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책에서 ‘그러나 당신은 실제로 눈을 보지 않는다는‘라는 문장을 읽고 그 혜안에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원하는 걸 다 볼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눈만은 볼 수가 없죠. 보이지 않는 그 눈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지를 결정해요. 그러니까 다 본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눈의 한계를 보고 있는 셈이에요. 책을 편집하다 보면 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의 모든 문장은 저자의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의 한쪽에서만 나오죠. 그래서 모든 책은 저자 자신이에요. 그러니 책 속의 문장이 바뀌려면 저자가 달라져야만 해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26

기차의 불빛은 어두웠고 눈은 침침했으며 머리는 복잡했다. 종이는 거칠었고 문장은 생경했으며 소설의 내용은 이상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깨달았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계속 지는 한 다음번에 이길 확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워진다.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결국 돈을 따게 돼 있었다. 다만 판돈이 부족했을 뿐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22

"지민씨의 엄마가 쓴 소설은 연인이 세번째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세번째 삶은 첫번째 삶과 같은 방향으로 시간이 흐르니까 그들은 다시 한번 살아가는 셈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두번째 삶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것이죠. 즉 인식의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 이미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만약 지민씨와 준이 앞으로 결혼하게 된다고 칩시다. 그 일을 원인으로 지금 이렇게 두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28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만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29

대부분의 말은 듣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어떤 말들은 씨앗처럼 우리 마음에 자리잡는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31

"두 분 다 학생인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이저리그 투수가 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기면 조금 배울 수 있지만 지면 모든 걸 배울 수 있다. 지기만 하는 인생도 나쁘지 않아요. 중간에 선택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32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말이더라.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우리는 죽지 않고 결혼해 지금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잖아. 줄리아는 그냥 이 사실을 말한 거야. 다만 이십 년 빨리 말했을 뿐. 그 시차가 평범한 말을 신의 말처럼 들리게 한 거야. 소설에 미래를 기억하라고 쓴 엄마는 왜 죽었을까? 그게 늘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엄마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34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을 일이 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 P34

언젠가부터 그는 세상을 거울이라고 생각해왔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어딘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에 가까웠지만, 그는 늘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모습을 통해 지금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중에서 - P44

자연이 무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두려움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지금 이 눈보라의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어둠이 내린 밤,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자신의 모습뿐인 칠흑 같은 창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아마도, 그 의미없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의미 없는 것들의 무자비함을. 이 무자비함의 그물에서 벗어나려면 사람은 자기 내면에 의미를 세워 자연을 해석해야만 한다. 그간 그가 읽은 시와 소설들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쓰기 시작한 글들은 모두 그런 노력의 결과물들이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무자비할 수밖에 없는 자연에 맞서기 위해 상징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정현이 평생 몰두해온 일이었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중에서 - P44

"‘비에도 바람에도 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컷 얻어맞고 경기에 진 건 맞는 것 같은데 뭐가 좋아서 그리 싱글벙글이야?‘ 그랬더니 ‘상대 선수보다 연습량도 경험도 다 부족한데 어쩌겠니? 얻어맞고 쓰러져봐야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지‘이러더라구요. ‘인생 참 힘들게 사네‘라고 말했더니 ‘은정아, 인생 별 거 아니다. 버틸 때까지 버텨보다가 넘어지면 그만이야. 지금은 그거 연습하는 중이야. 얼른 소주나 줘‘라고 대답하더라니까요."

-<난주의 바다 앞에서> 중에서 - P59

해가 저물 무렵이라 주변이 노르스름하게 물들었기 때문인지 빛바랜 옛 사진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그녀에게 들었다.

-<진주의 결말> 중에서 - P70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진주의 결말> 중에서 - P85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중에서 - P110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중략)...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중략)...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 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가?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중에서 - P121

그때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무덤덤하고 무더운 여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여름이 명준의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다.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한 감정들이 무덤덤한 일상 아래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엄마 없는 아이들> 중에서 - P136

명준이 이제는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얼굴은 유동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과거의 얼굴에서 미래의 얼굴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게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도.

