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독히 다행한
천양희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나는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쓴다(133쪽)'고 시인은 말한다. 나도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읽는다고 말하련다. 이 시집 속 어느 한 편 허투루 읽지 않도록, 세심하고 다정하며 쓸쓸하기도 한 시심 가득 담아 놓은 시들 뒤편에 시인은 자신의 산문까지 실어 놓았다. 왜 시를 쓰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면서, 자신이 그리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받아 안아 줄 독자를 기대하면서.
아무 쪽이나 펼쳐도 좋은 시집을 오랜만에 본다. 마음에 콕 와 닿는 구절들을 옮겨 보겠노라 내내 연필을 들고 있었지만 끝내 아무 곳에도 줄을 긋지 못했다. 그으려면, 옮기려면, 결국 시집 한 권을 통째로 긋고 옮겨야 할 듯해서였다. 시집 제목처럼 '지독히 다행한' 만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시집에는 유달리 '바람'이 많이 불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산도 물도 길도 모두 바람 아래 있는 듯하다. 덕분에 '바람아래해변(46-47쪽)'이라는 시를 다른 시들보다 더 들여다보게 된다.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이 좋아서, 이 시간을 만들어주는 시가 좋아서, 이 좋은 시를 만나게 해 준 시인이 좋아서, 나는 또 하염없어진다.
그리고 또 한 편 더. '의외의 대답(94-95쪽)'이라는 시. 의외의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시인의 마음이 와 닿는다. 이렇게 살았을 것이라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이라고 믿는 데에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는다. 짧은 시 한 편으로도 사람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겠다는 경험을 자주 겪는 건 아니다. 횡재한 기분이다.
무엇보다 어렵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설사 시인이 어려운 마음을 담았다고 해도, 그래서 어렵게 읽어 주기를 바랐다고 해도, 나는 쉽게 읽고는 깊이 빠졌다가 오래 머물렀다.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고. (y에서 옮김20210717)
두 편을 천천히 옮겨 본다.
46-47
- 바람아래해변
물을 좋아하는 너와
바람을 좋아하는 내가
물처럼 살 수 없고
바람처럼 가벼울 수 없을 때
너보다 더 낮은 곳에 물이 있고
나보다 더 높은 곳에 바람이 있다는 걸
바람아래해변에 가서야 겨우 알았다
바람은 해변 아래서만 불고
물은 해변 아래서만 흘렀다
어떤 이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물이라 하고
누구는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것이 바람이라 하지만
바람아래해변에선
모든 것이 바람 아래라는 것을
바람아래해변이 말해준다
바람이 불지 않고는
어떤 생각도 밀물처럼 밀려오지 않고
바람 없이는
어떤 후회도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는
바람아래해변에서
바람을 맞고도
너와 나는 물처럼 하염없다
94-95
- 의외의 대답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말보다 침묵으로 말하겠다
강변에 나가 앉아
물새야 왜 우느냐 물어보았던 것
나는 왜 생겨났나 생각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흘러가는 말로 다시 말하겠다
강가에 서서
그냥 미소 짓고 답하지 않는 노을을 오래 바라보았던 것
나는 왜 사나 알아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는다면
사람의 말로 거듭 말하겠다
무릎 꿇고 앉아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던 것
나는 왜 사람인가 물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끝까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끝까지 묻는다면
마지막 남은 나의 말로 끝까지 말하겠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 살려주고 떠나는 것
다시는 몸 받지 않겠다며
나를 잃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