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티모어의 서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사 년 전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을 읽고는 올해의 발견이라고 마구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미스터리와 소설쓰기라는 매혹적인 소재를 절묘하게 그려낸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며 두 권짜리 책을 앉은 자리에서 네 시간 동안 내리 읽었다. 캐릭터, 플롯, 반전 모두 너무 흥미진진했던 터라, 왜 조엘 디케르의 다음 작품이 나오지 않는 건지 그 동안 궁금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새로운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이번 작품의 화자가 전작과 마찬가지로 작가 마커스 골드먼이라고 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읽기로 했다. 당연히 재미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제발! 정신 나간 소리 좀 작작하게. 이제 책의 시대는 갔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죠?”

“요즘 20대들은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출판산업은 이제 끝났어. 아마도 자네의 손자들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라오의 상형문자를 바라보듯 책을 바라보게 될 거야. 자네 손자들이할아버지, 책은 어디에 쓰는 물건이에요?’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 줄 텐가? 그때가 되면 책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있을 거야.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들이라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망하게 되지. 그때 가서 깨닫고 후회해봐야 소용없어.”

 

전작에서 마커스 골드먼은 스물여덟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로 단 몇 주 만에 유명인사가 된 소설가이다. 첫 작품의 어마어마한 성공은 그를 백만장자로 만들어주지만, 이후 단 한 줄도 써내지 못하는 슬럼프에 빠졌을 때, 그는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해리 쿼버트를 찾아 간다. 그리고 서른이 된 마커스는 해리 쿼버트에게 벌어진 사건을 소설로 써서, 겨우 두 번째 책으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된다. 그렇게 해리 쿼버트 사건이 보도된 2008년부터 사건이 발생한 1975년까지의 시간이 교차되면서 이야기는 퍼즐 같은 미로를 시작해, 마커스 골드만의 신작이 되는 한 편의 소설이 쓰여지는 과정이 작품의 전체 스토리가 되었었다. 그리고 33년 전에 있었던 그 살인사건의 수사 과정에 긴박감과 미스터리를 더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번 작품 <볼티모어의 서>에서 주인공은 마커스 골드먼이지만, 같은 인물을 등장시킨 이유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기에, 전작과의 연계성은 거의 없다. 그저 유명 소설가인 주인공이 필요했기에, 전작의 마커스 골드먼이 다시 등장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번 작품은 전혀 다른 드라마가 펼쳐진다. 전작이 미스터리의 비중이 높았다면, 이번 작품은 가족 드라마의 성격이 더 강한 느낌이다.

이야기는볼티모어 골드먼가족과몬트클레어 골드먼가족에서 시작한다. 마커스 골드먼의 큰아버지 사울이 사는 곳이볼티모어이고, 아버지 네이튼이 사는 곳이 뉴저지 주몬트클레어이다. 큰아버지는 볼티모어에서 가장 신망이 두터운 로펌을 이끄는 변호사였고, 화려한 경력을 기반으로 중요한 소성을 도맡았다. 큰어머니는 굉장히 아름다웠고, 존스홉킨스 병원 암센터에서 일하는 베테랑 의사였다. 아들 힐렐은 마커스와 동갑내기였고, 사촌간인 그들은 친형제보다도 더 가깝게 지냈다. 마커스는 어린 시절 내내 큰아버지 가족에게 동경과 부러움을 느끼면서 자라왔다. 그들은 대저택, 고급 자동차, 여름 별장, 타워 아파트, 스키휴가까지 풍족한 경제력으로 늘 자신만만했고, 누구에게나 존경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내내 자신의 부모들을 존경하고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큰아버지가 자신의 부모였으면, 우리도 그들 가족처럼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힐렐의 친구 우디까지 셋은 골드먼 갱단을 결성하고 영원한 우애를 맹세한다. 모든 것을 함께 하고, 모든 것을 나누었던 이들의 시대는 매력적인 여자 알렉산드라 네빌이 등장하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지만, 완벽한 비극의 시작은 비단 그것에서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왜 글을 쓰냐고 묻는다면?

글이 삶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우리가 부조리한 삶에 맞서는 복수전을 펼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준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 성벽처럼 강한 정신,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기억의 힘을 증명할 수 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소설가인 마커스 골드먼이 완벽하게 행복해 보여서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던 볼티모어 골드먼 가족들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을 파헤치는 과정이 그려진다. 그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들의 행복이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었던 건지, 그들에게 닥친 비극의 실체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의 후반부에 볼티모어 골드먼 가족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해서 글로 써내면서 끔찍한 비극을 지울 수 있었고, 잊을 수 있었고, 누군가의 과오를 용서할 수 있었고, 자신이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볼티모어 골드먼들이 과거에 누린 영광은 이미 다 사라져버렸고, 이제는 작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상황에서, 자신에게 남은 건 지금 써 나가는 소설밖에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 보낸 오늘 하루가 우리의 생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다. 누군가의 생을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는 비극 또한 단 하나의 원인 때문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갖가지 우여곡절이 쌓여 누구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형성된 결과일 수도 있다. 산다는 것은 매 순간 뭔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과정이고, 수많은 사람들과 맺어가는 관계에서 우리가 매번 솔직할 수는 없다. 오해와 편견이 만들어낸 허상이 시간이 흘러 정말 실체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고, 좋은 의도로 한 착한 거짓말이었지만 상대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되고 그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완벽해 보이던 삶이라도 단 한 번의 실수로 완전히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릴 수도 있으니 세상에 영원한 거란 아무것도 없는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불확실한 삶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끔찍한 비극이 닥치더라도, 불행이 피할 새도 없이 밀어닥치더라도, 어쨌거나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만 하니까. 그러니 사실 그 일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정작 중요한 건 우리가 그 일들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극중 마커스는 글을 통해 골드먼들의 삶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었다.

조엘 디케르는 전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스타일로 이 두툼한 책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주었다. 작가라는 직업과 살인 사건 뒤에 숨겨진 미스터리에 치중했던 전작에 비해, 이번 작품에서는 가족 드라마에만 집중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술술 읽히지만 페이지가 점점 쌓일 수록 이야기가 묵직해지는 느낌이다. 정말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할까. 조엘 디케르는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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