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가 생각하기에 괴물이 세상과 화해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마법에서 풀려나 괴물이 아닌 사람이 되거나 모두를 똑같이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것. 동화는 전자를 선호하지만
어쩌면 괴물의 입장에서는 후자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훨씬 쉽고,
간단하고 게다가 통쾌하니까.
원나는 6년 전
화재로 아빠를 잃고, 엄마와
둘이 살고 있었다. 아빠는
원나를 화염에 휩싸인 집에서 구해내고 죽었고,
원나는 화상 흉터가 심하게 남아 외모 콤플렉스를 갖고 성격 마저
의기소침해졌다. 고개를 푹
숙여 머리칼로 얼굴을 가린 채 다녔고, 학교에선 자발적 왕따로 지내고 있다.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거라곤 우연히 재능을 발견하게 된 펜싱이었는데, 고교대표로 전국체전에서 매달도
따지만, 그 이상의 기록을
세우지는 못했다. 시상대에
올라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 일부러 매달 권밖인
4위를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런 차량 전복사고로 원나의 유일한 가족인 엄마 마저
식물인간으로 병원 신세가 되고 만다. 하지만 우울해할 겨를도 없이 엄마 병수발에 마을 어른들의 이런 저런 심부름들을 하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갈 정도로 바쁘게
보낸다.
현재 원나의 나이 스무
살, 화재로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학교를 1년 휴학해서
아직 고등학교 3학년이다. 한 살
어린 동급생들 사이에서 원나는 괴물 취급을 받았고,
원나는 펜싱을 통해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터득한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 JFK공항에
좀비 출현. 이상 바이러스
감염자로 추정"이라는 제목을
단 뉴스 소식이 들려온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
아비규환의 공항 내부,
바보 같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좀비들의 영상이 잇달아 업데이트되지만 사람들은 심각하게가
아니라 우스갯 소리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좀비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국내로 들어와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어 버리고 원나가 살고 있는 주민 10여명의 작은 마을까지
초토화시킨다. 결국 원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버리고, 정부에서는 백신이 개발 중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며 자살하지 말고, 죽이지 말고,
서로 떨어져 있으라는 무책임한 선포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과연, 세상에 홀로 남겨진 원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는,
나로 죽기 싫었어."
"왜?"
"내가 싫었으니까."
원나는 헛헛한 마음에 술을 한
잔 더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솔직히,
처음 읍내 나갔을 때,
며칠 만에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다 망할 수 있지? 싶어서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분되고 좋기도
했어.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싶어 하는 소녀의 성장 소설은 뜬금없이 좀비 바이러스가 등장하면서 갑작스럽게 재난 소설로 바뀌어
버린다. 하지만 그 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바로 좀비를 대하는 원나의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좀비물에서는 남은 자들이 좀비와 싸우거나 그들을 없애려고 하거나,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고 살아 남기 위한 고군분투가
벌어지는 것이 플롯의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원나는 좀비로 변해버린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좀비이기 이전에 자신의 가족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게다가
노인들이라 이빨도 없고 근력도 약하고, 좀비들이 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불을 켜놓으면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단다. 좀비로부터 물리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것도 사실이고,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노인들이라 대개는 이빨이
없으니 물 수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잉런 원나의 생각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설득력을 부여하는 장치 중에 그녀가 펜싱 선수라는 점이 대단히 흥미롭게
사용되고 있다. 펜싱복 소재가
케블라라고 방탄복 소재인데, 그걸 입고 있으면 혹시 좀비한테 물린다고 하더라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상 흉터로 인한
열등감,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자괴감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살아온 원나에게 좀비로 변한 마을 어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표가 생긴다. 열등감에 짓눌려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던
원나에게 생존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생기게 된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을 치료해줄 백신이 분명히 올 거라는 생각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다
생존자인 7년차 아이돌 영군이
찾아오게 되고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원나는 든든해지지만,
좀비들을 사냥하는 다른 생존자 무리들이 마을로 찾아와 그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과연 원나는 좀비로
변한 마을 사람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과연 정부는 백신을 개발해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무너진 세상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나 혼자밖에 안 남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이 두려워 가끔은 세상이 망해버리고,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던
소녀가 정말로 무너져 버린 세상을 마주한다면 어떨까.
소녀의 재앙 극복 프로젝트는 때로는 유쾌하게, 그리고 따뜻하고도 놀랍게 이어진다. 좀비와 싸우는 이야기가 아닌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는 상상도 못했기에 이 작품이 더욱 흥미로웠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좀비들을 삶으로 끌어 안으려 혼신의 힘을 다하는 소녀의 생의 의지가
뭉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