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사랑 범우문고 307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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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송에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방송에서 유시민이 나와서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책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평소 유시민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던 나는 이 책을 언젠가 꼭 한번 읽어보리라고 마음먹었다. 

나는 참여하고 있는 독서토론 모임의 50번째 책으로 '독일인의 사랑'을 선택했다. 우선 책이 얇아서 좋았다. 110mm x 174mm 문고판으로 겨우 172쪽의 두께였다. 가볍게 읽을 수 있겠지, 안일한 생각을 가졌다. 

책은 두께와는 반비례하였다. 문장은 수려했고 은유와 비유는 넘쳐났으며, 종교와 철학이 온갖 데 난무하였다. 책의 선정자로서 나는 난처해졌다.

독서토론 모임에서 책 선정자는 책을 가지고 토론한 논제를 발제해야 한다. 서정보단 서사를 선호하는 나는, 서정과 감상이 넘쳐나는 책에서 발제를 고르기 위해 책을 읽고 나서도 맘 편히 있지 못하고 인터넷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의 가사가 된 시를 지은 빌헬름 뮐러를 아버지로 둔 막스 뮐러는 원래 언어학자였다. 또한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아서 연구도 많이 하였다. 독일에서 태어나 공부하던 뮐러는 1850년 영국 옥스퍼드로 유학 가서 아예 영국에 귀화를 하여 1900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영국에서 살았다. 뮐러는 언어학자로 살면서 평생 단 한 권의 책을 집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었다. 영국에서 살면서 언어학 관련 저서와 논문은 영어로 썼는데, 귀화한 영국인이 쓴 소설은 독일어로 독일인을 위해서 썼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영국인의 사랑도 아니고, 왜 독일인의 사랑을 썼을까? 찾아본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뮐러는 1774년에 발간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온 우울한 사랑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 젊은이들에게 결핍되고 슬픈 사랑 대신  영혼이 충만한 사랑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 신학'이라는 종교적인 책을 바탕으로 하여 사랑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사랑을 하면 영혼과 마음이 가득 찬다는 내용의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다. 

주인공인 '나'는 소년 시절 우연히 영주의 저택을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병약하게 태어나 평생을 병상에서 지내는 마리아라는 여성을 만난다. 
이후 헤어진 두 사람은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 철학과 사랑과 종교에 대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 서로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병약한 마리아는 끝내 숨을 거두게 되고, 그녀를 평생 돌보던 노의사가 주인공에게 마리아의 죽음과 자신의 당부를 전한다. 


줄거리는 정말 간단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독일인의 사랑'은 발간 당시 독일에서 아주 인기가 많았다. 오히려 현대 독일에서는 인기가 시들하며, 독일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팔리고 읽히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 책을 줄거리를 따라 읽는 책이 아니다. 등장인물도 이름도 없는 주인공과 마리아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주인공과 마리아의 대화를 읽고 곱씹어 보는 데서 책의 묘미가 살아있다. 


어떤 옛 현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난파당한 작은 배의 조각들이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중에서 몇 개의 조각은 서로 만나 잠시 붙어서 다녔으나 잠시 후 폭풍이 덮쳐와 그 두 조각을, 하나는 서쪽으로 하나는 동쪽으로 몰로 가 버렸다. 그것들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운명도 이와 같다. 다만 그와 같은 커다란 난파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따름이다. - P29

"그런데 사랑에 있어서도 확실한 사랑의 표시를 나타내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알아내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자기 스스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건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사랑을 믿는 범위 내에서만 다른 사람의 사랑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65


마침내 마리아를 사랑하게 된 주인공에게 마리아는 묻는다. ​

"당신은 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시는 거예요?"


이때 주인공이 한 대사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문구이다. ​

"왜냐고요?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그가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느닷없이 다가오며, 태양이 있고 달이 뜨는 것처럼 자연의 섭리이자 운명이라는 것이 막스 뮐러의 주장인 것이,  이 책을 통해서 읽힌다. 


