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ic Grammar in Use 3rd 세이펜버전
Cambridge University Press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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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래머 인 유즈는 한때 영어 공부 좀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책이다. 문법에 관한 굉장히 여러 버전이 있지만, 그 어느 출판사의 그 어느 버전도 그래머 인 유즈의 명성은 따라 올 수 없는 것 같다. 해외 연수나 유학 등의 준비 시에 꼭 챙겨가게 되는 책이기도 하고 말이다. 특히나 이 책은 실생활에 밀접한 상황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법을 익힐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딱딱한 영문법에 질린 이들이라면 더욱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문법책을 세이펜으로도 공부할 수 있는 버전이 나왔다고 하니 굉장히 기대가 됐다. 사실 세이펜은 주로 아이들을 위한 책에서만 등장하던 아이템 아닌가. 종이책의 페이지를 펜으로 콕 짚는 것만으로 원어민 발음을 그냥 들어볼 수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 싶기도 하다. 하핫. 

이 책은 Basic Grammar in Use의 새로운 개정판으로, 기존 판을 풀컬러로 전면적인 업데이트를 하여 새롭게 출간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세이펜과 함께 그래머 인 유즈의 명강의를 바로바로 들으면서 학습할 수 있어 졌다.

이제는 따로 시간내고, 비용을 들여 영어 강의를 들을 필요 없이 책과 세이펜만 있으면 평생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과, 공부하다 궁금한 부분을 바로 세이펜으로 찍으면 원어민 발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편리성도 있다. 세이펜이 단지 영어 문장을 읽어주는데 그치지 않고, 문장을 번역하고, 문법 강의도 해주고, 연습 문제 풀이 설명과 해설까지 들을 수 있다.

 

 

게다가 알록달록 레인보우 컬러의 세이펜은 디자인도 너무 컴팩트하고 예쁘다. 다섯 가지 색상 중에 나에게 온 것은 밝은 오렌지 컬러인데, 아이가 보자마자 달려들어 만지작거렸을 정도로 눈길을 끄는 아이템인 것 같다. 충전은 동봉되어 있는 5핀 케이블을 통해 컴퓨터로 가볍게 할 수 있고 충전 시간도 짧아 이용하기에 편리했다.

 

세이펜의 앞쪽 센서 부분을 세이코드가 적용된 책의 페이지에 갖다대면 소리가 나는 방식인데, 블루투스 수신 연동방식으로 스마트 기기에 바로 연동해서 세이펜 음원을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는 세이고 기능과 핸드폰을 연결해 펜을 분실 또는 미아 방지를 할 수 있는 세이콜 기능, 그리고 안드로이드 기기의 앱과 연동하여 펜으로 책을 찍으면 스마트 기기에서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할 수 있는 세이패드 기능도 탑재되어 있다.

 사실 세이펜은 아이들의 동화 전집에 활용하는 것만 이야기를 들어왔기에,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린 아들이 사용할 일이 없어서 그 기능이 궁금하기만 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사용해보니 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세이펜으로 책 읽기를 권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너무 편리하고, 쉽고, 흥미를 유발시키기도 좋고, 디자인도 예뻐 눈길을 끌기에도 부족함이 없고 말이다. 그리고 MP3기능도 있어서 음원을 넣어서 들을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블루투스를 활용한 기능들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세이펜이 이렇게 그래머 인 유즈랑 호환되면서 어린이 뿐만 아니라 성인까지 활용 범위를 넓혔는데, 굉장히 유용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 말이다. 무엇보다 너무 가볍고 손에 딱 맞는 사이즈라 장소에 구애없이 들고 다니면서, 지하철이나 카페 등에서도 쉽게 영어 공부에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성능 녹음 기능도 있어 공부를 하면서 사용자의 발음을 그대로 담아내주어 영어 발음을 직접 확인하고 교정할 수도 있고 말이다.

 

내가 만난 버전은 그래머 인 유즈 베이직 편이라 굉장히 기초단계 문법인데, 한글판이 아니라서 전부 영어로 되어 있다. 물론 그럼에도 간단히 직역이 가능할 만큼 쉽고, 알아보기 쉽게 짜임새를 갖추고 있어 부담스럽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그림도 곁들여 있어 아이들이 처음 시작하는 영어 공부로 도전하기도 좋을 것 같다.

