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한마리
양성우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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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양성우 시인의 시 구절이 맴돌았다. 오래 전에 외웠던 시인데 '남모르게 숨긴 칼 허공에 휘두르며'로 시작하는 "믿음 때문에"라는 시였다, 고 확신하고 있었다. 혹시 싶어 인터넷 공간에서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더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시집을 샀다. 혹시 비슷한 구절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시집이 오래 되었던가, 종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물론 시를 읽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했지만. 이런 경우 새책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쪽이 아니라 이런 책이라도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시집조차 얻지 못하게 될까 하여. 


시인의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다 싶다. 여전히 힘있고, 여전히 밝고. 힘들고 고단한 세상에서 기운 내어 살아가자고, 혼자가 아니라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우리가 있으니 서로가 함께 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고 하면서. 너무도 기막힐 때는 잠깐 절망스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그래도 하면서 토닥여 주고 어루만져 주는 시어에 매달리게 된다.


애써 끌어모으고 싶다. 나자빠지지 말고 물러서지도 말고 적어도 버티고는 있어야 할 시절이다. (y에서 옮김20150301)

사람의 모든 시간이 물처럼 흐르지만,



그것이 어딘가에 문득 머물기만 한다면



거듭하여 쓰러진 자에게도 희망은 있다. - P12

내 안의 아름다운 너를 보낸다.



......



빈 들을 건너 반짝이는 물끝 너머로



내 안의 눈물겨운 한 사람



너를 보낸다. - P13

물 밑에 물이 흐르고.



이미 흔적도 없이 아득히 사라진 꿈 뒤에도



또다른 꿈들이 따라오는 것을.



홀로 묶인 빈 뱃전엔 밀물이 들면 떠나리라. - P19

저 가을 나뭇잎들이 그 자리에 또다시



피어나기 위해서 떨어지는 것과는 달리,



사람은 한번 헤어진 뒤에는



처음처럼 다시 만나기 어렵다. - P23

오늘 하루 나 혼자 내 그림자를



밟는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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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ㅣ 문학동네 시인선 113
유강희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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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읽은 시집이 아니다. 쓰여 있는 시어들 중 많은 것들에 걸려 비틀거렸다. 날것의 말, 험한 말, 센 말, 가시로 다가오는 낱말들, 문장들. 나는 아무래도 여리고 약하고 동글동글한 시어들을 좋아하는 데에 멈춰 있는 것 같다. 나아가지도 깊어지지도 못한다. 어쩔 수 없다.  

희망을 별로 못 봤다. 시집의 제목들이 대체로 역설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기대하다가 그러면 그렇지, 확인하게 된다. 세상에 어떤 고백이 희망을 전할 것인가, 고백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고민과 주저와 두려움이 담겨 있는 것을. 그럼에도 해야 해서, 마지못해, 억지로라도, 끝내는 살아야 해서 하는 말이 고백인 것을. 

내가 즐겨 읽는 취향의 구절을 몇몇 얻었다. 덜 힘들었다. (y에서 옮김20241022)


<지난해 겨울 평산책방에서 구한 시집>

까치 혼롓날을 알려줄 꿀벌은

언제쯤 바람의 페달을 밟고 날아오나 - P13

도토리 귀를 슬쩍 잡아당기면

숲의 가장 안쪽 물결이 인다 - P19

그늘보다 그늘 아래 물보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줘 - P37

어떤 저녁은 겸재의 그림처럼 한 산이 한 산을 껴안고 간다 - P66

라일락, 구름의 주소가 많은 스무 살

저 나무는 어디를 건너왔나

땀방울이 몽글몽글 피어났네

향기가 수치가 되는 날들 지나왔네

지치지도 않은 절망,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처럼

햇볕의 상처를 보여주는

모서리 딛고 네가 걸어오네

내 앞에서 한번 웃어주지 않겠니?