하지만, 이런 작가의 의견에 괜한 딴지를 부리고 싶은 나는 아직도 사춘기인 걸까?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운명이나 자연의 섭리라기 보다 줄리엣의 아름다운 미모 때문일 것이다. 성춘향의 파릇파릇하고 예쁜 외모가 이몽룡의 시선을 끈 이유였을 것이다. 작가는 환상과 경건의 세상을 동경하면서 그의 희망 사항을 소설로 쓴 것일 것이다.  즉, 사랑에는 남에게는 차마 밝히지 않는 어떤 속물적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딴지를 걸고 싶다. 


독서토론 모임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독일인의 사랑'을 평생 읽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원래 줄거리가 없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화와 감정만이 난무한 독일인의 사랑을 선택하고,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독서토론 모임이 자랑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읽기 보다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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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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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빅터 프랭클이라는 정신분석학 박사가 쓴 자신의 체험수기이자, 자신의 정신분석연구 테마인 로고테라피에 대한 설명서이다.

나는 로고테라피라는 말을 이 책을 통해 처음 들었지만, 정신분석학에서는 프로이트와 함께 두 번째로 손 꼽히는 정신분석학 학문이라고 한다.


책은 세 가지 파트로 되어있다.

1부에서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에 대한 이야기가, 2부에서는 로고테라피에 대한 기본 개념이, 3부에서는 비극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삶에 대한 태도가 담겨 있다.


책에는 나와있지 않은데, 빅터 프랭클 박사가 나치 수용소로 가게 된 이유가 참 아이러니하다.

독일이 오스트리아 침범이 예상되는 시기에 오스트리아에 있던 미국 대사관에서 프랭클 박사에게 미국 이주를 허락하니 빨리 미국으로 가라고 말했다. 평소 나치에 반대되는 말을 해온 유대인인 박사는 오스트리아에 그대로 있으면 필시 수용소행이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프랭클 박사는 고뇌에 빠졌다. 범인들 같으면 고뇌에 빠질 이유가 없는 사안이지만, 박사가 고뇌에 잠긴 이유는 연로하신 두 부모님 때문이었다. 그들은 미국에 같이 갈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임신한 아내와 프랭클 박사만이라도 떠나라고 독촉했다. 그때 우연히 프랭클 박사 눈에 들어온 조각 하나. 그 조각에는 십계명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박사는 미국행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에 남았다. 그리고 부모님, 아내와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참, 아이러니한 게 나치 수용소에서 부모님과 아내는 모두 죽었고 박사 본인은 살아남았다. 그때 아내와 미국으로 떠났더라면, 아내라도 생존했을 텐데.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렸을까?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고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나라면, 둘이라도 떠났을 것 같다. 부모님은 그렇게 떠나는 자식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을 것 같다.


책의 유명세에 비하여 책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신파적인 요소가 배제된, 학자들이 썼을 법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다. 수용소에서의 삶이 지옥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그 어떤 자극적 단어와 신파적 문장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안네 프랑크의 일기'처럼 가슴 저미는 글을 기대했던 나는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그만큼 책에는 진정성이 더 담겨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빅터 프랭클이 주창한 로고테라피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고 정의한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184쪽)

빅터 프랭클에 따르면,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삶의 진정한 의미는 나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부터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빅터 프랭클은 자아실현이란, 목표를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며 자아실현을 갈구할수록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하였다.


한동안 우리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진리인 것 같은 세상에 살았다. 세상이 뭐라 하든 나만 좋으면 된다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면 작은 것이라고 그만이라고 하는 말들이 넘쳐났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달라고, 나는 나일 뿐,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치유의 심리학이 난무하는 세상이었다. 아니, 지금도 그런 세상이다.


그런데, 빅터 프랭크의 말은 다르다. 나 안에 머무르면 안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자아실현은 목표를 이룰 수 없고, 사람은 나 말고 세상을 향해 바라보고 살아야 하며, 사람도 많이 만나고 일도 많이 하면서, 닥쳐오는 시련을 피하지 말고 부딪혀 견뎌내야 한다고 한다.