-<엄마 없는 아이들> 중에서 - P142

중부고속도로에서 올림픽대로로 빠져나오자, 평소와 달리 차량이 거의 없는 4차선 도로가 펼쳐졌다. 마치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자유롭게 해류를 따라 헤엄치는 물고기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사랑의 단상 2014> 중에서 - P189

"언제나 마음이 유죄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 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 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이다.

-<사랑의 단상 2014> 중에서 - P196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건 언제나 한 명뿐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해도 그중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뿐이라고.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사랑의 단상 2014> 중에서 - P206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사랑의 단상 2014> 중에서 - P211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했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22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을까?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24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31

"정신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뜻하지.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거야. 시간적으로도 겹쳐지고, 공간적으로도 겹쳐지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의 삶은 조금 더 지속된다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필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 밖에 없을거야."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31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세계를 더 많이 인식하는 것인가요?"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중략)"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35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한 번도 그 목소리를,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차와 객차 사이의 통로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바르바라와 바르바라와.....그리고 또다른 바르바라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객차 안으로 들어온 할아버지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자는 눙에 들어오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온 신경은 그 남자에게 가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그 남자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미래의 우리를 생각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렇게 기차는 세 시간을 달렸고, 할아버지는 대구에서 내렸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에서 - P2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론 형규는 그 이후로도 대마초를 계속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안해질 때마다 어절 수 없이 조금씩 피운다던 그것은 형규의 입지가 단단해질수록 오히려 횟수를 늘려갔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다는 건 언젠가는 그걸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까지 함께 얻는 것이었으므로.

<둥둥> 중에서 - P53

그저 내가 요양보호사의 모든 것을 좋아하진 않아도 안필순 할머니는 좋아하듯이, 원준도 복싱의 모든 부분을 좋아하진 않지만 어떤 부분은 좋아하겠거니 생각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브로콜리 펀치> 중에서 - P84

무심한 대답에 울컥 화가 치밀었는데 이상하게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마음이 개펄에 빠진 것마냥 푸욱 아래로만 가라앉는 것 같았다.

<브로콜리 펀치> 중에서 - P95

왜가리를 보면 그래요, 되게 타이밍을 잘 잡잖아? 여기서 좀 재미 봤다 싶으면 귀신같이 알고 다른 데로 날아가고. 여기는 이제 글렀다, 재들이 이 타이밍을 어떻게 잡는지가 난 너무 궁금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좀 알 것 같아요. 몇 번 실패하면 거기는 튼 거예요. 그럼 그걸 알았으면 날아가버리면 되거든. 거길 뜨면 되는 거야.

<왜가리 클럽> 중에서 - P171

왜가리는 그 생김새도 미끈하니 좋고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노련하여 멋있었으나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사냥에 실패했을 때였다. 오랫동안 도사리고 집중해 부리를 내리꽂았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물방울만 사방에 튀기며 고개를 드는 왜가리가. 분명 나였다면, 아니 사람이었다면 민망하여 헛기침이라도 한번 하며 혹시 누가 이 창피한 꼴을 보지는 않았나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법한 보기 좋은 실패였다. 하지만 왜가리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패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같은 무게로 여기는 것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그도 그럴 것이 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왜가리가 특별히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왜가리에게는 그저 매번 잘 노려서 잘 내리꽂는 것만이 중요했고 그 뒤의 일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같았다. 그것이 멋있었다고, 가슴이 뻐근하도록 부러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왜가리 클럽> 중에서 - P171

처음 한 번의 시도에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했다면 인류는 여기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치즈 달과 비스코티> 중에서 - P198

남자는 몸뚱아리가 조그맣긴 했지만 확실한 성인의 얼굴을 달고 있었고 심지어 새어머니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였다. 조그맣고 동그란 눈이며 뭉툭한 콘 주변으로 흉한 주름이 자글자글한 탓이다. 평생 인상을 찌푸리고 살아온 사람들이 나이 들어 갖게 되는 그런 주름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소리 지를 때, 그 고함의 절반은 자기 얼굴에 도로 가서 들러붙게 된다. 그것들이 얼굴의 팬 곳곳마다 고이고 묵어서 꼭 저런 모양으로 남는 것이다.

