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했다가 귀여웠다가 - 마음의 양면을 건너는 그림에세이
김성라 지음 / 아침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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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그림 작가의 산문집이다. 제주가 고향인 작가가 서울과 제주를 오가면서 겪는 삶의 단편을 아늑하고 소박하게 보여 주고 있다. 막 넉넉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한껏 따뜻해져 오는 모습들이다. 이 뜨거운 여름에도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따뜻함이 전혀 거북하지 않을 정도로. 더위도 물리치는 정이라고 해야겠다.

그림이 좋으니 글은 절로 읽혀진다. 단순해 보이는 선과 색깔이 담백해서 마음이 더없이 차분해진다. 복잡하지 않고 어렵지 않게 보이는 그림들. 귀찮고 짜증나는 마음을 씻어 주는 것이 참 좋다. 제주를 말하고 있는 다른 책들에서는 얻지 못하는 동기를 얻는다. 책 속 '여행의 성향' 글에서 보여 주는 어느 식당을 찾아 가서 밥 한 그릇 먹어 볼까 하고. 작가가 얻은 작업실과 비슷한 분위기의 카페를 찾아 가서 커피 한 잔 마셔 볼까 하고.      


작업실을 구하고 간판을 달았다는 에피소드가 자꾸 나를 끌어당긴다. 작업실이 필요한 것도 아닌 내가 이런 공간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는 게 그저 딱할 뿐. 남의 작업실이라도 구경을 하는 재미가 마냥 좋다. 작가의 작품집이 자꾸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y에서 옮김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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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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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플 여사가 예전 여행에서 만난 라피엘[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의 부탁을 받고 사건을 해결해 주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카리브 해의 호텔에서 함께 사건을 해결했던 라피엘이 죽었다는 기사를 읽고 스산한 마음에 빠져 있던 마플 여사에게 죽기 전에 준비해 둔 부탁을 전해 온 라피엘. 욕심보다 호기심이 강하고 올바름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마플 여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라피엘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겠다. 살아서 해결을 못 봤더라도,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마플 여사가 해결해 주리라고 믿었다는 점, 그게 또 중요하고. 


이 책 앞에 읽은 [작가들의 정원]을 통해 영국의 정원을 찾아다니는 여행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 마침 마플 여사가 참가한 여행이 이 여행이라는 것을 읽으며 신통하게 여겼다. 이렇게 이어지다니, 경험이라는 게 직접이든 간접이든 쓸데없는 건 없다더니, 책읽기에도 적용이 되는 것이구나 싶어 흐뭇하기까지 했으니. 


평소 정원에 관심이 많은 마플 여사. 실제로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정원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겠지만. [작가들의 정원]에서도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플 여사는 정원에 대한 관심으로 유심히 관찰하다가 마침내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얻는다. 관찰과 추리와 생각과 판단. 작가는 절묘하게 이들을 조절하면서 해당 인물이 제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 준다. 독자는 오로지 듣고만 있어야, 잘 들어야만 알게 될 것이라는 듯 귀한 정보는 일부러 숨겨 놓은 채.    


'사랑'이 늘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랑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 또 짚어 봐야겠지만,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오는 희생자. 사랑 때문에 자신이 희생자가 될지 어찌 알았을까마는. 인간 본성을 다룬다는 이 작가의 글, 특히 착함보다는 악함 쪽으로 조금 더 치우쳐 다루고 있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해 준다. 사람, 참, 딱한 존재다. 위대하기도 하지만. (y에서 옮김202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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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 가방
김성라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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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형태의 그림을 그리고 그에 맞는 글을 보여 주는 작가를 만났다. 좀 많이 횡재한 느낌이 든다. 내게 횡재란 이런 것이어서 더 근사하다. 이 작가의 책을 더 사서 갖고 싶어지는 마음까지 생겼으므로.

