밖으로 나가기만 기다리던 말들이었다. - P74

희망은 정말 묘한 것이라서 희망을 가진다는 게 터무니없어 보이는 곳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된다. 유족들은 차마 겪어내기 힘든 일을 겪었지만 슬픈 자아의 일부분은 눈물겨운 희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대체 희망이 무엇이길래 이 슬픈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했을까? 유족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만 말한다. "유족이 되면 그렇게 돼버려요." - P89

삶에 형태를 부여할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을 어떻게 발견할까? 이 문제는 이제 내게는 싱거울 정도로 쉬워졌다. 나는 책을 읽으면 된다. 내게는 새 책에 대한 기대가 새 삶에 대한 기대, 곧 내 목소리와 합쳐질 새 목소리에 대한 기대나 같았다. 작가들은 나에게 새 ‘눈‘와 새 ‘목소리‘를 준다. - P95

오늘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많은 것들이 한때는 내 눈에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너무나 눈부시게 살아 있고 너무나 빛이 나지만 그 깃털과 몸통은 너무나 부드럽지만 너무나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랑하는 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생의 소원이다. - P102

그에게 새의 날갯짓 소리는 소유의 기쁨보다 더한 행복을 준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런 말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몸으로 진짜 기쁨을 누려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시인 예이츠는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몸 전체로 떠올린 생각이다"라고 했는데 서 선장의 말이 바로 그런 말이다. - P111

"응, 나는 해냈어. 몸을 던져봤어. 그다음부터 많은 게 변했지." - P113

나는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 동시에 무엇을 ‘위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좋고 아름다운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 P116

나의 새로운 목소리가 나의 오래된 목소리를 이기길 바란다. - P121

가장 큰 두려움은 마음이 만들어낸 두려움이고 대체로 가장 큰 두려움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 - P134

삶의 의미는 삶을 가치 있게 사는 데 있고, 우리는 이것을 자아실현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렇게 자아를 실현하면서 삶을 살아내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부른다. 바닷가엣 돌고래를 기다리는 기다리는 것이 나에게는 나다운 것이고 행복이고 자아실현이다.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기쁜 일을 기다리는 것이 나다운 것이고 나의 자아실현이다.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기쁜 일이 일어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이 또한 나의 자아실현이다. - P150

영원한 행복은 없지만 영원한 기쁨은 있다. - P169

우리 시대는 같은 꿈을 꾸는 것에 대해선 극도로 말하지 않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일이 드물어졌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어떻게 에너지를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겠는가?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있다. 나는 나의 에너지의 대부분이 감탄할 만한 이야기를 따라 사는 데서, 마음이 가는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려고 하는 데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살 때 나는 어디에 힘을 써야 할지 모르는 슬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나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나 자신을 겨우 신뢰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타인의 이야기에서 에너지를 받는 것을 이야기의 초대라고 표현해왔다. 이제는 이 이야기의 초대에 따라 길을 가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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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67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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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칸토레크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 P17

포탄에 맞는 것도 우연이듯이 내가 살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연이다. 포탄으로부터 안전한 엄폐부에서도 나는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엄폐물이 없는 전쟁터에서 열 시간 동안 포탄이 비 오듯 쏟아져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할 수 있다. 어떤 군인이든 온갖 우연을 통해서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리고 군인이면 모두 이런 우연을 믿고 신뢰하는것이다. - P85

우리들은 사나운 맹수로 변했다. 우리는 싸우는 게 아니라 초토화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 우리들은 인간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우리 뒤에서 철모를 쓴 채 두 손을 들고 쫓아오는데 그 순간 우리에게 무슨 생각이 있겠는가? - P95

우리는 서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죄다 잃어버렸다. 쫓기는 우리의 시선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누가 누군지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감정이 없는 죽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속임수와 위험한 마술을 써서 달리고 또 달리며 그저 살인을 저지를 뿐이다. - P97