<평평한 세계> 중에서 - P2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나처럼, 한 인간이 수행하는 역할은 그보다 휠씬 더 성숙한 인간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내 눈에 이들은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애들처럼 보인다.

<이해> 중에서 - P81

너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움직이는 목표를 조준하는 것과 같아. 너는 언제나 내 예상보다 앞서 나가 있을 거야.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에서 - P188

우리 관계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내가 매일 자각하게 되는 것은 네가 처음 걷기 연습을 하면서부터야. 너는 쉬지 않고 어딘가로 달려나가겠지. 네가 문지방에 부딪히거나 무릎이 까질 때마다 나는 너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게 돼. 마치 말을 안 듣고 멋대로 행동하는 팔이나 다리가 하나 더 생긴 듯한 느낌이지. 내 몸의 연장이니까 지각 신경이느끼는 아픔은 고스란히 나한테 전달되지만, 운동신경은 전혀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 꼴이야.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에 - P193

사고란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말하는 과정이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에서 - P203

물론 천국이 지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곳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닐의 눈에는 부나 명성이나 매력처럼 가까운 자기 일로 생각하기에는 언제나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닐과 같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죽으면 갈 곳은 지옥밖에 없었고, 그것을 피하고 싶은 목적에서 인생 전체를 완전히 재구성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신은 닐의 인생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것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요행이나 불행이 결코 신의 의지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갈 가능성에 대해 닐은 아무런 공포도 느끼 않았다.

<지옥은 신의 부재> 중에서 - P325

닐은 자신이 신의 의식 너머에 존재함으로써 신에게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지만, 이것도 그의 감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신의 의식 너머에서 오랜 세월을 지옥에서 살아온 지금도 닐은 여전히 신을 사랑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지옥은 신의 부재> 중에서 - P363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경기하는 걸 보면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나? 물론 그렇지 않지. 그러기는커녕 경이감을 느끼고 감탄하지 않나. 그토록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는 거야. 그런데 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같은 느낌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건가?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우리에게 반성해야 한다고 하겠지. 페미니즘은 미학을 정치로 치환하려고 하니까. 그런 시도가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의 문화는 빈곤해질 거야.
세계 최고의 미인을 목격한다는 건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가슴 벅찬 일일세. 재능 있는 사람들만이 그 재능의 혜택을 받는 것은 아냐. 우리들 모두가 그 혜택을 받는다는 얘길세. 받을 수 있다는 편이 더 정확하겠군. 그럴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은 범죄나 마찬가지야.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타리> 중에서 - P4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 살림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적당한 돈을 지불하고 대신 안락함을 얻는 일에 너무 인색하지 말 것. 그렇게 얻어지는 평화가 창조에 기여할 수 있다면 물질을 아끼지 말 것. - P51

나는 알고 있다. 말이 많고 망설임이 많은 고객일수록 점원들에게 얕보임을 당한다는 것을. 당연한 일이다. 많이 드러낼 수록 바닥이 보이는 법이니까. - P69

내가 받은 전화의 거의 대부분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것은 상담이란 이름의 자기 고백, 더욱 잔혹하게 몰아붙이자면 자기 과시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살았고 세상은 나를 이렇게 유린했으나 나는 고귀한 희생으로 그것을 견디었다는 것.
견딤. 고통의 인내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이 미덕이라는 주장은 기득권을 쥔 자들의 염치없는 요구일 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정신의 진보를 억압한다. 억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 P71

고요한 밤의 시간, 깊은 밤의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거룩한 밤‘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고요하고 깊은 것은 모두 거룩한 것이다. 나는 언어의 표피를 만지는 것보다 그것의 본질을 만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쓸데없는 말의 낭비는 딱 질색인 것이다. - P96

할 수 있는 일은 이 비극이 황홀해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듯이 황홀함에 대한 척도도 물론 다르다. 모두들 자기 방식대로 내용을 완성하고 자기 주장대로 형식을 이끌어 간다. 평가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가는 신이 내린다 해도 절정을 느끼는 것은 삶의 주인공인 바로 우리들이다. 황홀함은, 다른 모든 것은 다 절대자가 관장한다 하더라도, 그 감정만은 우리들이 소유한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래서 모든 비극은 황홀감을 지향한다. - P202