나는 빅터 프랭클의 말이 많이 부분 동감한다. 나는 평소에도 늘 하던 것만 하면 만족을 못 하는 타입이었다. 어떤 과업을 필요로 했고 과업을 하는 과정에서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소확행과 내면을 이야기할 때 선뜻 동의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자꾸 편한 길로만 가려는 것 같고 미디어가 그 자리에 머무르라고 종용하는 것 같았다.


이런 나에게 이 책에서 한 빅터 프랭클의 말은 나에게 근거를 가져다준 것 같았다.

'그래, 사람은 시련을 견디고 성장하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인 거야, 그렇지!'

어떤 사람은 지식을 얻으려고 책을 읽기보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근거와 동조감을 확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더니, 이 논리가 맞다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나에게 근거를 대준 책이 되겠다.

빅터 프랭클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 봐주는 것은 그 사람을 타락시킨다. 그 사람이 되어야 할 모습으로 바라 봐주어야 한다. 사람은 충분히 그것을 할 수 있는데 있는 그대로 만족하는 것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사람은 그가 되어야 할 모습으로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발전이 있는 것이다."


약간은 지루했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내가 되어야 할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발전할 내 미래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그 모습을 완성하기 위해 어떤 시련의 파도가 나에게 닥쳐올까?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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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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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두 번이나 읽게 되었다.

처음은 그냥 줄거리만 따라 읽었는데, 우리 정서와 동떨어진 그저 유명한 소설일 뿐이었다.

이번에 다시 한번 더 읽게 되었다. 토론을 하기 위해서 앞번보다 더 글자를 곱씹어가며, 인물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천천히 읽었다.

정성을 들여 책을 읽으니, 책은 내게 더 깊이 들어왔다. 영미권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평론가는 이 책을 두고 여성판 '허클베리 핀'이라고도 하였다.

6살에서 9살에 이르는 시기 동안 미국 남부 앨러바마주 메이콤이라는 마을에 사는 어느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경제공황 무렵인 1932년 경의 세상과 어른들의 이야기를 그린 책이 '앵무새 죽이기'이다.

주인공 진 루이스 핀치, 일명 스카웃은 오빠 젬과 사이좋은 오누이 사이다. 스카웃과 젬은 여름 방학마다 놀러 온 스카웃과 동갑 내기 남학생 딜과 함께 메이콤의 단조로운 일상을 놀이와 호기심과 모험으로 가득 채워 나날이 새로운 날들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소설의 화자가 꼬마 소녀 스카웃이기에, 같은 여성으로서 나는 어느 평론가의 여성판 '허클베리 핀'이라는 평가에 동의하는 바이다. 아주 좋아하는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보다 나는 스카웃의 모험과 호기심에 더 공감을 많이 느꼈다. 아마 동성으로서 내 유년 시절을 연상하며 스카웃에게 감정이입이 되었으리라.

스카웃과 젬의 아버지는 애티커스 핀치라는 오십 줄에 들어선 남자인데 직업은 변호사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생소하면서도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이 바로 이 애티커스 핀치라는 남자였다. 아, 애티커스가 변호사여서거나 명사수라서가 아니다. 내가 감명받았던 것의 애티커스 핀치의 자녀 교육법이었다.

인간의 생애 중에서 가장 에너제틱하고 하루 중 걸음 수가 제일 많을 시기가 6살 무렵 무터 12살 무렵까지이다. 애터커스는 두 자녀를 두었는데 두 명이 다 이 시기에 해당되었고 게다가 아빠 애티커스는 이 에너제틱 한 아이를 양육하기에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티커스는 아이들을 너무나 잘 양육하고 있었다!