책 제목인 고사리 가방은 고사리를 따서 담는 가방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작가는 고향인 제주도에 가서 제주 사투리를 진하게 쓰시는 엄마와 함께 고사리를 따러 간다. 그 길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간결한 선과 깔끔한 배경의 그림 그리고 다정한 대화와 흐뭇한 독백까지. 모처럼 내 마음이 다 아늑해진다. 사는 일에 별 게 없다고 입으로는 늘 떠들곤 하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바로 그 별 거 없음에 소중하고 귀한 일상이 깃들여 있으니까. 그걸 이제는 확실하게 알게 되고 말았으니까.

볕 좋은 날, 이렇게 커다란 통유리창 아래 옆으로 누워서 햇빛 받는 시간을 얻고 싶다. 생각해 보면 이럴 시간도 공간도 이미 갖고 있으면서 이럴 줄 몰라 못 누리고 있었다. 이게 문제다. 좋은 걸 이미 갖고 있으면서 모르고 산다는 것.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풍경 앞에서라도 같은 자세로 누워 바라보고 싶은 걸. 바람 부는 날이면 또 어떠랴. 행복과 평화가 내 한 걸음 안에 이미 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y에서 옮김202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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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5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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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5 1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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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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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마음에 든 책을 만나면, 앞서 읽었던 책 중에 좋았다고 생각되는 책들과 비교하게 된다. 어느 것이 더 내 마음과 가까운가. 그리고는 순위를 따지면서 책의 자리를 만들어 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책을 제일 윗자리에 놓는다.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감동을 주었던 책으로, 가장 깊은 울림을 남겼던 책으로. 올해 내 여름을 이 책에 남기겠다.

어쩌면 이렇게도 잔잔하게 펼쳐 보일 수 있는 건지. 너무 조용하고 잔잔해서 도리어 조마조마해진다.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몰라서. 조용함이 의외로 힘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 말없는 성격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다는 것, 차분하다는 게 어떤 힘의 다른 이름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요란한 게 전혀 없는데 읽는 이의 마음을 내내 일렁이게 하는 이야기로. 반전까지 놀라울 정도로 잔잔하다.

이야기의 중심 소재는 '건축'이다. 소박한 듯 보이지만 철두철미한 노건축가와 그가 있는 설계 사무소에 갓 들어간 젊은 건축가가 설계를 하면서 한 해의 여름을 함께 보낸 이야기. 그 여름이 오래오래 남아 소설의 제목이 된 이야기. 내게도 그런 여름이 있나? 여름이 아니라도 봄, 가을, 겨울 중에? 내 인생의 방향을 이끌어 준 어느 해 어느 계절이.그 계절을 담고 있는 소설 속 여름별장과 같은 곳이?(없다, 흑, 좀 많이 슬프고 섭섭하군.)

가끔 건축과 관련된 글에 내가 기대 밖으로 빠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르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무심한데 건축만큼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모르면 알고 싶어할 정도로 나를 이끌어 가면서 읽는다. 읽으면서 흐뭇해 하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여긴다. 내게 이런 쪽의 바탕이 있었던 건지도 몰라, 하면서.

건물을 설계하면서 건축가들이 고민하는 영역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아주 세세하고 치밀하게 들여다 본 느낌이다. 이 작가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정도로 혹은 그 이상으로 설계에 정성을 들이는 건축가들은 정말 위대한 예술가일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지금도 이름을 남기고 있을 것이고, 비록 이름은 남지 않았더라도 그런 위대한 일을 한 건축가들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건축가이기 전에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하고 싶어진다. 거대한 건물을 설계하면서 각 방의 문고리의 재질이나 무늬까지 고려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일 것이다. 집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사람이 사는 공간의 효율성과 장식성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 궁리하고 또 궁리하는 모습, 집이 되기 전까지 혹은 집이 된 후에도 끝없이 고치고 보완하는 모습. 아, 나는 너무도 건조하게, 바짝 마른 채로 살아온 것만 같다. 비와 바람만 피하면 된다는 듯, 우리집에게 미안해지는 기분이다.

'집'을 애틋하게 여기시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더욱 애틋해지시라고.(y에서 옮김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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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5 1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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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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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책의 외형, 아주 내 취향이다. 무엇보다 두껍고 단단하고 표지의 그림은 선명하면서 아득하고. 바닷물 사이로 키가 큰 가로등 사이로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을 따라 나도 간다. 무서운 듯 싶어도 유혹적이다. 내가 이렇게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었던가.


