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문학동네 시인선 187
안미옥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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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제법 오래 전에 구해 놓았고 이제야 펼쳐 읽는다. 빨간색 표지를 계속 보고 있었던 셈이다. 


여름 시 몇 편이 아주 돋보였다. 겨울 시 여러 편보다 더. 뜨거운 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겨울 시가 나를 좀 구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펼치자마자 녹아 내리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글도 이 더위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얼음도 눈도 속수무책이구나, 여름만이 끔찍하게 떠들고 있구나...  바람조차 열기로 떨고 있다. 


시는 승리자의 말이 아니라 패배자의 말이라는 말, 내가 어디서 누구한테서 들었던가? 모르겠다. 진짜 들었던 말인지 내가 혼자 궁리한 말인지. 시를 읽으면서 신이 난다는 기분을 얻은 적이 없으니. 세상과의 대면에서 진 쪽이 쓴 말, 사람과의 대결에서 진 쪽이 쓴 말, 상황과의 대립에서 진 쪽이 쓴 말, 내가 읽는 시들은 늘 이쪽에 있다. 읽는 내 취향 탓일까, 쓴 시인의 정서 탓일까. 오늘도 나는 이 시집에서 지고 있는 사람을 본다.


문이 인상 깊었다. 열린 문, 닫힌 문. 열린 집, 닫힌 집. 집이 덩달아 인상적이 되었다. 내 집은 세상의 어느 자리에 있을까? 시인이 찾고 있는 집은 세상의 어디에서 시인을 기다리고 있을까? 문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애써 발견해도 열리지 않고 문 안 쪽의 집안은 나를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들어오지 말라는 듯. 보면서도 이 시인은 울지 않는다. 울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대신 시를 쓴다.  


이렇게 문 앞에 서 있는 시인 한 사람을 곁에 둔다. 

일상이 뒤죽박죽이라면
조금 더 헤쳐놓아도 될까 - P14

마지막 인사는 마지막에 하는 인사가 아니라 마지막이 올 때까지 하는 인사일까. - P19

어둠을 접어서 옆에 두면 잠이 잘 온다
나는 작게 더 작게 접는다
접을 수 없을 때까지 접는다 - P21

걸을 때마다 여름 열매들이 발에 밟혔다
언제부터 열매라는 말에
이토록 촘촘한 가시가 들어 있었을까 - P42

부서진 마음, 무너진 마음, 부족한 마음, 꽉 찬 마음, 쏟아지는 마음, 넘어지는 마음, 터진 마음, 젖은 마음, 뾰족한 마음, 여린 마음, 단단한 마음…… - P60

깨진 자리마다 꽃이 피는
녹슨 여름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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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잊어버린 것 - 마스다 미리 첫 번째 소설집
마스다 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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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읽는 중-다소 가볍고 길지 않고 무난하고 편하고. 내게는 만화>산문>소설 순이다. 줄글보다는 만화로 전달하는 쪽이 더 와 닿는다는 뜻이다. 노골적이든 은근하게든 이 작가의 경우 줄글 전달이 편하지 않았다.

 

언뜻 생각하면 그림으로 된 만화가 글보다 작가의 의도를 더 직설적으로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겠지만 같은 내용이라도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만화로 나타날 때 더 함축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 작가의 작품들로 인해 알 수 있었다. 작가에 따라 글로 드러내는 게 더 효과적인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 이 작가는 만화 쪽이 나았다는 것, 작가에게 끌리는 매력이 더 깊었다는 것, 소설책이 이 한 권밖에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랬다는 것을 메모해 둔다.

 

요즘 내가 한 영역에서는 정신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게 맞는 모양이다. 가벼운 글을 가볍게 읽고 싶어 하고 가벼운 생각으로 시간을 메우려고 하는 것을 보면. 마스다 미리의 그림이나 생각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데 적절하고.

 

남자와 여자의 오묘하면서도 끈질긴 관계. 정도껏 사랑하고 정도껏 미워할 일인가. 적당히 숨기고 적당히 속이면서 유지해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어떤 때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지혜롭다 싶다가 어떤 때는 교활하다 싶어진다. 어느 쪽이든 살아 남기 위해 택한 삶의 방식이었을 것이고, 내가 그때마다 다르게 느꼈다면 그 순간순간의 내 삶이 아슬아슬했던 탓이었겠지. 속여서 기쁘기도 했고 속여서 낭패스럽기도 했고.

 

나는 잊어버린 것이 없어 좀 서글프다. (y에서 옮김201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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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니 참 좋았다
박완서 지음, 김점선 그림 / 이가서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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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작가와 그림을 그려준 작가가 좋아 무조건 샀다. 5년이나 전에 나온 책인데 왜 몰랐나 하면서 50%나 할인을 해 준 예스에 고마워하면서. 그리고 읽었다.


사 놓고 금방 읽은 게 아니라 시간이 좀 흘렀는데 앞 두 편을 읽으면서 낯익은 느낌이 들어 책을 산 그때 앞부분을 좀 읽고 잠시 내버려두었다가 오늘 다시 읽는 것인가보다 그렇게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또 두 편을 더 읽었다. 아무래도 이건 본 글이다. 헐, 내가 쓴 리뷰를 들춰보았다. 이 책에 대한 글은 없다. 그렇지, 아무렴, 내가 책을 읽고 리뷰를 쓰지 않았으려고.


