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 시인선 489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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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이라는 것을 채 배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접하게 되는, 어릴 때의 어떤 경험은 일생을 함께 하는 놀이가 되기도 하고 직업이 되기도 하고 꿈이 되기도 한다. 내게는 '시 쓰기'가 그런 경험 중 하나다. 돈이 들지 않는 취미이자 특기가 될 수 있었던 시 쓰기, 한때 시인이 아니었던 어린이는 없었다는 말까지 있고 보면 어려서 참 쉽고 다정하게 접할 수 있었던 게 시이기는 했다. 그랬는데 어쩌다가 우리는 시를 읽고 시를 쓰는 마음을 놓치고 말았던 것일까. 그리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일도 아닌데 말이다.

 

앞서 나온 작가의 시집을 읽었고, 어렴풋이 괜찮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기억이 있고(내가 쓴 리뷰를 다시 확인해 보니 망설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시집도 읽어 나가면서 괜찮구나, 괜찮구나, 잡히는 구절도 많구나, 좋게 중얼거렸다. 다만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면서 이 반가움이 줄어들더니 4부에 이르자 '흠, 내 취향과는 멀어졌는데?' 하기에 이르렀다. 그럴 수도 있지. 앞선 반가움만 해도 어디랴. 이만큼이면 만족스러운 시집인 거지.

 

나는 시인이 쓴 구체적이지 않은 표현, 몽롱한 표현이 더 좋다. 생활에 가까운 표현일수록 읽기에 쑥스럽다. 내가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어서 거북함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굳이 이 시인의 작품에서만 이런 기분을 갖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생활에서 아주 멀어진 관념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가운데쯤, 생활과 이상의 가운데쯤에서, 만남과 이별의 가운데쯤에서, 현실과 기억의 가운데쯤에서 떠돌고 있는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땅과 하늘의 가운데쯤에 있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대신이라고나 할까? 어중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도, 어중간하니 도리어 아무것이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이 더 크다고 우기고 싶을 만큼.  

 

잊고 싶고 잊혀지고 싶은 계절이다. 그 대상이 특별한 몇몇이라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들도 이제부터는 부디 나를 잊어 주기를.  (y에서 옮김20170921) 

당신은 어떤 과거를 보관하기 위해 모든 것에 옷을 입히고 싶어 하는가. 나 또한 고요한 것은 진실 이전의 일이라 믿는다. - P13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 P16

아무 데서나 황야를 생각한다 - P18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어서 퍽 안심이 됩니다 - P21

사는 것은 늘 지루한 혼잣말 - P28

잊혀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봄날 내 가슴에 처음 온 꽃잎으로 피었다가
오는 비 가는 세월에 남김없이 스러져
저물어간다는 건 - P44

아무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닌
그러나 그 모든 것이어서 슬펐던 날들을
기억해야지 - P47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 P48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 P49

세상에 너만 남겨져
혼자서 아프라고 햇빛 비추는 것 아니다 - P51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가득 찬 목숨 안에서 당신 하나 여의며 사는가 - P63

우리가 살아서 서로의 옛날이 되고
옛날의 사람이 되어서 결국 옛날 애인이 될 것을
그날 하루 전에만 알았던들 - P125

아주 지는 꽃
끄트머리처럼 내 그늘이 밝았다 - P127

그러니 잘 지나간 것들은 거듭 잘 지나가라
나는 이제 헛된 발자국 같은 것과 동행하지 않는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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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시요일
강성은 외 지음, 시요일 엮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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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큐레이션 앱 '시요일'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집을 빌려 읽었다. 책은 2018년에 출간되었고 나는 몰랐다. 내가 시의 세상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이것저것 다 몰랐다는 것이 무안해졌다. 아직도 한참 더, 자주, 많이, 진심을 다해서 시를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좀 나아졌다.


사랑시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들의 출전을 보니 1987년의 작품부터 2018년 사이의 작품들이다. 기획하고 편집한 이들의 수고가 어렴풋이 잡힌다. 읽고 또 읽고 고르고 또 골랐겠지. 한 사람의 독자라도 더 이 시들을 읽어 주기를, 한 사람의 작가라도 더 독자에게 가 닿기를 비는 마음이었겠지. 내가 생각하는 의도이지만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렇게 읽으니 좋았다고, 지나가버린 나의 서툴렀던 사랑을 잠시 애도했다고, 그때도 지금도 사랑 앞에서는 딱딱한 마음이 한없이 풀어지고 있다고. 