스카웃과 젬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애티커스에게 야단을 맞은 적도 많지만 단 한 번도 아빠에게 맞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스카웃도 젬은 아빠가 때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스카웃과 젬이 옆집에 사는 은둔의 부 래들리 아저씨를 밖으로 끄집어 내려는 짓궂은 여러 시도를 들켰을 때에도, 학교 친구 월터 커닝햄과 치고받는 싸움을 벌여 학교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었을 때에도, 이웃에 사는 듀보스 할머니에게 버릇없는 말대꾸를 하였을 때에도, 애티커스는 고함을 치거나 바닥을 손을 때리거나 가슴을 치는 일 없이 조곤조곤 말로 아이들을 설득시켰다. 아이들이 설득되지 않더라도 손이나 매로 아이들을 때리는 법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득되지 않으면 설득되지 않는 대로, 가정의 규칙을 들어가며 '안되는 건 안된다'라는 것을 강조하였고 가족의 일원으로 동참하려면 그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또 스카웃과 젬이 어른들의 세계-힘과 권력이 우선되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고 관행이 우선되며 위선의 예절이 난무하는-에 반발하며 반항과 질문을 계속할 때에도 애티커스는 인내를 갖고 하나하나 대답을 해주며 아이들에게 어른의 세상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흔히 우리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고 맞다고 생각하는 그 교육법을 행하고 있는 부모가 바로 애티커스였다.

'앵무새 죽이기'는 작가 하퍼 리의 자전적 소설인데 어쩌면 소설 속 애티커스 핀치가 실존 인물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하퍼 리는 정말 행운아가 아닌가!

게다가 애티커스는 강간죄의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는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하는 변호사인데, 여전히 흑백의 이분법이 만연하던 시절, 흑인을 변호한다는 것은 동네에서 왕따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팔을 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걱정하는 스카웃과 젬에게 애티커스는 이런 말로써 그의 임무를 정당화하였다.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


'앵무새 죽이기'를 번역한 김욱동은 책의 말미 '작품 해설'에서 '앵무새 죽이기'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넘치는 작품이라고 하였다.

소설에서 사회적 약자라 하면, 은둔의 부 래들리, 누명 쓴 흑인 톰 래들리, 백인의 창고를 교회로 개조하여 예배를 드리는 메이콤 마을의 흑인 주민들, 백인이면서 흑인과 더 친하게 지내는 돌퍼스 레이먼스 아저씨 등이 있는데, 스카웃과 젬과 딜 그리고 애티커스는 이들 모두에게 그들의 친구와 같이 대하여 일체의 편견 없는 동일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이들에 대하여 선입견을 갖고 삐딱한 시선을 보내며 불친절한 행동을 드러낼 때, 우리의 주인공들은 상대가 부 래들리이든, 레이먼드 아저씨이든, 톰 로빈슨이든 간에, 눈에서 나오는 빛과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손끝에서 전해지는 행동이 늘 따뜻하고 온화하고 부드럽다.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애티커스가 한 말과 행동을 스카웃과 젬이 그대로 보고 배운 결과일 터이다.

딜이 만약 결이 다른 아이였다면, 스카웃과 젬과 친구도 되지 않았을 것이라, 딜이 스카웃과 젬과 친한 친구가 된 걸 보면 딜 역시 사람과 세상에 편견을 가지지 않은 큰 사람이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되어도 사람들이 고전이라고 부르며 좋아하는 소설은 읽는 사람에 따라, 읽히는 시점에 따라, 읽히는 시공간의 다름에 따라 각기 다른 부분에서 마음이 움직인다.

나는 이번에 읽는 '앵무새 죽이기'에서는 이 구절이 유독 눈에 걸렸다.


아빠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이다, 자업자득이란다. 우리는 보통 우리 수준에 맞는 배심원을 갖기 마련이거든. 우선 첫째, 용감한 메이콤 시민들은 재판에 관심이 없지. 둘째, 걱정도 되지. 그러니 그들은..."


