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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평점 :
깍아지른 듯한 산을 배경으로 목가적인 언덕이 있는 잔잔하고 평온한 곳이었다. 호수는 그림엽서에 나오는 물빛처럼 푸르렀지만, 수면 아래의 물은 유럽 구석구석의 모든 불행이 이런저런 행로를 거쳐 마침내 거기로 모여든 것처럼 약간 불길해 보였다. 회복해야 할 고달픔이 있고 죽어야 할 죽음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학교도 있었다. 양지바른 호숫가에서는 젊은이들이 물을 튀기며 놀고 있었다. 그곳에는 또 보니바르의 지하 감옥이 있고, 칼뱅의 거리가 있었다. 밤이 되면 바이런과 셸리의 유령이 여전히 어슴푸레한 물가를 떠돌아다녔다.
- '이국의 여행자' 중에서, p.54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의 성공으로 소설가로서 절정인 시기를 화려하게 누리지만,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과 알코올 의존증 아내의 신경쇠약 등으로 고통받는 말년을 보낸다. 이 책은 그렇게 피츠제럴드가 작가 활동 후기에 발표했던 단편소설 8편과 에세이 5편을 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고르고 옮긴 이 작품들은 피츠제럴드가 말 그대로 자기 몸을 축내며 살았던 암울한 시대에 내놓은 것들이다.
<이국의 여행자>에는 미국을 떠나 1920년대 유럽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유복한 젊은 부부가 등장한다. 이들의 모델은 물론 스콧과 젤다인데, 이들이 이국의 땅에서 겪는 일들은 겉으로는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어딘지 불온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인생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뭔가가 손상되었고(p.24)'라는 문장에서도 보여지듯이 정말 행복했던 시간 뒤에 찾아오는 것들을 보여준다.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에서 그리는 부부 사이의 위기는 실제로 피츠제럴드 부부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할리우드에서 일할 때 경험한 몇 가지 사건을 소재로 <크레이지 선데이>가 쓰였다. <어느 작가의 오후>는 피츠제럴드가 거액의 빚을 지고, 젤다가 신경쇠약에 걸려 입원 중이던 시기에 쓰였다. 글은 생각처럼 써지지 않고 몸도 좋지 않았던 당시의 어두운 일상을 피츠제럴드는 '사소설' 형태로 담담하게 그려냈다. 빚에 떠밀려 정신없이 사는 자신의 생활과 긴박한 상황을 픽션이라는 형태로 희화화해 <피네건의 빛>과 <잃어버린 10년>을 쓰기도 했다.
갑자기 나는 홀로 외로이 있어야 한다는 강한 본능을 느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평생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나는 평균적인 사교성을 지닌 사람이지만, 나 자신을, 나의 생각을, 나의 운명을 내가 접촉하게 된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관련짓고 싶어 하는 경향은 평균 이상이었다. 나는 항상 남을 구원하거나 남에게서 구원을 받았다. 하루의 아침나절 동안에만도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공작이 느꼈을 법한 여러 다양한 감정들을 겪곤 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적대감을 품은 사람들과 떨어져 있기 힘든 친구와 후원자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 '망가지다'중에서, p.307~308
소설도 자전적인 부분을 바탕으로 쓰였지만, 에세이는 더욱 솔직해 진다. 하루키는 피츠제럴드의 에세이에 대해 '그는 머리가 아니라 펜 끝으로 깊이 생각하는 듯하다. 문장의 설득력은 아마 거기서 생겨나는 것이리라'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피츠제럴드는 <나의 잃어버린 도시'에서 뉴욕이라는 하나의 도시를 중심으로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망가진 3부작'에서도 깨달음의 순간들을 담았다. '망가진 3부작'은 <망가지다>, <붙여놓다>, <취급주의> 세 작품으로 <에스콰이어>에 매달 연속으로 게재되었던 에세이이다. 하루키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해 예전부터 수없이 읽고 또 읽었던 에세이라고 한다. 특히나 해설에서 헤밍웨이에게 '여성스럽다'라고 비난받은 이 에세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여기에 숨은 단단함을 부디 맛보라고 했을 정도이니, 그 애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오랜 팬을 자처하는 하루키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피츠제럴드의 후기 단편들을 직접 발굴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속에서 자기 연민이나 자기기만을 능가하는 힘, 어떻게든 희망을 움켜쥐려는 의지와 작가로서의 강인한 본능을 읽어 냈고, 그로 인해 작가에게 더 깊은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느 작가의 오후'에는 '문득 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있다) 각각의 작품에는 하루키가 직접 작품의 배경과 해설을 썼다. 피츠제럴드는 일상생활에서 체험한 일을 소재로 상상력을 발휘해 부풀려 쓰는 타입의 작가라, 이 책에 수록된 소설과 에세이들은 모두 자전적인 부분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츠제럴드는 장편소설 <라스트 타이쿤>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겨우 마흔네 살의 나이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칠십 대 중반을 맞이한 하루키는 피츠제럴드의 말년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과 지금을 동시에 떠올린다. 하루키의 애정이 가득 담긴, 피츠제럴드의 아름다운 작품 선집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