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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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프랑스 파리에 사는 여섯 살 난 소녀 마리로르는 선천성 백내장으로 눈이 보이지 않으리란 진단을 받는다. 딸에 지극정성인 아빠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하는 자물쇠장인으로, 딸을 위해 비싼 점자책을 마련하고 혼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한가지 감각이 부재하면 다른 감각들은 예리해진다고 했다. 마리로르는 아빠의 선물인 수수께끼 모형을 손의 감각만으로 풀어내는 경지에 이른다. 1934년, 독일의 탄광도시 졸페라인에 사는 여덟 살 베르너는 갱도가 무너져 아버지를 잃고 동생 유타와 ‘아이들의 집’에 맡겨진다. 충격 때문일까. 남매의 머리는 하얗게 새어버렸다. 언덕 너머 쌓아둔 더미에서 라디오를 찾아낸 소년은 기계 회로에 마음을 빼앗긴다. 타고난 재능으로 라디오를 고친 소년은 밤늦게 몰래 라디오를 듣는다. 어린이를 위한 방송과 음악을 들려주는 프랑스 남자의 목소리는 소년이 꿈을 꾸게 한다. 〔같은 해, 히틀러는 ‘긴 칼의 밤’을 거쳐 총통이 되었다.〕 1940년 5월, 소녀는 열두살 소년은 열네살이 되었다. 소년의 꿈은 선명함을 더해가지만 1년 후면 탄광노동자가 될 예정이었다. 소녀는 집과 박물관을 오가며 공부 중이었다. 그러나 파리가 함락될 거란 소리에, 박물관의 귀중한 보석 ‘불꽃의 바다’를 가지고 소녀와 아빠는 피난길에 오른다. 졸페라인에 온 간부의 커다란 전축을 고친 소년은 추천장을 들고 국립 정치 교육원으로 향한다. 소녀에겐 절망이, 소년에겐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라디오와 보석, 소년과 소녀의 시각이 교차되며 이어지는 이야기는 전쟁이 인간의 삶을 황폐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리로르와 아버지는 파리로 곧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럴 일은 요원하다. 그들이 향한 생말로는 소녀의 작은 할아버지인 에티엔이 사는 곳이다. 에티엔은 1차대전 이후로 PTSD를 앓고 있어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소녀는 박식한 할아버지와 좋은 친구가 되지만 파리에 다녀오겠다던 아버지의 소식이 끊긴다. 내면으로 파고들던 소녀는, 생말로 해변에 밀려온 파도와 바람이 싣고 온 바다 내음으로 마음을 치유한다. 한편, 국립 정치 교육원에서 수학과 공학을 공부하게 된 베르너. 약육강식은 소년들의 세계도 지배하여, 단짝인 프레데리크는 숱한 괴롭힘에 시달린다. ‘다른’ 사람들을 핍박할 구실이 전쟁을 일으켰듯이, 소규모 복사판인 학교에서도 ‘다른’ 소년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단짝을 보호하지 못한 베르너의 죄책감은 어쩌면, 정치 교육원에 오기 위해 라디오를 부쉈던 그 밤- 동생의 원망스러운 눈동자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검은 줄이 가득한 동생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비겁함은 단짝의 멍한 눈동자에 비춰진다. 그 죄책감에 따른 명령불복, 괘씸함 때문인지 베르너는 어린 나이에도 전쟁에 차출된다. 한편 생말로는 여인들을 중심으로 반독일 활동이 이루어진다. 마리로르의 존재로 힘을 얻은 에티엔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게 되고, 다락방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다. 30년대에 이어, 그의 레코드에서 울려 퍼지는 드뷔시의 달빛(월광)은 영국과 독일에도 드리운다. 이 거대한 달무리를 따라 베르너가 생말로를 향한다. 전파 발신지를 추적하여,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영리한 소년은 단번에 그 장소-졸페라인에서 들었던, 그 라디오 속 프랑스 남자의 목소리가 퍼지는 진원지-를 찾아낸다. 