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눈썹 -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사랑의 순간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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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 홀로 행복해지는 방법에는 시를 읽는 일이 있다. 더욱이 그 시의 내용이 사랑이라면, 해도 해도 고프고 목마른 사랑이라면, 이룰 수 있고 없음의 구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행복해질 수 있다. 아늑하게, 그립게, 좀 서글프더라도. 


김용택의 시를 이미 읽어본 사람이라면, 새로움 없더라도 낯익은 친숙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전한 사랑이구나 하면서, 사랑이 그래도 아직은 있어야 하는구나 하면서, 사랑만이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있는 것이구나 하면서.  


한결같음은 사람마다 장점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단점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데, 이 시인의 시를 읽느 독자 또한 그렇게 나뉘어지겠다. 여전한 장점으로 아니면 이제 좀 지루한 단점으로. 내게는, 내게는 아직까지는 장점이 더 크게 보인다. 쉽고 간결하고 애절하며 그리운 사랑 표현들. 요즘도 이런 시 구절을 이용하여 연애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 몰라. 


아직도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기에 좋은 책이다.  (y에서 옮김20120821) 

반짝이는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 P53

내 그리움의
그 끝에
당신이 서 있었습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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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다, 삼냥이 - 대한민국 대표 캣맘과 세 고양이가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으로의 초대
황인숙 지음, 염성순 그림 / 오픈하우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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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신춘문예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로 등단한 작가의 산문집이다. 고양이를 향한 시인의 마음을 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책으로 더 자세하게 확인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예뻐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 나는 이제 이해한다. 


세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각기 성격이 다르고 활동 성향도 먹성도 다 다른 세 고양이와의 동거. 두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나로서는 80% 정도 그 상황들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닌가, 두 마리와 세 마리는 또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모르겠지만, 모른대도 더불어 사는 마음만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테지, 이렇게 믿고 싶다.


작가인 시인은 함께 사는 고양이만 보살피는 게 아니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 주는 것도 집을 잃은 고양이를 아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일도 정성을 다한다.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 대단해 보인다. 그러는 중에 고양이를 괴롭히거나 해를 끼치는 인간들의 행패에 대한 글을 읽고 있자니 더 읽어나갈 수가 없을 지경이다. 내가 괴로워서 못 읽겠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이들에게는 마치 제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는 느낌을 줄 것 같다. 그집 고양이도 그런가요? 우리집 고양이도 그래요, 하면서. 아픈 고양이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치료해야 했다는 글을 읽으면서 애가 쓰였다. 우리집 두 녀석은 지금처럼 건강하게 자랐으면 바랄 도리밖에.  (y에서 옮김202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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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들어온 너에게 ㅣ 창비시선 401
김용택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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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시를 읽으면서 문득 든 의문 하나. 요즘의 학생들은, 특히 도시에서 살고 있는 학생들은 시골의 삶을 노래하는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것. 시골의 풍경과 시골의 생명과 시골의 소리를 제대로 떠올려 볼 수 있을까 하는 것.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는데, 학생들이 아직도 시를 읽기는 읽는다. 교과서에 나오고 시험에 나오니까. 그런데 시를 시로 읽는다고 하기보다는 문제를 풀기 위한 제시문으로 다루다 보니 자신이 감정이 생길 틈도 없어 넘어가 버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마음에 드는 시를 찾는 일은 엄두도 못 내고 마음에 드는 한 줄도 채 만나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혼자 안타까워해 보다가 이것도 부질없지 싶다가 그래도 나는 읽어야지 했다가...

 

'새들의 밤'이 가장 깊이 와 닿는다. 다른 시들에 비해 길고, 내용도 험한 편이다. 새들의 고달프고 험한 생에 왜 내 마음을 빼앗긴 것인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다. 나보다 여리고 약한 것들에 연민을 느꼈다가 스스로 나를 위로하는 길을 잡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춥다, 춥겠다, 추운데 고생하는구나 하면서 내가 그러한 상황이 아니어서 다행이구나 싶은 것인지. 이래서야 시를 읽는 나를 기특하다고 여길 수도 없는데.

 

쉽게 읽힌다. 어떤 시는 싱겁게도 느껴진다. 쉽고 싱거워 보인다고 쓰는 마음까지 그러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안다. 어렵고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아야만 얻을 수 있는 표현이리라는 것, 인정하고 품어야만 쓸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이 작가의 시를 계속 읽을 수 있는 것이고. 