톰 로빈슨의 재판이 열리고, 길머 검사와 애티커스 변호사는 배심원과 테일러 판사님 앞에서 동네 주민들이 꽉 들어찬 재판정에서 각각 증인 심문을 진행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모든 증거와 증언과 논리는 톰 로빈슨이 무죄이며, 톰을 고발한 백인인 동네 양아치 밥 유얼과 그의 딸 메이엘라 유얼이 톰을 모함한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서 다른 재판과 달리, 배심원들은 오랜 토론을 가졌다. 하지만 재판의 결과는 의심만으로도 흑인은 유죄 판결이 내려져야 하는 시절이었고, 아무리 잘못된 고발과 기소라 하더라도, 고발인이 모두가(백인이든 흑인이든) 인정하는 양아치 백수건달이라 하더라도, 백인이 재판의 의뢰인이라면 그 의뢰인은 당연히 승리를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잘못된 재판 결과를 보고, 스카웃과 젬이 아빠에게 물었다.

왜 우리나 모디 아줌마 같은 사람들이 배심원이 될 수는 없는 거예요?

이 질문에 대한 애티커스의 대답이 내가 이번에 이 책에서 유독 눈에 걸리는 구절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 수준에 맞는 배심원을 갖기 마련이거든."

1932년 당시 미국 남부 메이콤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배심원을 둔 대가로 죄 없는 흑인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그 후 몇 십 년의 투쟁과 몇몇의 희생이 담보가 되어 현재 미국은 그보다는 나은 세상이 되었다. (흑백 차별에 한해서는)

나는 내가 제법 높은 수준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의 배심원 자리(지도자)에는 내 수준에조차 전혀 미치지 못하는 얄팍한 사람이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애티커스 말이, 수준에 맞는 배심원을 가진다는데, 지금 대한민국의 배심원 자리에 있는 사람이 우리의 현재 수준인 건가?

재판을 지고 나온 애티커스의 답답한 심정과 명백한 진실을 감추는 어른들을 보고 절망을 느낀 스카웃과 젬의 마음이 그 구절을 읽는 나에게 한치의 공백도 없이 고대로 시공간을 넘어 전달되었다. 내 마음은 답답하고 절망적이다.

지금 우리의 배심원 격인 자리에 계시는 분이 아랍에미리트에 가서 '아랍에미리트의 적이 이란이다'라는 말을 공개 석상에 하였다고 한다. 이란에서는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자칫하다간 호르무즈 해협도 못 쓰고 원유 대금 8조의 향방도 안갯 속이라고 한다.

내 마음은 언제까지 답답하고 절망적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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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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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려고 생각은 하였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선순위에서 늘 뒤로 밀렸던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누군가와 다 같이 읽게 되니 뒤로 밀려있던 순위가 단번에 1등을 차지했다.


이어령에게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까?

교수, 학자, 작가, 칼럼니스트, 예술가, 장관, 아트디렉터.....

워낙 많은 일들을 너무도 다 잘 해내었기에 어떤 수식어를 그 이름 앞에 붙여도 하나도 상경하지 않은 사람. 바로 이어령이다.


이 책을 계기로 김지수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떤 잡지사의 에디터였다고 하며 이어령 교수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김지수 작가는 암 투병으로 힘든 몸을 이끌고서도 끝까지 공부하고 탐구했던 '까칠한' 인간 이어령을 16번이나 단독 인터뷰하는 기회를 얻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총 16개의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16개 수업은 나름의 제목을 갖고 있지만, 나도 내 나름으로 각각의 수업에서 얻어 낸 키워드가 있다.


1장 바디/스피릿/마인드. 자기 머리로 생각하라. 꿀벌 독서법

2장 큰 질문을 경계하라

3장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과 은폐.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고 있는 것, 죽음

4장 운명과 자유의지

5장 존경vs사랑. 관습vs도발 혹은 삐딱

6장 디테일의 진실. 타자성의 철학

7장 진선미-순수, 실천, 판단의 기준

8장 스토리텔링이 있는 부유한 삶. 인생의 3단계 - 관심/관찰/관계

9장 꿈꾸는 삶

10장 상처와 고통

11장 눈물 한 방울

15장 도마뱀의 창조성. 한국인


김지수 작가가 이어령 교수를 거의 신급으로 존경하고 사랑한 관계로 책은 마지막 수업을 정리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어령의 말을 경전으로 만들려고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점이 오히려 약간의 반감을 생기게 했다고나 할까?