소년은 입 안에서 프랑스어 문장을 만들어 본다. 전쟁 전에, 선생님의 방송을 라디오에서 들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기회였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베르너도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쓸모, 소용은 오직 국가를 위한 것이라는 구호가 거북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프레데리크의 몸과 마음이 파괴되는 것을 보며 고통스럽다. 베를린의 집에서 바라본 별을 단 사람들, '치워 버려'서 홀가분하다는 말들.. 어디에 발을 붙여야할지 모른 채, 그저 허공에서 발을 저을 뿐이다. 마리로르는 아빠의 부재 속에, 생말로에서 고군분투한다. 히틀러가 '장애'를 가진 이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생각할 때, 소녀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선 것은 엄청난 일이다. '보이지 않는 모든 빛'은 라디오 전파, 그 속에 녹아 든 달빛이라는 음악 그리고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미세한 전기이다. 전파를 통해 전해지는 달빛이 우리 귀로 들어와 마음을 움직인다 해도 좋을 것이다. 우연을 거듭하여, 마리로르와 베르너가 만나게 되는 순간은 기다려왔던만큼 아름다웠다. 독자는 베르너를 알지만, 마리로르와 유타를 비롯한 이들은 그를 모른다. 성인이 된 그들이 베르너를 오해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침묵 속에 묻힌, 전쟁 중 베풀어진 친절과 희생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전쟁의 명분은 정신을 마비시켜, 칼과 총을 들게 하지만 아주 작은 한 가지로도 그 마비가 풀릴 수 있다. 라디오를 통해, 한가지 목소리를 통해 선동된 이들에게 회의의 씨앗 하나가 심긴다면.. 1차대전 때 참호에서 전투 속개를 기다리며 듣던 그 노래가 상대 진영에서 들려오자 한동안 전투를 못했다고 한다. 괴물처럼 느껴지던 적군이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줄곧 회의와 죄책감에 시달리던 베르너가, 생말로 모퉁이에서 마리로르를 보고 전파에 실려온 목소리를 들으면서 하게되는 결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무너진 잔해를 헤치고 나온 소년이 어디로 향할지도 안다. 소년이 추구한 순수한 학구열과 재능이, 나이 든 소녀의 모습에서 이어져가는 것을 보며.. 전쟁이 아니었다면 소년의 재능이 과연 꽃피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왔다. 두 소년 소녀가 겪은 비정함, 생말로의 풍경과 동유럽의 해바라기 밭을 지나는 문장 사이 숨은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면 이 작품을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소년과 소녀의 시선에 끼어드는 보석 사냥꾼 룸펜은 역사를 반영한 악당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전쟁 중에 다양한 미술, 예술품을 모아 고향 린츠 박물관에 모아두려 했다. 룸펜은 영원한 삶을 약속한다는 '불꽃의 바다'를 찾고 있다. 감수성과 예술, 문화를 제거한 이들이 예술품을 찾는데 혈안이 된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달빛이 반짝이며 부풀어 오른다. 찢어진 구름들이 나무 위를 휙휙 질주한다. 나뭇잎들이 사방에서 날아다닌다. 그러나 달빛은 부는 바람에도 동요하지 않고, 베르너가 보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리고 차분하게 구름을 뚫고, 허공을 뚫고 지나간다. 그 빛줄기들은 풀들이 드러 누운 들판에 넓게 걸쳐져 있다.

