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소설은 사르트르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1980년 4월, “그는 영웅이었으나 학대자들을 지지했다.”는 감상으로 애도를 마친 미셸은 라스파유 대로의 보도에서 옛 친구 파벨을 만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1959년을 회고한다. 

 

1959년, 미셸은 12세 소년이다.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 6구 어디쯤 살고 있고, 명문 앙리 4세 중고등학교에는 턱걸이로 합격했다. 학교 공부보다는 테이블 풋볼과 로큰롤, 문학과 사진에 흥미를 느끼며 강박적인 독서를 즐긴다. 하교 후엔 단짝 니콜라와 복식조를 결성, 테이블 풋볼 경기를 하러 다닌다. 테이블 풋볼 실력자 새미가 있는 14구의 비스트로 발토. 그 곳에 걸음했다가 우연히 사르트르와 케셀이 체스를 두는 모습을 목격하고, 이 뒷방 체스 클럽에 머무는 망명자들과 친구가 된다. 

 

이 소설은 마리니 집안 사정을 통해 60년대의 프랑스를, 체스 클럽 회원들을 통해 60년대 프랑스 국외, 철의 장막의 이면을 보여준다. 사춘기를 맞이한 미셸의 관심사와 주변 사람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를 반영한다. 엄청나게 재미있으면서도 쉬운 글이다. 미셸이 생일을 맞이한 1959년 10월에서 1964년 7월까지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사건들... 소설의 전반부인 1권에서는 주로 프랑스 국내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인상깊었던 몇 가지를 소개하려 한다.

 

 

▶ 알제리 전쟁 (알제리 독립 전쟁)

 

1959년은 드골이 대통령에 취임한지 2년째 되는 해로, 알제리 독립 전쟁이 한참이던 시기다.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지정학적 위치-군사적 목적-이 제일이었고, 지리상으로도 다른 해외 영토들보다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건너가 살았고, 사회적 인프라도 잘 갖춰졌다. 프랑스인들의 심리상 알제리는 식민지라기 보다는 프랑스 영토 내 한 지방에 가까웠다. 점령 후, 임의적으로 해체된 부족들-인종, 종교, 그들의 문화-는 무시당한 채, 알제리는 상위 몇 프로의 유럽인과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식민지인의 계급사회로 공고화된다.

 

2차 대전이 발발한 후, 프랑스 정부는 북아프리카 연합 작전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알제리 해방을 약속한다. 많은 알제리인들은 프랑스군에 입대하는데 이들을 아르키(Harkis)라 한다. 1945년 5월 8일, 파리는 해방을 만끽하지만 알제리 독립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반발한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알제리 국기를 든 소년이 총에 맞아 쓰러진다. 강경진압은 학살(세티프 학살)로 바뀌고, 이는 알제리 독립 운동을 점화하는 계기가 된다.

 

다른 식민지들의 독립은 승인되었지만 왜 알제리는 그대로 남아야 했을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알제리가 가지는 특별함 떄문이기도 했고, 식민지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대독일 전쟁은 국가와 국가 간의 대등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의 독립 전쟁은 대등한 전쟁이 아닌, 봉기이자 반란일 뿐이었다. 인권과 자유의 나라, 프랑스의 입장이 이렇다니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회복 작전(Operation Resurrection) 같은 작전명을 보라... 심지어 이 전쟁의 공식명칭은 〈알제리 사태(Evenements d'Algerie)〉였다. 1999년이 되어서야 〈알제리 전쟁(Guerre d'Algerie)〉이라는 공식명이 채택되었다. 2012년 12월, 알제리 독립 5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전쟁 당시 벌어졌던 학살을 인정하며 애도했지만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는 하지 않았다.

 

당시,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 9월, 프랑스 지식인 121명은 성명을 발표(Manifeste des 121)하여 정부를 규탄한다. 참여한 지식인에는 모리스 블랑쇼, 로베르 앙텔므, 미셸 번스타인,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앙드레 브르통, 알랑 레네, 기 드보르, 마게리트 뒤라스, 앙드레 마송, 프랑수아 트뤼포, 폴 레비 등이 있다. 피에-누아(Pieds-Noirs,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였던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독립을 반대하고, 자치권 확대를 주장했다. 분노한 알제리인들은 알제리 내 카뮈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주인공 미셸 마리니의 외삼촌, 모리스 들로네는 피에-누아 루이즈와 결혼하여 알제에 가정을 꾸린다. 알제와 오랑의 부동산을 수십 채 거느리고 살던 그들은 프랑스 우파에 의해 조직된 OAS(Organisation armee secrete, 비밀 군사 조직)를 믿고 알제를 떠나지 않는다. 외할아버지도 드골 대통령이 알제리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결과는... 독립 승인이 발표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피에-누아들은 프랑스로 돌아오고, 그 수는 90만에 이른다. 그들의 재산은 알제리에 그대로 남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북아프리카 연합 작전에 참여했던 아르키들이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군에 가담하여 싸웠기 때문에 민족반역자로 몰려 납치되어 고문, 학살 당했고 그 수는 5만에서 15만명까지로 추정된다. 프랑스인의 회사와 가정에서 일하던 알제리인들도 어떠한 보장 없이 그대로 남겨졌다. 돌아온 피에-누아들로 인한 프랑스 사회의 혼란, 알제리 독립을 둘러싼 분열은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마리니와 들로네 집안을 통해 반영된다.

 

 

▶파리의 비스트로, 오베르뉴 사람들(Auvernat) 그리고 체스클럽

 

19세기, 프랑스의 중앙 산악지대(le Massif Central)에 위치한 오베르뉴(Auvergne) 출신 다수가 파리에 정착한다. 산지에서 땔감과 숯을 배달하러 왔다가 눌러앉은 이들이 대부분으로, 목욕용 물을 배달하거나 고철을 판매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숙박과 식당업에 종사하게 되는데, 파리의 비스트로 주인장들은 오베르뉴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보통 서민 동네에 자리잡았고,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에 등장하는 비스트로 발토 역시 14구 당페르 로슈로 광장에 위치한다. 보통 비스트로에서는 프랑스의 가정식을 판매하는데, 특히 오베르뉴 음식은 보양식의 이미지라 하니 여기도 집밥의 신화가... (발토의 주인 마르퀴조 내외도 출신지인 오베르뉴의 캉탈에서 들여온 식재료를 사용한.)

 

오베르뉴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파리발 고속열차(TGV)가 없다. 지방철 TER만 운행했는데 얼마 전, 파리발 클레르몽-페랑행 TGV 라인이 신설되리란 발표가 있었다! 보통 파리에서 리옹으로 TGV를 타고 갔다가, TER로 환승하여 생-테티엔을 거쳐 클레르몽-페랑에 가야만 했다. 가톨릭의 큰 딸, 프랑스에서도 특이하게 이 지역의 다수가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 그랬다는 말도 있다. 타이어 만드는 미슈랭이 향토 기업이다. 화산 지대인 퓌 드 돔과 먹거리로는 유제품, 꿀과 잼, 광천수 등이 유명하다. (생수 볼빅, 비쉬의 온천 등)

 

파리의 이방인이지만 후덕한 인심을 가진 마르퀴조 내외는 또다른 외부인들- 망명자 체스 클럽을 받아들인다. 체스 클럽에 대해서는 다음 리뷰에서 좀 더 얘기할 생각이다. 비스트로 발토는 라스파유 대로와 당페르 로슈로 대로 양 쪽에 면한, 광장을 보고 있는 규모가 있는 식당으로 손님들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게 뒷편에 체스 클럽이 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집안 내부 문제로 옆집 문제에 소홀해지는 것처럼, 프랑스 내부 문제에 신경쓰느라 냉전의 희생자들을 살피지 못한 프랑스가 연상된다. 장미셸 게나시아는 망명신청/승인 담당자를 원망하는 클럽 사람들의 입을 빌려 프랑스의 행정을 꼬집지만, 동시에 자칭 백작 볼로딘을 등장시켜 담당자의 고충을 설명한다. 하 수상한 시대, 과거를 속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신분을 증명할만한 서류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 이 서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웰컴, 삼바리뷰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 2권에 등장하는 사샤가 핀란드로 넘어가기 전에, 챙기는 것도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들이다.

