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제국
이토 게이카쿠.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런던 대학 의학부 대 강의실, 의학도 존 왓슨은 친구 웨이크필드와 함께 처음으로  '죽은 자 소생' 실습을 한다. 자유 경제의 발전은 시체가 뒷받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라, 언제나 시체가 부족하던 시대였기에, 연구를 위해 시체를 도둑질하는 것이 뉴스가 되는 그런 시기였다. 상처 하나 없는 신품 시체가 해부대에 나신으로 누워 있었다. 수어드 박스는 전류 자극으로 두개골에 박힌 바늘을 통해 뇌 조직에 거짓된 영혼을 불어 넣는다. 시체가 프랑켄화하는 순간, 죽은 자의 눈꺼풀이 번쩍 열린다. 죽은 자는 태연하게, 산 자들 눈앞에서 그렇게 되살아난다. 방금 전까지 생명을 잃고 누워 있었던 것이 갑자기 움직이는 것을 목격하는 기분이란 어떨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섬뜩함이 느껴질까. 과학이 결국 이런 일을 이루어내는 구나 감탄부터 나올까.

우리는 저마다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 의사라고 믿는 것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의사를 믿는다고 느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과학은 확실히 '어째서'에 대해 묻지 않지만 우리는 죽은 자와 다르다. 우리는 물리적인 현상이지만, 동시에 의미를 덮어 쓰기 하면서 살고 있다. 겨우 21그램 정도의 영혼이 그런 덮어쓰기 기능을 담당한다. 이야기마다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어질 것이다.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할 때, 누군가는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실험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사람에게 영혼이 존재하고 죽음을 맞는 순간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간다고 한다면,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서 사망 전후의 체중 차이가 바로 영혼의 무게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하여 이를 증명해 보인 것이다. , 그렇다면 사람이 죽었을 때 인위적으로 이 '영혼'이라는 것을 주입시킨다면, 그는 다시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보자면 가능하지 못할 법도 없을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19세기 말, 프랑켄슈타인이 죽은 자를 살려 낸 지 100여년이 흐른 시점에서, 죽은 자의 몸에 가짜 영혼을 인스톨하여 되살려 내는 이 기술이 발달한 시대이다. 인류는 죽은 자 소생 기술을 발전시켜 노동과 군수 분야에 활용 가능한 '크리처'라고 불리는 생물을 제조했다. 그러니까 죽은 시체가 다시 되살아나 살아 있는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시대인 셈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시 생명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그저 이들은 스톨된 의사 영소에 따라 움직이는 시체, 즉 로봇과도 같은 존재로 재 탄생한 존재에 불과하다.

,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 최초로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던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려보자. 그는 시체로 만든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지만, 결국 그 괴물은 인간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되고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 대한 복수를 꾀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죽은 자들의 폭주 또한 그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 감당 못 할 것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인과응보를 언제나 겪게 된다. 예외는 없다.

산 자의 몸에서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영소. 우주를 향해 퍼져 나가는 영혼들. 그 전부를 남김없이 다시 모음으로써 모든 죽은 자는 되살아난다. 기억 속 존재가 아니라 실체를 가진 존재로서. 그런 일이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에 의해서 인류에게 구원이 있다는 뜻이 된다. 인류에게는 구원이 있기에 그런 물리 과정은 '존재해야만 한다'. 그것이 효도로프가 내건 사상의 핵심이다. 이 세상의 모든 영혼, 예전에 태어났고 지금 태어나고 이윽고 태어날 모든 영혼, 우주 전체로 확대되는 인류의 영혼은 총체적으로 정신권을 구성하고 세계 그 자체의 구원을 가져온다.

반 헬싱 박사는 왓슨에게 국가를 위해서 봉사할 기회를 제의하고, 군의관이라는 위장 신분을 부여 받고 첩보원으로 파견된다. 봄베이의 성곽 지하, 아프가니스탄 오지 계곡, 일본 화학 공장.. 그들의 목표는 '죽은 자의 제국'이었다. 막대한 양의 죽은 자들을 빼돌려 '죽은 자의 제국'을 만들고자 하는 알렉세이 카라마조프라는 인물의 실체에 대해, 그리고 실제로 죽은 자들의 제국이 존재하는 지에 대해 말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든 일종의 산업 비품인 죽은 자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만의 제국을 만든다? 프랑켄슈타인의 후예답게 당연한 결과라고? 이렇게 이 작품은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하는 SF 모험극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철학적인 사유가 곳곳에 산재하고 있어 생각보다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진 않는다. '거짓된 영혼을 인스톨한 죽은 자는 부활의 때에 되살아나게 될까. 부활한다고 치면, 그 이전에 산 자였던 인물과 어떻게 견주어 봐야 할까.' 그리고 '인간 영혼의 감추어진 비밀이, 그 패턴이 완전히 해독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역시 물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등등... 인간을 인간다게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뿐인지, 억지로 만들어 넣은 '영혼'을 통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그러나 실제로는 죽어 있는 자들은 과연 생명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인지.

이 작품은 요절한 SF작가 이토 게이카쿠가 남긴 미완의 원고를 엔조 도가 이어서 완성한 작품이다. 이토 게이카쿠가 쓴 부분은 고작 프롤로그 밖에 되지 않아, 나머지 전체 분량을 모두 엔조 도가 썼으나, 제일 중요한 플롯 구상은 이토 게이카쿠가 했다. 가끔 이렇게 미완의 원고를 다른 작가가 완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각각 작가의 특징을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어 썼든, 새로 썼든 독자 입장에서 읽을 때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작품은 다 읽고 나서 프롤로그를 쓴 이토 게이카쿠가 끝까지 다 완성을 했더라면 어떤 그림일까 궁금했다. 그만큼 독특한 설정과 기발한 상상력이 넘쳐나는 작품이었기에 그렇기도 하고, 엔조 도가 풀어낸 스토리가 나에게 지나치게 철학적이어서 다소 어렵게 느껴졌던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들 두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양귀자의 소설 책 제목처럼 대부분의 인간들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그러니 당신도 금지된 영역 속으로 한 발자국 내딛어 보길. 그곳을 나와서는 다시는 전과 같이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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