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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
이소영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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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게 참 묘한 감정이다. 내 처지에 만족하여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내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조차 남의 행복에서 위로를 얻기도 한다. 도대체 행복이라는 게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매달리는 듯 보일까. 갖고 싶다고 쉽게 가질 수 없는 듯하다가 애써 가지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행복한 감정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있기도 있고. 아무튼 좋은 것임에는 분명한데.

책은 우리나라 작가가 쓴 것이다. 칼 라르손이라고 하는 스웨덴 화가를 아주아주 좋아해서 그의 삶과 이력과 근거지와 작품들을 몽땅 찾아다니고 자료들을 모아 만든 책이라는 것. 대상자인 칼 라르손이라는 화가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많겠지만 한 사람을(혹은 어떤 대상 하나를) 좋아하면 어떤 경지까지 활동할 수 있게 되는지도 이 작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만하면 일과 놀이와 즐거움을 한데 모아 누릴 수 있다고나 할까. 취재 과정의 수고로움이 단지 수고스럽기만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이런 대상을 많이 가질수록 각자의 삶이 좀더 풍요로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칼 라르손, 몰랐던 사람이고 알게 되어 좋다. 이케아의 정신적 모토라고 하는데 위대한 화가는 세계로 향하는 국민 기업의 모델이 될 수도 있음을 실제 사례로 본다.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예술과 인문학을 잘 알고 활용하면 얼마나 큰 힘을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니.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가까이, 내 가족과 함께 하는 데에 있다. 아는데, 알아도, 쉽지 않다. (y에서 옮김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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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들 - 모마 미술관 도슨트북
SUN 도슨트 지음 / 나무의마음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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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싫어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고. 그림을 보러 미술관에 가는 일은? 글쎄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몇 차례 다녀온 적도 있지만,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러 간 경우에는 보러 온 사람에 치이고 밀려 뭘 봤는지 모르겠고, 모르는 화가의 그림은 또 뭐가 뭔지 몰라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나 여겼던 것도 같고. 그림 앞에서 멍 때리듯 서 있는 사람들도 있던데 아직 그래 본 경험이 없다. 이만큼이 그림과 미술관과 나와의 관계라고 해야겠다.

굳이 따져 보면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그림만 몇몇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단연 모네의 그림에 대한 설명에서 머물렀다. 모마 미술관이라는 곳에 관심이 생겼을 만큼, 뉴욕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1도 없지만 모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는 여기 5층에는 가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도라에몽의 마법 문이 있다면,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곳 5층으로 가 보고 싶다고.(내가 이만큼이나 그림을 좋아하나? 아닌 것 같은데.)    


도슨트라는 직업 이름을 익힌다. 미술관 현장에서 작품과 화가에 대해 설명해 주는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참으로 근사하다. 이 순간 무언가를 설명하는 직업 중에 도슨트가 가장 멋있게 느껴진다. 그림을 알고, 그림에 대해 그림을 그린 이에 대해 그림을 보는 눈에 대해 말해 주는 사람이라. 본격적인 도슨트를 만난 적이 없다 보니 상상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여겨진다. 이 책 덕분일 수도 있겠다. 책에서 글로 보는 게 아니라 그림 앞에서 도슨트의 음성으로 직접 들을 수 있다면, 그림 감상의 폭도 훨씬 깊고 넓어질 것만 같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책에 실린 그림들은 대체로 알고 있었고 작가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아는 것도 있고 몰랐던 내용도 있었다. 나같은 독자에게는 사실 책으로 보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다. 내 수준과 흥미에 맞게 천천히 넘겨도 빨리 넘겨도 되는 이 속도도 중요하니까. 

그림을 보러 가고 싶다는 말, 나도 한번 해 보고 싶다. 갖고 싶은 허영이다. (y에서 옮김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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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이미경의 구멍가게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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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책이다. 전국의 구멍가게를 찾아 그 가게를 그림으로 보여 주고 그때의 생각을 글로 보여 주는 작가의 책. 그냥, 구해서 가졌다. 갖고 싶다는 것, 내가 돈을 주고 얻어서 갖고 있고 싶은 대상이 바로 이런 책이다. 예쁜 그림과 소박한 생각과 이를 나누는 작가의 솜씨가 아주 근사하게 어울리고 있는 책.


