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시장, 각오가 필요하지 텍스트T 6
김혜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가 달랐으면, 그 왕 노릇을 잘했으면 상황도 달라졌겠지. 근데 그래서, 그게 뭐? 지금의 너는 이렇고, 그게 너야."
사실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게 주문이 걸려 있지 않았다면 시장 밖에선 눈치 볼 일 없었을 거고 시장에선 쫓길 일 없었겠지.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 지금의 내가 나다.            p.136

 

열다섯 소녀 모라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모라의 등을 밀면 상대가 튕겨 나가고, 누군가 모라에게 물건을 던지면 코앞까지 날아온 물건이 되감기 하듯 도로 상대에게 날아가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모라는 그 동안 누구도 쉽게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못하고, 늘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했다. 이제야 그 모든 일들이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걸어 놓은 반사의 주문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모라는 엄마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엄마가 있다는 곳은 바로 '남대문시장'이었다. 엄마는 그곳의 물품 보관소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가 사는 이쪽 세상이 아닌, 저쪽 세상이었다. 겹쳐져 있지만 서로 다른 쪽을 느끼지 못하고 따로 존재하는 두 세상, 그 두 세상이 통하는 일종의 교차로가 시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치 해리포터의 킹스 크로스 역 9와 3/4 정거장처럼 모라는 회현역에 내려 바닥에 표시된 특별한 안내판을 보고 그곳을 찾아가게 된다.

 

엄마는 어떻게 생겼을까, 왜 엄마는 저쪽에, 아빠와 나는 이쪽에 살고 있을까, 이쪽과 저쪽은 얼마나 다를까, 모라는 궁금한 게 많았다. 무엇보다 모라는 엄마가 걸어 놓았다는 반사의 주문을 없애고 싶었다. 엄마가 주문을 풀어 준다면 원래의 세상에서도 이상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감추며 자신을 눌러야 했던 모라는, 시장에서 더 이상 감추거나 숨지 않는다. 시장에 처음 도착한 그 순간부터 엄청난 소동에 휘말리게 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권력의 암투 속에서 죽은 자로 살아야 했던 선왕이 시장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약장수들과의 거래에서 실패해 아버지의 약을 살 수 없게 된 아이를 도와주고, 함께 움직이게 된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서 나선다. 그리고 그 모험은 모라를 조금씩 성장시킨다.

 

 

시장은 주고, 받는 곳. 우리는 대가를 치렀고 지금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지금이 좋았다. 마음껏 싫어하고, 좋아하고, 믿고, 의지하고, 화를 내고....... 참았던 것을 다 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나는 압력 밥솥과 같지 않았다. 여기선 끓는 걸 참을 일이 없어서였다. 그냥 끓고, 넘치고, 불이 꺼졌다 켜지고, 계속 그랬어서. 다 끓고 난 내 속은 잔잔했다.             p.233


주로 청소년 소설과 판타지 동화를 쓰는 작가이지만, '김묘원'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던 <고양이의 제단>이라는 미스터리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작품에서도 십대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생생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여주었는데, 이번 작품의 십대 주인공들 역시 개성 넘치는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엄마를 만나 주문을 풀기 위해 남대문시장에 간 모라는 살아 있으나 죽은 선왕과 엮이면서 각자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쫓기게 되는데, 숭례문에서 남대문시장까지, 가장 한국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판타지가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표백제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색이 바래 유령처럼 보이는 사람인 껍데기들이 휘청휘청 걸어 다니고, 그림 속에 있는 까치가 말을 하며,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하기도 하며, 비싼 건 싸게 팔고, 싼 건 비싸게 파는 이상한 장이 열리는 기이한 그곳에서 모라는 엄마를 무사히 만날 수 있을까.

 

 

청소년 소설이라는 카테고리로 가둬 두기에는 완성도 높고 짜임새 있는 판타지 소설이다. '이쪽'의 남대문시장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장소이지만, '저쪽'의 남대문시장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시장에서의 엄청난 모험이 모두 끝이 나고 나서야 모라는 반사의 주문이 자신을 세상 전체로부터 보호하는 주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동안 자신이 보호받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담긴 엄마의 진심도 모르고 살아 왔던 것이다.