 

왜 빛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까? 

2권 391-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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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8-03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말 내내 붙잡고 있었어요. 최세희 역자가 조금 자기 스타일이 강한 것 같아요. 가시내에서도 그러더니.. 아직 2편 1/3정도 남았다는

2015-08-07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7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8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5-08-05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내는 아마도 불어번역이고 최정수님 번역인데 제가 엉뚱한 소리를.. 프레데리크에게 닥친 일은 차마 적을 수도 없을 만큼 마음 아팠어요. 장님이어도 그렇게 성공할 수 있게 점자책들을 많이 발행하고 배려하는 시스템이 있었으니 교수가 되는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읽고나서 여운이 더 긴 책이네요. 읽을 때도 시간이 오래걸리더니. 문장이 평이하지 않고 시 같기도 산문 같기도 .. 아마존 보니 미국 독자들에게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책이었던 것 같더라구요. 일던 뒤쪽 반이 얼버무린 것같다는 의견. 시간이 왔다갔다 해서 너무 헷갈리고 산만하다는 의견이 많더라구요

에이바 2015-08-07 21:1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부분 다 공감하고요. 글을 읽고나서 어떤 교훈이나 전쟁이 주는 딜레마에 대한 고민같은 건 크게 다가오는게 없더라고요.(말하자면 이 작품만의 독특함?) 치밀한 구상을 하고 아름답게 쓰려고 했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배경을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어요. 읽으면서 생말로랑 동유럽의 해바라기 밭 떠오르는게 참 대단하더라고요. 기억도 되살리고.. 베르너가 애타게 바라던 배움의 기회가 마리로르에겐 (쉽지 않았지만) 한 번의 결심이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기대보다는 평이했습니다.. 문장이 아름답다고 하던데 솔직히 못 느꼈어요. 얼른 이해가 되지않아 1권 초반부 내내 붙들고 있었거든요.
 
안나 드 노아이유 시선 : 사랑 사랑 뱅뱅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2
안나 드 노아이유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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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의 안나 드 노아이유, 자신의 살롱에서〉 

 

루마니아의 보야르 가문 출신인 안나 드 노아이유 백작부인은 1876년 11월 15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결혼 전에는 안나-엘리자베스 비베스코 바사라바 드 브랑코방 공녀였다. 19살이 되던 1897년, 노아이유 7대 공작의 넷째 아들인 마티유 드 노아이유 백작과 결혼하였고, 백작위를 이어받은 아들은 안느-쥘 드 노아이유이다.

안나는 가정에서 받은 교육을 통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를 구사했고 예술- 특히 음악과 시에 대한 안목이 뛰어났다. 지성인이자 문인으로서 3편의 소설과 자서전, 많은 시 작품을 남겼으며 파리의 예술가들이 모이던 살롱 주인이었다. 주변인으로는 폴 클로델, 피에르 로티, 앙드레 지드, 마르셀 프루스트, 장 콕토, 폴 발레리, 프랑시스 잠, 오귀스트 로댕 그리고 콜레트 등이 있다. 1904년 12월, 안나는 다른 여성문인들과 함께 당시 발간되던 잡지의 이름을 딴 〈행복한 삶〉이라는 문학상을 만든다. 이는 여성문인들의 활동을 장려하기 위함이었는데, 1회 〈공쿠르 상〉의 최종 후보에 올라간 안나가 탈락한 이유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은 1922년 〈페미나 상〉으로 계승되어, 그 해 프랑스어로 쓰인 산문과 시 중 가장 뛰어난 작품에 수여한다. 수상자의 성(性)과 국적은 상관이 없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은 수상작품 중 하나이다. 


사교활동과 위스망스의 교류로 유명했던 뮈니에 신부는 그녀에 대해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마티유 드 노아이유 부인(Mme. Mathieu de Noailles)은 찬양을 좋아한다. 그녀는 십자가, 개선문, 나폴레옹이 되기를 원한다. 내게는 과했다. 감정의 분출 그 자체인 그녀는 지금이 아닌, 헬레니즘, 비잔틴시대에 태어나야 했다.〉 안나의 열정적인 특징은 다른 지인들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장 로스탕은 《안나 드 노아이유 시선집》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짓궂었다. 이 시인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심리적 통찰력, 미르보의 신랄함, 쥘 르나르의 엄격한 명확성을 가졌다.〉 반면 옥타브 미르보는 그의 저서 《La 628-E8》에서 그녀를, 여사제에게 둘러싸여 〈살롱의 앵무새로서의 역할을 즐기는〉 우상이라며 비꼬았다.