편집에서 내 취향과 살짝 어긋났다. 나는 시마다 내 마음에 드는 시행을 찾아볼 작정을 하고 펼쳤다. 그랬는데 편집 측에서 시의 제목 아래 시 속에 있는 1~2행을 이미 뽑아 실어 놓은 것이었다. 방해가 되고 말았다. 이를 손으로 막고 시를 읽고 나의 시행을 골랐다가 편집 측과 같은 구절인 것을 계속 확인하자니 재미가 영 떨어졌다. 나는 나대로 타이핑을 하면서 좀 더 긴 시간을 머물러 있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냥 따라하는 것은 또 아니지 않겠는가.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혼나지 않는다고 하니 사랑이 힘든 이들에게 이 시집을 권하는 마음이다. 요즘에도 사랑을 하기는 하나? 이런 고리타분한 의심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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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시인선 548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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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이의 말이나 글이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할 때가 바로 나이 드는 때일까? 점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야기, 이를 가깝게 느낀다고 의식하는 내가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이 시집도 이런 마음으로 보았다. 시도, 시를 쓰는 이의 마음도, 시를 읽고 있는 내 마음도 조금씩 평온에 가까워지는 듯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시인의 시집. 많은 글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시는 여지껏 외우고도 있다. 젊은 날의 시와 나이 든 날의 시에 차이가 있다면 있고 못 찾는다면 또 못 찾겠지만 읽는 내 의식에서는 두 줄기로 흐른다. 낯익은 표현과 낯설어서 반가운 표현들로. 시인과 독자는 이렇게 만나 한 시절을 공유하는 셈이다. 고맙게도 오랜 시간이다.


하루하루, 지금 현재, 과거나 미래 말고. 종종 듣는 말이다. 걱정도 미리 당겨서 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 나이 드는 것에 마음이 열려 있는 내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시집이다. 시인의 마지막 시집이 아니기를 온 마음으로 빌어 본다. (y에서 옮김20230116)

같이 발 묶인 그만그만한 배들을 내다보는 불빛. - P11

앞서간 삶보다 뒤에 남은 삶이 더 버겁습니다. - P13

나뭇잎은 대개 떨어지기 직전 결사적으로 아름답다. - P16

뭘 이뤘다고 다 제 게 되는 게 아니다.
남기면 남의 것 되고 모자라면 내 것 된다. - P19

그 어디서고 삶의 감각 일깨워주는 자에게
죽음의 자리 삶의 자리가 따로 있겠는가? - P25

인간도 힘 거머쥔 자의 비위 거스르지 않으려면
가지 자르고 동그래져야 하는가? - P30

어디서 흘러오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게 된 나날 가운데
이 하루,
무지개 같다. - P41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다 된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아팠던 일 - P44

잘못 놓인 소품 하나마저 눈에 띄게 해다오 - P45

이 세상에 눈물보다 밝은 것이 더러 남아 있어야
마감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견딜 만한 한 생애가 그려지지 않겠는가? - P53

베고니아, 너는 지금 조금도 눈부시지 않는 세상을
눈부시게 내다보고 있다. - P56

늙음은 슬픔마저 마르게 하는지
생각보다 덜 슬픈 게 슬프다. - P61

살아 있는 것들이 순서 없이 너도나도
가진 것 안 가진 것 다 꺼내놓는 이 봄날, - P68

언젠가 기쁨, 아픔, 영글다 만 꿈 같은 거 죄 털리고
반딧불보다도 가벼운 혼불 될 때
슬쩍 들러붙어 하얗게 탈 빈집 처마 같은 걸 찾다가
내가 왜 이러지? 홀연히 꺼지기 딱 좋은 곳. - P99

뒤처져 날면 마음 되게 시릴 텐데. - P134

돌이켜보는 청춘은 늘 찡하다.
삶에서 추억이 제일 더디 가는가? - P142

꽃, 열매, 텅 빔, 이 세 자리를
하나같이 손보는 시간의 손길,
어느 한둘만 보고 삶을 꿰찼다 할 수 있겠는가? - P144

예술은 보여줘야지 가르치려 들어서는 안 된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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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572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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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제목이 퍽 인상적이다. 이 구절만큼 마음이 멎는 다른 구절을 얻지 못했다고 하면 이건 다행인 것일까 섭섭한 것일까. 봄날의 괜히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으려 들여다본 시들, 이만해도 되었다는 생각이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일상을 돕는 기운을 얻는 데에 시를 읽는 일만한 게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종종, 할 수 있다면 자주 시집을 열고 그의 시를 읊어 보려고 애쓰는 편인데, 이렇게 마음 설레는 순간을 자주 맞이했으면 좋겠다. 시집을 덮고도 웅얼거리는 시의 구절이 남아 있기를, 외운 시 구절에 내가 보내는 시간이 겹쳐 흐르기를, 시를 찾는 내 의욕이 줄어들지 않기를. 