나 역시 내가 먼저 한번 복습하듯이 보고 난 뒤에, 아들이 조금 더 자라면 처음 시작하는 영어 공부를 이 책과 세이펜으로 쉽고 재미있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으니 말이다

 

각각의 유닛은 딱 2페이지로 구성되어 있고, 필수 문법 사항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전체 116 유닛이면 가볍게 문법 책 한권을 마스터 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전체 풀컬러 버전이라 지루할 수 있는 문법 공부를 조금 덜 지루하게 만들어준다고 할까. 풀컬러 그림들 덕분에 아이들도 더욱 집중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영어 공부! 언제나 늦었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다시 한번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그래머 인 유즈와 세이펜으로 말이다.

 

한때 영어 공부 좀 안해 본 이가 어디 있으랴. 학교에서 주구장창 주입식 영어 공부를 해왔고, 대학에 가서도, 직장에 가서도, 영어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따라서 많이 들으면 늘어지는 테잎부터, 음질이 좋아진 씨디, 그리고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엠피쓰리 파일과 영어 방송까지.. 꽤 많은 히스토리를 거쳐오면서 나름 영어 공부를 해왔지만 글쎄, 의지의 문제인지 방법의 문제인지 아직까지 꽤 만족스러울 만한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영어였다.

어쩌면 그래머 인 유즈와 세이펜과 함께라면 올해 다시 한번 새롭게 도전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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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드의 영역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이규원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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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행우주라는 말을 다들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우주에 지구만 생명체가 존재할 리 없으며, 평행하는 다양한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절대 갈 수 없는 것이 또한 평행선이다. 그것은 만날 수 없는 선이니 말이다. 평행이란 나란히 가는 것이기에 존재해도 서로 만날 수 없는 세상이다. 우리가 일백 번 고쳐 죽어도 다른 차원의 자신이나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는 없다. 물론 평행하는 우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도피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진짜 평행우주가 존재하고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될 두 세계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쓰쓰이 야스타카의 신작은 바로 그것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농담 같은 이야기이다.

가게 안에 빵 굽는 냄새가 가득 차고 반지하층에서부터 그 고소한 향이 거리로 흘러 나가 행인들이 고개를 살짝 쳐들고 코를 움찔거리는 개점 직전 시각, 시마가 반지하층에서 커다란 쟁반에 담아 매장으로 옮긴 바게트를 보고 마사히코는 낯이 창백해지고 가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일 보던 동물 모양의 작은 바게트 수십 개 위에 단 하나, 떡 하니 놓여 있는 바게트가 인간의 한쪽 팔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게트로 구워진 여성의 오른팔 모양은 실물 크기에 길이는 40센티 정도, 팔꿈치 조금 위부터 곧게 편 손가락 끝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강변 둔치에서 미대 학생이 여성의 오른팔을 발견한다. 어깨부터 절단된 여성의 팔은 깨끗하게 절단된 것도 아니고 난폭하게 뜯겨진 것도 아니고 어깨에서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인다.  사건을 조사하러 현장에 나온 경찰과 대화하는 감식반의 쓰쓰미는 그것을 이렇게 평가한다. '아마도 하느님이 아담과 함께 만든 이브의 팔도 이렇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여기에는 평범한 여성의 팔에서 엿보이는 보편적 에로티시즘이 있다', 팔에 관한 자신의 의견 피력을 무려 두 페이지 가깝게 늘어놓는다. 손 페티시스트가 아닌가 싶을 만큼 말이다. 평범한 미스터리처럼 시작한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살해된 여성이 누구인가. 대체 왜 이런 범죄를 저질렀으며,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가.는 이 작품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여성의 오른팔' 바로 그 자체가 의미심장한 것이다.

