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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김훈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의 문체가 내 말투로 되살아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가 쓴 말처럼 내가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어렴풋이 그랬던 것 같았더니,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해졌다. 어지간한 동경심이 아니고서야 내가 이렇게 빠져들다니, 즐거운 경험이다.
남한산성을 읽고, 이어 칼의 노래를 읽고, 한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일'에 진저리를 쳤다. 이렇게 살아야만 했던 백성의 목숨. 나는 내가 그런 백성 중의 한 명이면서, 또 그런 한 명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읽었다. 이 생각은 다른 표현의 의문으로 바뀌면서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여전히 계속 되었다. '나는 이 땅의 백성 중 한 사람인가, 백성 중 한 사람이 아닌가.'
앞서 두 권의 책은 전쟁 중이어서 그런 줄로 알았다. 장군이 아니니, 귀족이 아니니, 왕실 가족이 아니니, 그저 이름없는 백성이니, 그런 시대의 힘없는 백성들은 그렇게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에 의해- 때로는 적에 의해 때로는 우리 상관에 의해-죽고 살 수밖에 없었나 싶었다. 비단 우리 땅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닌 것 같아, 전쟁이란 세상 위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늘 일어나는 일이어서 전쟁 중에 스러지는 생명들의 가엾음을 그저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전쟁만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웃 나라와의 전쟁이 없어도 나라 안은 늘 전쟁 중이었다. 생각해 보니, 산다는 것이 전쟁인 것이었다. 내가 나와 싸우는 전쟁만이 아니라, 내가 내 이웃과 싸우고 나를 지배하는 관리와 싸우고 내 삶을 보호한다는 체제와 싸우는, 삶 자체가 전쟁인 것이다. 그러니 살 길을 찾아야 할 밖에. 살아 있으니, 살아가야 하니, 살 길을 찾아서 도모할 수밖에.
전에는 옛날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음이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 책을 읽는 초반에도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100년 전에 살았던 게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랬는데, 잠시 고개를 든 순간, 지금이, 100년 전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백성은 여전히 춥고 배고프고 아파서 울고 있으며, 그런 백성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잡혀들어가고 있고, 백성을 모르면서 안다고 말하는 이들은 저들의 욕심에 갇혀 아우성치고 있으니.
할 말을 다 하지 않고 감추는, 아니 버리는 작가의 문체에 자꾸만 눈길이 머문다. 글을 쓰면서 앞서 죽어간 그들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랴. 살아서도 아프고 죽어도 아플 일이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살아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찌 모를 수 있는 것인지.
이 책을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읽으시라고 권하는 마음은 간절하다. 읽으신다면, 그는 적어도 아픈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리하여 세상이 지금만큼이나마 빛을 품고 있는 것일 터이므로. (y에서 옮김2011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