 

 

▶담배: 골루아즈와 지탄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담배도 등장인물들의 속성을 반영한다. 미셸의 외할아버지, 들로네 씨가 피우는 지탄(Gitanes) 그리고 사르트르와 망명자들이 피우는 골루아즈(Gaulloise). 지탄과 골루아즈는 둘 다 프랑스의 국민 담배이다. 지탄은 주로 유산 계급- 기업가, 중간관리자들이 피웠고 골루아즈는 무산계급을 비롯한 예술가, 지식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말보로 등의 미국 담배의 상륙, 정부의 흡연 정책 등으로 골루아즈는 프랑스 국외로 공장을 옮긴다. 골루아즈의 푸른 담뱃갑은 프랑스의 낭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사르트르와 카뮈, 갱스부르가 피웠으며 파리에 잠깐 체류했던 조지 오웰도 피웠던 담배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에 언급된다.) 골루아즈는 골 족, 갈리아 족 여인을 뜻한다. 말 그대로 프랑스를 상징하는 골루아즈를 망명자들이, 지탄(집시)은 자본가가 피우는 아이러니...

 

 

▶문학: 계몽 그리고 기억

 

Monday burn Millay, Wednesday Whitman, Friday Faulkner, burn 'em to ashes, then burn the ashes. That's our official slogan. 월요일엔 밀레이를, 수요일엔 휘트먼을, 금요일엔 포크너를 불태워라. 재가 될 때까지 태우고 그 재도 태워라. 그게 우리 공식 표어랍니다. - 가이 몬태그의 대사,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

 

미셸의 형, 프랑크의 친구 피에르는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이다.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며, 생쥐스트의 사상에 감명을 받은 그는 국립행정학교(ENA)의 2차 관문 면접에서 2번의 탈락을 맛본다. 그가 이름 붙인 생쥐스트주의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바탕으로 한다. 그가 엘리트주의를 바탕으로 한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그가 ENA 지원자이며 그의 집이 그랑 조귀스탱 대로의 으리으리한 아파트라는 점에서 수긍된다. 미셸을 존중하는 피에르는, 입대를 앞두고 어린 친구에게 로큰롤 음반을 빌려주면서 책 한 권을 건넨다. 바로 《화씨 451》이다. 몰래 파티에 참석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혼이 난 미셸은 이 책을 읽고 작은 혁명(반항)을 시작한다. 피에르가 달아 둔 촌평은 '우리 모두가 몬태그?!' 였다.

 

가이 몬태그는 《화씨 451》의 주인공으로 Fireman, 방화수이다. 책이 외면당하는 시대, 정부의 금서목록에 오른 책을 찾아 태우는 직업이다. 화씨 451은 책이 불타는 온도인 것. 왜 이 책이 등장했을까? 장미셸 게나시아는 의미없는 장치를 하지 않는다. (그는 추리소설을 쓴 적도 있다.) 정부가 책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문학이 가지는 힘,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힘 때문이다. 분서갱유를 피하기 위한 방법은 《화씨 451》에 등장하는 현자들이 알려준다. 2권에 등장하는 진주인공 사샤의 이야기와 겹쳐지는 장면으로, 사샤가 미셸과 우정을 쌓으며 도움을 주는 그 무엇들은 '기억'과 연관이 있다. 가이 몬태그는 클라리사라는 소녀를 만나 계몽되는데, 태우는 불이 아닌 따뜻한 불을 만나 문학이 권력에 대항하는 힘을 알게 된다.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도 비슷하게 연출된 바 있다.

 

 

▶마리니/들로네: 프랑스의 현실

 

주인공 미셸은 폴 마리니와 엘렌 마리니(들로네)의 차남이다. 형제로는 위로 프랑크와 동생 쥘리에트가 있다. 아버지 폴은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 3세로 마리니는 무산계급, 철도 사업에 종사하는 집안이다. 야심 많은 폴은 집을 떠나 파리로 와, 들로네 씨가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한다. 들로네의 딸 엘렌은 폴과 사랑에 빠져 임신하게 되는데, 폴이 징집되어 전장으로 떠난 뒤였다. 4년 후,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돌아온 폴과 엘렌은 프랑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다. 부부의 결합이 축복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결혼식 날이 들로네 가 막내의 다니엘의 전사일이라는데서 암시된다.

 

아직 어린 미셸은 12살 생일파티에서 자신의 두 가족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데, 형 프랑크(7살 차이)가 들려준 이야기에 다소 충격을 받는다. 생일 축하를 하는 자리에서 마리니 집안은 노래만 부르고, 들로네 집안은 박수만 치는 장면은 섞이기 어려운 자본주의 사회의 두 계급-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를 상징한다. 사회적 성공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급진적인 사회당 노선을 택한 폴과 달리 장남 프랑크는 공산당을 지지하여, 들로네 집안의 눈총을 받는다. 쥘리에트는 들로네 가에 가깝고, 미셸 역시 부르주아의 아들로 컸으니 부르주아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한다.

 

들로네 가는 아마도 파리 강점 시기, 비시 정부에 충성하며 부를 쌓은 것으로 보인다. 폴이 이탈리아에서 수감생활을 한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누명을 벗었다는 엘렌의 외침은 공허하다. 모리스 들로네가 피에-누아 집안과 결합하여 알제 내 부동산을 불려가는 과정은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현실을 반영한다. 뼛속 깊이 마리니 집안의 아들인 프랑크는 모리스와 들로네 집안을 비난한다. 엘렌이 용납할 리 만무하다. 이는 알제리 전쟁을 두고 분열되는 프랑스의 국론을 떠오르게 한다. 크게 싸운 뒤, 25년이 넘도록 두 모자가 만나지도 대화를 하지도 않았다는 말은- 양측이 화합할 수 없음을 그리고 세대 간 갈등이 깊음을 보여준다.

 

자녀 교육과 훈육에서도 차이가 난다. 들로네 가는 미셸이 프랑크처럼 될까 봐, 뤼마니테 축제(공산당 축제)에 가는 것을 노심초사한다. 엘렌은 폴이 이탈리아어로 노래하는 것을 싫어하며, 품위를 지키고 들로네 집안이 원하는 가치에 동화되기를 바란다. 폴도 노력하지만 쉽지는 않다. 엄격하고도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프랑크는, 상대적으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아버지의 가족들을 가깝게 느낀다. 미셸에게 가족사에 대해 들려줄 때도, 자신이 태어났던 시기의 부모 사이와 미셸이 태어난 시기가 다르니 고민하지 말라는 얘기를 한다. 명문 앙리 4세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부르주아의 아들 프랑크가 어찌해서 청년 공산당에 입대하고, 입영 연기를 취소하고 알제리로 떠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장남에 대한 부모의 태도도 차이가 난다. 프랑크를 찾기 위해 폴이 알제로 떠날 때에도, 엘렌은 회사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알제에 있는 모리스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폴이 계좌에서 500만 프랑을 빼내 프랑크를 돕고 미셸을 다독일 때, 엘렌은 돈의 행방을 추궁하며 프랑크를 신고하려 한다. 미셸을 혼낼 때도 손찌검을 한다. (프랑스는 애들 잘 때린다...)

