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연히 참석한 파티장에서 도난 사건이 벌어지다니. 어찌되나 싶었지만 무사히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어려운 사건들을 수없이 해결해온 Q의 체면을 유지했군. 어휴.'
명탐정의 명성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명탐정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런 의미로는 고독한 인생이었다. 보랏빛 연기가 바람에 일렁거리며 밤의 어둠에 녹아 들어갔다.          - '명탐정 Q 씨의 휴가' 중에서, p.87

 

여러 직업을 가진 여섯 명의 사람들이 해적섬 투어에 초대된다. 중의원, 행로사 사장, 영상 크리에이터, 시스템 엔지니어, 요양 시설 사장, 모델, 이들은 배를 타고 외딴 섬에 도착했다. 호텔에는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고용된 부부가 있었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모두 다이닝에 모인다. 그때 어디선가 그들을 향해 컴퓨터로 합성한 소리가 들려 온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모두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입니다.'로 시작된 그 목소리는 모인 사람들 모두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회피해왔기 때문에, 법관을 대신해 자신이 궁극의 벌을 내리기로 했다고, 목숨으로 죄를 갚으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스피커에서는 그들 각각이 저질러온 악행에 대해 비밀들이 폭로되기 시작하고, 해적섬에 모였던 여덟 명은 다음날 아침 일곱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렇게 한 명씩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아리스가와 아리스 식으로 재해석한 표제작이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루이스 캐럴의<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도가와 란포의 <소년 탐정단 시리즈>를 패러디한 이야기들을 비롯해 미스터리 콩트, 다크 판타지, 블랙 코미디 호러, 괴수 소설, 타이포 그래픽션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분량도 제각각인데 초단편처럼 아주 짧은가 하면, 표제작처럼 중편 이상의 분량인 작품도 있다. 작가의 후기도 수록되어 있어 각각 작품의 집필 과정이라던가 배경에 대해 만날 수 있다.

 

 

 

"이 섬은 지옥이지만, 섬 밖도 지옥이 될 것 같네요. 덴스케가 말한 내용은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 폭로될 거예요."
하루야마는 울적한 표정으로 유리잔에 와인을 반쯤 따라 가느다란 목을 젖히고 마셨다. 이어서 에노키가 맥주를 마시려는데 그 입술이 캔에 닿기 직전에 하루야마의 유리잔이 가녀린 손에서 굴러떨어졌다.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쳐 붉은 액체가 카펫 위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하루야마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털썩 쓰러졌다.        -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중에서, p.378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소설집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들은 국내에도 꽤 많이 소개된 편인데, 신간이 나온 것은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는 테마를 받아서 쓴 소설도 있고, 분량 제한 없이 자유롭게 쓴 소설도 있다. 짧은 작품은 두 페이지, 긴 작품은 중편이라 할 정도라고 한다. 자유롭고 비범한 인상을 마음껏 펼치고 있어, ‘아리스가와 아리스 소설의 견본집’이라 할 수 있다고 하니 그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어 왔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리스는 추리소설의 발전에 공헌한 작가에게 주어지는 ‘일본 미스터리 문학 대상’을 2023년 올해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에 수록된 14편의 작품들을 통해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가가 보여주는 장난기 있고 스타일리시한 매력이 가득한 이야기 세계를 경험해보면 어떨까.
 
작가 아리스 시리즈와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좋아했다면 이번 작품 역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해 온 작가의 저력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라,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종합선물세트같은 느낌도 들 것이다. 무더운 여름, 제대로 된 미스터리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이 작품과 함께 시원한 이야기의 미로를 즐겨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