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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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슬플 땐 절대로 날 위로해줄 만한 사람들을 향해 고개 돌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 그래서 우리는 더 슬퍼지지. 부모님이 서로를 사랑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믿고 있다가, 어느 날 부모님이 나와 함께 있는 걸 썩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지. 어른이 된다는 건 우리가 생각만큼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란다. 힘겨운 일이지.

그레구아르 들라쿠르의 전작인 <내 욕망의 리스트>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늘 거짓말을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남자는 여자와 자고 싶어서 그녀가 예쁘다고 칭찬을 하고,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내가 필요하다며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진실을 견디지 못하는 허약한 사랑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거짓말을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너는 재능이 있으니 멋진 삶을 살 거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 인생을 바꾸는 건 책에서나 가능한 거라는 걸 깨닫게 되면, 그제야 그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삶이 거기서 거기이고, 꿈을 이루지 못하는 평범한 삶이 대부분이라는 걸 아이들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엄마들은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거짓말들은 대개 상대를 배려해서이거나, 혹은 마음이 다치지 않게 보호하려는 선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 <행복만을 보았다>에서는 정반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할 수 없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마음 한편에 연민이나 동정, 인정 같은 것을 놓아둘 자리 없이 냉철하고, 계산적으로 일해온 그는 양쪽 보험회사의 입장에서 셈을 하고 가치를 따져봐야 하는 손해사정사이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하고,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그는 사고가 나면 신체적 피해, 심리적 피해, 직업적 손해, 의료 비용, 손상된 차량의 가치, 심리적 고통에 대한 보상금 등등을 따져서 계산을 해야 한다. 그 일을 하면서 그는 종종 자신이 타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던 때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조사 중에 발견된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어서 누군가를 곤경에서 빠져 나오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누군가의 인생을 끝장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최소한으로 지불하게 만들어서 돈을 받는 사람이에요. 인정도 없고 연민도 없는 사람. 조난자에게 손을 내밀 권리가 없을뿐더러 마음 한편에 친절을 놓아둘 자리도 없어요. 사람들이 날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만들었어도 난 그저 가만히 받아들였어요. 나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못 본 척해야만 돼요. 그렇지 않나요, 그제스코위악 씨? 당신이 물에 빠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대신 당신은 마음껏 날 욕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복종은 비겁한 사람들의 자존심이죠. 훈장 같은 것 말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자란 앙투완은 스스로를 '결핍'속에서 자랐다고 기억한다. 어머니의 냄새가 나지 않는 곳에서, 어머니의 품이 아닌 곳에서 허전함에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서 말이다. 반면 쌍둥이 여동생 둘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나, 그들 중 한 명이 죽는 바람에 가족의 행복도 끝이 난다. 여동생이 죽자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리고, 남은 여동생 안나는 어머니와 쌍둥이 자매가 곁을 떠난 뒤 말문을 닫아버린다. 그는 아버지를 향한 화를 주체하지 못했고, 매주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아야 했다. 지금은 그도 어른이 되어 나탈리라는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조세핀과 레옹이라는 남매를 둔 가장이 되어 살고 있다. 하지만 한 순간의 연민으로 실직자가 되어, 아내도 잃고, 나중엔 결국 아이들 조차 잃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한테 느꼈던 증오심을 스스로에게 돌리기로 마음을 먹는다.

저도요, 아빠, 죽고 싶을 때가 있어요.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1부는 주인공 앙투안이 아들 레옹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고, 2부에서는 모든 걸 잃어버린 뒤 멕시코로 추방된 이후의 삶과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 과정, 3부에서는 그의 딸 조세핀의 시점에서 그녀가 아버지에게 받은 충격과 상처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다.

개 같은 일이 벌어졌던 그 첫해 5 5, 끔질’(끔찍한 질문)이 다시 떠올랐어요.

왜 당신은 날 먼저 쏘았나요?