 

1962년, 모리스가 가족들을 이끌고 파리로 와 이들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가정부 마리아가 그만두는 등 일상이 망가진다. 프랑크 문제로 부부 사이는 소원해진 상태고, 엘렌은 어떻게든 해보려 고군분투한다. 직전에 엔조 마리니가 집을 정리하고 이탈리아로 떠날 때, 파리 집에 머물까 염려하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물론 상황이 다르긴 하다.) 

 

회사(들로네 씨는 딸 엘렌에게 회사를 물려줌)에서 폴의 자리는 모리스로 대체된다. 이는 소설의 전반부에서 엘렌이 참석하는 워크숍을 누가 추천했는가를 생각할 때 이미 예견된 것이다. 엘렌 마리니는, 엘렌 들로네로서 자라왔고 그녀가 공유하는 가치는 마리니 집안과 같지 않았다. 그녀가 프랑크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이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셸의 눈으로 바라본 마리니 가족은 연신 휘청거린다.

 

한편 이탈리아로 돌아간 엔조 마리니는 평안한 노후를 보낸다. 이민자 2세로서, 프랑스 사회에 동화되기를 바라며 이탈리아 문화를 멀리 했던 그는 가족의 고향에서 평화를 얻는다. 그의 아들, 폴 마리니가 애지중지 하는 시트로엥 DS 19 프레스티지유(Citroen DS 19 Prestigieux)는 그의 성공을 상징한다. DS, 즉 Deesse(여신)인 이 자동차는 당시 기술력의 절정과 아름다운 바디, 최고급형으로 나온 모델이었다. 프랑크가 입대하는 날 망가지는 이 자동차는 이후 미셸이 언급한 '두 아들 때문에 힘들어진 인생'을 떠오르게 한다. 계급을 배신(숙명론자 엔조의 말)하고 프렌치 드림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폴 마리니는 평화를 얻었는가?

 

너무나도 다른 두 집안, 60년대 파리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은 이 소설에서는 푸자드 주의자 장마리 르펜 또한 언급되는데 프랑스의 극우, 국민전선의 현재 득표율과 행보와 함께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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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는 미셸의 학교 생활, 친구들과 취미 그리고 집안 문제를 통해 프랑스의 내부 현실을 다룬다. 동시에 2권에서 드러날 체스 클럽의 망명자들- 냉전의 희생자이자 민낯- 소개 또한 진행된다. 2권의 리뷰는 동쪽에서 온 이들을 소개하고, 이 리뷰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정말 재미있고 멋진 작품, 장미셸 게나시아의 바람대로 그가 쓴 '인생소설'이니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 프랑스의 여러 문학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공쿠르 상Prix Goncourt〉이다. 같은 날 발표되는 또 다른 문학상이 있는데 바로 〈고등학생이 주는 공쿠르 상Prix Goncourt des lyceens〉이다. 2천여명의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투표로 선정되는 이 상은 독서문화 장려를 위해 제정되었고, 프랑스의 교육부와 기업 프낙Fnac의 후원을 받는다. 얼마 전 출간된 실비 제르망의 《마그누스》, 필립 클로델의 《브로덱에 관한 보고서》, 그리고 이 책- 장미셸 게나시아의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등이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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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6-08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탄이나 골루아즈 고루고루 다 태우곤 했는데_ 음 어떤 게 더 맛있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네요;; 에이바님이 좋다고 하시니 요것도 일단 장바구니에 퐁당_

에이바 2015-06-08 11:34   좋아요 0 | URL
지탄, 골루아즈 독하다는 얘긴 들었는데요. 생각보다 괜찮은가 봐요.. 제 친구들은 말아 피거나 말보로나 럭키스트라이크 피웠거든요. 요샌 전자담배가 대세라는 것 같고요. 그리고 이 책 진짜 강력 추천이에요!! 야나님 프랑스에서의 추억 소록소록 떠오르실 듯 해요.

cyrus 2015-06-0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생이 선정하는 문학상. 참 좋은데요. 독자가 좋은 책을 선정하는 문학상은 많지 않은데 우리나라도 이런 공식 문학상이 있으면 좋겠어요. ^^

에이바 2015-06-09 17:04   좋아요 0 | URL
청소년들에게 현대 소설을 읽히자는 취지라고 해요. 아카데미 공쿠르에서 후보작을 추려내면, 두 달 여 심사기간을 거친대요. 심사단으로 선정된 학급의 학생들이 교사들과 함께 읽고, 작가와의 만남도 가지고요. 올해 수상작 발표는 11월 15일이네요. cyrus님 말씀대로 한국문학 부흥을 위한 청소년들이 뽑는 문학상 제정, 좋네요! 10대들에게 동시대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멀리 보면 문학애호가 육성의 방면이기도 하고요.

CREBBP 2015-06-09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경을 상세하게 알려주시니 더욱 재미있습니다. 읽고도 잊어버리거나 주의깊게 보지 않아 모르고 지나갈 뻔 했던 부분들을 많이 알았네요. 완전 추천!!!

에이바 2015-06-09 17:17   좋아요 1 | URL
저도 이번에 무릎을 탁 쳤어요. 특히 오베르뉴랑 비스트로요. 제가 알던 조각들을 이어본 계기가 됐어요. 이 책은 두고두고 읽을 듯 합니다. 아직 안 풀린 궁금증들도 있고요. 기네스님의 리뷰도 기다려져요!

CREBBP 2015-06-10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다 읽고 1편 앞부분을 다시 읽었는데.. 여전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어요. 왜 프랑크와 피에로는 입대한거죠? 미룰 수 있었는데.. 그들이 공산주의자인 것과 관계가 있나요? 프랑크는 떠날때 미쉘한테 계급 운운하며 혁명때문에 입대한다고 했는데 말이 안되는 거 같아서요. 프랑스군과 알제리 독립군과 싸우는 전쟁이 아니었나요?

에이바 2015-06-10 19:12   좋아요 0 | URL
기네스님. 제가 고민하던 부분도 바로 그거였어요! 그것 때문에 다른분들 리뷰 기다리고 있었어요. 일단 제가 2권 리뷰 마지막 부분에 넣었는데요. 피에르는 입영 연기가 더 미뤄지지 않아서 입대했고요. 프랑크는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되는데 혁명 때문에 입대한게 맞는 것 같아요...

네오 2015-06-11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생요? 음,,뭐,,그럴수 있겠죠? ^^ 프랑스 제국주의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니깐 알제리뿐만 아니라,,,인도차이나 에서 벌어지는 그런 정책적인 것들,,제가 얼마전에 프랑스와 베트콩을 다룬 역사서를 읽었는데 물론 번역본 없음요,,ㅋㅋ 뭘랄까 필연적인것 그러니깐 프랑스 기질같고는 아시아에서 살아남을수 없다는 인상을 받아거든요,,,

에이바 2015-06-11 14:47   좋아요 0 | URL
프랑스식 제국주의는 프랑코포니로 계속되고 있다는게 제 생각... 옛 식민지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인들 베트남 여행 많이 가더라고요~ 일하러 가기도 하고 향수를 찾는건지 뭔지 참.. 작년인가 마게리트 뒤라스 탄생 백주년인가 해서 France Culture 라디오에서 베트남 갔거든요. ˝연인˝ 특집으로.. 현지 여성이랑 불어로 인터뷰하는데 인터뷰어 짜증내더라고요. 현지 여성분이 불어를 자꾸 씹는다고 해야 하나 유창하진 않아서요. 그게 저한테는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일본어로 말 걸고 왜 일본어 못해? 하는 거랑 똑같이 느껴졌어요. 아 그럼 통역을 데려가던가! 베트남어를 배우던가! 사정이 있었겠습니다만..

