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벌판에서 산을 넘고 들을 지나는 무장 독립군을 생각하며 배고픔과 추위와 그리움을 견딘 그들을 존경했고 숭배했고 동경했다.
이런 이유로 문학이나 교육, 집필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은 독립운동의 2류쯤으로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윤동주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목숨을 내놓지 않은 얄팍한 지식인들이 앞세운 그들의 변명과도 같은 독립운동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윤동주의 시를 좋아했지만 독립운동가로서의 윤동주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좀 더 나이가 들었다. 몇 년 전 영화 '동주'를 보았다.
영화 '동주'를 통해서 나는 윤동주의 진심이 느껴졌고 그의 부끄러움에 호응했다. 가슴속에 가진 당시 시국에 대한 분노(영화는 2016년 2월에 개봉했다. 박근혜 정부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내가 동주에 반사되었다. 조금은 윤동주가 이해되었고 소위 '얄팍한 지식인들'이 납득되었다.
친구와 서울 종로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에 갔다. 그는 윤동주를 아주 좋아하는 친구였다. 전시된 그의 시와 영상을 무심히 보는 나와는 달리, 친구는 동주의 전시된 시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일일이 사진을 찍고 공짜로 주는 엽서를 마치 고흐의 진품 그림을 대하는 것처럼 귀히 여겼다.
그가 말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소설을 보았어. 여기 오니 소설이 생각나네. 윤동주를 가슴으로 읽고 이해하게 되였다고나 할까?"
평소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친구를 믿고 책을 빌렸다.
책은 2권짜리, 작가는 '뿌리 깊은 나무'의 이정명, 추리소설, 역사소설, 등장인물 교도관 스기야마, 윤동주 히라누마 도주, 교도관 와타나베 유아치, 조선인 죄수 최치수, 조선인 죄수이자 끄나풀 김만교, 누가 스가야마를 죽였는가? 윤동주는 어떻게 죽었는가? 문장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사람에게 시란 무엇일까? 칼이 무서운가, 글이 무서운가? 기록과 기억의 중요성.
시점이 여러 개의 나뉘어 왔다 갔다 산만했다. 소설 초반에 교도관 유이치의 기록과 시선으로 썼다고 되어 있었는데, 어느샌가 어느 부분은 스기야마의 시선이 되었다가 또 어떤 부분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되었다가 했다. 독서의 흐름에 심대한 방해를 일으키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추리소설임에도 심장 쫄깃해지는 몰입은 어려웠다.
시간도 과거와 현재가 벽걸이 시계의 시계 추처럼 자주 왔다 갔다 해서 과거와 현재의 분간이 흐릿했다. 책을 읽다 자주, 특히 초반에, 앞을 다시 들춰보는 수고를 해야 했는데 이 점도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작가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에는 이미 여러 작품으로 정평이 난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을 드라마로만 보다가 활자로는 처음 읽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을 통해서 이정명 작가가 직유와 은유와 비유에 탁월한 솜씨를 지닌 작가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소설이 긴박하다기 보다 아름답고 처연하기까지 하였다. 작가의 탁월한 능력은 그래서 궁금증을 일으켜야 할 추리소설에는 오히려 독서에 장애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건 작가의 탁월한 묘사와 표현력을 질투한 내 뾰족한 심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거의 매 챕터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해야 하는 문장들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행복이 유리에 맺힌 물방울처럼 불안하다'든가, '그의 영혼의 올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걸 보았다'든가, '눈앞의 백지는 형무소의 뜰처럼 황량했다'든가, 하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비유를 만드는 작가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물과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저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만약 저런 능력이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라면 수많은 글쓰기 강좌와 수업은 다 사기임이 틀림없다. 만약 수없는 노력과 연습이 절묘한 비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연습을 해야 하는지, 그저 나는 가망이 없는 것 같아 기쁘게 책을 읽으면서도 동시에 기분이 우울해짐을 느끼는 역설을 머리에 이고 책을 읽었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고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이것은 드라마로 영화로 다큐로 여러 번 다루어졌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어떻게 묘사하는가 어떤 식으로 풀어 내는가에 따라 재미는 증폭되기도 하고 반감되기도 한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사실이 증폭되었다. 책을 읽는 독자는 알고 있는데, 그 주사를 맞으면 안 된다는 것을. 책으로 들어가서 유이치에게 '그 주사를 동주에게 맞히면 안 돼! 그는 죽을 거야!'라고 미래를 말해주고 싶은 욕망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에서 들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