내가 열 수 없었던 눈물의 섬들

봄비가 대지의 틈을 꿰매듯

라일락, 너무 많은 모음과 자음

나는 어떻게 저 위를 지나가나 - P102

아버지의 단단한 눅은 마음결이

밤의 흰 속살을 밀고 가는

작은 칼의 굳은 입매를,

그 빛나는 밤의 종교를

나는 또 얼마나 닮고 싶은

것일까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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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수수밭 ㅣ 창비시선 122
천양희 지음 / 창비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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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밭을 이미지로 찾아 본다. 많이 본 듯한 풍경이지만 아마 실제로 내가 본 적은 없을 것이다. 봤더라도 그게 수수밭인지 몰랐을 테니, 못 본 것이나 다름이 없고. 마음에 수수밭이 있다면, 혹은 마음에 수수밭을 가꾸고 있다면, 그 마음은 어떠할까. 수수밭을 모르니 마음까지는 더 모르겠고. 그럼에도 시집 제목과 같은 첫시는 뭔지 모를 스산함으로 마음을 때리고. 


시인은 1942년생,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책은 1994년판이다. 꽤 오래 전 책인데, 내가 사 놓고 정리를 안 한 건지, 선물로 받은 책인지 알 수가 없다. 개정판이 나와 있으니 아직도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있는 시집인 모양이다. 이 시집이 나올 때쯤의 시인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막 구한 기분으로 시집을 읽었다. 


전체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 있는 시들이 좋다. 15편인데 고르게 나를 울린다. 이렇게 계속 좋으면 어떻게 하지 싶었는데 2부로 넘어가면서는 덜해졌다. 시를 읽는 마음의 간격이 커져 버려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안 읽히는 이유를 대느라 고민하지 말고 잘 읽혀서 와 닿는 시들을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 길 위에 서 있는 시의 화자를 동경하는 마음이 큰 듯하다. 1부의 시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어딘가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구체적인 지명을 향한 길도 있고 막연하게 꿈꾸는 길도 보인다. 길을 가는 생 앞에 서서 망설였다가 걷고 머뭇거렸다가 내딛는 화자의 의지가 애틋하다. 비슷한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내가 이러고 있었던 것 같아서. 


반백년을 넘게 살아도, 어른이 된지 한참이 지났다 싶어도, 여전히 생의 길은 첫길이다. (y에서 옮김20201225)

가지 않은 길 하나씩 품고 있는 한줌 기대와 기대 속에 묻힌 한 그루 추억의 푸른 나무 - P13

빠른 길만이 앞선 것은 아니다.

- P16

앞길은 언제나 막막한 것일까. - P24

나는 지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었노라던 말라르메의 그 말이,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던 김수영의 그 말이,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던 랭보의 그 말이,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소라던 브로드스키의 그 말이, 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떻게 알겠느냐던 니체의 그 말이,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던 발레리의 그 말이…...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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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89
이재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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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릴 때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남은 일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 나로서는 시골도 도시도 아닌 소도시에서 자란 탓에 어릴 때의 추억이란 게 참 없는 편이다. 고작해야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운동장이나, 집 앞의 길에서 놀았던 게 전부이니까. 때문에 시골아이들처럼 풀이나 꽃이나 나무나 벌레에 대해서도 거의 모르고 자랐고, 그렇다고 도시의 아이들처럼 문화의 혜택을 누렸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점을 생각한다면 나의 어린 시절은 정신적으로 참 가난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란 사람을 부러워하는 편이다. 들꽃이름이나 나무이름을 잘 아는 친구들, 동네 냇가에서 놀면서 저절로 헤엄을 배웠다는 친구들, 곡식들이 어떻게 익어가고 과일이 어떻게 열리는지 아는 친구들, 물과 산과 언덕을 친구로 삼고 있는 친구들이 자라면서도 참 부러웠던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오로지 학교에서 배우는 책을 통해, 기껏 책 속의 사진을 통해서만 보고 외워야 했으므로, 나에게 있어 시골은 또다른 별나라였다.