네오 2015-06-11 14:54   좋아요 0 | URL
네,,,,저도 이런면이 짜증이 나더라고요,,,,베트남이 원래부터 프랑스가 아니잖아요,,막 침략해서 그렇지,,,우리한테도 좀 그런게 규장각에 있는 도서 쓸어가고 나서 뭔지고 모른 상태에서 도서관에 쳐박아 놓고,, 달라니깐 그때서야 안돼다고 하고,,,,애네들한테 한때 선진국민 맞나라는 생각이 들정도로,,,테베도 로비로 해서 우리한테 넘기건 생각하면 읔,,,,마게리트 뒤라스가 인도차이나에서 태어난건 다행이지만요^^

에이바 2015-06-11 15:11   좋아요 0 | URL
문화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지요. 다양성 문화 만든것도 프랑스잖아요. 우린 문화강국이다 하는... 외규장각 도서 찾아낸 것도 한국인이었잖아요. 협조도 안해주고. 원래 고고함과 찌질함은 한 끗 차이...ㅋㅋㅋ 테제베 성공시키려고 소피 마르소까지 델꾸오고 ㅋㅋㅋ 뒤라스 멋진 작가죠^^

네오 2015-06-11 15:15   좋아요 0 | URL
에이바님 그런데,,프랑스 다양성 다양성 그러는데,,그게 뭐죠? 진짜 모르겠슴다,,,

에이바 2015-06-11 15:38   좋아요 0 | URL
이게 프랑스 문화부가 꾸준히 밀고 있는 정책인데요. 미국으로 상징되는 문화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이거든요. 물론 그 선봉 아니 리더로는 프랑스가 있고요.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장려해야 한다, 여기서 문화란 삶의 방식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 의미입니다. 우리가 후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과도 같은... 실생활에서 보자면 우리나라가 스크린쿼터제 할때 주장했고 프랑스에서 얼씨구나 지원하기도 했지요. 덕분에 다양성 영화들도 개봉하게 되었습니다만... 프랑스인들에게 문화는 공공서비스고 누구에게나 누릴 수 있는 권리라는게 문화부 지침이었나 그래요. 쓰고 보니 멋있네요 ㅋㅋㅋ

네오 2015-06-11 16:02   좋아요 0 | URL
네,,알겠어요,,멋있군요,,그래서 프랑스 갔다온 분들이 느끼는 한반도에 답답하는 측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돼는군요,,,그런데,,저도,,,뭘라까,,일렬로 죽세우는 그런 것 좋아하는 아니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데 어떡하죠? ㅋㅋ 뭐,,저도 한국인이라도 어쩔수 없군요;; 그놈의 로케이션 본능 ㅋ
 
제임스 조이스 시집 : 체임버 뮤직 - 수동 타자기 조판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6
제임스 조이스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XXIV

 

  Silently she's combing,
  Combing her long hair
  Silently and graciously,
  With many a pretty air.


  The sun is in the willow leaves
  And on the dapplled grass,
  And still she's combing her long hair
  Before the looking-glass.

  I pray you, cease to comb out,
  Comb out your long hair,
  For I have heard of witchery
  Under a pretty air,

  That makes as one thing to the lover
  Staying and going hence,
  All fair, with many a pretty air
  And many a negligence.
 

                                    《Chamber Music》 James Joyce 

 
 

24

 

 

  말없이 머리 빗는 그녀,

  긴 머리를 빗네,

  말없이 우아하게,

  어여삐 뽐내는 자태.


  버드나무 잎 사이사이 채운 햇빛

  얼룩덜룩 풀밭에 어른거리는데,

  거울 앞 그녀는 아직도

  긴 머리를 빗네.


  바라건대, 머리 좀 그만 빗어요,

  그 긴 머리 좀 그만 빗어요,

  어여삐 뽐내는 자태 아래

  마법이 깃든다고 들었으니,


  그것은 애인에게 한 모습으로 분하여,

  머물렀다 이내 사라지지요,

  수많은 어여쁜 자태, 수없이 무관심해도

  곱기만 한 모든 모습.

 

                   《체임버 뮤직》 아티초크 출판, 공진호 옮김

 

 


아마도 시인은 침대에 누워 연인의 머리 빗는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창 밖의 버들잎 사이로 들어온 햇볕이 연인의 머리에 수를 놓는다.

산들산들 바람에 풀이 누웠다 일어섰다, 반짝임이 파도치는 평화로운 순간,

머리칼이 반짝거리는 여인의 뒷모습은 너무도 어여뻐 질투를 살지도 몰라.

누군가의 사악한 마법이 깃들지도 몰라. 아니 그이가 마법을 부린걸까?

제발 머리 좀 그만 빗고 이리로 와요. 내게로 와요.


조이스에 따르면, 상상의 여인에 대한 글이라는데 진위는 알 수 없으니 믿어줍시다.

노라에게 옛 사랑을 들킬까 봐 그랬을지도 몰라요.


마지막 행의 "All fair,"는 '금발 혹은 햇빛에 반사되어 금발로 보이는 머리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안 되나? 누가 가르침 좀 주세요...

 

-


읽으면서 너무도 귀여운 시가 있어 소개한다.

 

제임스 조이스가 25세가 되던 해 출간된 《체임버 뮤직》은 '실내악'이라는 그 뜻처럼, 여러 시들이 모여 음악처럼 구성되었다. 작가가 원한대로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소설과는 다르게, 조이스는 간결하면서도 단순한 시어들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한다. 그래서 나도 실내악 24번에 어울리는 노래를 생각해 보았다.


이 시에서의 'witchery'는 사랑의 양면성을 모두 가진 단어다. 사랑이란 원래 마법처럼, 누군가를 사로잡는 것. 행복과 불행을 함께 느끼게 하는 감정이 아니던가! 이 시에 어울리는 노래로〈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는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버전은 영화 History Boys에서 사무엘 바넷이 부른 〈Bewitched〉이다. History Boys 얘길 잠깐 하자면, 동명의 연극이 성공하자 영화로도 옮겨진 작품. 몇몇 배우를 제외하고 극과 영화의 배우가 동일했던 걸로 기억한다. 주역들은 여전히 활발한 활동중인데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아마도 제임스 코든, 도미닉 쿠퍼랑 러셀 토비 정도? 다른 배우들은 뮤지컬/연극계라...

 

아무튼 이 영화 사운드트랙은 진짜 전부 다 좋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깔리는 노래가 The Smiths의 〈This Charming Man〉이라고요! 내 마음대로 조이스에 헌정할 〈Bewitched〉는 다음과 같다.


〈Bewitched〉, 사무엘 바넷

〈Bewitched〉,  루퍼스 웨인라이트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엘라 피츠제럴드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에디 히긴스 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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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s a fool and don't I know it
But a fool can have his charms
I'm in love and don't I show it
Like a babe in arms
 
Love's the same old sad sensation
Lately I've not slept a wink
Since this half-pint imitation's
Put me on the blink
 
I'm wild again
Beguiled again
A simpering, whimpering child again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am I
 
Couldn't sleep
And wouldn't sleep
When love came and told me I shouldn't sleep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am I
 
Lost my heart, but what of it?
He is cold I agree
He could laugh, but I love it
Although the laugh's on me.
 
