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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시장, 각오가 필요하지 ㅣ 텍스트T 6
김혜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6월
평점 :
"네가 달랐으면, 그 왕 노릇을 잘했으면 상황도 달라졌겠지. 근데 그래서, 그게 뭐? 지금의 너는 이렇고, 그게 너야."
사실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게 주문이 걸려 있지 않았다면 시장 밖에선 눈치 볼 일 없었을 거고 시장에선 쫓길 일 없었겠지.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 지금의 내가 나다. p.136
열다섯 소녀 모라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모라의 등을 밀면 상대가 튕겨 나가고, 누군가 모라에게 물건을 던지면 코앞까지 날아온 물건이 되감기 하듯 도로 상대에게 날아가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모라는 그 동안 누구도 쉽게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못하고, 늘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했다. 이제야 그 모든 일들이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걸어 놓은 반사의 주문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모라는 엄마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엄마가 있다는 곳은 바로 '남대문시장'이었다. 엄마는 그곳의 물품 보관소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가 사는 이쪽 세상이 아닌, 저쪽 세상이었다. 겹쳐져 있지만 서로 다른 쪽을 느끼지 못하고 따로 존재하는 두 세상, 그 두 세상이 통하는 일종의 교차로가 시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치 해리포터의 킹스 크로스 역 9와 3/4 정거장처럼 모라는 회현역에 내려 바닥에 표시된 특별한 안내판을 보고 그곳을 찾아가게 된다.
엄마는 어떻게 생겼을까, 왜 엄마는 저쪽에, 아빠와 나는 이쪽에 살고 있을까, 이쪽과 저쪽은 얼마나 다를까, 모라는 궁금한 게 많았다. 무엇보다 모라는 엄마가 걸어 놓았다는 반사의 주문을 없애고 싶었다. 엄마가 주문을 풀어 준다면 원래의 세상에서도 이상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감추며 자신을 눌러야 했던 모라는, 시장에서 더 이상 감추거나 숨지 않는다. 시장에 처음 도착한 그 순간부터 엄청난 소동에 휘말리게 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권력의 암투 속에서 죽은 자로 살아야 했던 선왕이 시장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약장수들과의 거래에서 실패해 아버지의 약을 살 수 없게 된 아이를 도와주고, 함께 움직이게 된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서 나선다. 그리고 그 모험은 모라를 조금씩 성장시킨다.
시장은 주고, 받는 곳. 우리는 대가를 치렀고 지금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지금이 좋았다. 마음껏 싫어하고, 좋아하고, 믿고, 의지하고, 화를 내고....... 참았던 것을 다 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나는 압력 밥솥과 같지 않았다. 여기선 끓는 걸 참을 일이 없어서였다. 그냥 끓고, 넘치고, 불이 꺼졌다 켜지고, 계속 그랬어서. 다 끓고 난 내 속은 잔잔했다. p.233
주로 청소년 소설과 판타지 동화를 쓰는 작가이지만, '김묘원'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던 <고양이의 제단>이라는 미스터리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작품에서도 십대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생생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여주었는데, 이번 작품의 십대 주인공들 역시 개성 넘치는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엄마를 만나 주문을 풀기 위해 남대문시장에 간 모라는 살아 있으나 죽은 선왕과 엮이면서 각자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쫓기게 되는데, 숭례문에서 남대문시장까지, 가장 한국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판타지가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표백제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색이 바래 유령처럼 보이는 사람인 껍데기들이 휘청휘청 걸어 다니고, 그림 속에 있는 까치가 말을 하며,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하기도 하며, 비싼 건 싸게 팔고, 싼 건 비싸게 파는 이상한 장이 열리는 기이한 그곳에서 모라는 엄마를 무사히 만날 수 있을까.
청소년 소설이라는 카테고리로 가둬 두기에는 완성도 높고 짜임새 있는 판타지 소설이다. '이쪽'의 남대문시장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장소이지만, '저쪽'의 남대문시장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시장에서의 엄청난 모험이 모두 끝이 나고 나서야 모라는 반사의 주문이 자신을 세상 전체로부터 보호하는 주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동안 자신이 보호받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담긴 엄마의 진심도 모르고 살아 왔던 것이다.
시장은 무언가를 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곳이었고, 모라와 친구들은 대가를 치르고 지금을 얻었다. 시장에 오지 않았다면, 낯선 이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이 모든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만, 엄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저 원망하며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모라는 그렇게 자신을 보호해주던 반사의 주문 아래에서 살 때는 절대로 느낄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끼며 성장한다. 작가는 새로운 신화를 쓰고픈 마음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신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소년 대신, 어머니를 찾아가는 소녀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것이다. 엄마에게서 받은 주문을 없애고,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스스로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모라의 모습에서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느낀다.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장소, 이 매혹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모험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