조세핀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대체 그는 왜 딸에게 총을 쏘게 된 것일까. 그는 나름 자신의 입장에서 딸을 위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당한 상대방의 입장까지 고려하지는 않았다. 그가 평생 원망하고 서운해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자신의 행복을 위해 눈이 멀어 아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바람을 피웠던 그의 아내 나탈리도, 오로지 오토바이 때문에 엄마의 새 남자친구 아저씨에게 마음을 연 레옹도, 자신에게 용서할 수 없는 짓을 한 아빠라는 존재를 용서하고 인정하기 위해 애쓰는 조세핀도,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복만을 보려 한다.

나의 엄마, 네 친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거짓말도 보이지 않고, 네 엄마가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모르는 탓에 네가 생기기 1년 전에 지운 아기도 보이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무한하고 거대하면서도 비극적인 그 사랑도 보이질 않네. 당시에 내가 흘렸던 눈물도, 소파에서 뜬눈으로 지새웠던 무수한 밤도, 되살아난 야수의 모습도 보이질 않네.

그저 행복만을 보았어.

극중 앙투안은 레옹이 태어날 무렵의 사진을 보며 그 속에서 당시의 상처, 비극, 우울함 등은 보이지 않고 행복만 보인다고 쓸쓸하게 말한다. 평범한 어느 집에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단란한 가족 사진 말이다. 사진이란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기 위한 장치이다. 영원히 간직할 찰나의 순간을 위해서, 우리는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단정하게 체크하고, 밝게 웃는 표정을 짓는다. 행복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도 십 여 년 전에 찍은 가족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다. 사진 속에는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도 계시고, 지금보다 많이 정정해 보이는 부모님의 모습도, 훨씬 어려 보이는 파릇파릇한 나와 동생의 모습도 있다. 물론 되돌아보면 당시에 마냥 행복한 일, 좋은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사진 상으로는 누구보다 밝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라도 하면서 행복이라는 것을 붙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람들이 사진 속에서 짓고 있는 미소가 거짓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는 다면 그 순간만큼은 진짜처럼 행복해지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희망이 정말 행복을 불러올 수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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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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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과 맞닿은 황무지에 보란 듯이 우뚝 서 있는 대저택에 살고 있는 자발라위가 아들 다섯 명을 부른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다들 그 자리는 당연히 장남인 이드리스의 몫이라고 생각했지만, 자발라위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 넘고 막내인 아드함을 지목한다. 형제들은 모두 곤혹스러웠고 장남인 아드리스는 분노해서 아버지에게 말대꾸를 한다. "저와 저의 형제들은 지체 높은 귀부인의 자식이지만 이놈은 흑인 노비의 아들이에요." 라고. 그러나 자발라위는 아드함이 소작인과 임차인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글을 쓰고 계산을 할 줄도 알기 때문이라고 그의 반발을 묵살시켜버린다. 아드리스는 격분해 노비의 자식을 자신의 위에 두고 싶어하신다면 아버지에게 복종하지 않겠다며 격분하고, 결국 집에서 쫓겨나고 만다.

"너는 현명해. 나는 너의 후손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일을 너에게 알려 주려고 왔어. 그건 바로 네가 오늘 겪게 될 일이 시작이지 끝이 아니라는 거야. 앞으로 자손을 많이 낳아 시끌벅적한 일가를 이뤄야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일이 이뤄질 거야. 네 생각은 어떠냐?"

쫓겨난 그는 매일마다 못된 짓에 빠지고 점점 더 타락해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싸움을 걸고, 식당에서 계산 없이 배를 채우며, 술을 마시고 망나니 짓을 해댄다. 그러던 어느 날, 멀쩡한 모습으로 아드함 앞에 나타난 아드리스는 지난 날을 후회하는 것처럼 그를 설득해, 아버지의 유언장에 재산에 관한 모든 서류가 있으니 그것을 몰래 확인해보자고 그를 유혹한다. 결국 아드함은 형과 아내의 부추김에 힘입어 아버지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 들키게 되고, 역시 집에서 내쫓기게 된다. 여기서 전지전능한 신의 위치에 있는 하느님이라면, 막내 아드함은 아담, 부인 우마이마는 이브, 장남인 이드리스는 사탄으로 상징된다. , 이 작품은 알레고리 소설인 것이다.