뒤이어 한쪽 다리가 발견되지만, 행방 불명 된 여성 중에 그런 팔이나 다리에 어울리는 피해자는 없었고, 수사에 더 이상의 진척이 없을 때 경찰서로 기이한 메일과 투서가 들어온다. 아트베이커리라는 빵집에서 여성의 팔을 본뜬 바게트가 판매되고 있는데 그것이 강변 둔치에서 발견된 여성의 오른팔과 매우 흡사하다는 주장이었다. 아트베이커리는 미대생을 알바로 고용해 동물 모양의 바게트를 파는 걸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알바생 두 명이 휴가를 가면서 임시로 고용된 미대생이 그저 재미로 팔 모양 바게뜨를 만들게 되었다. 그것을 단골이었던 유이노 교수가 보고는 극찬을 하며 사가서 신문 칼럼에 그 이야기를 기고하면서 팔 바게뜨가 유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경찰이 찾아갔을 때는, 그것을 만들었던 미대생이 알바를 그만두고 연락이 안 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갑자기 유이노 교수가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행동과 말을 하고 다니기 시작한다. 자신을 신 혹은 그것에 가까운 존재라고 주장하며, 무슨 일이든 뭐든지 안다고 예언 비슷한 말을 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글쎄 말했잖아. 나는 뭐든지 안다고."

"꼭 하느님 같네요."

오가와 요시미는 절반은 경악하고 절반은 야유하는 투로, 그리고 자신의 실책을 까밝힌 데 대한 분노까지 보태서 애써 웃는 낯을 꾸미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은 아니야."

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그것에 가까운 존재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신이라며, 유이노 교수의 몸은 단지 빌렸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공원에 모이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 되고, 언론에서도 취재를 하러 오는 등 일대 난리가 난다. 그러다 한 남자를 가볍게 건드려 뇌타박상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고, 그 청년이 다음 날 멀쩡하게 일어났지만 일이 커져 재판에까지 이르게 된다. 자신을 신이라고 자처하는 과대망상에 빠진 이상한 남자와 벌이는 이상한 재판, 피고인에 대한 상해죄는 오직 그가 법정에 서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되었든 법정은 그가 정신이상이라고 밝혀지지 않는 이상 그에게 구형을 해야 한다. 황당무계한 세계관처럼 들리는 것을 너무도 진지하게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이 이상한 이야기는 하나의 농담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굉장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힘도 느껴진다.

다중우주 또는 평행우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외에도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실제 과학자들이 말하는 평행 우주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의 끝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 어두운 에너지로 가득 찬 신비로운 풍경 속에 존재하는 세계, 또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공간 안에 있는 세계.

"나나 당신들이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가능세계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이야기 말이야. 여기가 단지 소설 속의 세계라고 하면 어떨까. 독자가 보자면 나나 당신들이 있는 이 세계는 가능세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겠지. 당신들도 알잖아. 여기가 소설 속의 세계라는 것을."

"역으로 말하면, 우리 세계에서 보자면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의 세계야말로 가능세계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도 있겠지."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세계가 다른 세계와 공간적으로 겹쳐져 있다는 설정 자체가 매혹적이다. 이 작품의 서두에 등장하는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출현한 이유에 대해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는 대목도 매우 흥미롭고 말이다. 한쪽 세계에만 존재하는 누군가가 다른 한쪽 세계에 등장하면서 변수가 발생하고, 그 결과 이 모든 혼란이 생겼다는 쓰쓰이 야스타카의 논리가 모두 설득력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발상 자체는 흥미롭기 그지 없다. 50년이 넘는 작가 생활 내내, 전에 없는 난센스와 블랙 유머가 작렬하는 작품들로 '쓰쓰이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열광적인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SF 작가답게, 자신의 최고 걸작이며 아마도 마지막 장편일거라는 말에 부합하듯이 이 짧은 작품 안에 굉장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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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딩 노트
tvN [내게 남은 48시간] 제작팀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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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당신에게 죽음이 배달된다면? 게다가 오늘은 바로 당신이 죽기 이틀 전이라면 말이다.

앞으로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48시간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당장 뭘 해야 할까.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음식을 먹으며 어떤 마지막을 꿈꿔야 할까.

'가상 죽음 배달'이라는 이상하고 오싹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tvN의 프로그램 [내게 남은 48시간 : 웰다잉 리얼리티]이라는 방송이었는데, 가상 죽음을 소재로 게스트가 출연해서 48시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남은 인생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방송을 보면서, 처음 죽음을 배달받는 그들의 모습이 (비록 연출된 것일지라도) 굉장히 무섭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결국 언젠가는 누구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일이니 말이다.

