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와 함께 - 작지만 우아한 식물, 이끼가 전하는 지혜
로빈 월 키머러 지음, 하인해 옮김 / 눌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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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묘사, 다정한 문장들을 읽었다. 중심 소재는 이끼라고 볼 수 있겠지만 주인공이 이끼만은 아니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 어쩌면 살아 있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사소해 보이겠지만 지금 이렇게 확장되고 있는 내 의식이 이 책 덕분이라는 것을 안다.


이끼를 연구하는 일은 사람의 의식을 연구하는 일만큼 가치 있다는 것도 알겠다. 우주의 비밀을 풀기 위한 연구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겠다. 어디 이끼뿐이랴.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하나 다 살아 있는 이유가 있고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헛된 착각으로 귀하고 천한 것으로 구분해 놓았을 뿐. 이끼에게서 끝없이 배우고 있는 작가의 태도가 괜히 존경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이끼를 모른다. 은이끼라는 것 하나 정도 겨우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조차 이 책으로 알게 된 것이지만. 이끼를 그려 놓은 그림을 보고 있어도 구분이 전혀 안 된다. 사진을 놓고 봐도 안 될 듯하다. 이끼 앞에서 나는 지극히 무지 몽매하다. 이끼에게 미안한 노릇이다. 이끼 하나 제대로 알아볼 수 없으면서 어떻게 지구를, 생명을 헤아린다고 할 수 있으랴. 나는 나조차 낯설기만 하다.


이끼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 이끼를 연구하는 작가의 열정, 이끼로부터 생명체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르쳐주는 작가의 충고가 더없이 고맙게 느껴진다. 보고 익혀서 깨닫게 해 주는 글이다.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끼의 특성을 전혀 습득하지는 못했지만, 읽으면서 그대로 넘기고 말았지만, 이끼를 대하는 앞으로의 내 태도가 달라질 것을 나는 안다. 이제 더 이상 발로 쓱 문질러버리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끼 너도 이렇게 버티고 있구나, 살아가고 있구나, 우리를 지켜주고 있구나, 말을 건네게 될 것이다. 제 이름을 기억 못하여 내 식대로 즉석에서 지어 불러 줄지도 모를 일이고.


새로운 시선, 애정어린 관심, 나이와 관계없이 늘 배우고 자라겠다는 의지, 나만 소중하다고 착각하는 이기심을 버리는 용기, 세상의 모든 개체들을 향해 존중하는 태도를 지니겠다는 다짐이 저절로 생겨난다. 내가 나를 칭찬하고 격려한다. 이 책을 잘 읽었으니 되도록 천천히 잊자고. 할 수 있다면 기억하고 살자고.

입으로 부르는 이름은 서로 잘 안다는 증거이므로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에는 달콤하고 비밀스러운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우리의 경계를 긋는 강력한 형태의 자결주의다. - P15

우리는 겉만 훑어보면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중간 척도에서 우리 시야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시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마음의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장치들이 너무 뛰어나서 우리는 맨눈을 믿지 못하게 되었을까? 아니면 기술이 없더라도 시간과 인내만 지니면 인지할 수 있는 것들에 우리가 무관심한 걸까? 세심함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망원 렌즈를 능가할 수 있다. - P23

내 세상과 다른 존재의 세상을 가르던 경계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험을 하면 겸허해지면서 즐거워진다. - P25

단어를 아는 것은 보는 법을 배우는 또 하나의 단계다. - P29

눈으로 잘 보이지 않더라도 친밀함을 쌓으면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 P32

올챙이와 포자, 난자와 정자, 나와 당신, 이끼와 개구리, 우리 모두는 봄이 시작되는 밤의 소리를 이해함으로써 서로 연결된다. 그것은 신성한 세상에서 삶을 지속하고 이끌려는 간절함이 우리 안에서 울려퍼지는 무언의 목소리다. - P54

이끼와 물의 상호관계.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이고, 사랑을 통해 스스로 나래를 펴는 방식이 아닐까?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향한 애정으로 형상화되고, 사랑의 존재로 확장되며, 사랑의 부재로 움츠러든다. - P75