알레고리 소설이란 무엇이냐 찾아보니 '인물, 행위, 배경 등이 표면적인 일차적 의미와 이면적인 이차적 의미를 모두 가지도록 고안된 이야기란다. 쉽게 <이솝우화>를 예를 들면 일차적으로는 동물 세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이면에 인간 세계에 대한 풍자와 교훈을 담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작품 해설을 참고하자면 '일신교인 유대교, 기됵교, 이슬람교의 신앙을 알레고리 기법을 차용하여 본의를 암시하고 알레고리의 특질인 이원론적인 구조와 객관전 현세와 교훈적 메세지를 드러낸다'고 되어 있다.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이어 갔고 모두들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리파아도 열심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람은 진정한 이야기꾼이었고 그가 하는 이야기는 실화였다. 얼마나 자주 압다가 그에게 말했던가!

"우리 동네는 이야기가 많은 동네란다."

정말로 이야기들은 좋아할 만했다. 이 이야기에는 그가 놀이터 삼아 놀던 무깟탐 시장과,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 된 외로움을 보상할 만한 위안이 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설 내 장들의 숫자는 머릴말을 제외하고 코란의 114장과 같은 숫자로 구성되어 있고 주된 인물들은 아라파를 제외하고 코란과 성서 속 성인과 선지자들이라고.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쉽게 이 작품과 코란과 성서 간의 상호 텍스트성을 간파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데, 불행히도 나는 종교적인 지식이 거의 없는, 그러니까 이런 분야로는 완전 문외한이라서 작품을 읽으면서 내재된 의미까지 바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작품 해설을 보고, 다른 리뷰들을 읽으면서 아, 그런 거구나. 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작품 자체가 어렵지는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담이 사탄과 이브의 유혹에 금단의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듯, 아드함도 이드리스와 우마이마의 부추김에 대저택에서 쫓겨난다. 질투심에 카인이 아벨을 살해했던 것처럼, 까드리도 질투로 인해 후맘을 살해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아담의 자손들은 번성해서 세상을 이루며 살아가고, 자발라위의 후손들도 동네가 커지고 자손들이 늘어나면서 하나의 동네, 즉 사회를 이루게 된다.

지금 우리 동네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카페에서 리벡의 반주에 맞춰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믿지 않을 것이다. 자발, 리파아, 까심이 대체 누구지? 이야기가 아닌 카페 밖 어디에 대체 그들의 흔적이 있다는 건가? 어둠 속에 잠긴 동네와 꿈을 노래하는 이야기꾼들만 눈에 들어온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에 처하게 되었을까?

동네 사람들은 외부 세계와는 철저히 담을 쌓고 대저택에 칩거한 자발라위에게 모습을 드러내 세상을 올바로 잡아 줄 것을 간원한다. "당신은 어디에 계신가요? 어떻게 지내세요? 더는 존재하지 않으신 것처럼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세요?" 라고. "당신이 없다면 우리에게 아버지도, 세상도, 땅도 희망도 없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막막하거나 어려운 일에 부딪쳤을 때 신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신이시여, 만약 당신이 존재한다면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식의 불공평하고, 억울한 일은 세상에 천지이다.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이럴 수 없을 거야. 싶은 일들이 너무도 태연하게 벌어지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예전 상태로 돌아가느냐 아니냐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글쎄 과연 그럴까.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구원하는 희망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극중 카이로의 한 작은 마을에 있는 동네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과연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평화, 희망을 어떻게 가져올 수 있을지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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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 Bakery 나만의 빵집 안티 스트레스 컬러링북
임보영 그림 / 꿈꾸는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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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문구를 보니 이 책이 '안티 스트레스 컬러링북'이란다. 한동안 컬러링 북이 서점가에 열풍이었다. 국내에 출간된 컬러링북만 해도 200여종이 넘는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어릴 적 누구나 한번 쯤 해봤음 직한 단순 색칠 놀이처럼 보이지만, 성인대상으로 나오다 보니 조금 더 복잡하고, 세밀한 도안들이 특징이다. 조해너 배스포드의 '비밀의 정원'으로 시작해서 국내에서 화제를 모으기 시작한 컬러링 북은 꽃과 나무, 동물, 정원, 인형 등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려놓은 밑그림 위에 독자들이 직접 색을 덧입혀 완성하는 그림책이다. 도안만 그려져 있는 하얀 스케치북 같은 책에 색을 칠하다 보면 마음의 안정과 스트레소 해소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궁금했다.