책의 내용은 앞서 나온 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각각의 구멍가게들의 이름이 다르고 모습이 조금 다르게 보일 뿐, 그 가게가 그 가게라고 해도 괜찮게 보일 정도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비슷해 보여도 계속 보고 싶다. 마치 '틀린그림찾기' 놀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가게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고 다른 부분을 짚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어떤 가게의 경우,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을 다 그려서 보여 주고 있는데 계절마다 다르게 놓여 있는 주변 사물들을 구별해 보는 재미까지 있었으니까. 계절마다 찾아갔을 작가의 마음이 헤아려지면서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갖고 있으면 이렇게까지 빠져들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사람마다 그런 게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강렬한 마음으로 집중하고 싶은 대상 하나 이상.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 어떤 스포츠(직접 하든 구경만 하든)일 수도 있을 것이고, 요즘 유행하는 노래의 주인공인 가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한 차원 높여 미술이나 건축이나 공연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이 작가의 경우, 우리나라 전역에 남아 있을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는 일일 것이다. 그 가게에 가는 여정, 그 가게를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 그 동안에 느꼈을 온 마음을 글로 옮기는 일까지.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가진, 그리고 충분히 누릴 만큼의 능력을 지닌 작가의 삶이 많이 부럽다. 이런 삶은 부러워해도 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  


예전에 내가 살던 지역의 가게(대산마을 점방, 201~205쪽)를 이번 책에서 만났다. 살짝 설렜고 좀 많이 흐뭇했다. 오랜 시간을 버티고 견딘다는 참된 뜻을 알게 된 기분도 얻었다. 새것도 좋지만 오래된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 시대에 맞도록 발빠르게 바꾸는 일도 현명하겠지만 그 시대의 흐름을 벗어나 긴 호흡으로 살아남아 있는 일도 가치를 남겨 줄 수 있다는 것. 


작가가 이 책을 만들고 있는 동안 책 속의 어떤 가게는 영영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만 한다. 이런 구멍가게는 사라지는 일은 있겠으나 새로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증거로라도 살아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예쁜 증거, 갸륵한 증거, 진실로 거룩한 삶의 증거의 한 방법으로서. 


남아 있는 오래된 가게를 보는 마음도 안쓰럽고, 이제는 비어 버린 채 유리창에 겨우 붙어 있는 이름만 낡아 가는 가게를 보는 마음은 더 애달프다. (y에서 옮김2020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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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의 구멍가게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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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 동네의 구멍가게가 현대식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우리 애들의 초등학교 옆에 있는데 애들이 다닐 때 가게를 보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벌써 15년이 넘었구나. 그분들의 아들 내외(이분들도 이미 손자를 두신 할아버지, 할머니시다.)가 이 가게를 새로 단장하면서 자그마한 간판을 걸었다.0 0슈퍼라고. 이 책을 봤더라면, 이 책 속의 그림 중 하나라도 일찌기 봤더라면 오가면서 사진 한 장 찍어 두어도 좋았을 것을. 사진 속 그림들과 참 비슷하면서 또 다른 구멍가게였는데.

 

평상, 나는 그 무수한 평상들이 그립다. 동전도 불량식품도 뽑기도 학용품도 그립지 않은데,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지상의 공간, 그곳이 그립다. 내 어린 시절은 그런 평상도 가질 수 없을 만큼 가난했던 것이리라. 우리집은 평상을 둘 곳이 아예 없었을 테니, 구멍가게들을 지날 때마다 저기 한번 앉아 봤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던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한데. 거기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어 본다거나 쭈쭈바를 먹어 본다거나 하는 상상, 딱 상상까지다.(나는 아이스크림이나 쭈쭈바를 어지간해서는 안 먹는다. 먹고 싶은 장소를 끝내 못 찾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무로 엮은 넓은 탁자 위에 남은 장판을 덮은 소박하면서도 튼튼한 자리, 어떤 애들은 그곳에 엎드려 숙제도 하는 것 같았는데......  

 

나무 그림들은 오히려 낯설다. 사소한 먹을거리에 가려 나무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리라. 아무리 큰 나무였더라도, 아무리 울창했던 나무였더라도, 아무리 화려한 꽃나무였더라도 내 어린 시절의 시야에 나무까지 잡히지는 않았으리라. 그때는 아직 어렸을 테니까, 가게 안이 더 궁금했고, 내 수준에 먹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가늠해 보는 게 더 절실했을 테니까. 번번이 그냥 스쳐 지나갔겠지만.