 

아무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죽을 날짜와 시간을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숱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혹은 소설 속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인물들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왔는지, 우리는 참 많이 만나 왔다. 하지만 그건 모두 '남의 일'이었고, 정작 '내게 닥친 일'이 아니었기에, 그저 강건너 불구경 하듯 무심히 보아왔던 것도 사실일테고 말이다. 그 어떤 불행도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만 않다면, 사람들은 또 아무렇지 않게 순간을 살아내는 존재들이니까.

이 책 <해피 엔딩 노트>는 방송에 출연한 그들이 48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의미 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 계획을 적어 내려가고,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들도 작성했던 '엔딩 노트'이기도 하다. 나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돌아보며 다양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내가 미처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며 소소한 행복들을 일깨워주는 노트이기도 하고 말이다.

나를 위한 처방전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을까요? 내 몸과 영혼을 위한 좋은 일, 지금부터 시작해봐요)

'나를 위한' 이라는 대목부터 참 머쓱해졌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아이를 쫓아다니고, 아이를 위해서 뭔가를 챙기고, 그리고 남는 시간을 쪼개어 집안 일을 해치우고,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의 밥을 차리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한밤중이 되어 버리는 나날을 벌써 이 년 넘게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도 바삐 사느라 나를 돌아볼 여유도, 거울 한번 제대로 볼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으니, '내 몸과 영혼을 위한' 일 따위야 내 삶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어떻게든 하루에 몇 자라도 책을 읽으려고 애쓰는 것이 그나마 나를 지탱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마저도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는 나날이기도 했고 말이다.

내일부터라도, 나를 위해서 하루에 단 몇분이라도, 시간을 내어 보고 싶다.

 

분노 유발자들 (어처구니없는 직장 상사, 예의 없는 이웃, 환경오염. 분노 유발자들 속에서 살아남는 나만의 생존수칙이 있나요?)

 

하핫.. 분노 유발자들을 기재하는 페이지에 이르고 나니 그저 유쾌한 기분마저 든다. 지난 연말까지 나의 분노 지수는 그야말로 최대 게이지에 달했고,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 지수 역시 폭발할 지경에 이르른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모든 스트레스를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누군가에게 풀지 못해 그야 말로 화병이 생길 지경이다보니, 잦은 두통과 소화 불량으로 고생하기도 했었다. 여기 노트에 그것들을 몇자 적기만 해도 화가 어느 정도는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뭐, 말 다했지. 올해에는 분노를 다스리는 나만의 생존방법을 좀 진지하게 강구해봐야 할 것 같다.

살면서 내가 가지 못했던 길에 후회와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때 당당히 아니라고 말할 걸, 그때 왜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에 대한 자각은 꼭 지나가고 나서야 들게 마련이니 말이다. 가끔은 이미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기고, 육아와 가사일 때문에 직장도 그만둬버린 내 삶에 더 이상의 선택은 없을 것 같고, 이제 갈림길 앞에 설 일은 생기지 않을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트에 기재되어 있는 것처럼 마냥 미련만 남기고 있을 게 아니라, 그때 내가 그랬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를 구체적으로 적으면서 정리를 하게 된다면, 그럼 후회라는 감정도 좀 더 옅어지지 않을까하는 기분도 든다. 뭐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실제보다 더 커지고 부풀어져서 기억 속에 저장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한때 임종체험이 유행처럼 매스컴에 소개되는 걸 보며, 신기해했던 적이 있다. 실제로 영정사진도 찍고, 유서도 작성하고, 입관까지 직접 해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지만 실제로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면하게 되는 순간은 진짜 그 날이 오기 전에는 절대 짐작조차 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우리가 모두 언젠가는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내게 남은 48시간]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해피 엔딩 노트>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처음부터 한번 돌아보게 되었던 것 같다. 내 어린 시절은 어땠으며, 대학이라는 사회에 처음 부딪쳤을 때는 또 어땠고, 졸업 후 첫 직장 생활, 그리고 나를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인연들과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났던 순간,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던 그 순간까지 말이다.

