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박완서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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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는 1999년경부터 2002년 중반까지 박완서 작가가 이곳저곳에서 발표했던 에세이를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펴낸 산문집이다. <두부>가 발간된 것은 2002년 10월인데 이때는 작가가 칠순하고도 2년이 된 해였다.


박완서의 산문을 보면 작가에게 평생 그리움을 안겨주었던 고향 개성 박적골과 평생 책임과 숙제처럼 남겨졌던 6.25전쟁이 없는 적이 없다. <두부>에서도 그렇다. 5부로 구성된 <두부>의 2부인 아치울 통신은 박완서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과 가장 비슷한 산과 들을 품은 곳, 아치울로 이사 가서 사는 일상을 꽃과 나무와 새들의 이야기와 함께 담아내었다. 아치울 통신이라고는 하지만 5할은 아치울에 투영된 고향의 그리움이 곳곳에 배여있다. 3부 이야기의 고향은 늘 작가가 그리워 한 고향 박적골 이야기가 이번에도 빠지지 않고 백반 집의 공깃밥과 김치처럼 얹져져 있다.


1부와 4부는 결이 좀 다르다. 노년의 자유라는 주제로 글이 모아진 1부는 칠순 즈음이 된 작가가 나이 듦과 노년의 시간에 대하여 때로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작가는 노년의 시간을 시간 속의 미아가 된 것 같다며 두려워하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세상을 가볍게 보아 넘겨도 되는 지금의 시간이 좋다며 다시는 젊음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한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나이 듦이기에 노련한 작가마저 노년의 시간과 자유에 대해서는 노련하지 않게 청춘을 대하는 20세 젊은이처럼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글 속에서 느껴진다.


단출하나 3개의 에피소드로 된 4부에서는 작가를 사로잡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한 명은 김윤식 평론가이고 다른 한 명은 박수근 화가이며 마지막 한 명은 이영학 설치미술가이다. 이름만 알았던 김윤식에 대하여 소소하나마 그의 인물 됨됨이를 알 수 있었고 박완서 작가의 처녀작 <나목>을 통해 이미 알았던 박수근 화가의 이야기를 소설이 아닌 산문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되었으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영학이라는 설치미술가와 그의 작품 세계를 <두부>를 통해 알았다.


박완서가 글을 잘 쓰는 소설가임은 대한민국에서 책 좀 읽어보았다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를 일컬어 한국 문학의 대표, 상징, 대모라고 해도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데에 반문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박완서의 소설을 2편 밖에 읽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재미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의 소설이 엄청나게 재미있다, 박진감 있게 흥미진진하다고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내 문학적 이해와 공감이 아직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의 재미와 흥미를 떠나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박완서는 '글을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쓴다'라는 것이다. 그의 산문을 읽다 보면 감정의 표현과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의 묘사와 상황에 대한 비유와 은유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내고 저런 묘사를 그려낼 수 있는지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당연히 알고 있던 것들을 비유와 은유로 끌어내어 작가가 쓰고자 하는 상황을 독자가 바로 글을 읽는 그 순간 바로 내 일처럼 느끼고 공감하게끔 하는데 이런 작가의 능력에 나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는 표현밖에 하지 못해서 참담한 마음뿐이다.


박완서의 책, 특히 산문집을 읽으면서 줄을 치며 읽는 부분이 많은데 그 줄친 부분이라는 것이 헤세의 <데미안>처럼 철학적 사유를 위해 두고두고 읽으려고 그은 밑줄이라기보다는 '한국어'를 이보다 더 이상 맛깔나게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은 우리 말의 아름다운 표현 때문에 그은 밑줄인 경우가 더 많다. 박완서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의 상황에서 가장 영롱하게 빛나는 명사를 골라 또 그 영롱한 명사와 가장 잘 어울리는 동사와 형용사를 찾아내고 배치하여 한국의 정서를 가슴에 안고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그의 글을 읽는다면 입으로 탄성이 절로 나고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을 만큼의 문장을 만들어 낸다. 이번 책 <두부>도 나에게는 그런 책이었는데 책을 읽다가 표현이 너무 찬란하고 처절해서 줄을 긋다가 긋다가 온통 줄을 그어 댄 통에 나는 중간쯤 가다가 그만 줄 긋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두부>의 1부 노년의 시간에서는 시간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세월에 대한 느낌을 쓴 것들이 많았는데 나도 어느덧 중년이 되고 나이 듦을 몸으로 마음으로 절절히 체험할 때이다 보니 그 어느 글보다 가슴에 와닿고 줄 칠 부분이 많았다.


노을이 너무도 핏빛으로 선열하여 영웅호걸의 낭자한 출혈처럼 비장할 적이 있는가 하면, 가인의 추파처럼 요요할 적도 있다 ... 아침에도 노을이 지지만 그건 곧 눈부신 햇살을 거느리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잊힌다. 그러나 저녁노을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끝이 어둠이기에 순간의 영광이 더욱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집착 없음 때문이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 (p136-137)



어느 늦은 가을 해 질 녘, 서쪽 하늘의 불타는 듯한 저녁노을을 보고 '처절하게 붉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내 표현이 성에 차지 않았었다. 그런데 박완서의 '영웅호걸의 낭자한 출혈처럼 비장'하고 '가인의 추파처럼 요요하다'라는 언어 사용의 적절성을 보고 박 작가를 통해 국어의 아름다움과 글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집착에 매여 있기에 내 저녁의 노을이 아름다운 줄 아직 알지 못하겠다. 아니, 눈으로만 아름다움을 알되 가슴으로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 맞겠다. 아직은 조금 더 치열한 중년을 보내고자 한다. 그러고 난후 이십 년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날 때쯤이면 나도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의 진정한 아름다움의 이치를 알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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