안나 드 노아이유의 작품은 깊은 서정과 관능을 드러내고 있다. 사랑과 열정, 낭만과 상실, 고독과 죽음들은 새로운 시각- 즉 여성의 시각에서 제공된다. 대중들이 열광했으며, 디오니소스적이라 불리는 그녀의 시는 찬양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살롱 주인이며 백작부인이라는 지위가 아니었다면 찬사와 인정을 받지 못했을 거라는 것, 그리고 작품을 소비하는 독자층이 그 이유였다. 시인의 사후 인기는 사그러들었지만 작품에 대한 인정은 옳았다고 평가되고 있다. 안나 드 노아이유의 작품과 활동내용에 대한 인정은 다음과 같다: 벨기에 왕립 불문학 아카데미의 첫 여성 회원(33번석: 이후 콜레트와 장 콕토가 계승), 첫 여성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3급 훈장), 192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그랑 프리 수상 등.

그러나 따르는 비판처럼, 안나 드 노아이유는 사교계의 중심에서 문인 혹은 예술가들의 〈뮤즈〉 역할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복잡한 관계도에서 중요한 인물은 단연, 모리스 바레스이다. 1903년, 안나의 살롱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으로 보인다. 모리스 바레스는 안나의 지성과 우아한 화술에 마음을 빼앗긴다. 사랑에 빠진 바레스는 아내와 함께 앙피온에 있는 백작 부부의 빌라에 초대되어 함께 휴가를 보낸다. 몇 달 후, 바레스 부부는 백작 부부의 이탈리아 여행에 우연인 척 합류하는데, 이 때 백작은 이 관계를 알아차린다. 두 사람의 우정에서 안나는 정신적인 교류와 사랑을 원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정신과 육체의 합일에 대한 바레스의 열망이 더해진다. 그는 안나의 살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1906년 바레스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정회원이 되는데 1907년, 전통적으로 전임자를 칭찬해야 할 취임연설에서 안나에 대한 감정과 우정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한다. 세 달 후, 안나의 시집 《눈부심》이 출간되고 《스파르타 여행기》를 쓰기 위해 여행 중이던 바레스는 시집의 헌정사를 쓰기 위해 비용을 들여 파리로 돌아온다. 백작은 그의 헌정사에 반대하고, 아내를 압박해 요청을 거절하게 만든다. 이를 핑계라 생각한 바레스는 화를 내며 이별을 고한다. 이별 후 안나의 비통한 심정을 담은 시는 1913년에 발표한 《산 자와 죽은 자》에 실린다. (두 사람의 육체적 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나는 살롱에서 공통의 친구들로 이어진 바레스의 조카- 샤를 드멍주와 가까워진다. 다른 이들과 같이 드멍주의 숭배는 보답받지 못한다. 1909년, 그는 그녀를 너무도 사랑한다는 편지를 남기고 권총 자살을 하고 바레스는 모든 책임을 안나에게 돌린다. 1912년, 백작 부부는 우호적으로 이혼하고, 1913년 안나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바레스에게 보낸다. 두 사람은 1917년에야 서신을 주고받게 된다. 바레스 55세, 안나 41세였다. 1923년 그가 사망하자 깊은 절망에 빠진 안나는 죽음에 대한 시를 많이 쓰고 이는 《고통의 명예》에 실린다. 1933년, 안나는 전 남편인 마티유 드 노아이유 백작 앞에서 숨을 거두고, 파리의 페르 라 셰즈에 묻혔다. (스캔들은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서신을 참고)


 


XX


그것은 있었지만 영원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것을 알기에
상실과 갈망의 우주인 나는
나에게 지친다

너의 부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헛되이
망각, 희망, 무의식을 추구한다.