 

이 노트는 그렇게 나라는 한 인간의 삶을 처음부터 현재까지 돌아보게 만들고, 추억에 젖게 만들고, 설레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그러다 후반부에 오면 나의 장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유언장을 써야 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죽음이 찾아오기 마지막 10초를 남겨두고,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다섯 장면을 꼽아보고, 가족들과 지인에게 보내는 나의 장례식 초대장도 작성해보고, 초대할 사람의 명단과 연락처 리스트까지 기재하고 나면 정말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다. 진짜 마지막에 다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이다.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남겨질 반려동물과 가족들에게,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단 한사람에게 내 주변을 정리해주길 부탁하는 글을 쓰게 될 즈음에 이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노트의 무게가 묵직해지면서 비로소 진짜 나의 마지막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이런 마음 가짐이라면 내일부터 나에게 오는 온갖 스트레스와 짜증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죽고 나면 만사 무용지물인 그것들에 집착하고 얽매여 있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새롭게 나에게 주어진 매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아까울텐데 말이다.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래서 소중한 것 같다. 아무리 어리석은 이라도, 아무리 대담한 이라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나의 남은 생이 마지막까지 해피 엔딩으로 그려지길, 조심스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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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동화전집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한스 테그너 그림,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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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동화를 읽고 있는 동안은 뭔가 보호받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던 것 같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불만이 생기거나,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거나,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답답할 때, 나는 안데르센의 동화들을 은신처 삼아 잠시 동안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에게 잘 골라 펼쳐 든 한 권의 책은 방패이자 방화벽이며, 투명인간의 망토였던 셈이다. 어릴 때부터 북적북적 시끄러운 집안이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독서의 매력을 알아차려버린 것도 있지만, 나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이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던 든든한 친구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눈의 여왕, 인어 공주, 성냥팔이 소녀, 미운 아기 오리 등등.. 안데르센의 수많은 동화들은 지금도 여전히, 내가 험난한 세상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하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이번에 출간된 안데르센 동화전집이 가치가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가장 많은 작품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는 거 아닐까 싶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되었던 안데르센의 전 작품은 156편이었는데, 이번에 12편이 더 추가되어 최초로 168편이 수록되어 있는 전집이니 말이다. 게다가 클래식 일러스트가 무려 64장이나 함께 담겨 있어, 읽는 내내 더할 나위 없이 향수를 느끼게 만들어주고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처음 만났던 동화의 판본에는 언제나 이런 일러스트가 함께 수록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안데르센의 동화는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 다시 읽어도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은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단순하지만 유치하지 않고, 짧지만 긴 여운을 남겨주며,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어른들의 삶도 비춰주고, 굉장히 판타지처럼 읽히지만 반대로 매우 현실적이기도 하니 말이다. 바로 그 보편성과 아름다움이 안데르센의 수많은 작품들이 아직도 여전히 각색되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이유이기도 할테고 말이다.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너무도 유명해서 내가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이 책을 통해서 하나씩 읽어나가다 보니 많이 알려진 작품들 외에 너무 좋은 이야기들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동화'이기 때문에 웬만한 작가들의 '단편'보다도 더 짧은 이야기들인데, 어쩌면 그렇게 수많은 삶의 진리들과 보석같은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는지 말이다.

 

"이 세상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또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는 거야. 이제 난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어. 사람들은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걸 겪어 봐야 해. 그러면 결국 우리는 모두 탑지기처럼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게 된다구."

-'탑지기 올레' 중에서

 

"진딧물이라구! 사물을 올바르게 불러야지. 일상 생활에서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동화에서라도 올바르게 불러야 하는 법이야. " 동화 할머니가 큰 소리로 말했다.

 

-'녹색 옷을 입은 작은 병사들' 중에서

 

사람들은 말과 의미가 다른 말을 종종 한다. 사람들은 말은 많이 해도 의미가 별로 없는 말들을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다. 중상모략을 하는 말들이 많으며 해가 되지 않는 말들도 많다. 사람들의 말 속에는 진실과 유머가 숨어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중에서

 

안데르센의 <동화집>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의 경험에서 나온 거라고 한다. 그가 보고 행한 모든 것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영감을 준 것이다. 안데르센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이야기들은 나의 생각 속에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개울물과 한 줄기 햇살과 한 방울의 말루트 액만 있으면 꽃을 피우는 씨앗과 같다." 그는 이야기에 현실적인 측변을 살짝 가미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는 삶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고, 끔찍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으며, 순조로울 수도 잔인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의 이야기는 동화지만 모두 행복하게 끝나지 않는다.