 

시장은 무언가를 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곳이었고, 모라와 친구들은 대가를 치르고 지금을 얻었다. 시장에 오지 않았다면, 낯선 이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이 모든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만, 엄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저 원망하며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모라는 그렇게 자신을 보호해주던 반사의 주문 아래에서 살 때는 절대로 느낄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끼며 성장한다. 작가는 새로운 신화를 쓰고픈 마음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신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소년 대신, 어머니를 찾아가는 소녀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것이다. 엄마에게서 받은 주문을 없애고,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스스로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모라의 모습에서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느낀다.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장소, 이 매혹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모험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덕후 일기 - 시간 죽이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2
송승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짜 삶으로 대하라는 권유. 나는 그 권유를 충실히 받아들였다. 나는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하는 내내 즐겁지 않았다. 어떤 재미있는, 신나는, 멋진, 잘 만든 게임들을 할 때 느끼는 즐거움을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하면서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나는 이 게임에 몰입했다. 이 게임을 하는 동안 나는 잠시나마 서부 시대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 앞서 말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거기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일은 꽤 복잡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악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p.36

 

김희선 작가의 <밤의 약국>에 이은 핀에세이 두 번째 작품이다. 송승언 시인은 '나는 정말로 오타쿠가 아니다'라고 '오타쿠가 될 만큼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고 단언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 뒤로 몇 페이지만 읽어 보아도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웹툰, 영화, 드라마에 대한 취향의 나열로도 모자라 RPG게임을 위해 팀 모임을 할 정도이니 누가 봐도 오타쿠잖아 싶을 테니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타의 '덕질'을 소재로 하고 있는 책들이 열정과 뜨거움으로 버무려져 있는데 비해, 송승언 시인의 덕질은 대상과 서늘한 거리를 유지하고,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딱 표지 일러스트 속 주인공의 시니컬한 표정처럼 말이다.

 

이 책은 게임 편, 애니메이션 편, 웹툰, 영화, 드라마 편, 그 밖의 취미 편으로 챕터를 나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세상에 수많은 게임들 중에 제대로 해 본 게 몇 개 안 되는 나로서는 게임 편에 대한 글들은 거의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면서 읽었다. 각각의 게임들에 대한 장단점과 특이점에 대해 디테일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들 게임을 해봤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게임들이 거의 다였기에, 조금 어려웠다. 그나마 애니메이션으로 가면 조금 상황은 나아지는데, 그래도 애니메이션을 막 챙겨보는 편은 아니라서 작품에 대한 집요하고도 치밀한 분석들이 호기심을 유발시키진 못했다. 이어지는 웹툰, 영화, 드라마와 그 밖의 취미 편으로 가면 읽기가 조금 수월해지는데, 읽다 보면 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송승언 시인은 오타쿠적인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대체 왜 자신은 오타쿠가 아니라고 하는 걸까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 한편 약간은 꼬인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까닭은 행복하지 않을 자유 또한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떨 때는 숨 쉬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게 삶인데, 행복을 열심히 좇지 않을 자유마저 없는 세상이라면 불행이라는 단어보다 더 불행한 단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왜 갑자기 분수에도 없는 행복 타령을 하고 있는 걸까. 행복이 의무인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참이기 때문이다.           p.263

 

이 책을 구매하면 <송승언의 덕후 외전-내가 만난 유령들>이라는 미공개 에세이를 담은 얇은 책자를 받을 수 있다. 기이하고 으스스한 존재인 유령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가끔 그 기운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이 글 역시 '어릴 적부터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는 부정의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유령 따위 존재할 리가 없다는 그의 생각에 상해를 입힌 사건이 있었다고 하니 더 흥미로워졌다. 여기 수록된 글들은 그가 유령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한 여러 결과물 중 일부라고 한다. 야광이라 밤이면 녹색으로 빛나는 레고 블록 세트 '마법의 성', 게임팩 대여점에서 빌려 결국 악몽으로 남아 있는 게임 '고스트버스터즈', 그 외에도 유령과 관련된 게임, 영화에 관한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히려 본 책보다 이 작은 책자에 담긴 외전을 더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유는 내가 유령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개인의 취향이 있고, '덕질'은 보편적인 사회 현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인데, 이런 방식의 덕질도 있구나 색다른 기분으로 읽었던 작품이다. 시인의 방대한 취미의 편린이 담긴 모험일지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그다지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덕질은 바로 그렇게 누군가한테는 쓸데없고, 쓸모 없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탕진하는 데 진심인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연히 참석한 파티장에서 도난 사건이 벌어지다니. 어찌되나 싶었지만 무사히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어려운 사건들을 수없이 해결해온 Q의 체면을 유지했군. 어휴.'
명탐정의 명성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명탐정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런 의미로는 고독한 인생이었다. 보랏빛 연기가 바람에 일렁거리며 밤의 어둠에 녹아 들어갔다.          - '명탐정 Q 씨의 휴가' 중에서, p.87