오늘날 우리는 여행객처럼 청춘의 풍경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실들에 의해 불타 버린 상태에 있다. 우리는 장사꾼처럼 차이점들을 알고 있고, 도살자처럼 필연성을 알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근심 없이 지낼 수 없는데도, 끔찍할 정도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고 있다. 우리가 존재하고는 있지만 과연 살고 있는 걸까? - P102

그냥 엎드리고 있으면 공포는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곰곰 생각하다가는 공포에 질려 죽고 만다. - P114

우리 가족은 그리 애정이 넘친 적이 없었다. 힘들여 일해야 하고, 걱정거리가 많은 가난한 집에는 그런 게 흔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잘 알지 못한다. 어차피 알고 있는 내용을 뻔질나게 표현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얘야>하고 말한다면 이는 다른 어느 누가 말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 P129

이들은 나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한다. 이들에게는 걱정, 목표, 소망이 있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그들과 똑같이 파악할 수 없다. 때때로 나는 그들 중의 한 명과 작은 음식점에 앉아, 이렇게 조용히 앉아 있는 게 나의 유일한 낙임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려고 한다. 그들은 물론 내 말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고,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단지 말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러한 것이다. 이들은 내 말에 공감하지만 늘 단지 절반밖에 공감하지 않는다. 이들의 나머지 절반은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다. 이들의 생각이 이렇게 분산되어 있으니, 아무도 온몸으로 나의 말에 공감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 자신도 나의 의견을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P136

나는 아무 말 없이 이런 것들 앞에 서 있다. 마치 법정 앞에 선 피고처럼.
낙담한 채 기가 꺾여 있다.
말들, 말들, 말들, 그 말들은 나의 폐부를 찌르지 못한다.
천천히 나는 그 책들을 다시 책꽂이의 빈 곳에 꽂아 넣는다. 끝났다.
조용히 나는 방에서 나간다. - P140

오직 삶만은 죽음의 위협에 맞서 계속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삶은 우리에게 본능이라는 무기를 주기 위해 우리를 생각하는 동물로 만들었다. 명료하고 의식적인 사고를 할 때 우리를 덮치는 공포로부터 우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삶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둔탁하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고독의 심연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삶은 우리 마음속에 동료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삶은 우리가 야수처럼 모든 것에 무관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긍정적인 자세를 갖고, 밀려드는 허무의 공격에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극도로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닫혀 있는 가혹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어쩌다가 어떤 사건이 불꽃을 던져 줄 뿐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놀랍게도 무겁고도 끔찍한 동경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 P214

다들 평화와 휴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모두들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가 다시 무산된다면 이들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토록 평화에 대한 희망이 간절하다. 만약 이들의 희망을 앗아 간다면 이들은 폭발하고 말 것이다. 평화가 오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 P228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보다 앞선 한 세대가 자라고 있는데, 이들은 사실 여기 전선에서 몇 년 세월을 우리와 함께 보냈지만 이들에게는 침대와 직업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에 돌아가면 옛 직업에 복귀해서 진쟁 따위는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뒤에는 예전의 우리와 비슷한 한 세대가 자라고 있다. 우리에게 서먹서먹한 이 세대는 우리를 옆으로 밀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인간이 되었다. 하여튼 우리는 커 나가서, 몇몇은 적응해서 살아가고, 다른 몇몇은 순응해서 살아갈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 이럭저럭 세월이 흘러가고, 결국에는 우리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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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러브, 좀비 (리커버)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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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아지면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우울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습지의 사랑> 중에서 - P45

모든 가족들이 이럴까? 증오 없이 사랑만 하는 가족 따위는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거 아닌가? 그런 건 다 가식이다. 적당한 가식이 세상을 유지시킨다는 걸 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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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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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책에서 ‘그러나 당신은 실제로 눈을 보지 않는다는‘라는 문장을 읽고 그 혜안에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원하는 걸 다 볼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눈만은 볼 수가 없죠. 보이지 않는 그 눈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지를 결정해요. 그러니까 다 본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눈의 한계를 보고 있는 셈이에요. 책을 편집하다 보면 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의 모든 문장은 저자의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의 한쪽에서만 나오죠. 그래서 모든 책은 저자 자신이에요. 그러니 책 속의 문장이 바뀌려면 저자가 달라져야만 해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26