I'll sing to him
Each spring to him
And long for the day when I’ll cling to him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am I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am I
 
I’ve seen a lot
I mean a lot
But I'm like sweet seventeen a lot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am I
 
Lost my heart, but what of it?
My mistake, I agree
He can laugh but I love it
Because the laugh's on me
 
I’ll sing to him
Each spring to him
And worship the trousers that cling to him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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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초크 《체임버 뮤직》에는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 실린 〈Eveline〉의 원문과 번역을 함께 소개한다. 문학동네에서는 〈이블린〉으로 나온 작품인데 아일랜드에서의 발음대로 〈에벌라인〉이라 표기했다고. '마비'된 더블린 사람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단편을 새로운 번역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청년 제임스의 감성을 느끼고 싶은 분께 추천한다. 

 

 

 

 

 

 

 

 


"Love is unhappy. When love is away!" 

"사랑은 사랑이 멀리 있어 슬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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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21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이 책 안 나왔으면 조이스 전집을 강제 구매할 뻔 했어요. ㅎㅎㅎ 범우사에서 나온 조이스 전집 중에 <실내악>을 수록한 책이 아직도 판매되고 있어요. 김종건 교수 번역과 비교하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

에이바 2015-05-22 09:30   좋아요 0 | URL
오! 범우사 판을 아직 구입할 수 있나봐요? 조이스 매니아 cyrus님께 딱인 시집입니다.^^ 말랑하고 멜랑콜리하고 젊은 제임스의 꿈을 엿보는 것 같아 좋아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제인과 에드워드의 방해물이자, 해피엔딩을 위해 모든 장애를 처리하고 떠난 광녀. <제인 에어>의 버사 메이슨이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녀의 이름은 앙투아네트 코즈웨이.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영국인, 크리올이다. 1833년 노예해방령이 선포되면서, 식민지에서 노동집약적 대농장을 경영하던 영국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몰락하게 된다. 소설의 러트렐 씨처럼, 영국 정부의 보상금을 기다리다 떠난 농장주들도 많았다. 식민지에 남은 크리올들은, 대농장 구입을 위해 본토에서 온 부유한 영국인들과 비교되며 본토인들과 원주민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는다. 노예로 부려지다 자유를 얻은 원주민은 오갈 데 없는 분노를 머금고 있다. 본토에서 온 영국인들은 이들의 분노를 간과하며, 흑인은 게으르고 멍청하다는 제국주의적 발상을 지속한다. 아울러 그들에게 비친 크리올의 모습은 노예제를 통해 재산을 불린,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계층으로 식민지 문화에 동화된, 순전한 영국문화를 가진 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백인 농장주들이 노동력, 재산을 늘리기 위해 원주민 여성들을 취해 자식을 낳게 했던 사실은 크리올들이 완전한 백인이 아닐 거라는 의심을 낳는다.

 

앙투아네트 코즈웨이의 생부도 대농장을 경영하였고, 노예해방령 전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후처로,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출신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들이 몰락하자 원주민들은 조롱할지언정 위협은 하지 않았다. 힘의 역학상 그들의 아래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의 딸 티아는 앙투아네트와 어울려 놀며 ‘흰 검둥이’라고 놀리고 옷을 빼앗는다. 티아의 말에서 드러난 이들의 궁핍은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유모의 말에서 재확인된다. 아네트는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그녀의 미모를 십분 이용, 본토에서 온 부유한 메이슨과 결혼에 성공한다. 이제 그들은 상위 계층에 머무르게 되고, 원주민을 비롯한 쿨리브리 사회의 질시를 받는다. 자메이카 사회에 만연한 분노를 알아채지 못한 메이슨 씨는, 노동자들이 게으르다며 쿨리를 데려오겠다는 말을 하게 된다. 이 말을 들은 하인 마이라는 사람들을 모아 메이슨의 집에 불을 지르고 일가를 위협한다. 아네트는 이 분노에 대해 남편에게 여러 번 경고하였고, 그를 무시한 피해는 그녀의 백치 아들 피에르의 죽음이었다. 그녀의 고통은 남편을 죽이겠다는 위협으로 발전되며, 메이슨은 그녀를 시골 별장에 두고 흑인 감호인을 붙인다. 그리고 해외를 떠돌며 아내를 잊는다. 남편의 무심함은 아름다운 아내의 손발을 묶고, 그녀를 증오하는 흑인의 손에 넘김으로써- 그녀가 과거 노예였던 이들에게 지속적인 겁탈과 희롱을 당하여 자긍심이 조각나게 하고 끝내 실성에 이르게 한다.

 

수녀원에 맡겨진 앙투아네트는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다. 메이슨은 그녀에게 삼만 파운드라는 거액의 상속금을 남기고 사망한다. 따라서 그녀의 후견인이 된 리처드 메이슨은 그녀의 결혼 상대자를 정해야 한다. 타인이나 마찬가지인 의붓 여동생을 치워버리고 싶었던 리처드는, 본토에서 건너온 에드워드 로체스터의 구혼을 허락한다. 앙투아네트의 높은 지참금은 어떠한 보호조치도 없이, 결혼을 통해 에드워드의 손에 떨어진다. 앙투아네트의 목숨까지도.

 

에드워드 페어팩스 로체스터는 차남으로, 물려받을 작위도 재산도 없어 결혼을 통해 생활을 꾸려야 한다. 그는 상속녀와 결혼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와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하며 일주일 내에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처음부터 자메이카의 자연은 그를 압도한다. 이 분위기에서 자유로이 호흡하고 생명력을 뿜어내는 앙투아네트는 에드워드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 그는 긍지 높은 신사지만 혈통의 순수함이 의심되는 크리올과 결혼한 것이다. 삼만 파운드에 영혼을 팔았다는 표현은 여러 번 등장한다. 돈 많은 상속녀인 아내는 생명력이 넘치는 여성으로 그의 품 안에 갇혀 “가정의 천사”가 될 수 없는 여인이다. 관계와 환경의 주도권을 잡지 못한 그는 때를 기다린다. 오베아(부두)라고 불리는 주술을 행한다는 유모 크리스토핀이 주는 모멸을 감내하면서…

 

어린 신부 앙투아네트는 남편을 숭배하고 사랑한다. 그가 가르친 사랑의 몸짓은 남편이 그녀를 헤픈 여자라 부르게 하지만, 그녀에겐 자연스러운 열정의 발산이었다. 에드워드의 계획은 착실히 실현되고 있다. 그는 크리올인 아내가, 원주민 문화인 오베아와 원주민어 파투아에 익숙한 것을 경멸한다. 그래서 그는 먼저 그녀의 이름을 빼앗는다. 노예주가 노예에게 이름을 주는 것처럼, 부두술사가 좀비에게 이름을 주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 앙투아네트는 마리오네트, 버사로 둔갑하며 에드워드는 그 이름 안에서 그녀의 영혼을 빼앗고, 아내를 자신의 ’인형’으로 명명한다. 이름을 빼앗긴 앙투아네트는 인형처럼 입을 다문다. 에드워드는 참을 수 없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아내를 증오하는 원주민 하녀 아멜리와 관계를 맺는다. 관계 회복을 위해 남편에게 간절히 빌었던 앙투아네트의 몸과 마음을 취한 다음날이었다. 그렇게 에드워드는 아내의 영혼을 조롱한다. 그녀가 신성히 여기는 신혼집, 영혼의 안식처를 더럽힌 것이다. 앙투아네트는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는 소리, 신음소리 모든 것을 듣고 집을 떠나 유모에게로 간다.