낯선 시어를 자주 본 느낌이다. 내가 잘 모르는 낱말을 보게 되면, 우리말이 아닌 경우 더더욱, 새로 뜻을 찾아 보아야 하기도 하고, 과정도 내 속 사정도 답답해서 그만 포기하곤 한다. 내가 앞으로 더 알아야 할 낱말들은 얼마나 많을까?


2014년 세월호에 희생된 이들을 그리며 쓴 시들은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잊지 않게 해 주어 고마울 따름이다.   (y에서 옮김20230410)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 P10

하루나 이틀쯤 모자라는 슬픔이 - P16

간지러워 나무들은 재채기했네 - P41

내 사랑
한 줄로 된 현악기
울리거나 멈추거나 - P50

너는 얼마나 멀리 날아갈까
네 몫의 어리석음으로부터 - P58

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 봉투도 비밀도 없이. - P75

모든 이가 어느 다락방에 쌓인 낡은 몰락의 일종이었음이 문득 자연스러워지는 오후 한때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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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521
류인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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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이끌려 뽑은 시집이다. 이 놀이터는 어떤 놀이를 하게 해 줄 것인가, 궁금증과 기대감을 품고 읽었다. 읽다가는 반갑게도 군데군데 머물면서 놀았다. 어떤 놀이는 이유도 모른 채 빠져들게 만들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기분으로 다 헤아리지는 못하겠구나 싶으면서도 옮겨 보았다. 문장 하나하나의 결이 읽는 순간의 나를 끌어당겼다. 이만하면 족하지 않느냐고, 이만해도 충분하다고. 


그렇다고 해도 한 권의 시집에서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의 전문을 얻지 못하면 퍽 섭섭하다. 시인과의 만남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느낌이 드는 탓이다. 문장들 여럿보다는 온전한 한 편의 시가 더 나을 때가 많은데. 시인이 펼쳐 놓은 길들이 군데군데 막혀 있는 듯, 내 쪽에서 열기만 하면 되도록 숱한 잠금 장치가 내 앞에 보이는데도 열지를 못한다. 누구를 탓하랴.  


거북한 느낌으로 읽게 되는 시어들이 많이 보인다. 강하고 거친 단어들과 이 단어들이 빚는 험한 세상으로는 다가설 마음이 안 난다. 나는 여전히 시 속에서 보호받고 싶은 성향이 강한 상태다. 그 어디에도 부딪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옮겨 놓은 구절을 다시 읽어 보니 이 시집의 가장 여린 대목들만 데려온 것 같다. 낯부끄럽게도.   (y에서 옮김20210318)



너도 잠수부처럼 배를 버리고 물결치는 물의 어둠 안으로 들어간다. - P9

간혹 밤의 라디오가 구워주는 음악 편지가 빵 속보다 촉촉하다 - P10

흙 아래 작은 꽃 피우는 젖은 눈이 있다 - P13

나는 마음의 육체성을 따라가보려 한다.
느린우체통에 맡긴 엽서 걸음일 테다. - P15

데워진 모래는 한결 기분이 좋다 - P18

바람은 어디서 바람과 만나 기다리는 바람을 낳나 - P24

일몰이 비껴가는 창에서 하루 중 풍경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을 조작한다 - P38

떠날 수 있는 이의 행장은 가벼우리.
무거운 것은
먼지와 고요, 햇빛.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 꾼 적 있는 꿈을 다시 꾸는 일. - P54

골목은 골목에서
간신히 놀고 있네
소실점을 얼굴에 둔 그림처럼 눈동자 안으로
흔들리며 걸어가는 골목들 - P68

얼음의 날씨를 열며 닫으며
고요의 회복기를 고요와 함께 견딜 때
날개가 품은 바람길을 빌려주던 창문, 해변들 - P77

거리에는 언제나 기억을 가리기 좋을 만큼 어둠이 있다 - P94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걸어서 오오
오늘은 오늘로부터 걸어서 오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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