수많은 컬러링 북 중에서 뭘 고를까 고민하다 내가 고른 것은 '나만의 빵집' 이다. 어릴 때부터 워낙 빵을 좋아해서 엄마가 툭하면 "너는 커서 빵집에 시집가야겠다." 라고 할 정도로 빵순이였던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빵을 너무나 좋아한다. 일부러 빵이나 케이크가 유명한 맛집을 찾아 다니는가 하면, 집에서 직접 베이킹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당연히 컬러링 북도 내가 좋아하는 빵을 채색해보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단, 꽃이나 나비와는 달리 음식이므로, 한참 색칠을 하다 보면 문득 빵이 먹고 싶어져 자신도 모르게 침을 흘릴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긴 하다. 하핫..

 

 

맛있는 케익과 마카롱, 그리고 빠질 수 없는 티포트까지~!! 도트무늬의 티포트는 너무 깜찍해서 탐이 난다.

 

 

이 케익은 테두리에 다쿠아즈 과자를 이어 붙이고 과일로 토핑을 한, 언젠가 직접 만들었던 케익과 비슷해서 눈길을 잡아 끌었다.

 

 

 조각케익과 파이들.. 정말 그림 속에서 하나 꺼내 입에 넣어 보고 싶은 비주얼이다.

 

 

결국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딸기 케익을 골라 쓱쓱 채색을 시작했다. 이 케익은 엄마가 골랐는데, 같이 칠해보자고 말했더니 덥썩 옆에 앉으시는 엄마. 어렸을 때 해보고 채색은 처음 해본다면서 엄마도 재미있어 하신다.  복잡한 컬러링 도안에 비해 이 책 처럼 심플한 도안은 이렇게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준다는 거. 어린 아이가 있다면 아이와 함께 색칠을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이건 동생이 골라서 열심히 채색한 각종 커피들이다. 역시나 빵과 케익에는 커피와 차가 빠질 수 없다. 색칠 한 번 해보겠냐고 물었을 때 난 귀찮아서 그런 거 싫다고 하더니, 정작 채색을 시작하니 완전 집중해서 열심이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채색해서 누군가에게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니, 그저 마음 내키는대로, 아무렇게나 맘에 드는 색깔을 골라서 입혀 볼 수 있는 것이 매력적인 것 같긴 하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회사에서, 가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길 없는 직장인과 주부들에게 적극 권해보고 싶다. 한순간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채색이 끝나고 나면 뭔가 완성했다는 뿌듯함도 드니 말이다. 컬러링 북이 정서를 안정시키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아트 테라피'의 일종이라고 하더니, 어느 정도는 맞는 말 같으니 말이다. 꽃과 나무를 채색해 나만의 정원을, 빵과 케익을 채색해 나만의 빵집을, 동물과 정원을 채색해 나만의 공원을 만들어 봐도 좋을 것 같다. 컬러링 북의 열풍 덕에 종류가 너무도 다양하니,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고르면 되겠다. 거기다 책의 가격도 저렴한 편이라 부담없이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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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2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 그림을 열심히 색칠하다가 식욕이 생길 것 같습니다. ㅎㅎㅎ

피오나 2015-04-22 12:02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마구 식욕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더라고요ㅋ
 