 

79쪽

1927년 출간된 《고통의 명예》

 

 

 

바레스와의 스캔들은 죽음의 이미지를 다룬, 《고통의 명예》에 실린 시들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이 시들을 단순히 사랑의 이별에 대한 고통이라고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안나의 나이 10살, 아버지를 잃고 그녀는 〈죽음〉을 알게 된다. 안나는 빅토르 위고가 익사한 딸에게 바친 작품을 읽고, 예술을 통해 죽음의 극복과 투영이 가능함을 깨닫는다. 《사랑 사랑 뱅뱅》에는 사랑에 대한 시 또한 많이 실려있다. 안나의 작품은 솔직한 감정의 발산을 통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번역노트에 소개된 이미지〉를 참고하길 바라며, 함께 실린 아리아드네의 비탄〉를 소개한다.

 

 

 

 〈낙소스 섬에서 아리아드네를 발견한 디오니소스〉, 1635년 경 르냉 형제. 오를레앙 보자르.

 

 


아리아드네의 비탄


자두와 초록색 배를 떨어뜨리는
바람
달을 뒤흔드는 바람
바다를 휘모는 바람

부수고 파괴하는 바람
차가운 바람
바람아 불어라
혼란스러운 내 가슴을 휘몰고 가라

투명한 바람아
풀잎 사이에
내 가슴에 불어라
쓴 수액과 함께 내 가슴을 뽑아라

아! 어서 성큼성큼
폭풍우가 왔으면
머릿속에서 맴도는
고통을 앗아갔으면

아! 어서 바람이 불어와 떠날 때
그 속에 퍼덕이는 문처럼
육중한 내 가슴을 실어갔으면!

바람아, 내 가슴을 실어가
달과 숲과 짐승
하늘과 어둠과 바다에
그 파편들을 집어던져라

내가 사랑했던
그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다시는 나에게 돌아올 수 없도록

 

100-101쪽

1902년 출간된《세월의 그림자》

 

 

 

 

 〈미노타우르스에 대적하는 테세우스〉, 1826년 쥘 라메이, 파리 튈를리 공원.

 

아리아드네는 크레타 미노스 왕의 장녀로,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되어 그가 미노타우루스의 궁에 들어갈 때 실타래를 건네준 인물이다. 괴물을 처치하고 나온 테세우스는 그녀를 낙소스 섬에 버려두고 간다. 남겨진 공주는 연인이 돌아오길 기도한다.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디오니소스가 그녀를 아내로 삼고 권능을 부여한다는게 신화의 내용이다.

 

그러나 노아이유의 아리아드네는 시 제목인 〈아리아드네의 비탄〉과 달리 슬퍼하지 않는다. 연인이 돌아오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녀는 자연의 강력한 힘(바람, 폭풍우)에 호소하여 마음의 고통, 파편을 제거하길 바란다. 〈혼란스러운 내 가슴〉, 〈고통〉, 〈내가 사랑했던〉 과거를 떨쳐내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현재 삶을 인정함으로써 새롭게 시작하는, 주체적인 삶을 의미한다. 남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영민하게 구혼자를 물리친 페넬로페는 그리스 신화에서 이상적인 아내로 그려진다. 이와 비교하면, 수동성을 탈피하려는 아리아드네는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시각의 전복은 다른 시 〈이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감정에 솔직하고 주체적인 여성상은 기존의 가치를 고수하던 이들에겐 도발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작품이 실린 《사랑 사랑 뱅뱅》은 안나 드 노아이유의 작품을 처음으로 번역한 것이다. 프루스트를 비롯한 문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의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은 안나 드 노아이유를 만나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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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7-26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은혜와 사랑을 배신한 영웅 테세우스의 인생도 순탄치는 않았죠 ....

에이바 2015-07-27 11:43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그러고보면 신의 피를 잇지 않은 영웅들은 말로가 좋지 않았던건지 궁금하네요..
 