교란 빈도가 평균적인 중간 지대에서는 매우 다양한 종이 균형을 이루어 번성한다. 어느 한 종이 독점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교란이 일어나면서 안정적인 기간도 충분하기 때문에 여러 종이 연달아 자리 잡을 수 있다. 군락마다 연령이 다양할수록 다양성은 극대화된다. - P117

숲이 교란에서 회복될 수 있는 건 다양성 덕분이다. 숲에 난 종류마다 적응하는 종이 다르다. 블랙체리는 흙이 노출된 중간 크기의 틈에 서식하고, 히코리나무는 자갈밭 위 작은 틈을 선호하며, 소나무는 산불이 난 뒤 잘 자라고, 줄무늬단풍나무는 병충해가 휩쓸고 난 뒤 무성해진다. 숲의 광경은 다양한 채도의 녹색으로 이루어진 미완성 퍼즐과 같고 빈틈마다 맞는 조각은 하나뿐이다. - P144

이끼낀 가로수는 대기질에 좋은 신호이고 이끼가 없는 가로수는 안 좋은 신호다. 어디에서든 발밑에는 은이끼가 있다. 소음과 공해가 가득하고 수많은 사람이 서로 밀쳐대지만 틈 사이마다 이끼가 있다고 생각하면 잠시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다. - P168

모든 식물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는 전통적인 세계관에서는 식물은 자신이 필요한 때에 필요한 장소로 찾아온다고 여겨진다. 식물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장소로 찾아간다. - P175

옛 스승들은 인간의 역할이 존중과 보호라고 말한다. 우리의 책임은 생명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식물과 땅을 돌보는 것이다. 우리는 식물을 사용하는 것이 식물의 본질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배웠고, 우리는 식물이 계속 자신의 재능을 선사하도록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 P186

과시욕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강력한 지배 행위다. 수집된 자연물은 자연으로 남을 수 없다. 자연물은 근원에서 멀어지는 즉시 본성을 잃는다. 어떠한 대상을 원래의 존재가 아닌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행위가 바로 소유다. - P230

이끼가 숲 공동체를 결합하는 호혜의 패턴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이끼는 필요한 만큼만 적게 갖고 크게 보답한다. 이끼는 존재함으로써 강과 구름의 삶, 나무, 새, 조류, 도롱뇽을 부양하지만, 우리는 존재함으로써 이 모두를 위험에 빠트린다. 인간은 설계한 체계는 보답하지는 않고 갖기만 하므로 생태계 건강을 지키지 못한다. 벌목은 단기적으로 한 가지 종의 요구는 충족할지 모르지만, 이끼, 알락쇠오리, 연어, 가문비나무의 정당한 요구는 묵살한다. 나는 우리도 가까운 미래에 언젠가 이끼처럼 자제하고 겸손한 삶을 살 용기를 갖게 될 거라고 전망한다. - P247

우리가 식물을 활용하고 그 재능에 감사하면 식물은 존중받고 그 결과 강하게 성장한다. 존중받는 한 우리 곁에 머문다. 하지만 우리가 잊으면 떠난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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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1 1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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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1 15: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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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더 무브 - 올리버 색스 자서전, 개정판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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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 작가가 쓴 <의식의 강>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다고 여기고 이 책을 한번 더 선택한 것은 내가 참 잘한 일이 되었다. 올해 책읽기와 관련된 일에서 제일 먼저 '참 잘했어요'를 주고 싶다. 


한 사람의 삶, 삶의 내용, 삶의 무게, 삶의 가치 등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한 사람 한 사람 따져 보아 세상의 어느 한 사람도 하잘것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반대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대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고 말해야겠다. 이 책의 작가와 같은 사람은 나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정녕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삶은 널리 알려 주는 게 맞는 것 같다.(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프레디 머큐리와 앨런 튜링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랐다. 위대하고도 애틋한 사람들.)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저절로 들 테니까.  