다시 책을 읽었다. 마침내 여섯 번째 글인 '산과 나무를 위한 사랑법'을 보고 확신했다. 이 책은 이미 읽었던 책인 것이다. 일곱 번째 '아빠의 선생님이 오시는 날'을 보니 더욱 확실하다. 학생들에게 주려고 복사를 할까 말까 하다가 분량이 조금 많아서 포기했던 글이라는 생각까지 딱 떠올라 주었으니까.


벌써 이게 몇 번째인가. 알고서 새로 읽는 게 아니라 안 읽은 줄 알고 읽다가 낯익어서 스스로를 의심하고 확인하고 한 뒤에야 깨닫는 기억력의 한계. 아마 이 책을 학교 도서실 책으로 읽었던 것이리라. 리뷰를 안 올렸으니 당연히 안 읽었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허탈하다. 글을 다시 읽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 유감이 없는데(새로 읽어도 여전히 괜찮은 글과 그림이니까) 한동안 머리 굴린 내 자신이 쑥스럽다.


그 동안 마음에 들었던 책 위주로 글을 올렸는데, 이제부터는 안 좋다고 여겨지는 책에 대해서도 메모 형식으로나마 올려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몰라서, 기억을 못해서 또 손에 그 책을 들지 모르니까. 좋은 책은 괜찮지만 좋지 않은 책에 또 시간을 들인다면 얼마나 아까우리.


가까운 분에게 선물해도 좋은 책이랍니다. (y에서 옮김200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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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4 - 브레이크 타임은 다섯 가지 풍미로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양윤옥 옮김 / 모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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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에서는 앞의 세 권과 조금 다른 요소를 활용하고 있다. 화자를 바꾸고 장소를 옮기고 반전을 꾀하고. 미호시와 아오야마의 활약은 그대로 이어지지만 소설 속 시선이 달라지니 새로워지는 맛도 있다. 그런데 이게 또 익숙한 방식이라 낯설지가 않다. 아마도 일본소설에서 많이 봐 온 형식이라 그런 듯하다. 평범해져 버렸다고나 할까?


재미있게 그리고 가볍게 잘 읽었다. 교토에서도 도쿄에서도 실제로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셔 본 듯도 하고. 제 3장에 나오는 다트 게임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이런 경기가 실제로 있나 보다. 단순하게 재미로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경기까지 할 수 있다니. 점수를 내는 방식도 승패를 결정짓는 과정도 못 알아채기는 했지만(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아오야마의 활약은 흥미진진했다. 미호시가 곁에 없어도 제 할 일은 하는 사람이란 말이지.


커피와 젊음이라, 씩씩하고 싱그러워서 읽는 마음도 흐뭇했다. 이런 소설책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 나에게는 어찌하여 단골 가게가 없을까 하는 것.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인가? 꼭 가서 먹고 싶다고 여겨지는 무언가가 있는 가게여야 한다는 것일 텐데. 단골이라고 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자주 들러야 자격을 붙일 수 있을까? 괜히 심술이 나서 투덜거려 본다. 


사건 수첩이 2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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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시편 문학과지성 시인선 526
김형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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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얼마만큼의 나이가 되어야 '나이가 들면'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환갑인 60을 넘겼다고 보면 이 말을 좀 수월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10년 정도 더 살고 있는 인생이라면 더더욱 자연스럽게. 아직 나로서는 도달해 보지 않은 경지인데 어떨까? 지금과 많이 다를까? 아니면 별로 달라진 걸 못 느낄까?


시인은 1944년생이시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그다지 무리없을. 마음이 여전히 젊은 것과는 관계없이 실제 살아온 시간이 이 정도라면, 이 시간을 겪은 이들이라면, 이 시집 속 시인의 목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을 것 같다. 특히 자신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친구나 선후배나 가족을 불러 보는 고요한 목소리가. 아득하고 잔잔하면서도 좀 많이 서글프고 좀 많이 애달픈 그리움이 넘치는 목소리에.  


시들은 대체로 짧은 편이라 읽는 마음이 가뿐하다. 3부의 화살시편 29수는 특히 그렇다. 그런데 분량이 짧다고 쉽게 읽고 넘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움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이름 한 번 불러도 잠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기억 한 줌 떠올려도 잠깐 맴돌아야 하고, 미처 챙겨 주지 못했던 후회가 한 가닥이라도 솟는다면 한참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는 것으로. 시인이 시인의 사람들을 부르고 있는 사이사이로 나는 내 사람들을 생각해서 좋았다. 


내 나이가 내 삶에서 어느 정도의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 헤아려보려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비록 잠시가 될지라도. (y에서 옮김20220414)

바람이 맛있는 데 가서
몸과 마음은 바람으로 채우고
너도 잃고 나도 잃는
낯선 곳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 P12

좋은 추억을 방패 삼아
새 인연 찾아 길을 나서는
늙은 나그네여,
스스로 괜찮다 괜찮다 위로하니
너도 괜찮고
나도 괜찮다. - P34

이제 네 마음 알았으니
그냥 거기 있거라.
더 다가가지 않을 테니
달아나지 마라.
너를 그리워할 곳이 여기라면
여기서 기다리마.

……

그냥 여기서 바라보며 그리워하마.
내 마음 실어 나르는
출렁이는 파도여.
넘을 수 없는 그리움이여.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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