과도한 경전화의 느낌을 알아서 편집하고 나면, 이어령의 말들은 생전에 그가 이룬 수많은 일들처럼, 그의 말조차 무수히 많은 것들을 이루어 내고 있다.

그의 말을 읽음으로써 필부(匹婦)인 나는 전혀 몰랐던 지식과 사상을 알게 되었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16개의 수업 중에 마지막 몇 개의 수업은 앞의 수업을 반복하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앞의 수업을 잘 들었으면 뒤에 있던 수업은 밑줄을 긋지 않아도 절로 반복 효과가 나는, 아주 바람직한 수업이었다.

모두가 가슴에 새길만하고 머리에 쌓아둘 만한 가치 있는 수업이었으나 그래도 내가 스스로를 돌이켜 보고 생각을 되새김한 가장 좋았던 수업은 두 번째 수업 '큰 질문을 경계하라'였다.


이어령 교수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질문을 두루뭉술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어떤 양봉업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이어령 교수는 이런 경우가 왕왕 있었다고 하며, 그의 개인적 경험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이런 유의 큰 질문 - 책 한 권으로도 답이 모자랄만한 총론 같은 질문이 아주 많다고 하였다.


아마도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거나, 질문하는 것을 고깝게 보고 돌출된 행동이라고 여기는 문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사람이 논문을 쓴다면 "8.15 해방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같은 것을 많이 쓴다면, 서양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하나의 사례를 가지고 세세하게 따지고 드는 논문을 많이 쓴다는 것이다.


나도 이와 관련된 사례가 있다.

회사를 다닐 때 외국인과 한국인이 섞여 워크숍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한국인은 두어 명이었고 외국인은 열 명 정도인 워크숍이었다.

워크숍에서는 더 좋은 중간 관리자가 되기 위한 몇몇 활동을 하였는데 그중 하나는 팀끼리 토론을 통해 우리 회사에 맞는 중간 관리자는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하고 발표하는 것이었다.

좋은 중간 관리자라, 어찌 보면 뻔한 대답이 나올만한 주제이다. 아랫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고, 스스로 솔선수범하고, 상사와 회사가 요구하는 것을 밑으로 잘 전달하는 것. 뭐 이런 뻔한 교과서적인 답을 준비하면서 나는 토론에 활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양에서 온 동료들은 이 뻔한 내용을 갖고 어찌나 시시콜콜 대화를 하고 대립을 하고 갑론을박을 하는지 나는 이 모습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아니, 뭐 이리 진지하고 세밀하게 사례를 들어가며 토론을 한단 말인가!

발표 시에 보니 서양의 동료들은 아주 디테일한 본인들의 사례를 들어가며 좋은 중간관리자에 대하여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였다. 내가 준비한 것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그야말로 뻔한 말이어서, 발표에서 나는 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공교육에서 질문과 발표의 교육을 받지 못한 주입식 교육법 탓을 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가 '질문 있습니까?'라고 할 때 내 질문은 주로 두루뭉술한 거대 담론적인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질문을 했는데, 질문이 멍청해 보여서 타인의 따가운 눈초리를 감당해 내야 할 수도 있고, 시간도 없는데 뭐 그런 것까지 묻는다고 그런 건 따로 조용히 가서 질문하라는 불평을 들을 수도 있다. 이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가장 안전한 질문, 그리고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도 화려한 미사여구로 있어 보이는 질문을 하다 보니 내 질문은 주로 '큰 질문'이 되었다.


이어령 교수의 두 번째 수업을 들으면서 내 질문의 허점을 깨닫게 되었고 문제점을 알 수 있었다.