작가는 의사인 부모 아래서 자라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사람이다. 이 정도라면 우리 처지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출생과 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작가는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남보기와 달리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는 게 인생인 걸까. 안으로 밖으로의 어려움을 이겨 내는 과정에서 택한 의사의 길이 예사롭지 않다. 단지 성적이 좋아서 돈을 많이 벌 것 같아서 의사가 되려는 사람과는 본질이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다. 아마도 그래서 더 근사하고 매력적인 의사가 될 수 있었겠지만. 


아주아주 오래 전에 읽은 A. J. 크로닌의 <성채>도 생각났다. 그때, 진로 탐색 중인 어린 시절이었을 텐데, 나는 의사란 모름지기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소설의 주인공을 보면서 했다. 그리고는 나라는 사람은 의사는 못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같이 했다. 그때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오늘,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의사다운 의사를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벅찬 느낌이 든다. 이런 사람이 정말 살아 있었더란 말이다.  


의사가 글을 잘 쓰고 좋아한다면 좋은 일이 많을 것 같다. 우리에게도 글을 잘 쓰는 의사 작가가 몇 분 계시기는 하다. 그분들의 책을 흥미롭게 읽기도 했다. 이 작가 역시 의사이면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행운이다. 그의 글은 개인의 기록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으로서도 의학으로서도 가치가 있는 글을 쓰는 것, 이런 일을 지식인으로서의 숭고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질병과 삶을 이어 주는 이야기는 어떤 내용이든 호기심이 생긴다. 먼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내 가족에게,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언제 생길지 모를 병, 환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의 일상까지 망치는 병,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이하게 될 사소하거나 위험한 병, 그 중에 누군가 죽음과 가까워지는 병을 앓기라도 할 것 같으면 삶 자체를 한탄하게 되는 병, 병, 질병들. 병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되던가. 한없이 약해지고 초라해지고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지 않던가. 작가는 일생을 이 모든 과정 안에서 살아 움직였다. 다른 사람의 병뿐만 아니라 자신이 겪은 병조차도 기록을 하면서.


작가는 신경과 전문의다. 뇌질환 환자들에게서 일어나는 정신 변화의 많은 사례들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이 분야에 대한 내용만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이 겪은 질병과 경험들도 고스란히 담아 놓았다. 노르웨이에서 다리를 부러뜨린 후에 맞이한 변화나 눈이 아프면서 시력을 잃어가는 과정, 실연의 아픔 이후 등등 자신의 아픔마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아픔으로 읽을 수 있도록 써 놓았다. '내가 이만큼 아팠는데요, 그래서 나는 당신의 아픔도 알 것 같아요.'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  


좋은 사람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하거나 속이려고 하지 않고 당당히 인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길 줄 알고 이를 나누어줄 줄도 아는 사람,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삶에 바람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이바지하는 사람, 의사 작가인 올리버 색스와 같이. 


이런 자서전, 무척 고맙다.  (y에서 옮김2019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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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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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 책을 빌려 보게 되었는지 계기는 잊어버렸고, 읽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쓰인 리뷰가 많아 자꾸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고 읽기는 했는데 만족스러운 독서는 아니었다.  


의식이라든가 생각이라든가 마음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실체를 알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또 알게 되면 어떤 점이 좋아질까? 내가 내 의식의 흐름을 깨닫게 되고 나면 인식하지 못했던 때와 비교해서 무엇을 더 얻게 되는 걸까?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글과 그저 스쳐 지나가고 마는 글들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동안, 나는 대책없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내 의식의 강 위를 맴도는 기분이라면 결코 유쾌한 느낌은 아닌 것이다.  


