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제2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ㅣ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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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작가의 시를 읽으면 기분이 서서히 좋아진다. 어디 먼 데 있는 환상도 아니고, 도무지 모를 의식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것도 아니고, 내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 그게 아무리 지독하더라도 그것마저 포근하게 품는 마음과 무엇보다 나날의 생활이 다정한 말들로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힘든 생을 마치는 생명을 다루고 있을 때마저도.


넓게 보면 지구에 인간만 사는 것도 아니고 인간과 더불어 살든 그저 저희들대로 살든 살아가는 생명체들은 무수하고 인간은 한 종일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인 우리 존재는 서로에게 또 다른 대상을 향해 얼마나 나쁜 짓들을 많이 하고 사는 것인지. 저 살자고 하는 일만도 아니면서. 나는 시 한 편 한 편을 읽고 넘기면서 시인의 눈을 좇아 내 주위를 살핀다. 말랑말랑한 힘으로 살아가는 애틋한 목숨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말랑말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쭉 곧고 단단하기보다 더 힘든 일이 말랑말랑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지난 날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다고 해서 아는 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님 또한 알고 있어서 일상은 고단하다. 고단해도 살고, 살아야 하고, 살 수밖에 없겠지만, 말랑말랑해지기를 바라면서.  


나온 지 시간이 꽤 된 시집인데, 유독 한 편의 시가 돋보인다. 괜히 '지장보살'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하필 오늘이 대통령 선거일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 것일까. (y에서 옮김20220309)




86-87



  [기호 108번]



국민들을 위한다면



국민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말을 팔았으면



아무리 최선을 다해 일을 하셨어도



진정 국민들을 위하였다면



자신이 부족하였음을 느끼셨을 텐데



부족하여



미안하여



재산을 다 헌납하시거나



아무도 모르게 선행으로 다 쓰셨어야 옳았을 텐데



재산이 늘었다니요!



잘못 전달된 거겠지요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 재산을 늘린 분들이 계신다면



대통령님이시거나, 국회의원님이시거나, 검사님이시거나,



도지사님이시거나, 시의원님이시거나, 농협장님이시거나,



다 개새끼님들 아니십니까



국민들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말을 파신 분이나 



말을 파실 분은



중생들이 다 극락왕생할 때까지



성불하시지 않겠다는



기호 108번



지장보살님 꼭 한 번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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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 다행한
천양희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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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쓴다(133쪽)'고 시인은 말한다. 나도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읽는다고 말하련다. 이 시집 속 어느 한 편 허투루 읽지 않도록, 세심하고 다정하며 쓸쓸하기도 한 시심 가득 담아 놓은 시들 뒤편에 시인은 자신의 산문까지 실어 놓았다. 왜 시를 쓰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면서, 자신이 그리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받아 안아 줄 독자를 기대하면서.   


아무 쪽이나 펼쳐도 좋은 시집을 오랜만에 본다. 마음에 콕 와 닿는 구절들을 옮겨 보겠노라 내내 연필을 들고 있었지만 끝내 아무 곳에도 줄을 긋지 못했다. 그으려면, 옮기려면, 결국 시집 한 권을 통째로 긋고 옮겨야 할 듯해서였다. 시집 제목처럼 '지독히 다행한' 만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시집에는 유달리 '바람'이 많이 불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산도 물도 길도 모두 바람 아래 있는 듯하다. 덕분에 '바람아래해변(46-47쪽)'이라는 시를 다른 시들보다 더 들여다보게 된다.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이 좋아서, 이 시간을 만들어주는 시가 좋아서, 이 좋은 시를 만나게 해 준 시인이 좋아서, 나는 또 하염없어진다.    


그리고 또 한 편 더. '의외의 대답(94-95쪽)'이라는 시. 의외의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시인의 마음이 와 닿는다. 이렇게 살았을 것이라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이라고 믿는 데에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는다. 짧은 시 한 편으로도 사람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겠다는 경험을 자주 겪는 건 아니다. 횡재한 기분이다.  