죽은 자의 제국
이토 게이카쿠.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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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대학 의학부 대 강의실, 의학도 존 왓슨은 친구 웨이크필드와 함께 처음으로  '죽은 자 소생' 실습을 한다. 자유 경제의 발전은 시체가 뒷받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라, 언제나 시체가 부족하던 시대였기에, 연구를 위해 시체를 도둑질하는 것이 뉴스가 되는 그런 시기였다. 상처 하나 없는 신품 시체가 해부대에 나신으로 누워 있었다. 수어드 박스는 전류 자극으로 두개골에 박힌 바늘을 통해 뇌 조직에 거짓된 영혼을 불어 넣는다. 시체가 프랑켄화하는 순간, 죽은 자의 눈꺼풀이 번쩍 열린다. 죽은 자는 태연하게, 산 자들 눈앞에서 그렇게 되살아난다. 방금 전까지 생명을 잃고 누워 있었던 것이 갑자기 움직이는 것을 목격하는 기분이란 어떨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섬뜩함이 느껴질까. 과학이 결국 이런 일을 이루어내는 구나 감탄부터 나올까.

우리는 저마다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 의사라고 믿는 것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의사를 믿는다고 느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과학은 확실히 '어째서'에 대해 묻지 않지만 우리는 죽은 자와 다르다. 우리는 물리적인 현상이지만, 동시에 의미를 덮어 쓰기 하면서 살고 있다. 겨우 21그램 정도의 영혼이 그런 덮어쓰기 기능을 담당한다. 이야기마다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어질 것이다.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할 때, 누군가는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실험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사람에게 영혼이 존재하고 죽음을 맞는 순간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간다고 한다면,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서 사망 전후의 체중 차이가 바로 영혼의 무게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하여 이를 증명해 보인 것이다. , 그렇다면 사람이 죽었을 때 인위적으로 이 '영혼'이라는 것을 주입시킨다면, 그는 다시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보자면 가능하지 못할 법도 없을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19세기 말, 프랑켄슈타인이 죽은 자를 살려 낸 지 100여년이 흐른 시점에서, 죽은 자의 몸에 가짜 영혼을 인스톨하여 되살려 내는 이 기술이 발달한 시대이다. 인류는 죽은 자 소생 기술을 발전시켜 노동과 군수 분야에 활용 가능한 '크리처'라고 불리는 생물을 제조했다. 그러니까 죽은 시체가 다시 되살아나 살아 있는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시대인 셈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시 생명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그저 이들은 스톨된 의사 영소에 따라 움직이는 시체, 즉 로봇과도 같은 존재로 재 탄생한 존재에 불과하다.

,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 최초로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던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려보자. 그는 시체로 만든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지만, 결국 그 괴물은 인간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되고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 대한 복수를 꾀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죽은 자들의 폭주 또한 그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 감당 못 할 것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인과응보를 언제나 겪게 된다. 예외는 없다.

산 자의 몸에서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영소. 우주를 향해 퍼져 나가는 영혼들. 그 전부를 남김없이 다시 모음으로써 모든 죽은 자는 되살아난다. 기억 속 존재가 아니라 실체를 가진 존재로서. 그런 일이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에 의해서 인류에게 구원이 있다는 뜻이 된다. 인류에게는 구원이 있기에 그런 물리 과정은 '존재해야만 한다'. 그것이 효도로프가 내건 사상의 핵심이다. 이 세상의 모든 영혼, 예전에 태어났고 지금 태어나고 이윽고 태어날 모든 영혼, 우주 전체로 확대되는 인류의 영혼은 총체적으로 정신권을 구성하고 세계 그 자체의 구원을 가져온다.