지금은 다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일부 옮기고 싶은 글들은 붙잡아 놓았다. 이것만으로도 신기하다.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다른 책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라 조심스럽기만 하다. 아직 모자란다. 이것만큼은 알겠다. 내 의식의 강에도 깊고 넓은 자극이 더 있어야 하나 보다. 이 작가의 자서전을 한번 더 읽어 봐야 하나 어쩌나. (y에서 옮김20190127)

다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 미적인 면만 볼 게 아니라, 기능과 적응이라는 면도 감안해야 한다고 여겼다. 난초는 정원이나 부케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장식품일 뿐만 아니라, 자연의 뛰어난 솜씨와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자연선택의 힘을 보여 주는 사례였다. "아름다운 꽃은 창조자의 손길과 무관하며, 수십만 년에 걸쳐 축적된 우연과 선택의 결과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윈이 생각하는 꽃의 의미, 모든 식물과 동물의 의미, 적응과 자연선택의 의미는 늘 이런 식이었다. - P32

‘영겁의 세월’이라는 개념과 ‘하나하나는 작고 지향성이 없지만, 축적되면 새로운 세상(엄청나게 풍부하고 다양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변화’의 힘은 중독성이 있었다. 진화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신의 계획에 대한 믿음이 제공하지 못한) 심오한 의미와 만족감을 제공했다. 베일에 가려졌던 세상에는 이제 투명한 유리창이 생겼고, 우리는 그 유리창을 통해 생명의 역사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진화는 지금과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 즉 공룡이 아직도 지구를 배회할 수 있고, 인간이 아직 진화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삶은 더욱 소중하고 경이로운 현재진행형 모험(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것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우연이라고 불렀다)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삶은 고정되거나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며, 변화와 새로운 경험에 늘 민감하다. - P35

1837년, 다윈은 "종에 관한 문제"를 개인적으로 정리하던 노트에 계통수tree of life를 그렸다. 전형적인 가지치기 모양의 계통수에는 ‘진화와 멸종의 균형’이 반영되어 있는데, 다윈이 이 그림에서 강조한 사항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생명은 지속성이 있다. 둘째, 모든 생물들은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진화했다. 셋째,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유인원과 다른 동물들은 물론, 식물과도 관련되어 있다.(주지하는 바와 같이, 식물과 동물은 DNA의 70퍼센트를 공유한다. 그러나 자연선택의 위대한 엔진인 변이 때문에, 모든 종들은 독특하며 개체들도 역시 독특하다. - P36

진화는 중단되지 않고 반복되지 않으며 후진하지도 않음을 보여준다. 멸종은 취소할 수 없다는 것, 즉 가지를 자르면 특정 진화 경로가 영원히 상실된다는 것도 보여준다.

......

동물의 삶은 식물의 삶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인간의 삶은 다른 어떤 동물의 삶보다도 복잡하지만, 모든 생물은 각자 나름의 생물학적 의미를 갖는다. - P37


자연은 뇌를 만들기 위해 최소한 두 가지의 색다른 방법을 채택했다. 사실 동물계에는 문phylum의 수만큼이나 많은 뇌가 존재한다. 상이한 동물들을 갈라놓는 심오한 생물학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든 동물들은 나름 다양한 수준의 정신을 발달시키거나 보유하고 있다. 우리도 그런 동물들 중 하나일 뿐이다. - P88

기억은 고정되고 활기 없고 단편적인 수많은 흔적들을 고스란히 재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반응이나 경험들을 바라보는 전반적 태도’와 ‘이미지나 언어의 형태로 저장된 세부 사항’을 기초로 하여 상상력이 가미되어 구성되거나 재구성된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암기와 반복의 경우에도 기억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억의 정확성을 절대시할 필요는 없다. - P109

인간의 기억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취약하며 불완전하지만, 굉장히 유연하고 창의적이다. 출처에 대한 혼동과 무차별성은 역설적으로 큰 힘을 발휘한다. 어디 한번 생각해 보라! 만약 모든 지식에 출처가 표시된 꼬리표가 붙어 있다면, 우리는 종종 엄청난 양의 부적절한 정보에 압도당할 것이다. 출처에 무관심한 우리의 뇌는 ‘우리가 읽고 들은 것’과 ‘타인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쓰고 그린 것’을 통합하여, 마치 1차기억인 것처럼 강렬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고,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예술, 과학, 종교가 포함된 문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동정신에 참여하고 기여함으로써 보편적인 지식연방을 구성하게 된다. 기억은 개인의 경험뿐만이 아니라 많은 개인들 간의 교류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134