무엇보다 어렵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설사 시인이 어려운 마음을 담았다고 해도, 그래서 어렵게 읽어 주기를 바랐다고 해도, 나는 쉽게 읽고는 깊이 빠졌다가 오래 머물렀다.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고. (y에서 옮김20210717)


두 편을 천천히 옮겨 본다.



46-47

- 바람아래해변



물을 좋아하는 너와



바람을 좋아하는 내가



물처럼 살 수 없고



바람처럼 가벼울 수 없을 때



 



너보다 더 낮은 곳에 물이 있고



나보다 더 높은 곳에 바람이 있다는 걸



바람아래해변에 가서야 겨우 알았다



 



바람은 해변 아래서만 불고



물은 해변 아래서만 흘렀다



 



어떤 이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물이라 하고



누구는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것이 바람이라 하지만



 



바람아래해변에선



모든 것이 바람 아래라는 것을



바람아래해변이 말해준다



 



바람이 불지 않고는



어떤 생각도 밀물처럼 밀려오지 않고



바람 없이는



어떤 후회도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는



 



바람아래해변에서



 



바람을 맞고도



너와 나는 물처럼 하염없다



 



94-95



- 의외의 대답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말보다 침묵으로 말하겠다



강변에 나가 앉아



물새야 왜 우느냐 물어보았던 것



나는 왜 생겨났나 생각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흘러가는 말로 다시 말하겠다



강가에 서서



그냥 미소 짓고 답하지 않는 노을을 오래 바라보았던 것



나는 왜 사나 알아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는다면



사람의 말로 거듭 말하겠다



무릎 꿇고 앉아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던 것



나는 왜 사람인가 물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끝까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끝까지 묻는다면



마지막 남은 나의 말로 끝까지 말하겠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 살려주고 떠나는 것



다시는 몸 받지 않겠다며



나를 잃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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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94
박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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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어서 그런가, 눈물이 그리운 이유는. 하긴 이 시집을 몇 차례 보았으니 꼭 가을 탓도 아니고. 그저 시를 통해 찔끔거렸으면 싶은, 애절한 맛을 보았으면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시인의 마음을 붙잡지 못하고 말았다.


작가와 나 사이의 거리감, 작가와 나눈 것이 그다지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건이든 경험이든 감정이든 비슷하거나 공감하거나 동경하는 부분이 좀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들에 머물지 못하였으니 내게는 빈 언어일 수밖에. 아쉬운 노릇이다. 시집을 이런 마음으로 덮고 나면 다른 책보다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데. 시간이 좀 더 흘러 다시 보게 되었을 때를 기대하는 마음 살풋 남겨 둔다.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그래도 한번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시를 통해 구현하는 가족의 이미지, 그리움. 아버지. 나는 내 가족에게 좀 무심한 쪽인가. 더듬어 보아도 애절한 무엇은 떠오르지 않는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그저 좋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래, 결핍을 느껴보지 못한 때문인가 싶다. 억울할 것도 없고, 속상할 것도 없으니 애타는 그리움이라는 게 생길 여지가 없었다. 바꿔 말하면 가족은 내게 이미 충분한 의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고마운 일이다.


결핍은 많은 상처를 주지만 어느 한 면에서는 성장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말, 불편한 채로 인정해 보려 한다.  (y에서 옮김20131031)

나는 어스름한 빛에 얼룩진 짧은 저녁을 좋아하고
책 모서리에 닿는 작은 바스락거림을 사랑하지요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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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아직 따뜻하다 ㅣ 창비시선 174
이상국 지음 / 창비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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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 촌스러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느끼고 있다. 이 말은 내가 도시스럽다거나 세련된 사람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어쩌면 나처럼 촌스러운 사람도 드물 정도로 난 어눌한 편이라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촌스러움이 좋다고 느끼는 것, 나는 사람이 촌스럽다는 것과 촌스러움을 좋아하는 일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다.