 

다음은 그녀의 수족과도 같은, 아내를 비호하는 유모 크리스토핀의 차례다. 에드워드는 한때 부두술사로 감옥에 갇힌 그녀를 고발하는 편지를 쓴다. 거세게 내려붓는 비처럼, 크리스토핀의 호통은 에드워드의 영혼을 두드린다. 앙투아네트와 함께 떠나겠다는 크리스토핀의 말에, 에드워드는 강한 분노를 터뜨린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앙투아네트를 넘기다니! 아내를 사랑하지 않지만, 소유해야 했던 에드워드는 자존심에 단단한 갑옷을 두르고, 아내를 광녀로 낙인 찍는다. ‘돈’을 바라고 그에게 투서한 대니얼 코즈웨이는, 에드워드의 증오에 불을 붙이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이제 에드워드는 장모와 처남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보다 그 ‘결과’를 중시한다. 앙투아네트의 가계에 광기가 흐르며, 천박한 장모처럼 앙투아네트도 육욕의 화신이라는 것. 그가 가르친 사랑의 몸짓은 그녀를 색녀로, 그가 준 술은 주정뱅이로, 그가 주었다 뺏은 사랑은 그녀를 광녀로 몰아간다.

 

에드워드의 계획에서 하나 비틀린 것이 있다면, 크리올과 백인을 증오하는 하녀 아멜리의 반응이다. 항상 에드워드를 “가엾다”고 했던 이 하녀는, 그와 관계를 맺고 서둘러 집을 떠나는데 반응을 캐묻는 에드워드에게 답한다. 이제는 “아씨도 가엾다”고. 본토에서 온, 제국주의와 가부장을 상징하는 괴물 에드워드는, 자기 연민에 빠져- 광녀 아내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아내의 영혼과 육체를 학대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의 영혼이 머물던 곳을 떠나 차갑고 어두운 잉글랜드로 데려온다. 손필드 저택의 다락방에 갇힌 앙투아네트, 그레이스의 말에 따르면 돈도 많으면서 제대로 된 음식도 주지 않는다. 아네트가 시골에 갇혀 서서히 미쳐갈 동안 메이슨은 여행으로 부재했듯이, 그도 앙투아네트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감시인 그레이스는 앙투아네트의 눈 속에 타오르는 그녀의 생명력, 혼을 보면서 감탄한다. 크리스토핀이 얘기했듯이, 앙투아네트는 태양을 품고 있는 여인이다. 태양은 여전히, 그녀의 눈 속에서 타오르고 있다. 에드워드는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 것이다.

 

<제인 에어>에서 광녀로 그려진 버사 메이슨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 생명력 넘치는 상속녀, 앙투아네트 메이슨이 되어 그녀의 목소리로 소리친다. 그녀의 문화를 말살하려는 남편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음을. 그들이 자신을 손필드의 유령이라 부른다 할지라도 그녀의 인생, 그녀의 존재와 영혼이 살아있음을. 어둠에 가리워 살아야 했던 그녀가 당당히 살아있음을 스스로의 태양- 불을 밝혀 증거하는 것이다.

 

“물 흐름이 느리고,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사르가소 바다”처럼 책장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곧, 어린 앙투아네트의 목소리는 공허한 내 가슴에 메아리를 울렸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진 리스는 일부러 그렇게 썼다는 걸.  이 글을 읽은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앙투아네트의 반짝이는 눈빛은 내 가슴을 움직였다. 지금 이 순간도. 내가 제인의 이야기보다도, 그녀의 이야기를 먼저 털어놓는 이유이기도 하다… 재밌는 것은 소설에서 에드워드의 이름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에드워드의 서술은 앙투아네트에 침범당한다는 것이다. 헤게모니가 누구에게 머무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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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5-19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멋진 리뷰입니다, 에이바님. 감탄하며 읽었어요. 심지어 제가 이 책을 제대로 읽긴 한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에요. 에이바님의 리뷰를 읽으며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진 리스가 좋았어요. 이 소설 때문에요. 모든 일에는 `다른 면이 있다`고 얘기하잖아요. `항상` 그렇다고요. 그걸 짚어낸 준 작가인 것 같아요. 그걸 알았기 때문에 이 소설이 나온 것일 테고요. 잘 읽었습니다, 에이바님.

에이바 2015-05-19 14:03   좋아요 0 | URL
저도 제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르가소를 읽고 무척 놀랐습니다. 제게 버사는 검은 살결에 체구도 큰, 위협적인 man eater의 이미지가 강했거든요. 앙투아네트는 그냥 평범한 여인이었어요. 제국주의적 관점을 제대로 비틀어 보여준 진 리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그 구절도 좋았어요. 나중에 추가해야겠네요. ˝어떤 일이 일단 발생하면 그 사건이 언제, 왜 발생했는지는 잊어버린다 해도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존재해요.˝ 댓글 감사해요 다락방님..

AgalmA 2015-05-19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은 참 이상하죠. 우리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우리를 낳아준 모성이기도 하고,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치는 광기이자 우울이기도 하죠. 진 리스가 사르가소 바다에 그 모든 걸 담은 건지도 모르겠다 먼발치서 생각해 봅니다.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제국주의, 가부장제, 계급의식, 인종차별 지금도 변함없다 싶으니, 삶이 참 아득해요. 물이 물의 성질을 늘 품고 있듯이.

에이바 2015-05-19 20:55   좋아요 1 | URL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제가 아는 것만 살짝 말씀드리자면... 사르가소는 해류 움직임과 해풍이 거의 없어 항해하기 어려운 바다라 해요. 사르가숨이라는 해초가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선원들이 꺼리는 곳이라네요. 접근도 항해도 쉽지 않은 이 바다는 앙투아네트와 에드워드의 문화가 합쳐지기 힘든 것을 상징합니다. 오베아, 파투아, 무더운 날씨는 에드워드에게 낯선 것이며 동시에 그를 이방인으로 만들죠.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내는 여러 문제점-아갈마님께서 언급하신-들은 이 바다가 가진 성질만큼, 소설 속에서도 암시적으로 드러납니다.

`Wide`를 `광막한`으로 번역한게 정말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아득하고 막막할 정도로 넓은 사르가소 바다라... 어떤 문제들은 노력해도 좁혀지지 않을, 너무나 아득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시도해야겠지만요...

AgalmA 2015-05-19 20:57   좋아요 1 | URL
에이바님은 살짝 아니라 늘 많이 알려주시는데요^^ 깊은 작품이해 늘 인상적입니다. 고맙습니다

살리미 2016-01-14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이 책 읽고 있어요. 읽는데 너무 좋아서 혹시나 에이바님 리뷰가 있지 않을까 하고 검색해봤는데 역시나 있네요!! 그것도 아주 멋진 리뷰가요!!!
제인 에어의 팬픽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좋을지 몰랐어요. 로체스터 좋아했었는데.. 이래서 사람 말은 양쪽을 다 들어봐야... ㅎㅎㅎ
어쩌면 이렇게 훌륭하게 버사, 앙투아네트를 변호해주었을까요.. 정말 진 리스 대단합니다!

에이바 2016-01-15 21:41   좋아요 0 | URL
오로라님 이 소설 정말 좋죠. 하지만 팬픽션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아요. 진 리스 스스로가 크리올이었고 제인 에어의 시각에 분노, 비판하기 위해 쓴 작품이라서요. 때문에 패스티시로도 분류되기 어렵고요, 영감을 준 건 확실하지만 리스가 에어의 팬은 아니었습니다. ㅠㅠ 저는 두 사람의 팬이지만...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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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하루키의 에세이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라니 귀엽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면 '개풀 뜯는 소리'라고 하는데, 요즘은 그냥 간단하게 개소리라고 하는 듯 하다. 실제로 개들이 풀을 뜯기도 한다고. 사자도 그렇고. 무슨 영양학적으로 필요해서 그렇다는데 신기하다.  실제로 인류의 발달사를 보면, 육식을 하면서 신체가 커지고 폭력성도 커졌다고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미드 <그림, Grimm>을 보면, 폭력성을 줄이기 위해 필라테스와 명상, 채식을 하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꽤 효과가 있다는 설정이다. 그러면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는 비폭력주의자라고 볼 수 있을까? 풀 뜯는 사자를 생각하니 꽃향기를 맡는 사자도 생각난다. 가끔 인터넷을 하다보면 동물들이 꽃 향기를 맡는 사진들을 보는데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괜히 마음이 뭉클해진다.