수업을 받고 공부를 하고 배운 것이 있다면 그 수업은 아주 좋은 수업이다.

게다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기에 돈이 들지 않았다.) 배웠다면 더더욱 금상첨화일 터이다. 모든 수업이 다 좋은 수업이었지만, 이어령 교수에게서 들은 마지막 수업 중 두 번째 강의가 내게 딱 그런 수업이었다.


밑줄을 여러 군데 그었다. 수업 내용은 반복하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배운 것을 두고두고 보고 익히기 위하여, 밑줄 그은 문구들을 나의 '좋은 말 모음집' 노트에 고이고이 필사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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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독립운동의 꽃은 무장투쟁이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만주벌판에서 산을 넘고 들을 지나는 무장 독립군을 생각하며 배고픔과 추위와 그리움을 견딘 그들을 존경했고 숭배했고 동경했다.

이런 이유로 문학이나 교육, 집필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은 독립운동의 2류쯤으로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윤동주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목숨을 내놓지 않은 얄팍한 지식인들이 앞세운 그들의 변명과도 같은 독립운동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윤동주의 시를 좋아했지만 독립운동가로서의 윤동주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좀 더 나이가 들었다. 몇 년 전 영화 '동주'를 보았다.

영화 '동주'를 통해서 나는 윤동주의 진심이 느껴졌고 그의 부끄러움에 호응했다. 가슴속에 가진 당시 시국에 대한 분노(영화는 2016년 2월에 개봉했다. 박근혜 정부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내가 동주에 반사되었다. 조금은 윤동주가 이해되었고 소위 '얄팍한 지식인들'이 납득되었다.


친구와 서울 종로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에 갔다. 그는 윤동주를 아주 좋아하는 친구였다. 전시된 그의 시와 영상을 무심히 보는 나와는 달리, 친구는 동주의 전시된 시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일일이 사진을 찍고 공짜로 주는 엽서를 마치 고흐의 진품 그림을 대하는 것처럼 귀히 여겼다.

그가 말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소설을 보았어. 여기 오니 소설이 생각나네. 윤동주를 가슴으로 읽고 이해하게 되였다고나 할까?"

평소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친구를 믿고 책을 빌렸다.


책은 2권짜리, 작가는 '뿌리 깊은 나무'의 이정명, 추리소설, 역사소설, 등장인물 교도관 스기야마, 윤동주 히라누마 도주, 교도관 와타나베 유아치, 조선인 죄수 최치수, 조선인 죄수이자 끄나풀 김만교, 누가 스가야마를 죽였는가? 윤동주는 어떻게 죽었는가? 문장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사람에게 시란 무엇일까? 칼이 무서운가, 글이 무서운가? 기록과 기억의 중요성.


시점이 여러 개의 나뉘어 왔다 갔다 산만했다. 소설 초반에 교도관 유이치의 기록과 시선으로 썼다고 되어 있었는데, 어느샌가 어느 부분은 스기야마의 시선이 되었다가 또 어떤 부분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되었다가 했다. 독서의 흐름에 심대한 방해를 일으키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추리소설임에도 심장 쫄깃해지는 몰입은 어려웠다.