반 헬싱 박사는 왓슨에게 국가를 위해서 봉사할 기회를 제의하고, 군의관이라는 위장 신분을 부여 받고 첩보원으로 파견된다. 봄베이의 성곽 지하, 아프가니스탄 오지 계곡, 일본 화학 공장.. 그들의 목표는 '죽은 자의 제국'이었다. 막대한 양의 죽은 자들을 빼돌려 '죽은 자의 제국'을 만들고자 하는 알렉세이 카라마조프라는 인물의 실체에 대해, 그리고 실제로 죽은 자들의 제국이 존재하는 지에 대해 말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든 일종의 산업 비품인 죽은 자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만의 제국을 만든다? 프랑켄슈타인의 후예답게 당연한 결과라고? 이렇게 이 작품은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하는 SF 모험극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철학적인 사유가 곳곳에 산재하고 있어 생각보다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진 않는다. '거짓된 영혼을 인스톨한 죽은 자는 부활의 때에 되살아나게 될까. 부활한다고 치면, 그 이전에 산 자였던 인물과 어떻게 견주어 봐야 할까.' 그리고 '인간 영혼의 감추어진 비밀이, 그 패턴이 완전히 해독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역시 물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등등... 인간을 인간다게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뿐인지, 억지로 만들어 넣은 '영혼'을 통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그러나 실제로는 죽어 있는 자들은 과연 생명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인지.

이 작품은 요절한 SF작가 이토 게이카쿠가 남긴 미완의 원고를 엔조 도가 이어서 완성한 작품이다. 이토 게이카쿠가 쓴 부분은 고작 프롤로그 밖에 되지 않아, 나머지 전체 분량을 모두 엔조 도가 썼으나, 제일 중요한 플롯 구상은 이토 게이카쿠가 했다. 가끔 이렇게 미완의 원고를 다른 작가가 완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각각 작가의 특징을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어 썼든, 새로 썼든 독자 입장에서 읽을 때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작품은 다 읽고 나서 프롤로그를 쓴 이토 게이카쿠가 끝까지 다 완성을 했더라면 어떤 그림일까 궁금했다. 그만큼 독특한 설정과 기발한 상상력이 넘쳐나는 작품이었기에 그렇기도 하고, 엔조 도가 풀어낸 스토리가 나에게 지나치게 철학적이어서 다소 어렵게 느껴졌던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들 두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양귀자의 소설 책 제목처럼 대부분의 인간들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그러니 당신도 금지된 영역 속으로 한 발자국 내딛어 보길. 그곳을 나와서는 다시는 전과 같이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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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젤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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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센티미터짜리 악마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무슨 소원을 제일 먼저 들어달라고 해볼까. 악마니까 그 대가로 영혼을 팔라고 하지 않겠느냐고? 천만에, 우리의 주인공 아자젤은 영혼이 뭔지도 모른단다. 소원을 말하는 이에게 오히려 영혼이 뭐냐고 묻는 이 깜찍한 악마는 자기 세상에서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라서, 우리 세상에 자신의 무게를 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에 누군가 돕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무슨 악마가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은 하냐고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이작 아시모프의 이 기상천외한 단편집에서는 이 모든 게 너무도 그럴 듯해 실제로 이런 악마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믿고 싶어질 정도이다.

그날 저녁, 저는 농구 경기를 보러 갔고 아자젤은 제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아자젤은 경기를 보려고 계속 주머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아주 이상한 광경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아자젤의 피부는 밝은 빨간색이고, 이마에는 작은 뿔 두 개가 튀어나와 있으니까요. 완전히 주머니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습니다. 1센티미터 길이의 근육질인 꼬리가 아자젤의 몸에서 가장 눈에 띄면서도 가장 혐오스러운 부분이거든요.

이 작품의 화자인 아이작 아시모프는 가끔 아주 한정적인 능력을 가진 작은 악마를 불러낼 수 있다고 말하는 조지라는 친구가 하나 있다. 각각의 단편은 그가 조지를 만나 아자젤이 했던 선행, 그러니까 누군가의 작은 소원을 들어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걸로 진행된다. 이상한 것은 분명 조지는 아자젤을 소환해 친구들을 도와 주려고 하는데, 항상 그 결과는 끔찍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대체 무슨 소원을 어떻게 들어줬길래 궁금해질 것이다. 이 작품은 악마가 들어준 18가지의 소원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 집 모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가 어찌나 풍자와 독설,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는지 무릎을 탁 치며 감탄을 하게 만들고 만다.