 

책, 예쁘고 예쁘다. 오래 두고 보고 싶다. 그때는 가진 게 없어 조금 쓸쓸하고 서글펐으나 지금은 그 기억까지 아끼는 사람들께 권한다. 긴 시간 잘 지내왔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y에서 옮김2017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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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
송경원 지음 / 바다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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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일, 소설을 읽는 일, 그리고 이것에 대해 글을 쓰는 일과 이것에 대한 글을 읽는 일.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짚어 본다. 어떤 것은 가깝고 어떤 것은 멀고. 나의 관심과 나의 취향과 나의 집착과 나의 사명에 의해 거리가 줄어들었다가 늘어났다가 한다. 나는 보고 읽고 쓰는 이 모든 과정이 좋다. 내가 가진 본성 중 하나라고 생각해 본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즐겨 보는 쪽이 아니다. 들여다보고 있고 싶지 않은 주제 의식이나 눈으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나 듣기 싫은 말이나 굳이 안 보고 싶은 배우를 거르다 보면 내가 볼 수 있는 영화가 별로 없다. 하루에 한 곳에서 세 편의 영화를 보는 게 퇴직 후의 꿈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포기 상태다. 시간이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없다. 내 취향의 영화 세 편을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상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헛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나? 싫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좋아하는 영화만 좋아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래서 본 영화를 보고 또 보는 일도 흔하다. 같은 감동을 다시, 몰랐던 자각을 새로 얻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여러 번 보았어도. 이만하면 내 건망증은 나의 특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보았는데 또 보아도 또 새롭고 재미있다면. 

정작 영화를 보지는 않으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읽는 일은 좋아한다. 내가 본 영화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내가 안 본 영화를 어떤 말로 이끌어들이려고 하는지, 작가는 얼마나 잘 보는 사람인지, 얼마나 잘 쓰는 사람인지,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는 과정이 심심하지가 않다. 하루에 세 편의 영화는 못 보더라도 세 편 이상의 영화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기도 하고. 

필사할 대목을 찾아가면서 읽었다. 어쩌면 나는 영화를 읽은 것이 아니라 작가를 읽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필사한 내용을 다시 읽어 보니 영화는 안 보이고 작가만 보였으니까. 마치 영화 안을 떠돌아다니는 작가를 찾아 다닌 것처럼. 영화는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이 그 영화를 작가가 어떤 눈으로 보고 어떻게 생각을 가다듬었는지 그게 보고 싶었던 것처럼. 

이 책을 내게 선물한 벗은 이 책을 통해 내가 궁금해질 영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점도 잊지 않은 채 글을 읽었다. 나는 어떤 영화를 궁금하게 여기고 마침내 보고 싶어 하게 되려나? 

책에 언급되는 영화 중 내가 본 영화 - 헤어질 결심, 탑 건 : 매버릭,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인셉션, 인터스텔라, 라라랜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괴물

쓰고 보니 정말 몇 안 되는구나 싶다. 영화 내용도 모르면서 나는 잘도 글을 읽은 셈이다. 답답하다거나 막막한 느낌은 없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읽으면 또 그렇게 된다. 그러면서 궁금해지는 영화가 있었어야 하는데, 이게 아쉽다, 붙잡지 못했다, 널리 알려진 제목의 영화조차도.

영화에 대한 내 기준이 확실해서 궁금증이 일지 않았던 것 같다. 세상의 크고 작은 문제나 고민이나 현상을 다루는 영화를 찾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조금이라도 심각해지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 오락, 즐거움, 환상, 도피, 망각... 정도로 충분하니까. 단순하고 또 단순해지도록, 영화를 보는 나는. 

대신에 나는 글을 읽었으니 만족한다. 영화를 보고 얼마나 아름다운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글을 쓸 수도 있는지를 알았다. 영화보다 글에 더 가까운 입장에 나는 서 있지만 영화 예술도 꼭 살아 남아야 한다고, 영화를 글로 쓰는 작가도 꼭 있어야 한다고, 간절히 바란다. (y에서 옮김202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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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9 2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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