 

이 글을 쓰는데 강릉 근처 산불이 잡히지 않고 있다는 뉴스가 들린다. 그 산에 깃든 새들은 이제 또 어떻게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y에서 옮김201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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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의 도시관찰일기
이다 지음 / 반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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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이다의 작게 걷기>가 퍽 인상적이어서 연달아 빌려 본 책이다. 애매하게 서운함이 남는다. 나는 글보다 그림 쪽을 더 기대했던 것 같다. 글과 그림 둘 다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 나누어 쓸까 궁금하게 여기면서. 이번 책은 그림보다 글의 분량이 더 많아 보였다는 점, 실제로 이런저런 측량을 한 것이 아니라 내 기분이 그러하였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관찰은 분명히 능력이다. 나는 관찰력이 아주 없는 편이다. 방금 전에 본 것을 떠올리는 것도 잘 못한다. 휘리릭 보고 듬성듬성 지나친다.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 내놓는 결과물을 보면서 신기하게 여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따라서 해 보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말짱 헛짓이었다. 이 분야에도 적성이나 유전자가 따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내게는 이런 쪽의 자질은 영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다 작가는 내가 막연하게 부러워하는 두 가지의 능력을 다 갖고 있다. 관찰과 그림 실력. 하나 더. 성실한 태도까지. 그러니 이것들로 책을 만들어 내는 것일 테다. 나로서는 그저 반가운 일이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세밀한 시선으로 관찰하지 않아도 되고 이렇게 작가의 책을 보면서 즐거워 하기만 하면 되니. 


그래도 새로 얻은 버릇 하나. 걸으면서 마음과 눈이 머무는 시간이 생기고 있다는 것. 내가 보고 있는 것들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 여러 번 다닌 길에서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있다는 놀라움을 느끼는 일까지. 심심해지지 않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사에 여러 모로 무심해진다는데 이번 기회에 이 속도를 늦출 수 있게 된 것 같아 나는 많이 고맙다. 


관찰을 잘해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발표도 하고 그러면 더욱 좋겠지만 그것까지 바라지는 않겠다. 그저 내 주변에서 매일매일 사라지고 있었던 풍경들을 지금처럼 되찾으며 지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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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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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작년이 되어 버렸다. 작년 크리스마스. 매일매일이 그날같은 날에 새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싶지만 아주 유명한 날이라니 나도 더불어 구별해 본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읽기 시작해서 다음해가 된 오늘에 읽기를 끝낸 소설집. 앞서 작가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인상 깊게 읽고 새삼 찾아 읽은 책인데 마음에 썩 들었다. 이제 이 작가의 글을 더, 천천히 읽어도 될 듯하다. 

소설은 모두 7편. 제목과 표지의 그림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달리 글은 밝지도 유쾌하지도 않다. 책을 소개하는 말에서 읽는 이의 마음을 밝혀 준다고 했는데, 나는 영향을 받지 못했다. 이 책을 읽은 시기가 하필 나라 전체로 사건사고가 겹치는 때여서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7편 속 어느 인물에게서도 사연 안에서도 나는 밝은 인상을 느끼지 못했다. 딱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이 또한 삶이라고?

그럴까? 삶의 기본값은 우울이고 절망일까? 관계의 기본값도 갈등이고? 그래서 조금만 나아져도 만족한다고 행복하다고 하는 것일까? 나이가 드는 것과는 관계없이 젊으면 젊은 대로 나이들면 드는 대로, 삶에는 연습이 없다고 하니 매번 다른 질의 어려운 과정을 거쳐 가야만 하는 일인가? 사는 게 이런 일이라고? 자꾸만 묻는다. 나에게 묻고 소설에게 묻고 세상에 묻는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는데도.

소설은 읽는 내 처지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잠들기 전에 읽기에는 좋지 않았다. 아침에, 오전에, 낮에 읽는 게 좋았다. 밤보다는 아무래도 낮 동안에 내 마음이 더 단단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만 눈을 감고 자자 하는 것보다는 살아 보자는 각오를 새기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소설. 너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너만큼은 애쓰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 말을 건네게 되는 소설.

"세상에는 끝내 해명되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68쪽)"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142쪽)"
두 편의 소설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소설인가 현실인가 나의 삶인가 이 모두인가. (y에서 옮김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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