크면서 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골을 고향으로 둔 시인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들은 어찌 그리 끝도 없이 고향을 노래할 수 있는지, 나는 부러움 반 시기하는 마음 반으로 시골노래들을 넘기곤 했다. 완전히, 내 마음 깊은 곳까지는 도저히 와 닿아주지 않은 채 떠나버리는 싯구들이었다. 얼마나 오래 안타까워하면서 살아왔는지.

이재무의 이 시집에도 시인의 시골 고향이 가득 담겨 있다. 아직도 내게는 글자로만 왔다가 부딪힐 뿐, 실체로 잡히지는 않는 무수한 시골살림살이 시어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 이런 류의 시집을 읽을 때와는 내가 좀 달라진 것 같다. 그 때만큼 낯설지가 않다. 시골에서 산 지 3년이 되어 가면서 나도 모르게 시골을 익혀 가고 있나 보다. '텃밭 가득 달빛 푸른 푸성귀들'(40p)이나 '등허리엔 소똥 같은 땀방울 흘러내려/ 내를 이룬다 숨이 차'(57p) 하는 모습이나 '저물 무렵 밭둔덕에 외로이 서 있는/ 늙은 감나무와 나란히 서서/ 인생의 황혼을 억세게 갈무리하시는/ 아부지의 등허리'(72p)가 이토록 가깝게 여겨진 적이 없었으므로.

시를 짓는 일이나 시를 읽는 일이나 거기서 거기일까. 아니면 시를 잘 쓰지 못하는 대신에 시를 열심히 읽고 살 수 있도록 베풀어주신 은혜를 제대로 입은 것일까. 이 시집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또 어찌 나의 이러한 변화를 깨달을 수 있었으랴. 하여 시골을 고향으로 두지 못했던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으니 너무 속상해 할 일은 아니겠으나, 이제라도 시골의 삶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니, 무엇보다 이 시집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으니, 나는 또 이 시집에 고마움을 가져야겠다. (y에서 옮김20010805)

[인상깊은구절]
강 복판 속을
산맥처럼 우뚝 서서
달리는 물줄기를 보고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면서
어디든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금세 마음은 변덕을 부려
갓 걸음 배우는 아이처럼
서툴게 걷고 있는
여리고 부드러운 물살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고구마순처럼 유순해지며
소홀했던 소중한 작은 약속들
수면 가득 떠올라온다
역사 이래 계절의 꽃 피워온 것은
강기슭에 볼 비비며 걷는
작은 물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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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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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 지 꽤 시간이 흐른 시집이다. 이따금 보았을 테고 잊었던 건 아니었을 텐데도 리뷰를 쓰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지, 작정하고 다시 넘겨 본다. 읽었다는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당연히 기억에도 없는 페이지들이다. 작가에 대한 내 관심으로 비추어볼 때 이건 좀 난감한 상황이다. 이럴 수도 있지, 매번 모든 작품에 내가 다 반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한 줄이라도 건지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읽으니 선뜻 다가오는 구절들이 있다. 이만큼이라도 만족이다. 


3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2부에 실린 시들의 제목 혹은 소재가 돋보인다. 음식 이름이나 음식 재료들이다. 그래, 이런 소재로도 시가 되는 것이었어. 산문이나 소설로만 맛볼 수 있는 게 아니었잖아. 그러나 좀 어색하다. 아직 확 끌리지 않는다. 줄글에서와 달리 읽는 맛도 모르겠다. 음식이 낯설어서 그럴 수도 있고, 낯선 음식이 아니라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음식을 이용해 부르는 시인의 노래에 내가 흥을 느끼지 못한 탓일  수도 있고. 나 혼자만의 거리감일지도.  


그리고 시집 전체에서 어머니를 향한 간절함 그리고 철없는 그리움은 확실하게 보인다. 어머니 앞에서는 나이가 아무런 장비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어머니, 어머니의 애틋한 삶, 어머니의 지극한 자식 사랑, 어머니 앞에서는 그저 어린 목숨일 뿐이니. 또 이렇게 시집 한 권을 건넌다.  (y에서 옮김20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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