지능, 상상력, 재능, 창의력은 지식과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다. - P144

다양한 모델들을 받아들여 모방하지만 창의성이 부족한 교육은, 어린이들의 미래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게 바로 미술, 음악, 영화, 문학 등의 예술이다. 이러한 장르들은 어린이들에게 팩트나 정보뿐만 아니라 교육의 기회도 제공하는데, 아널드 웨인스타인은 이를 일컬어 "예술을 통해 타인의 삶을 간접경험 함으로써, 새로운 눈과 귀가 트인다"고 했다. - P144

진정한 독창성은 ‘기억과 차용’에서 ‘동화와 통합’의 수준으로 도약하는 잠복기를 통해 탄생하며, 이 과정에 관여하는 핵심 요인은 심오하고 의미 있고 능동적이고 개인적인 몰입이다. - P155

역동적으로 흐르는 의식은 다양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능동적이고 연속적인 바라보기 및 탐색하기’를 허용하고, 가장 높은 수준에서는 ‘현재와 과거의 지각 및 기억의 상호작용’을 허용한다. - P195

우리 인간은 언어와 자의식, 과거와 미래에 대한 뚜렷한 감각을 발판으로 하여 비교적 단순한 1차의식에서 고차의식, 즉 인간의식으로 도약했다. 인간의식은 모든 개인의 의식에 주제적으로나 개인적인 연속성을 부여한다. - P196

의식이란 늘 능동적이고 선택적이기 마련이므로, 나의 선택에 정보를 제공하고 나의 지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하여 모든 감정과 의미는 나 자신만의 독특한 것이 된다. - P197

의식의 밑바탕에 깔린 지각의 순간은 단순한 물리적 순간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개인적인 순간들이다.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프루스터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 자체는 사진술을 떠올리게 하고, 보르헤스의 강물처럼 서로 맞물려 흘러가지만, 우리는 전적으로 순간들의 집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 P198

우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려면, 뭔가를 순간적으로 파악하거나 알아듣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수용하여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에 맞닥뜨리도록 허용해야 한다. 즉,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잠재적 관련성이 있는) 정신공간과 범주를 만든 다음,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완전하고 안정적인 의식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것들에 개념적 형태를 부여하고 마음속에 보유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기존 개념, 신념, 범주와 상충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수용과 심적 공간 확보 과정은 ‘하나의 아이디어나 발견이 민심을 장악하여 결실을 맺을 것인가’ 아니며 ‘흐릿해지고 잊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사라져갈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 P220

자신이 갖고 있는 기존의 신념과 이론이 약화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심지어 끔찍한 과정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생활은 알게 모르게 이론에 의해 지지되며, 때로는 그 이론이 이데올로기나 망상과 같은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 P223

마술 같은 창조적 진보가 일어나려면 사전에 수많은 자율적·개별적 요인들이 어우러져야 하며, 그중 어느 하나만 존재하지 않아도(또는 불충분하게 발달해도) 마술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요인은 세속적인 것으로서 자금과 기회, 건강, 사회적 지원, 태어난 시기 등을 충분히 갖추어야 하고, 어떤 요인은 성격이나 지적인 장단점과 관련이 있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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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그 자리에 - 첫사랑부터 마지막 이야기까지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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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 지점에 이르렀다고 여길 때,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기록으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려서, 자라면서, 철이 들면서, 어른이 되면서, 어른에서 더 나이가 드는 사람이 되어 가면서 제 삶의 굽이굽이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은. 남보란 듯이 잘했던 일만이 아니라 어설프고 모자라고 부끄러운 지난 날마저도 내보일 수 있을 만큼의 용기와 당당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가능할 텐데.