기차의 불빛은 어두웠고 눈은 침침했으며 머리는 복잡했다. 종이는 거칠었고 문장은 생경했으며 소설의 내용은 이상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깨달았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계속 지는 한 다음번에 이길 확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워진다.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결국 돈을 따게 돼 있었다. 다만 판돈이 부족했을 뿐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22

"지민씨의 엄마가 쓴 소설은 연인이 세번째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세번째 삶은 첫번째 삶과 같은 방향으로 시간이 흐르니까 그들은 다시 한번 살아가는 셈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두번째 삶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것이죠. 즉 인식의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 이미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만약 지민씨와 준이 앞으로 결혼하게 된다고 칩시다. 그 일을 원인으로 지금 이렇게 두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28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만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29

대부분의 말은 듣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어떤 말들은 씨앗처럼 우리 마음에 자리잡는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31

"두 분 다 학생인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이저리그 투수가 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기면 조금 배울 수 있지만 지면 모든 걸 배울 수 있다. 지기만 하는 인생도 나쁘지 않아요. 중간에 선택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32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말이더라.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우리는 죽지 않고 결혼해 지금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잖아. 줄리아는 그냥 이 사실을 말한 거야. 다만 이십 년 빨리 말했을 뿐. 그 시차가 평범한 말을 신의 말처럼 들리게 한 거야. 소설에 미래를 기억하라고 쓴 엄마는 왜 죽었을까? 그게 늘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엄마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34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을 일이 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34

언젠가부터 그는 세상을 거울이라고 생각해왔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어딘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에 가까웠지만, 그는 늘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모습을 통해 지금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중에서 - P44

자연이 무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두려움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지금 이 눈보라의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어둠이 내린 밤,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자신의 모습뿐인 칠흑 같은 창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아마도, 그 의미없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의미 없는 것들의 무자비함을. 이 무자비함의 그물에서 벗어나려면 사람은 자기 내면에 의미를 세워 자연을 해석해야만 한다. 그간 그가 읽은 시와 소설들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쓰기 시작한 글들은 모두 그런 노력의 결과물들이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무자비할 수밖에 없는 자연에 맞서기 위해 상징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정현이 평생 몰두해온 일이었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중에서 - P44

"‘비에도 바람에도 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컷 얻어맞고 경기에 진 건 맞는 것 같은데 뭐가 좋아서 그리 싱글벙글이야?‘ 그랬더니 ‘상대 선수보다 연습량도 경험도 다 부족한데 어쩌겠니? 얻어맞고 쓰러져봐야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지‘이러더라구요. ‘인생 참 힘들게 사네‘라고 말했더니 ‘은정아, 인생 별 거 아니다. 버틸 때까지 버텨보다가 넘어지면 그만이야. 지금은 그거 연습하는 중이야. 얼른 소주나 줘‘라고 대답하더라니까요."

-<난주의 바다 앞에서> 중에서 - P59

해가 저물 무렵이라 주변이 노르스름하게 물들었기 때문인지 빛바랜 옛 사진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그녀에게 들었다.

-<진주의 결말> 중에서 - P70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진주의 결말> 중에서 - P85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중에서 - P110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중략)...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중략)...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 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가?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중에서 - P121

그때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무덤덤하고 무더운 여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여름이 명준의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다.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한 감정들이 무덤덤한 일상 아래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엄마 없는 아이들> 중에서 - P136

명준이 이제는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얼굴은 유동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과거의 얼굴에서 미래의 얼굴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게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도.

-<엄마 없는 아이들> 중에서 - P142

중부고속도로에서 올림픽대로로 빠져나오자, 평소와 달리 차량이 거의 없는 4차선 도로가 펼쳐졌다. 마치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자유롭게 해류를 따라 헤엄치는 물고기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사랑의 단상 2014> 중에서 - P189

"언제나 마음이 유죄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 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 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이다.