시간도 과거와 현재가 벽걸이 시계의 시계 추처럼 자주 왔다 갔다 해서 과거와 현재의 분간이 흐릿했다. 책을 읽다 자주, 특히 초반에, 앞을 다시 들춰보는 수고를 해야 했는데 이 점도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작가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에는 이미 여러 작품으로 정평이 난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을 드라마로만 보다가 활자로는 처음 읽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을 통해서 이정명 작가가 직유와 은유와 비유에 탁월한 솜씨를 지닌 작가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소설이 긴박하다기 보다 아름답고 처연하기까지 하였다. 작가의 탁월한 능력은 그래서 궁금증을 일으켜야 할 추리소설에는 오히려 독서에 장애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건 작가의 탁월한 묘사와 표현력을 질투한 내 뾰족한 심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거의 매 챕터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해야 하는 문장들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행복이 유리에 맺힌 물방울처럼 불안하다'든가, '그의 영혼의 올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걸 보았다'든가, '눈앞의 백지는 형무소의 뜰처럼 황량했다'든가, 하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비유를 만드는 작가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물과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저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만약 저런 능력이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라면 수많은 글쓰기 강좌와 수업은 다 사기임이 틀림없다. 만약 수없는 노력과 연습이 절묘한 비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연습을 해야 하는지, 그저 나는 가망이 없는 것 같아 기쁘게 책을 읽으면서도 동시에 기분이 우울해짐을 느끼는 역설을 머리에 이고 책을 읽었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고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이것은 드라마로 영화로 다큐로 여러 번 다루어졌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어떻게 묘사하는가 어떤 식으로 풀어 내는가에 따라 재미는 증폭되기도 하고 반감되기도 한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사실이 증폭되었다. 책을 읽는 독자는 알고 있는데, 그 주사를 맞으면 안 된다는 것을. 책으로 들어가서 유이치에게 '그 주사를 동주에게 맞히면 안 돼! 그는 죽을 거야!'라고 미래를 말해주고 싶은 욕망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에서 들끓었다.

"속속들이 모르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위험하오."

1권 163쪽

동주가 유이치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윤동주에 대하여 속속들이 모르면서 어떤 선입견을 갖고 있진 않았나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부끄러워만 한 얄팍한 지식인이라고. 사람마다 저마다의 타고난 성정과 기질과 역량이 다 있을진대 사람을 똑같이 재단하여 무장투쟁이 일등이요, 나머지는 이등, 삼등으로 분류한 결국 아무것도 몰랐던.


영화 '동주'에서도 강하늘의 목소리로 듣는 윤동주의 시는 처절하고 의연했었다. 소설 '별을 스치는 바람'에 나오는 윤동주의 시도 의연하고 처연하고 슬픔이 배어 있었다. 색다른 맛이었다. 시는 볼 때마다 다르다. 읽기에 어렵고 시간과 품이 많이 들어간다. 읽는 데 드는 품에 비해 얻는 것이 힘드니 내가 시에 쉬이 눈이 가지 않는가 보다.

소설에는 윤동주의 시와 함께 윤동주가 사랑한 프랑스 시인 프랑스시 잠의 시가 두 편이나 실려 있다. 프랑시스 잠이라는 시인을, 그의 시를 알게 되어 기쁘다. 하나의 책으로 다른 책의 꼬리를 물게 되는 것, 독서의 묘미이다.


책의 뒤에 실려있는 윤동주의 연표를 정리해 봄으로써 '별을 스치는 바람'의 감상을 끝맺음하려 한다. 아직 속속들이 알지는 못해도 어렴풋이나마 그전보다 더 윤동주를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더 이해하게 될 테니까.


-1917년(1살) 간도에서 태어남

-1925년(9살) 명동 소학교에 입학

-1931년(15살) 명동 소학교를 졸업

-1932년(16세) 은진중학교 입학

-1935년(19살) 평양 숭실중학교 편입

-1936년(20살)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고향의 광명 학원에 편입

-1937년(21살) 윤동주라는 이름으로 작품 발표

-1938년(22살)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에 입학

-1939년(23살)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 발표

-1940년(24살) 릴케, 발레리, 지드의 작품을 탐독

-1941년(25살)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1942년(26살) 일본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

-1943년(27살)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 일기가 압수

-1944년(28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

-1945년(29살) 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 16일에 사망

-1947년 <쉽게 쓰여진 시>가 경향신문에 최초로 발표

-1948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

-1968년 윤동주 시비 건립

-1977년 윤동주 심문 기록 입수

-1979년 윤동주의 독립운동 사실 확인

-1982년 윤동주 판결문 사본 입수

-1985년 중국 용정의 윤동주 묘와 묘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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