 

여러 직업을 가진 여섯 명의 사람들이 해적섬 투어에 초대된다. 중의원, 행로사 사장, 영상 크리에이터, 시스템 엔지니어, 요양 시설 사장, 모델, 이들은 배를 타고 외딴 섬에 도착했다. 호텔에는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고용된 부부가 있었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모두 다이닝에 모인다. 그때 어디선가 그들을 향해 컴퓨터로 합성한 소리가 들려 온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모두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입니다.'로 시작된 그 목소리는 모인 사람들 모두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회피해왔기 때문에, 법관을 대신해 자신이 궁극의 벌을 내리기로 했다고, 목숨으로 죄를 갚으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스피커에서는 그들 각각이 저질러온 악행에 대해 비밀들이 폭로되기 시작하고, 해적섬에 모였던 여덟 명은 다음날 아침 일곱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렇게 한 명씩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아리스가와 아리스 식으로 재해석한 표제작이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루이스 캐럴의<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도가와 란포의 <소년 탐정단 시리즈>를 패러디한 이야기들을 비롯해 미스터리 콩트, 다크 판타지, 블랙 코미디 호러, 괴수 소설, 타이포 그래픽션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분량도 제각각인데 초단편처럼 아주 짧은가 하면, 표제작처럼 중편 이상의 분량인 작품도 있다. 작가의 후기도 수록되어 있어 각각 작품의 집필 과정이라던가 배경에 대해 만날 수 있다.

 

 

 

"이 섬은 지옥이지만, 섬 밖도 지옥이 될 것 같네요. 덴스케가 말한 내용은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 폭로될 거예요."
하루야마는 울적한 표정으로 유리잔에 와인을 반쯤 따라 가느다란 목을 젖히고 마셨다. 이어서 에노키가 맥주를 마시려는데 그 입술이 캔에 닿기 직전에 하루야마의 유리잔이 가녀린 손에서 굴러떨어졌다.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쳐 붉은 액체가 카펫 위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하루야마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털썩 쓰러졌다.        -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중에서, p.378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소설집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들은 국내에도 꽤 많이 소개된 편인데, 신간이 나온 것은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는 테마를 받아서 쓴 소설도 있고, 분량 제한 없이 자유롭게 쓴 소설도 있다. 짧은 작품은 두 페이지, 긴 작품은 중편이라 할 정도라고 한다. 자유롭고 비범한 인상을 마음껏 펼치고 있어, ‘아리스가와 아리스 소설의 견본집’이라 할 수 있다고 하니 그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어 왔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리스는 추리소설의 발전에 공헌한 작가에게 주어지는 ‘일본 미스터리 문학 대상’을 2023년 올해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에 수록된 14편의 작품들을 통해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가가 보여주는 장난기 있고 스타일리시한 매력이 가득한 이야기 세계를 경험해보면 어떨까.
 
작가 아리스 시리즈와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좋아했다면 이번 작품 역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해 온 작가의 저력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라,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종합선물세트같은 느낌도 들 것이다. 무더운 여름, 제대로 된 미스터리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이 작품과 함께 시원한 이야기의 미로를 즐겨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케이지 : 짐승의 집
보니 키스틀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통화가 끝났지만 레스터는 여전히 주방에 서서 불편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배럿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문제 있나?"
"부사장님." 레스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셰이 램버트는 좋은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습니다."
"나도 아는 바야." 배럿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감이지. 잘못된 타이밍에,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었으니까."            p.39

 

도시에서 가장 높은 최신 건물인 마켓플레이스 타워, 일요일이었지만 30층 최상층 두 군데에서 옅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서로 반대편에 위치해 있는 두 곳 말고는 온통 캄캄했다. 한쪽에는 사십 대 초반의 잘 차려 입은 여자가 있었고, 같은 층 반대편 끝에는 사십 대 초반의 키 큰 여성이 대충 묶은 포니테일과 평범한 복장으로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중앙 엘리베이터로 걸어갔고, 문이 스르르 열린다. 두 여자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고, 곧 문이 닫힌다.