지방의 소도시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나는 흙마당이 있는 집에서는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어떤 식물이나 동물도 키워 본 경험이 없다. 그렇다고 시설 좋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므로 내 어린 시절은 참 삭막했다고 할 수도 있다. 내가 놀 수 있었던 곳은 고작 학교 운동장일 뿐이었으며 어떠한 풀이나 곤충과도 친구가 되어 본 적은 없었다. 촌스러움도 전혀 모르고 그렇다고 도시생활의 혜택을 누리지도 못했던 내 어린 시절.

언젠가부터 그 촌스러움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내 어린 시절의 환경에 대해 억울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꽃 이름 하나, 풀이름 하나, 곤충 이름 하나도 변변하게 아는 게 없었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다른 생명체에게 해로운 것인지 이로운 것인지도 모르고, 하다 못해 나 아닌 생명에 대한 관심조차 없이 살아왔던 것에 대해 누구에겐지 모를 원망의 마음이 생겨났던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정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웠던 것일까.

그러다가 이상국의 이 시집을 보면서 나는 내 속에 숨겨져 있던 촌스러움의 갈망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전까지는 일부러 찾아 읽어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던 시의 그림들이 이 시집 속에서 천천히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집'이 본래 우리에게 그런 것이 아닐까. 제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들어있음을 채 알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그 속을 깨닫게 되는 그런 것. '문을 닫지 못하고 다시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65p)는 언제나 따뜻한 '집'처럼. 이제는 내 속에서 늘 따뜻할 나의 촌스러움처럼. 지극히 촌스러워서 더욱 따뜻한 이 시집처럼. (y에서 옮김20011101)

[인상깊은구절]

슬픔도 꽃도 지천인데

산 내다버리고 오는 물처럼

누가 다시는 세상과 싸우지 않겠다며

늙은 소 같은 어둠 앞세우고 돌아오는데

다 안다 다 안다 하며

물소리가 따라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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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골목 ㅣ 창비시선 179
천양희 지음 / 창비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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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자신이 무척 내 마음에 들 때가 있다. 또 어떨 때는 내 자신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도 있다. 나는 두 경우가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꼭 들거나, 마음에 전혀 들지 않거나. 그럴 때 내가 찾게 되는 시집이 천양희의 이 시집이다.

자신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신에 대해 그전보다 더 잘 알 수 있게 될까. 혹은 자신에 대해 진정 알 수 있기는 한 것일까.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고 느끼면서 사는 때가 참 많다. 그러하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듣는 내 평이 오히려 더 맞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내가 왜 나인지,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거나 속상하거나 설레일 때 천양희의 이 시집을 읽으면서 난 시인을 몹시 부러워한다.

시를 읽는 일은 시인을 읽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오래 전부터다. 시를 통해 시인을 더듬어 보는 일은 나 아닌 한 사람의 삶과 정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를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부러움이란 곧 시인의 삶과 정신에 대한 부러움이다. 어떻게 이렇게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자신의 모자란 부분과 남는 부분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성찰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자신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지.

한 편 한 편 베껴 쓰기도 한다. 한 줄 한 줄 외워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늘 부족하다. 한 순간 한 순간 그를 따라 살 수는 없는 까닭이리라. 그래서 나는 오늘처럼 내가 내 마음에 드는 날, '오래된 골목'으로 간다. (y에서 옮김20010208)

[인상깊은구절]
세상은 나 없이도 가득 차 있고 흐르는 물은 몇 개 웅덩이를 키우면서 내려갔습니다 아름다운 꽃이 언제 말하며 피겠습니까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할 때 나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 자리는 그리워해보는 것이지 가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 우물 옛 거울 없어진...... 물음표의 모든 것은 바꾸고 싶지 않아도 바뀌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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