목숨을 던지는 일보다 사랑을 참는 일이 더 힘이 들었습니다. - P3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차별의 상징체계를 전복할 힘이 없는 개인이 스티그마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주어진 장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 P20

근대는 공간을 압축하고, 거리를 말소하며, 장소를 파괴한다. - P21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 P26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 P31

노예는 한번도 태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까닭에 죽었을 때도 아무런 의례를 거치지 않고, 다만 "그 장소에서 치워진다." - P35

권력이란 ‘우리‘를 만드는 능력이자,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행동의 잠재적 가능성이다. ...... "권력은 함께 행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서 사람들이 흩어지는 순간 사라진다." 주인들은 ‘우리‘를 만들 줄 알았기에, 권력이 있고 지배할 수 있다. - P39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말해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은 또한 장소의존적이다. 실종자의 예에서 보았듯이 특정한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사람의 지위를 상실할 수 있다.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회란 다름 아닌 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 P57

몰락하고 명예를 잃은 인간은 노예와 비슷해진다. 노예의 굴욕을 날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노예와 비슷해지는 것만큼 큰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 P62

문화적 지식이나 상호작용의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실제로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특볋한 도움이 필요함을 의미할 뿐이지, 그에게 사회 구성원의 자격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적 성원권을 요구하는 데는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이미 들아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 P65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 P73

사람이 수행적이라는 것은 사람다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사람다움은 우리에게 있다고 여겨지며,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체하는 어떤 것,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 P83

얼굴은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의 내부나 표면이 아니라, 만남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흐름 속에 퍼져 있다. - P87

사람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의미가 가면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역사적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어떤 역할을 속에서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 또한 이 역할들 속에서이다. - P88

얼굴은 결코 가면과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가면의 뒤에 있다고 상상되는 무엇이다. 어떤 사람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가 만들어내는 것이 가면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그 가면을 굳이 벗기려 하지 않을 때, 나아가 그의 연기에 호응하면서 그가 가면을 완성하도록 도와주고, 실수로 가면이 벗겨지더라도 못 본 체할 때, 한마다로 그의 가면 뒤에 있는 ‘신성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그 사람은 얼굴을 갖게 된다. - P90

모욕은 존엄을 공격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무너뜨린다. 배타적 민족주의운동이나 파시즘은 먼저 배제하고자 하는 집단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욕당하는 집단이 여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면, 그리하여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이런 모욕이 일상화되면, 그때부터는 법적으로 이 집단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일이 가능해진다. - P104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개인은 그러므로 다른 참가자들의 사람다움을 확인해주고, 사람이 되려는 그들의 노력을 지지해줄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역으로, 그는 남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대우해주기를 기대할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 P116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 P131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 P144

굴욕과 모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욕에는 언제나 가해자가 있지만, 굴욕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 P159

모욕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모욕감을 강조하면서 단호하게 항의할수록 효과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반면에 굴욕을 당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가능한 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사건 자체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굴욕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나타내는 두 단어가 ‘쿨하다‘와 ‘찌질하다‘이다. - P160

우정은 차별성의 인정이다. 우정이란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 어느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를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 P174

우정은 일종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정을 나누려면 먼저 증여자가 되어야 한다. - P182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망각으로부터 사회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 P217

어미가 병이 깊으면 약이나 침으로 치료하는 데 그쳐야 하며, 자기 몸을 손상시키면서까지 고치려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라 불효라고 주장하였다. - P224

유교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람다움을 증명하는 한에서, 조건부로만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인격은 지속적인 시험 아래 놓이며, 언제나 잠재적인 비난에 노출되어 있다. - P226

어떤 생명체가 사람이냐 아니냐는 그 생명체의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개입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 P249

윤리학의 과제는 당사자들을 대신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그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토론을 위한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 P265

도덕적 발화가 효력을 갖는 것은 그것을 듣는 사람이 발화자와 동일한 도덕적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믿을 때에한해서이기 때문이다. - P273

한 장소를 떠나는 것은 그 장소에 속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떠나는 것이며,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 뿐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P2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