 

 

 

무려 1280페이지의 두툼한 페이지이지만, 그 속에 수록된 168편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10분이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짧다. 하루에 십분만 시간을 내어보자. 그리고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서 그 이야기를 읽어보자. 어쩌면 그 이야기로 인해 당신의 하루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 공주, 눈의 여왕의 지배를 받아 심장이 얼음덩이가 된 소년 카이와 그를 찾아 세상 끝 라플란드로 떠난 소녀 게르다, 팔지 못한 성냥에 불을 밝히며 환상 속에서 잠들어 가는 소녀들이 당신이 잊고 있던 그 무언가를 깨닫게 해 줄 지도 모르니 말이다.

 

우리의 부모가 읽었고, 우리가 어린 시절 읽었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읽고 있으며, 우리의 자녀들이 또 읽을 수밖에 없는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동물이나 식물, 돌들이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장난감이 생명을 가지고 영혼이나 요정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내가 살아온 인생사가 바로 내 작품에 대한 최상의 주석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던 안데르센의 어린 시절과 인생이 불행과 절망으로 얼룩져있었기에, 그가 작가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해 창작한 수많은 작품들 속에 아름다움과 더불어 처절한 슬픔도 함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배수아 작가가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내 어린 시절의 한 페이지를 완성해주었다'고 말한 걸 본 적이 있다. 누구에게든 그렇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그만큼 특별하고 소중한 이야기들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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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어린시절 읽은 동화를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책 살 돈이 많으면 그림형제 동화 전집, 안데르센 동화 전집을 사고 싶어요. ^^

피오나 2017-01-12 19:16   좋아요 0 | URL
그림형제,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아이들이 보기에도, 어른이 읽기에도 좋은 책이죠ㅎㅎ
 
당신의 완벽한 1년
샤를로테 루카스 지음, 서유리 옮김 / 북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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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숙제를 준다면 어떨까. 아침마다 감사한 것 세 가지 적어보기. 생각나는 것 뭐든지 상관없지만, 단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그리고 저녁에는 하루에 있었던 좋은 일 세 가지를 적어보는 거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 있냐고? 굳이 글로 적어보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감사한 것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과연 그럴까? 상투적으로 감사할 것들 말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감사. 정말 '감사'라는 표현에 걸맞고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주고 아침에 일어날 때 가장 먼저 생각나고 밤에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을 때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그런 것이, 과연 당신에게도 그런 게 있을까?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을 제시한다. 가장 평범하고도 특별한 방식으로 말이다.

정말 사춘기 철부지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 무슨 쓰잘데기 없는 짓인가. 이럴 시간이 있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그의 삶에 감사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굳이 거창하게 적을 필요가 없단 말이다. 아버지처럼 치매에 걸리지 않아 망각의 위협이 없다.

예를 들어 감사한 것... ... 감사한 것은..........