-<사랑의 단상 2014> 중에서 - P196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건 언제나 한 명뿐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해도 그중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뿐이라고.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사랑의 단상 2014> 중에서 - P206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사랑의 단상 2014> 중에서 - P211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했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22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을까?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24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31

"정신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뜻하지.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거야. 시간적으로도 겹쳐지고, 공간적으로도 겹쳐지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의 삶은 조금 더 지속된다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필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 밖에 없을거야."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31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세계를 더 많이 인식하는 것인가요?"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중략)"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35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한 번도 그 목소리를,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차와 객차 사이의 통로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바르바라와 바르바라와.....그리고 또다른 바르바라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객차 안으로 들어온 할아버지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자는 눙에 들어오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온 신경은 그 남자에게 가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그 남자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미래의 우리를 생각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렇게 기차는 세 시간을 달렸고, 할아버지는 대구에서 내렸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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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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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형규는 그 이후로도 대마초를 계속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안해질 때마다 어절 수 없이 조금씩 피운다던 그것은 형규의 입지가 단단해질수록 오히려 횟수를 늘려갔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다는 건 언젠가는 그걸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까지 함께 얻는 것이었으므로.

<둥둥> 중에서 - P53

그저 내가 요양보호사의 모든 것을 좋아하진 않아도 안필순 할머니는 좋아하듯이, 원준도 복싱의 모든 부분을 좋아하진 않지만 어떤 부분은 좋아하겠거니 생각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브로콜리 펀치> 중에서 - P84

무심한 대답에 울컥 화가 치밀었는데 이상하게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마음이 개펄에 빠진 것마냥 푸욱 아래로만 가라앉는 것 같았다.

<브로콜리 펀치> 중에서 - P95

왜가리를 보면 그래요, 되게 타이밍을 잘 잡잖아? 여기서 좀 재미 봤다 싶으면 귀신같이 알고 다른 데로 날아가고. 여기는 이제 글렀다, 재들이 이 타이밍을 어떻게 잡는지가 난 너무 궁금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좀 알 것 같아요. 몇 번 실패하면 거기는 튼 거예요. 그럼 그걸 알았으면 날아가버리면 되거든. 거길 뜨면 되는 거야.

<왜가리 클럽> 중에서 - P171

왜가리는 그 생김새도 미끈하니 좋고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노련하여 멋있었으나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사냥에 실패했을 때였다. 오랫동안 도사리고 집중해 부리를 내리꽂았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물방울만 사방에 튀기며 고개를 드는 왜가리가. 분명 나였다면, 아니 사람이었다면 민망하여 헛기침이라도 한번 하며 혹시 누가 이 창피한 꼴을 보지는 않았나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법한 보기 좋은 실패였다. 하지만 왜가리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패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같은 무게로 여기는 것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그도 그럴 것이 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왜가리가 특별히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왜가리에게는 그저 매번 잘 노려서 잘 내리꽂는 것만이 중요했고 그 뒤의 일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같았다. 그것이 멋있었다고, 가슴이 뻐근하도록 부러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왜가리 클럽> 중에서 - P171

처음 한 번의 시도에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했다면 인류는 여기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치즈 달과 비스코티> 중에서 - P198

남자는 몸뚱아리가 조그맣긴 했지만 확실한 성인의 얼굴을 달고 있었고 심지어 새어머니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였다. 조그맣고 동그란 눈이며 뭉툭한 콘 주변으로 흉한 주름이 자글자글한 탓이다. 평생 인상을 찌푸리고 살아온 사람들이 나이 들어 갖게 되는 그런 주름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소리 지를 때, 그 고함의 절반은 자기 얼굴에 도로 가서 들러붙게 된다. 그것들이 얼굴의 팬 곳곳마다 고이고 묵어서 꼭 저런 모양으로 남는 것이다.

<평평한 세계> 중에서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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