매듭과 십자가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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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임스 엘로이는 이언 랜킨을 〈타탄 누아르의 제왕 The King of Tartan Noir〉이라 칭했다. 타탄은 하이랜더들이 입던 킬트의 체크무늬 천으로, 타탄 누아르는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범죄 소설을 가리킨다. 이언 랜킨의 《매듭과 십자가》는 이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타탄 누아르는 제임스 호그의 《사면된 죄인의 사적 일기와 고백》,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양면성, 선과 악, 구원과 징벌 등을 다룬다. 미국의 하드보일드(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스타일을 흡수해 주로 냉소적인 세계를 그리며 주인공은 대개 공명심이 부족한 안티히어로이다. (아무런 죄책감없이 모닝롤과 우유를 훔쳐먹는 존 리버스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이 겪는 개인적 위기들이 사건 해결의 핵심이 된다.

 

존 리버스 시리즈는 영국 범죄 소설 판매량의 10%를 차지하며, 보통 출간 후 3개월 이내에 50만부가 판매된다.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ITV 계열 제작사에서 5개 시리즈(총 14개 에피소드)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가장 마지막에 방영된 에피소드인 《매듭과 십자가》에서 주인공은 켄 스텃이 연기했다. 이 배우는 영화 《호빗》에 드워프 발린으로 출연했다.

 

1편인 《매듭과 십자가》는 1987년에 출간되었으며, 가장 최근작인 19편은 2013년에 출간되었다. 범죄 수사과 형사의 은퇴 연령을 볼 때, 17번째 소설 《Exit Music》이 시리즈의 마지막이 되리라 예상됐지만 이후로 2권이 더 출간되었다. 주인공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형사로 근무중인 41세의 존 리버스. 그는 특수부대 SAS의 훈련을 마쳤으나 모종의 이유로 그만두고 경찰이 되었다. 

 

사설이 긴 이유는, 이 소설이 250쪽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얘기해도 미리니름을 피할 수 없어!! 작가는 범죄소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주인공에게 복잡한 이력을 안겨주었다 한다. 수수께끼(Rebus)라는 이름처럼 존은 복잡한 인물인데 자신의 지적능력을 뻐기는 편이다. 하늘이 〈바그너의 오페라만큼이나 음산하다〉라거나, 이어지는 사건들이 〈히드라〉 같다거나-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는 모습들은 존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이 소설에서 느슨하게 변주되고 있다. 짧지만 흡입력이 상당했다.

 

《매듭과 십자가》는 1985년을 배경으로 한다. 디스코텍, 카세트덱, 그리고 전자문서화 같은 얘기들에선 세월의 흐름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내 에든버러의 분위기와 맞물려 아련한 복고풍이 느껴진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날씨 아래 중세 분위기를 잘 간직한 에든버러, 〈정신분열증적인〉 이 도시를 배경으로 곁들여지는 맥주와 블랙커피. 리버스 시리즈에는 스타일이 있다.

 

스코틀랜드 동부의 파이프(Fife)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찾은 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면술사가 된 동생 마이클의 집에 들르지만 형제의 관계는 데면데면하다. 마이클은 일과 가정생활 모두 성공적인 반면 존은 이혼했고, 특수부대에서 받은 훈련의 트라우마로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있다. 에든버러로 돌아온 존을 기다리는 것은 어린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쇄살인 사건이다. 존에게 익명으로 전해지는 봉투에는 알 수 없는 메시지-〈단서는 사방에 널려 있다〉, 〈시간의 틈을 읽으라〉-와 매듭, 십자가가 들어 있다. 한편 마이클이 마약운반책이라는 증거를 찾아낸 기자는 존의 알 수 없는 과거와 맞물려 이 형제가 범죄에 연루되어있음을 직감하는데...

 

리버스 시리즈를 꾸준히 소개하겠다는 버티고Vertigo는 다음 작품으로 2편 《숨바꼭질》을 목록에 올려놓았다. 좋은 기획이다. 이언 랜킨은 가족과 함께 에든버러-작가 JK 롤링, 알렉산더 매컬 스미스, 케이트 앳킨슨과 가까운 곳-에 산다고 한다. 네 작가 모두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왕실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16쪽에서 존과 마이클의 대화를 보면 〈런던에서 온 독실한 신교도는 퀸즈 파크 레인저스 팬〉일거라 단정하는데, 이 클럽은 박지성 선수가 뛰었던 곳이 아니던가?! 찾아보니 레인저스의 성향이 신교도 혹은 (북아일랜드와 영국) 통합주의자*로 여겨지는데 클럽팬끼리 이 문제를 좀 따지는 모양이다.