 

이 에세이는 하루키가 잡지 <앙앙>에 실었던 연재물을 모은 것이라 한다. 2012년에 쓴 글들이라 하는데, 그 때 나이 59세. 감성이 젊다. 작가는 동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던데, 젋게(young) 사는 것이 젊은 정신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앙앙>은 젊은 여성들이 주로 보는 잡지이기 때문에, 독자층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고. 젊은 여성들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게 다른 그룹에 비해 빠르다고 한다. 그래서 편하게 썼다기 보다는, 하루키는 귀찮으면 안 읽겠지라고 생각해서 편하다고 한 것 같다.

 

에세이들은 편하게 읽을 수 있고, 대체로 좋은 글이다. 여행도 많이 하고, 외국에 체류한 기간도 길고... 오픈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하며 읽은 몇 가지 글들이 있어 얘기해보려 한다.

 

<잊히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글에서는 베를리오즈가 잊어야만 했던 교향곡을 얘기하는데,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 '망각'이라지 않나. 만약 우리 뇌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섬세한 감성이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들은 그래서 더 놀랍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베를리오즈의 작품은 무척이나 아깝지만...

 

<죽도록 지루한 대화>와 <모릅니다, 알지 못합니다>는 하나로 이어도 되겠다 생각했다. 언어 구사능력이 특출하다고 말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컨텐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대화를 위해서는 센스가 필수다. 예전에 외국에 있을 때, 그 나라 말을 잘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가 가끔 입을 열 때면 모두가 빵 터졌다. 간단한 단어를 가지고도 얼마나 웃긴지, 대화의 맥락을 재미있게 비트는 재주가 있었다. 다른 친구가 백마디를 해도 지루한 이야기를 한 마디로 웃기다니. 그런 센스는 타고나는 걸까 싶다. 하루키는 작가라는 직업의 장점이, 대화를 할 때 '모릅니다'라고 할 수 있다는 거라고 했다. 사람들이 작가라는 직업을 일단 제껴놓기 때문인지...  그러고 보면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건 용기있는 행동이다. 어릴 때는 모르는 이야기를 할 때도 아는 척 하다가 들통나는 사람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른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더구만.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모냥 빠지는' 행동일 수 있다는 거다. 눈치껏 때울 수 있는 부분에서는 의뭉스럽게 넘어가되, 솔직해야 할 타이밍에선 또 진실되어야겠지. 하루키씨 부럽네요.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가방>의 한 대목이다.
어떤 짐이든 부족함 없이 다 들어갑니다, 안심하고 맡겨주십시오-이런 친절한 가방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72p)

 

물론 없다.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마법주머니를 보면 주머니에 공간 마법을 걸어서 집도 한 채 넣고 하더만... 최근 본 컨텐츠 중에 그럴 듯한 것은 미드 <부통령이 필요해, Veep> 에서 설리나의 보좌관으로 나오는 게리의 가방 '리바이어던'이 있다. 아무에게나 가방을 맡기지 않는 게리... 설리나가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는 신비의 가방. 상관이 새로운 가방을 사주자 거기에 적응한다고 한참 걸린다. 그건 그렇고, 가방 이름이 리바이어던이라니 ㅋㅋㅋ

 

<바위에 스며들다>에는 매미 이야기가 나온다.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베짱이는 사실 매미다. 그리스에 있는 매미가 북유럽에는 없어서 매미가 베짱이가 된 거라고. 생각해보면 매미는 땅 속에서 12년(종에 따라 다르다)을 기다렸다가 여름 한 철을 산다. 이 정도 기다림이면 생애 마지막을 날개를 비비며 불태운다고 비난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중국산 꽃매미는 싫다. 생긴 것부터 비호감이다. 참매미는 크기도 작고 귀여운 편인데 꽃매미는... 나무의 수액이 마를 때까지 붙어있는다고 한다. 엄청난 생명력으로 어떤 약도 그들을 저지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발로 밟거나 해서 으깨어(...) 죽이는 것이라고. 뉴스에서 소방관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봤다. 날이 더워지면서 이 꽃매미들이 많아졌고 나무는 말라 죽고 나무가 죽으니 다른 매미와 생명들은... 도시에도 많다. 강남역에서도, 종로에서도 많이 목격했다. 무서운 건 매민데 울지 않아! 가끔 사람에게 붙어있기도 하는데 아무리 광란의 댄스를 춰도 떨어지질 않는다.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으으... 그들의 계절이 오고 있군요.

 

<말도 안 되는 거리, 험한 길>에서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하루키 답게, 당시의 그리스 전령에게 현대의 마라톤 경기를 뛰게 해보고 싶다고 한다. 가뿐하게 이기려나, 아니면 지구온난화와 대기오염 때문에 현대인에게 지려나. 동등한 조건이 아니라면 알러지 반응 때문에 현대인이 이길 것 같아요. 네.

 

짧지만 즐겁게 읽었다. 표지가 귀여워서 책장에 꽂아두고 싶은... 하지만 읽어도 그만, 읽지 않아도 그만인 글들. 안 읽는다고 큰일날 글들은 아니고,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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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5-11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들이 속이 안 좋을 때 구토 유발과 장 속 기생충 퇴치용으로 풀을 먹는다고 해요.(자가치료)^^
그런데 호기심 많은 개는 주로 재미로ㅋㅋ

잡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레이먼드 카버가 <에스콰이어> 등 여성잡지 등에 고정기고를 많이 했잖아요. 그런 잡지에 계속 작품을 실으려면 독자층을 감안하고 작업했을 거 같은데요. 그렇게 보면 하루키와 카버의 현대적 감성이 왠지 이해가지 않나요? 작가의 고유 개성이 제일 크겠지만.
하루키가 안 했다고 하지만 아주 안할 수는ㅎㅎ...등단부터 살 만했던 하루키는 그럴 수 있었을 지 몰라도 늘 쪼달렸던 카버는...

제가 읽고 있는 <직관펌프>에서도 대니얼 데빗이 제일 먼저 그래요. 실수 덮을려고 더 큰 실수 부르지 말고, 깨끗하게 실수 인정하고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게 이롭다!
^^

에이바 2015-05-11 22:26   좋아요 1 | URL
하루키 말로는 낚시 잡지같은 게 아니라 편했대요ㅎㅎ 주제도 자유롭다고 하고... 근데 젊은 여성들이 복잡한 걸 싫어할거라 생각하는 구석은 좀 있어요. 비하까진 아닌데요. 그 잡지를 보는 독자층이 그런거겠지요?

<작가란 무엇인가 1> 카버 인터뷰 보면서 부코스키 떠올렸어요. 그러자마자 카버가 부코스키 좋아한대서 반갑고 좋고... 전 아직 <대성당>만 봤는데 멋진 사람 같더군요. 술만 빼면요...? 저번엔 헷갈려서 <대지의 기둥> 봤는데요;; 웃기죠. 왜 헷갈렸는지ㅠㅠ 하루키 진짜 신기한 사람이에요. 데뷔작 한방에 쓰고 한방에 뜬거라죠? 부러운 인생입니다. 덕질하면서 사는 것 같은...