주인공은 아팠다.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는다. 자신의 남은 날들 앞에 다가오고 있을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떠할까? 절망하고 절망하고 또 절망하게 될까.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오늘은 살았구나, 내일에도 살아날까? 밤에 잠드는 일은 또 어떨까? 잠이 오기는 할까? 안 자고 못 자다가 어느 순간 지쳐 쓰러지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또 놀랍게도 깨어나고? 글을 읽어 나가는 동안 작가의 처지에 나의 상상력을 갖다대면서 나는 멋진 혼란을 겪었다. 이 소설은 소설만이 아니었다. 온전한 삶의 온전한 형상 하나였다.  


곧 죽을 줄 알았기에, 자신이 살아 있었던 흔적을 모조리 정리까지 하고(운영하던 출판사도 팔았는데), 죽음에 기꺼이 굴복하려는 즈음 자신의 뇌사진이 다른 사람의 뇌사진과 바뀌었다는 것을 주인공이 알게 된다. 의사가 사진 아래의 환자 이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던 것. 안 죽을 사람을 죽을 것이라고 하고 곧 죽게 될 사람에게 안 죽을 것이라고 진단하는 의사라니. 이렇게 하여 누군가의 실수로 잃어버릴 뻔했던 내 목숨을 되찾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의 심정은 어떠할까? 새롭게 다가오는 남은 날들이 이제는 어떻게 보일까? 소설은 참으로 끈질기고도 웅장하게 나아간다. 하루하루 만나고 헤어지고 추억하고 몰두하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나는 이 책만큼은 다른 책과 같이 읽을 수가 없었다. 온전히 이 책에만 매달렸다. 


읽는 동안 내가 나에게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아서 책을 수월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과제처럼 의무처럼 책 속 사항들을 정리해야 하는 처지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읽고 묻고 답을 고르고 잊어버리고 다시 읽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내가 언어를 이만큼 좋아하는 수준이라는 것에 또다시 만족하고 고마워하고. 책은 나를 괜찮은 독자로 자꾸 확인시켜 주는 듯하였다. 


좋은 사람 옆에는 좋은 사람이 있다고 했던가. 옆에 있는 사람을 보면 당사자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도 했던가. 주인공 레이랜드와 이어진 사람 중 형편 없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심지어 오진한 의사조차 악의나 무지로 그런 실수를 저질렀던 게 아니라고 믿어졌으므로), 나는 이게 가장 문학적이라고 여겼다. 문학이 아니고서는 이런 세상을 창조할 수가 없다. 현실이 지루하고 지긋지긋하고 끔찍하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더없이 초라하고 하찮고 짜증스럽게 여겨질 때마다 꿈꾸게 되는 문학, 문학 속 인물, 문학 속 세상. 레이랜드를 통해 촘촘하게 펼쳐 보이는 세상. 


번역이 이렇게 달콤한 작업이었나, 번역가가 이렇게 숭고한 직업이었나, 소설가가 이렇게 복잡한 예술이었나.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놓아 보내지를 못하겠다. 내가 앞으로 읽을 글들은 얼마나 무거운 무게로, 얼마나 무거운 감동으로, 얼마나 무거운 사명감으로 나를 사로잡게 될 것인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언어와 모르는 언어들에게 어떤 경의를 품게 될 것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다. 혼란스러워도 전혀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흥미로워진다. 주인공이 낯선 언어를 모두 배우려고 했던 마음처럼 나도 모든 글 앞에서 설레게 될 것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이하고 보내는 순간은?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인데, 내가 먼저 죽을지 네가 먼저 죽을지 모르면서 우리 스스로는 자신을 죽음의 길에서 빼놓는다. 오래 생각하고 있다. 나도 모를 나의 죽음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가게 될 것인지를. 내 곁에 있는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의 죽음을 먼저 맞게 된다면 내가 또 어떤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인지를.


책에 담긴 언어의 무게가 그윽해서 참으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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