 

그리고 7분 뒤, 911에 신고 전화가 걸려 온다. 전기가 나가서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신고였다.

 

 

다시 불이 켜지고, 엘리베이터가 다시 가동되었을 때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은 젊은 여성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탔는데, 한 사람만 살아 남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가능성은 단 두 개로 좁혀진다. 자살 혹은 살해. 엘리베이터 안에 남겨진 여성은 총상으로 사망했다. 죽은 사람은 패션업계의 거물 기업은 CDMI의 인사부 총괄 부장이었고, 살아 남은 사람은 얼마 전부터 같은 회사 법무팀에서 일하게 된 변호사였다.

 

살아 남은 변호사 셰이 램버트는 자살 사건을 눈 앞에서 본 목격자로 구출되지만, 점점 상황이 스스로의 무죄를 증명하지 않는 한 살인자로 몰릴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누군가 그녀를 살인자로 만들려는 듯한 음모까지 뒤에서 벌어지면서, 점점 범인이 되어 모든 것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녀는 죽은 여자가 자살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사건을 자살이 아닌 살인 사건으로 만들려는 이의 의도는 뭘까. 무죄를 주장해야 하는 이와 유죄를 증명하고자 하는 이가 팽팽히 맞서는 이 이야기는 충격적인 도입부만큼이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끝을 향해 달려 간다.

 

 

그들이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면 나는 최대한 설득력을 발휘할 것이다. 내게는 루시를 죽일 수단이나 동기가 전혀 없기에 그녀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합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나는 준비를 마쳤다. 생각을 정리하고 진술할 말을 연습했다. 거들먹거리는 그 여자와 함께 화장실에 갔을 때 찬물로 세수도 했고, 커피 한 잔과 글레이즈 도넛도 받아 들었다. 카페인 수혈을 받고 혈당도 되찾은 것이다. 이제 이 일을 끝낼 준비가 되었다.           p.123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보니 키스틀러는 기업 소송을 전문으로 미국 전역에서 사건을 수임해 성공적으로 활동한 소송 전문 변호사이자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 역시 자신의 이력을 살려 주인공 변호사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고, 기업 내의 복잡한 법적 문제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긴장감을 만들어 내고 있다.

 

<더 케이지>라는 원제 옆에 국내 버전에는 '짐승의 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 이유는 주인공이 엘리베이터를 짐승 우리(케이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 안에 갇혔을 때의 느낌이, 딱 '우리'에 갇힌 느낌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건 제로섬 게임과도 같다. 엘리베이터에는 단 두 명이 있었고, 한 명이 죽었는데 자살한 게 아니라면, 범인은 나머지 한 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살아남은 사람은 총이 발사된 순간 자신이 그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야 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걸 증명해야 하는 이가 다름 아닌 변호사라면, 법률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라면 이야기는 재미있어질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그녀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 진행되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비밀과 반전들이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치열한 두뇌 싸움을 탄탄하게 그려내고 있다.

 

셰이라는 인물이 숨겨온 비밀과 회사의 임원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지금 셰이의 현재에 이르게 한 과거 시점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거대한 스케일로 만든 다음 그 모든 것들을 폭발시키는 이야기의 장악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사실 제목에서 풍겨오는 이미지 때문에 이 작품을 읽기 전에는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거대한 기업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범죄와 음모가 난무하는 법조인의 세계를 그리는 스릴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져 가는 음식들 - 우리가 잃어버린 음식과 자연에 관한 이야기
댄 살라디노 지음, 김병화 옮김 / 김영사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전 세계에서 길러지는 보리 가운데 인간이 먹는 것은 고작 2퍼센트뿐이다. 그 대부분인 60퍼센트가량은 동물 먹이로, 나머지는 몰트(맥주를 만들고 위스키를 증류하는 재료)를 만드는 데 쓰고, 극히 일부분은 발효시켜 간장과 된장을 만든다. 에머 밀과 아인콘처럼 보리를 음식으로 먹는 곳은 대개 먼 오지이거나 살기 어려운 지역이다. 에티오피아의 고원지대에서는 볶은 보리로 만든 보리차가 전통 음료로 남아 있고, 티베트인은 여전히 고지대의 에너지원으로서 보릿가루를 차로 반죽한 참파를 주식으로 삼는다.           p.125