<직관펌프> 더욱 읽어야겠습니당 ㅎㅎ

AgalmA 2015-05-11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소양봐서 <직관펌프> 아주 재밌게 잘 읽으실 거 같아요^^ 교양과 재미가 하나로!
부코스키 문장도 생각난다니까요ㅎㅎ아, 웃다가 울고 싶은 이상한 쾌감들!

왜요. 하루키처럼 한방에 뜨고 승승장구 중인 우리나라 김영하씨도 있잖아요~ 본인의 창작고통까진 모르겠습니다만.

에이바 2015-05-11 22:37   좋아요 1 | URL
아갈마님 뽐뿌에 넘어갑니다아아아... 부코스키라니요! 읽지 않을 수 없는 코멘트ㅠㅠ 이렇게 장바구니는 또 채워집니다ㅎㅎ 생각해보니 대성당 키워드 때문에 <대지의 기둥> 본 것 같아요. 그 땐 절판 상태라 ㅎㅎ 김영하씨도 대단했죠. 그래도 하루키같은 열풍까진 아닌 것 같아요. 우리나라 작가도 언젠가 파리 리뷰 같은 데서 인터뷰했으면 좋겠습니다.

네오 2015-05-1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비프봐요?

에이바 2015-05-12 09:42   좋아요 0 | URL
네. 네오님도 보시나요? 다음 시즌부터 이아누치가 연출에서 빠진대요.

네오 2015-05-12 20:20   좋아요 0 | URL
네..혹시 게리가 rage against the machine 설리나한테 얘가했던거 기억나요?

에이바 2015-05-13 10:10   좋아요 0 | URL
네ㅋㅋㅋㅋ 제가 사랑하는 캐릭터 게리...
 
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허즈번드 시크릿>을 읽게 된 계기는 별 거 없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올 때 마다 책 표지가 뜨고, 판매지수도 높길래 읽을만 한가 생각했다. '아마존에 쏟아진 찬사!' 이런 광고카피도 한 몫 했고. 그러다 ㄷ님의 감상을 보게 되었는데 와, 정말로 공감하는 표현을 찾았다. "수다스럽다."

 

사실 글 자체는 흡입력있게 쉬이 읽힌다. 그런데 글 전체에 도사리고 있는, 뭔지 모를 부산스러움은 집중력 있는 독서를 방해한다. 가끔 번역된 소설을 읽다보면 느끼는 점이기도 한데, 작가의 문체가 원래 이런건지 다른 작품들은 읽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책에 실린 아마존 서평 중 하나는 "치밀한 구성, 예상치 못한 반전"이라는데 글쎄올시다. 남편의 비밀은 초반부에서 알아차릴 수 있고, 독자가 반전을 알아차렸다는 점에서 치밀한 구성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추리소설 느낌이 나지만, 남편의 비밀이야 편지를 읽어보면 알 수 있을 테고...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사건의 전말과 '만약'이란 가정은 그저 끼워맞추기처럼 느껴진다.

 

소설은 존 폴을 통해 인간의 죄책감과 자기 기만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특히 그의 짝인, 모범적인 세실리아가 바라보는 시선에서 잘 드러난다. '진실'을 마주한 그녀는 몇 번 구토하고 자기절제력을 잃는다. 하지만 충격이 지속되는 시간과 강도는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또 너무 빨리 회복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캐릭터다운 빠른 회복일 수도 있겠고, '엄마'라는 포지션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 주제를 다루기에 '일주일'은 충분한 것 같기도,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버지니아가 긴 세월 동안 입을 다문 것, 세실리아가 끔찍해 하면서도 입을 다물게 되는 것, 테스가 조각난 결혼생활을 짜 맞추려는 것 그리고 레이첼이 자신의 삶을 돌보지 않은 것 모두 '모정' 때문이다. 자식이라는 게 뭔지, 주정뱅이였던 코너의 어머니까지도 중요한 순간에 모정을 발휘한다. 엄마는 그런 걸까. 사랑과 희생은 언제나 함께인 단어인걸까.

 

시모도 알고 있었으니 빼박 사기 결혼이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진짜일 테지만, 이 때까지 그녀가 알아온 남편의 실체는 빈 껍데기였단 말인가. 아무리 아이들을 위한 선택이라지만 세실리아가, 매 맞는 아내와 겹쳐보였다면 너무 비약이려나. 죄책감과 울분, 모든 진실 앞에 폭발하고 말지만 부모의 죄를 자식이 대신 이어받는다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를 보며 더한 고통에 시달릴 건 분명 세실리아일 테고.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갔다면 세실리아는 다른 이를 만나 결혼했을 것이고, 코너도 그토록 오랜 기간 고통받지 않았을지 모른다. 존 폴도 안타깝지만 '그도 피해자'라는 면죄부를 주고 싶지 않다. 진짜 피해자는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살지 못했고, 살지 못하고, 살아가지 못할 사람들이다. 죄에 대한 속죄 방식을 가해자가 직접 정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거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존 폴이 온몸을 크게 들썩거렸다. 심장마비로 고통받는 사람처럼 손바닥으로 가슴을 세게 눌렀다.

"내 앞에서 갑자기 죽진 마."

세실리아가 날카롭게 말했다.

세실리아는 손바닥 끝에 볼록한 부분을 두 눈에 대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지그시 눌렀다. 눈물이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처럼 훨씬 짭짤하게 느껴졌다.

"왜 레이첼에게 말한 거야? 하필 이때?"

존 폴이 말했다.

세실리아는 눈에서 손을 떼고 존 폴을 쳐다보았다. -505, 506p

 

펼친 부분 접기 ▲

 

발췌는 딥빡^^ 을 느낀 부분. 저혈압이신 분들께 추천한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만큼은 아니지만 간만에 혈압상승을 느낄 수 있다. 멘탈 약한 남편을 보듬어 살아야 할 세실리아가 안 됐지만, 그녀의 고백이 좀 더 일렀다면 비극을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결국 자식을 위한 피츠패트릭 엄마들의 선택은, 자식들의 인생을 고통스럽게 했다.

 

아이가 없었다면? 세실리아가 진실을 알지도 못했을테고(편지가 없었을테니), 진실을 알았다손 치더라도 거침없이 이혼했을 텐데 자식이란 게 뭔지 참, 인생은 쉽지 않다. 그리고 자식도 없는데 고통받는 코너... 짝을 잘 만나야한다는 교훈을 준다. 사람 마음이란 게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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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5-05-0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언 매큐언의 <속죄>에서 딥빡이라고 할수 있는 부분이 있었나요? ^^

에이바 2015-05-06 11:57   좋아요 0 | URL
브리오니요. 제가 이 소설을 2006년 봄에 읽었는데요 그 이후로 다시는 펼치지 않았죠... <작가란 무엇인가> 때문에 매큐언 작품에 관심이 가서 다시 읽어볼까 생각중이에요.

네오 2015-05-06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상황들을 제대로 말하지 않는 부분요? ㅋ 브리오니가 로빈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거 아닌가요? ㅎㅎ

에이바 2015-05-06 23:16   좋아요 0 | URL
감수성 풍부한 문학소녀였으니까요. 그런데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시도도 안 했죠. 문학으로 속죄를 했다기엔 기만성이 강하고요...

CREBBP 2015-05-0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수다스러웠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래도 뭐 술술 잘읽히는데다가 그 삼각관계 있자나요. 남편이 사촌이랑 바람나서 와이프한테 하는 짓거리 묘사가 참 흥미진진했죠. `재미`는 있었습니다.

에이바 2015-05-07 19:25   좋아요 0 | URL
테스 이야기는 뭔가 있을 법한 이야기라서 흥미로웠어요. 나머지 인물들은 맥 빠지고요. 그러고보니 이 소설 막장이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