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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평점 :
처음 읽는 하루키의 에세이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라니 귀엽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면 '개풀 뜯는 소리'라고 하는데, 요즘은 그냥 간단하게 개소리라고 하는 듯 하다. 실제로 개들이 풀을 뜯기도 한다고. 사자도 그렇고. 무슨 영양학적으로 필요해서 그렇다는데 신기하다. 실제로 인류의 발달사를 보면, 육식을 하면서 신체가 커지고 폭력성도 커졌다고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미드 <그림, Grimm>을 보면, 폭력성을 줄이기 위해 필라테스와 명상, 채식을 하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꽤 효과가 있다는 설정이다. 그러면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는 비폭력주의자라고 볼 수 있을까? 풀 뜯는 사자를 생각하니 꽃향기를 맡는 사자도 생각난다. 가끔 인터넷을 하다보면 동물들이 꽃 향기를 맡는 사진들을 보는데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괜히 마음이 뭉클해진다.
이 에세이는 하루키가 잡지 <앙앙>에 실었던 연재물을 모은 것이라 한다. 2012년에 쓴 글들이라 하는데, 그 때 나이 59세. 감성이 젊다. 작가는 동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던데, 젋게(young) 사는 것이 젊은 정신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앙앙>은 젊은 여성들이 주로 보는 잡지이기 때문에, 독자층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고. 젊은 여성들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게 다른 그룹에 비해 빠르다고 한다. 그래서 편하게 썼다기 보다는, 하루키는 귀찮으면 안 읽겠지라고 생각해서 편하다고 한 것 같다.
에세이들은 편하게 읽을 수 있고, 대체로 좋은 글이다. 여행도 많이 하고, 외국에 체류한 기간도 길고... 오픈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하며 읽은 몇 가지 글들이 있어 얘기해보려 한다.
<잊히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글에서는 베를리오즈가 잊어야만 했던 교향곡을 얘기하는데,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 '망각'이라지 않나. 만약 우리 뇌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섬세한 감성이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들은 그래서 더 놀랍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베를리오즈의 작품은 무척이나 아깝지만...
<죽도록 지루한 대화>와 <모릅니다, 알지 못합니다>는 하나로 이어도 되겠다 생각했다. 언어 구사능력이 특출하다고 말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컨텐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대화를 위해서는 센스가 필수다. 예전에 외국에 있을 때, 그 나라 말을 잘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가 가끔 입을 열 때면 모두가 빵 터졌다. 간단한 단어를 가지고도 얼마나 웃긴지, 대화의 맥락을 재미있게 비트는 재주가 있었다. 다른 친구가 백마디를 해도 지루한 이야기를 한 마디로 웃기다니. 그런 센스는 타고나는 걸까 싶다. 하루키는 작가라는 직업의 장점이, 대화를 할 때 '모릅니다'라고 할 수 있다는 거라고 했다. 사람들이 작가라는 직업을 일단 제껴놓기 때문인지... 그러고 보면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건 용기있는 행동이다. 어릴 때는 모르는 이야기를 할 때도 아는 척 하다가 들통나는 사람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른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더구만.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모냥 빠지는' 행동일 수 있다는 거다. 눈치껏 때울 수 있는 부분에서는 의뭉스럽게 넘어가되, 솔직해야 할 타이밍에선 또 진실되어야겠지. 하루키씨 부럽네요.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가방>의 한 대목이다.
어떤 짐이든 부족함 없이 다 들어갑니다, 안심하고 맡겨주십시오-이런 친절한 가방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72p)
물론 없다.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마법주머니를 보면 주머니에 공간 마법을 걸어서 집도 한 채 넣고 하더만... 최근 본 컨텐츠 중에 그럴 듯한 것은 미드 <부통령이 필요해, Veep> 에서 설리나의 보좌관으로 나오는 게리의 가방 '리바이어던'이 있다. 아무에게나 가방을 맡기지 않는 게리... 설리나가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는 신비의 가방. 상관이 새로운 가방을 사주자 거기에 적응한다고 한참 걸린다. 그건 그렇고, 가방 이름이 리바이어던이라니 ㅋㅋㅋ
<바위에 스며들다>에는 매미 이야기가 나온다.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베짱이는 사실 매미다. 그리스에 있는 매미가 북유럽에는 없어서 매미가 베짱이가 된 거라고. 생각해보면 매미는 땅 속에서 12년(종에 따라 다르다)을 기다렸다가 여름 한 철을 산다. 이 정도 기다림이면 생애 마지막을 날개를 비비며 불태운다고 비난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중국산 꽃매미는 싫다. 생긴 것부터 비호감이다. 참매미는 크기도 작고 귀여운 편인데 꽃매미는... 나무의 수액이 마를 때까지 붙어있는다고 한다. 엄청난 생명력으로 어떤 약도 그들을 저지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발로 밟거나 해서 으깨어(...) 죽이는 것이라고. 뉴스에서 소방관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봤다. 날이 더워지면서 이 꽃매미들이 많아졌고 나무는 말라 죽고 나무가 죽으니 다른 매미와 생명들은... 도시에도 많다. 강남역에서도, 종로에서도 많이 목격했다. 무서운 건 매민데 울지 않아! 가끔 사람에게 붙어있기도 하는데 아무리 광란의 댄스를 춰도 떨어지질 않는다.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으으... 그들의 계절이 오고 있군요.
<말도 안 되는 거리, 험한 길>에서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하루키 답게, 당시의 그리스 전령에게 현대의 마라톤 경기를 뛰게 해보고 싶다고 한다. 가뿐하게 이기려나, 아니면 지구온난화와 대기오염 때문에 현대인에게 지려나. 동등한 조건이 아니라면 알러지 반응 때문에 현대인이 이길 것 같아요. 네.
짧지만 즐겁게 읽었다. 표지가 귀여워서 책장에 꽂아두고 싶은... 하지만 읽어도 그만, 읽지 않아도 그만인 글들. 안 읽는다고 큰일날 글들은 아니고,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