2센티미터짜리 악마, 아자젤은 악마이지만 꽤나 상냥하다. 왜냐하면 원래 자신이 사는 곳에서 좀 무시를 당했기 때문에 자기 힘을 이용해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안달 중이기 때문이다. 아자젤은 자기 힘이 반드시 다른 이들을 위해 착한 일을 하는 데에만 쓰여야 한다고 말한다. 천사가 아니라 악마인데 착한 일을 한다니? 설정부터 기발하지 않은가. 조지는 자신의 친구들, 주변인들이 어떤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을 돕기 위해 아자젤을 주로 불러낸다. 그런데 아자젤은 조지가 주문을 외워 불러낼 때마다, 매번 (거의 예외 없이) 짜증을 내며 삑삑거리는 작은 소리로 투덜대곤 한다. 거의 10만 자키니나 되는 돈을 건 운동 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제가 불러내는 바람에 그 결과를 볼 수 없게 되어 살짝 골이 나 있거나, 샤워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불려 나온 거라거나, 뭐 이유는 다양하지만 항상 기분이 무척 안 좋은 것처럼 나타나는 분홍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2센티미터짜리 악마라니. 나는 어쩐지 큭큭 웃음이 터질 것 같이 삑삑거리는 이 조그만 악마가 실제로 보고 싶어졌다.

"조지, 지금 하려는 이야기도 설마 자네가 그 친구를 돕겠다는 생각에 아자젤과 합심하여 엉뚱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그 친구를 비참함과 절망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내용인 건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저와 아자젤은 순수한 친절과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 그리고 뷔페에 대한 다소 구체적인 사랑 때문에 그 친구가 마음속으로부터 원하는 걸 들어줬을 뿐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나타난 아자젤에게 조지는 매번 이건 꽤 긴급 상황이라고 설명을 한다. 그러면 아자젤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방법으로 모종의 해결을 해주는데, 이상한 건 분명히 소원의 주인공이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결국에는 그것이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 대체 어떻게 소원을 들어줬기에? 사실 악마니까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 아니냐고 의심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이놈의 악마라는 놈이 악랄하기는커녕 어딘가 어수룩하고, 잘난 척 큰소리 처 놓고도 뭔가 실수를 하곤 하는 인간미(?)를 폴폴 풍기기 때문이다.

항상 아시모프에게 식사를 얻어먹으면서도 불평이고, 그를 작가로서 비난하고 깍아 내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조지라는 캐릭터 또한 너무도 매력적이다. 친구의 소원을 대신 빌어주며 그 소원이 이루어질 경우 떨어질 콩고물을 항상 기대하는데 그의 기대는 한 번도 예상을 벗어나질 못한다. 특히나 그의 매력은 아시모프와의 식사 시간에 더욱 빛을 발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음식을 세 접시나 비우면서 요리가 아주 엉망이라고 불평하는 그에게 그러면 왜 그리 많이 먹는 거냐고 묻자, 조지는 도도하게 이렇게 말한다. " 그럼 절 대접하겠다고 한 사람의 음식을 거절해서 그 사람에게 모욕감을 안겨 주란 말입니까" 라고. 게다가 매번 아자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처음 말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시작을 하며, 아시모프가 이미 아자젤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척이라고 하면, 도대체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알 수 없다며 오히려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곤 한다. 그렇게 아시모프는 그에게 끊임없이 무시를 당하고, 가끔은 몇 달러 돈도 뜯기지만 그럼에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그가 해주는 아자젤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다. (아시모프는 머리말에서도 그렇게 밝힌 바 있다. '조지가 해준 이야기는 그 정도 가치가 있으며, 조지에게 준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조지에게 돈을 준 건 이야기 속에서이니 더욱 문제가 안 된다'고 말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야 워낙 SF, 과학 소설의 최고봉이지만, 이렇게 매력적인 판타지를 써낼 줄이야, 새삼 감탄스럽기 그지 없다. 이 책은 <파운데이션> 시리즈나 <로봇> 시리즈 같은 그의 대표적인 SF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색다른 디저트가 될 것 같고,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만드는 애피타이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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