 

이 작가의 삶을 따라 가다 보면 마냥 찬탄하게 된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얼마만큼의 용기를 얻는 기분도 든다. 세상이 좋은 곳이고 더 좋은 곳이 될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길 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이렇게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 작가가 있었던 세상이라서, 이 작가가 믿어 준 세상이라서,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나로서는 이 작가의 말과 당부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책은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첫사랑이다. 작가의 모든 첫사랑들. 취미와 책과 수업과 그에 대한 이야기들. 그래, 이런 것들이 이 작가의 생에서는 첫사랑이 되었더란 말이지. 이에 비해 내 첫사랑은 얼마나 얇고 남루한지, 떠올릴 게 별로 없어서 자칫 쓸쓸해지려고 했다. 위대한 사람은 철이 들기 전부터도 남다른 집중력으로 몰입하는 자질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괜한 질투심을 느낀 셈이다. 쓸쓸할 일이 아니다. 

 

2부는 병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 준다. 의사로서의 작가가 의사여야만 경험하고 알 수 있는 일들을 말해 주고 있으니 독자로서는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작가의 다른 책에서 본 내용과 비슷해 보이는 것들도 있었는데, 이건 내 기억력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어서 확신할 수는 없겠다. 읽었어도 모르는 건 여전히 모르는 거니까. 관심의 정도에 따라 2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3부는 정녕 우아한 산문들로 채워져 있다. 소제목마저 '삶은 계속된다'이다. 얼마나 아늑하고 듬직한 말인지. 요즘처럼 어수선한 시절에 그저 붙잡고만 싶은 구절이다. 한 편 한 편 아끼면서 읽었다. 이 중에서도 더욱 나를 머물게 했던 글은 '깨알 같은 글씨 읽기'와 '정원이 필요한 이유'다. 책과 정원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열망을 작가의 글에서 거듭 만난 듯하여 더없이 반가웠다.     

 

세상을 더 나은 쪽으로 바꾸려는 노력 중에는 두 가지 큰 방향이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좋은 것을 자꾸자꾸 발견하고 알려서 더욱 넓혀 가는 것. 또 하나는 나쁜 것을 자꾸자꾸 발견하고 알려서 없애는 데 힘을 쏟는 것. 이 작가는 앞쪽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남긴 글을 읽고 있으면 세상이 환해지는 느낌이 든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나도 앞쪽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작은 몫으로라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y에서 옮김20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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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일반판)
올리버 색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알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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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다. 4편의 에세이. 병으로 곧 죽을 것을 알고 있는 상태로 글을 쓰는 마음은 어떠할까. 한 달 두 달도 아니고 '곧'이라고 하는데 이런 때도 글을 쓰고 싶어질까. 글을 쓰는 게 죽기 전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될까. 나는 4편의 글을 읽는 짧은 시간 내내 작가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벅찼다. 그래, 이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이 작가의 능력 정도 되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몇 살이 되면 죽음을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나이가 있기는 한 걸까. 오래 살면 오래 사는 대로, 젊으면 젊은 대로 생을 향한 욕망은 간절하기만 할 테니, 죽음 앞에 초연하다는 태도는 어쩌면 위장일지도 모를 일이다. 무서워도 참는 것이겠지, 어쩔 수 없어 포기한 것이겠지, 그럴 수만 있다면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바람일 텐데, 나는 이제 이런 글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는 삶을 어떻게 가꿔 나가는가 하는 문제와 잇닿아 있다고 했다. 평온하다면 둘다 평온한 것일 테고 요란하다면 둘다 요란한 것일 테지. 죽음 앞에 서면 정말 어떤 마음이 들까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기만 한데, 요즘처럼 매일매일을 나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살다 보니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같은 태도에서 비롯되는 일임은 알겠다. 물론 죽음을 아는 것과 죽음에 부딪히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겠지만. 

 

작가가 남긴 마지막 글들, 애틋하다. 이렇게 남겨 놓아 줘서 고마운 마음이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는 게 아니고 '나 이렇게 살아서 좋았다'고 하니 나도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게 그저 고맙다. 살아 있다는 게 이토록 고맙고 고마운 일인 것을, 주변에 있는 병든 영혼들의 악다구니는 끝날 날이 있을지. 적어도 이 작가보다는 더 겸손해져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y에서 옮김20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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