내가 감사한 것이 도대체 뭐지?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출판사를 운영중인 요나단은 대저택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지만 마흔 두 살인 현재 혼자이다. 부인인 티나가 그와 가장 친한 친구와 눈이 맞아 7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이혼을 요구했고, 자신이 주었던 그 모든 부를 기꺼이 버리고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한나는 사귄 지 4년이 넘어가는 남자 친구 지몬의 프로포즈를 기다리며, 자신이 10년 넘게 꿈꿔왔던 '꾸러기교실' 프로젝트를 친구인 리자와 함께 운영 중이다. 매사에 까칠하고 친구가 없는 요나단과 무한 긍정주의에 아이들을 사랑하는 리사의 이야기가 그렇게 교차로 진행된다. 요나단의 현재와 두 달 전 리사의 시간이 차례로 진행되다, 어느 순간 하나의 현재로 만나게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여느 때처럼 새벽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요나단은 우연히 자신의 자전거 손잡이에 매달린 가방 속에서 두툼한 다이어리를 발견하고 어리둥절해한다. 가죽 표지의 다이어리 첫 페이지에는 '당신의 완벽한 1'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고, 날짜당 매 페이지마다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짧은 격언과 그날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한 다이어리는 11일부터 1231일까지 모든 장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가끔은 거창한 스케줄도, 또 가끔은 소박한 스케줄도 있었다. 게다가 다이어리의 글씨체가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와 이혼하고 떠난 어머니였으니 말이다. 한나의 남자친구 지몬은 자신이 내년 말까지 살아 있을 가망이 거의 없다는 선고를 받고 절망에 빠진다. 그래서 한나에게 프로포즈 대신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놓아주고 싶다고 이별을 선언한다. 갑작스러운 비극을 받아들일 수 없어하던 한나는 지몬을 위해 내년 계획을 짜기 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매일을 위한 365가지 아이디어로 그의 미래를 위한 초석을 쌓겠다는 것이다. 오직 그를 위한 다이어리를 만들어서 그가 다시 힘을 내 병과 싸울 의지를 북돋아주고,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적어도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이 되길 바랬기 때문이다. 정말 그의 마지막 1년이라면, 정말 완벽한 1년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몬은 다이어리를 선물 받고 얼마 뒤 완전히 잠적해버리고, 다이어리의 주인을 찾을 것인지 고민하던 요나단은 자신의 출판사가 파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생을 낭비하기에는 하루하루가, 1초도 너무 소중했다. 걱정과 근심에 파묻혀버리기에는 너무 소중한 인생이었다.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걸리느냐에 상관없이. 누구도 자기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지금' 그리고 '오늘'이다. '어제'는 상관없고 더는 중요하지 않으며 '내일'은 아무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죽을 병에 걸린 연인을 위해 새로운 사람을 찾아 준다는 설정은 매우 진부하고 뻔하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이것은 매우 사소한 디테일에 불과하다. 완전히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주인공이 각자의 시간을 겪어내다가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초반부가 아니라 완전히 후반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모른 채로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우연히 피해가기도 하면서 그들은 무려 500페지가 넘어서야 하나의 교집합으로 같은 시공간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그 많은 페이지에서 대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는 걸까.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작성한 다이어리대로 일상을 채우는 한 남자가 자신의 삶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상황들과 사라져 버린 남자친구 때문에 절망했다, 그 다이어리를 통해 완벽한 삶을 살고 있을 어떤 남자를 찾으려는 한 여자의 일상이 겪게 되는 다이나믹한 상황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과연 이들이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될까. 다이어리를 통해서 이들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고, 또 어떤 순간을 만들어가게 될까 매 순간 고대하면서 두툼한 페이지들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

작가의 전작인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타인은 지옥이다> 모두 흥미롭게 읽었기에 이번 신작도 기대를 했다. 두 작품은 비프케 로렌츠라는 이름으로, 이번 작품은 그녀의 또 다른 필명인 샤를로테 루카스라는 이름으로 발표가 되었는데, 필명이 여러 개 인 것도 그렇지만 각각의 작품들이 분위기가 전혀 달라 이거 같은 작가가 쓴 게 맞나 싶을 만큼 완전히 달랐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유쾌한 캐릭터와 다소 황당한 설정이 풋풋한 재미를 주었던 작품이라면, <타인은 지옥이다>는 소름끼치는 오프닝이 돋보이는 본격적인 스릴러물이었다. 두 작품의 유일한 공통점은 독창적인 소재와 섬세한 심리 묘사 정도가 될 것이다. 이번 작품 <당신의 완벽한 1>은 유쾌발랄한 로맨스 소설처럼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무언가를 던져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극중 지몬을 위해 만든 한나의 다이어리 덕분에, 엉뚱하게도 요나단이 '지금 그리고 여기'의 삶에 집중하게 된 것처럼, 우리 삶의 수많은 우연들이 모여 인연을 만들고,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리고 내 현재를 가득 채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훌쩍 넘었다. 나의, 그리고 당신의 올 한 해가 이들처럼 '완벽한 1'으로 만들어지기를 고대해본다. 어제보다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위해 살수 있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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