 

세계를 먹여 살리는 모든 곡물에서 수천 년간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 삶의 여러 면모가 더 균질적으로 변했고, 온 세계가 사서 먹는 것이 갈수록 더 똑같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글과 우림에서, 밭과 농장에서, 모든 종류의 생물다양성의 상실이라는 위기는 지구 전체에서 전개되고 있다. BBC 기자이자 음식 저널리스트인 저자 댄 살라디노는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 해왔던 수많은 음식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저자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취재한 결과물인 이 책은 우리가 잊었거나 존재조차 몰랐던 총천연색의 음식들을 소개해주고, 세계화와 대량생산이 가져온 음식의 종말에 대해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위기에 처하다, 그리고 멸종 위험이 있다'는 개념은 대개 야생 생물에 해당하는 말로 여겨왔는데, '세계에서 사라져 가는 음식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부터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시작부터 632페이지라는 두께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각각의 음식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사연들이 화려한 향연의 풍미 넘치는 만찬처럼 펼쳐지고 있어 지루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위기에 처한 음식들'은 야생, 곡물, 채소, 육류, 해산물, 과일, 치즈, 알코올, 차, 후식의 10가지로 분류되어 있다. 각각의 카테고리에는 2~4가지 정도의 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 하드자 꿀을 얻기 위해 탄자니아의 에야시 호수로 향하고, 베어 보리가 자라는 스코틀랜드의 오크니에 가고, 오히구 대두를 만나기 위해 일본의 오키나와로 가본다. 미국, 인도, 중국, 멕시코, 볼리비아, 대한민국, 영국, 덴마크, 우간다, 시칠리아 등등 그렇게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전 세계의 곳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음식들과 식재료들을 만나볼 수 있다.

 

 

 

다양성은 바깥 세계에서도 보존되어야 한다. 치즈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절 이후로 인간은 자연의 숨겨진 힘에 고삐를 채워 초지에서 암소로, 젖에서 치즈로 옮겨놓았다. 치즈는 인간이 쓰는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살아남게 해줄 뿐 아니라 문화를 형성하는 데도 이바지한 음식이었다. 20세기 동안 과학은 모든 것을 더 많이 약속했다.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안전, 더 많은 균질성을 기약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주 많지만, 그 때문에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상실되고 있다. 살레, 스티첼턴, 미샤비너 같은 치즈는 단순한 음식 이상의 존재다.         p.428

 

인간은 야생의 것을 먹는 존재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의 거의 모든 기간에 식물을 채집하고, 견과류와 씨앗을 모으고, 동물을 사냥하는 것이 곧 인간의 생존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지구에 사는 78억 명 가운데 섭취 칼로리의 대부분을 야생에서 계속 얻는 이는 고작 2000~3000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회가 점점 산업화되면서 우리의 식생활도 달라졌고, 농경사회에 비해 야생 식품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온갖 가공 식품들이 우리의 식생활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야생의 식물과 동물, 그들의 서식지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 수렵채집을 하며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왜 야생 식품이 중요한지, 환경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현재의 위기를 헤쳐나갈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말린 카발자 씨앗을 보며 그 밀이 견뎌온 수천 년의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생겼다 사라진 수많은 제국, 살고 사랑하고 죽어간 무수히 많은 인간, 수천 번의 수확, 이 식물이 그 모든 일을 강인하게 겪어 냈다고 생각하면 어떤 음식도 허투루 생각하면 안 되겠다고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보물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뭔가를 잃기 전에는 그것이 소중한 줄 모르는 것이다. 수많은 위기에 처한 음식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의 소멸로 인한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올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위기에 처한 음식들은 현재 우리의 존재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그것들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음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안데스까지, 최고의 음식 저널리스트가 10년 넘게 전 세계를 현장 취재해 소개하는 위기에 처한 음식들을 만나 보자. 하나의 음식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고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문구가 소름끼치게 와 닿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