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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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찬양을 받는 콘텐츠라고 해서 꼭 나도 그것을 찬양할 필요는 없다. 이효리가 집에서 로브를 입는 것이 멋져 보인다고 해서 나도 따라 입어 보지만 내가 입은 로브는 그저 한 조각의 넝마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에게서 고전이라고 인정받은 소설이라고 해서 나도 그 작품을 반드시 칭송할 필요는 또한 없을 것이다. 세상에 취향은 다양하고 다양한 취향은 존중되어야 하니까.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25살에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일주일도 훨씬 전에 다 읽었건만, 도대체 이 책과 관련하여 어떤 말로 내 감상을 끄집어내야 할지 갈팡질팡하였다. 더 이상 꾸물대다간 갈팡질팡하는 이런 마음조차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도화지만 덩그러니 남게 될 것 같기에 정리 못한 내 마음이라도 남기자고 일단 끄적여보기로 했다. 


소설을 쓴 괴테와 같은 25살로 설정된 주인공 베르테르는 불구하고 오해와 게으름이 불러일으킨 많은 갈등과 다툼을 뒤로하고 발하임이라는 조용한 마을로 내려간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베르테르의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주는 지상과 하늘을 품고 있는 발하임 계곡의 언덕배기에 앉은 베르테르는 호메로스를 읽으며 이따금 상념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무한한 신의 영혼의 거울인 자신의 영혼을 신이 발하임을 그린 것처럼 자신도 종이 위에 잘 그려서 종이를 자신의 영혼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행복하게 고민하곤 하였다. 


어느 날 베르테르는 발하임 마을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하는 길에 그만 그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보지 못했던 가장 매혹적인 것을 보고야 말았는데 그것은 마을에 살고 있는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여인 샤를로테였다. 첫 만남에서부터 샤를로테가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가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것. 베르테르는 샤를로테의 약혼자가 출장을 나가 있는 몇 주동안 샤를로테의 집을 방문하고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였는데 이것은 해와 달과 별들은 고요히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베르테르는 낮인지 밤인지 모르고 그를 둘러쌌던 세계가 사라져 버린 듯하였다. 


로테와 함께 하는 충만하고 행복한 나날은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토가 돌아오면서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로테는 엄연히 약혼자가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인지하고 있던 베르테르는 이제 그 사실을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25살의 피 끓고 감성 충만한 성정의 베르테르는 이미 너무 깊이 로테를 사랑하게 되었다. 베르테르에게 로테는 헤라이자 아프로디테였고 아르테미스이자 아테나였다. 사랑과 숭배와 헌신을 이미 바쳐버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렇듯 감성이 지배하는 성정을 지닌 베르테르와는 달리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토는 훌륭한 인품에 근본적인 성실함을 가진 사람인 동시에 당시 독일 사회에 지배적이었던 계몽의식의 영향을 받았던 듯 이성이라는 것이 그를 대부분 잠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알베르토와 베르테르의 아주 다른 성향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잘 지내는 듯했던 그들의 관계는 점차 부딪히게 되고 게다가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마음이 줄기는커녕 점점 더 켜져 가면서 두 사람의 대립은 한번 크게 부딪히게 된다.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현실 속에서 괴로움을 잊으려 일 속으로 자신을 던져보지만 속세에 찌들어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은 그가 추구하던 삶이 아니었다. 자신의 안식처인 로테에게로 다시 돌아간 베르테르. 하지만 이미 유부녀가 되어버린 로테는 이제 베르테르의 안식처가 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종교와도 같이 되어버린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숭배는 공존할 수 없었다. 얄궂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초조함과 불안이 베르테르의 영혼에 뿌리내리며 잠식해갔고 그의 생기와 명민함은 소멸되갔다. 베르테르는 신변을 정리하고 알베르토에게서 빌린 권총으로 자신의 서재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 출판사의 거절을 겪은 다음 가까스로 출판된 처지였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출판되자마자 독일과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가져왔다. 18세기 계몽주의와 지독한 이성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억눌려 있던 젊은 감성들은 베르테르의 내면이 말하던 감성과 감정의 솔직함 풍부한 감수성에 열광했다. 냉철한 이성과 지식을 당연한 진리로 여겼던 당시의 풍조에 그들은 지쳤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떤 사조이든 경향이든 하나의 시간과 공간을 그것으로만 채워지게 되면 반드시 반대편의 억눌린 기류가 빈 곳을 비집고 나오게 되어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당시 사회에서 반대편 억눌린 기류였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말할 때 ‘이건 좋다. 저건 나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어떤 행동에 특별한 속사정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나 했나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 P89

충분히 이성적인 알베르토에게 베르테르는 이와 같이 항거하며 감정이 이끄는 대로 하는 것이 어찌해서 나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되묻고 있는 것이다. 아마 베르테르의 이 주장은 당시 유럽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목소리였을 수도 있겠다. 


'젊은 베르테르'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나 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나는 너무도 늦게 읽어나보다. 

베르테르의 우유부단함에 못내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처음부터 샤를로테가 약혼자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유부녀가 되어 버린 로테에 대한 사랑을 계속 키워가고만 있었다. 처음부터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는 베르테르가 나는 불만이었다. 

그 끝이 해피엔드가 아님을 베르테르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인데 '로테'라는 여신에 대한 숭배는 여전하고 스스로 초조함과 불만과 불안을 내부에서부터 키워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모든 비관적인 감정 덩어리는 독자들이 예상한 바 그리고 현대의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베르테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주인공은 초조함과 불안과 그리운 사랑으로부터 구원하는 방법으로 왜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감정은 이미 과거 저 편에 묻어버리고 오로지 현실과 이성만이 살 길이라는 듯 2020년 이 해를 살고 있는 나는 베르테르를 이해는 하지만 용납하지는 못하겠다. 예상되는 결말이 오기 전에 나를 보호해야만 했다, 고 생각한다. 베르테르는 로테는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베르테르는 대화를 나누지 않아야 했다. 베르테르는 로테와는 거리를 두고 알베르토와만 사교를 지속하여야 했다. 그랬더라면, 적어도 그는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 베르테르의 처연한 사랑과 끝 모를 슬픔을 용납하지 않고 '안전'부터 생각하는 나는, 이제  정말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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