 

에든버러를 담아낸 영화로는 데이비드 매켄지의 《할람 포》가 있다. 제이미 벨, 소피 마일즈, 키어런 하인즈가 출연한다. 스코틀랜드에서 결성된 밴드 프란츠 퍼디난드가 사운드트랙에 참여했다. 《트레인스포팅》도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영화이지만 글래스고에서 대부분 촬영되었다.

 

 

*는 셰필드포럼을 참고.

 

-존 리버스의 재즈 테이프 중 콜먼 호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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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2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의 서평을 읽어보니까 리버스 시리즈는 영국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네요.

에이바 2015-07-21 19:08   좋아요 0 | URL
타탄 누아르는 처음이라 빼먹었는데.. 잉글랜드랑 스코틀랜드 범죄소설이 구별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어떤 대체물이 된 장르라.. 하드보일드, 안티히어로 요소를 추가했어요.^^

북다이제스터 2015-07-21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미드, 영드 정말 좋아하는데, 그런 느낌으로 읽으면 딱 좋을 듯 싶어요^^ 좋은 책 추천 넘 고맙습니다.

에이바 2015-07-21 19:56   좋아요 1 | URL
존 리버스는 재즈를 좋아한다는군요. 영상도 하나 추가해봤습니다. 존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이 끝나 있어요ㅋㅋ 영드 좋아하시면 맞으실 듯 합니다. 같은 수사물이라도 영드는 좀 다르잖아요ㅎㅎ

AgalmA 2015-07-2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작가였다면 에든버러 음악페스티벌을 어떻게든 넣었을 겁니다ㅎ
에이바님이 그런 언급을 안 하신 거 보니 이 작가 음악마니아는 아닌 듯~
왜 하드보일드쪽은 죄다 재즈 선호인가 의문....ㅎㅎ

에이바 2015-07-21 21:26   좋아요 1 | URL
차차 나오지 않을까요? 총 19권인데 설마.. 1권엔 없어요. 책을 딱 펼치고 담배연기가 흐르는 중에 재즈.. 너무 전형적인가요? 아까 프란츠 퍼디난드 노래 걸었다가 뺐어요 너무 발랄한가 싶어서 ㅋㅋㅋ

찾아보니 이언 랜킨 롤링 스톤즈 팬인가 봐요. 조이 디비전, 밴 모리슨.. 취향 나쁘지 않네요ㅎ

AgalmA 2015-07-23 00:19   좋아요 1 | URL
오~ 조이 디비전, 밴 모리슨 정도면 적당히 대중, 적당히 마니악이네요. 대개 그렇듯 종점이 재즈인 거겠죠? 이언 랜킨에게 제 무례를 사과합니다ㅎ;;
존 리버스 탐독 Go이십니까? 저는 기다렸다가 젤 재미난 거 추천해주세요! 해야지ㅎㅎ;;

AgalmA 2015-07-21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9편 중에 한 번쯤은 언급되겠죠ㅎ...설마 ˝exit music˝ 라디오헤드는 아니겠죠😁;
소설에 대사만큼이나 음악 제대로 못 쓰면 정말 아니 올시다 인데...
하루키를 대중작가로 무시하지만 책 속 음악선곡에 있어 top 레벨이죠. 클래식부터 팝, 재즈.... 평론가들은 그런 걸 몰라ㅎㅎ....

에이바 2015-07-21 21:28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라디오헤드 생각했는데...ㅋ 근데 잘 썼어요. 원래 단발성으로 썼는데 묻힌 작품을 편집부가 다시 쓰라 해서 전설의 시작이 됐대요. 이 책은 이벤트로 선물받았는데 저도 드디어 시리즈물 하나 모으는군요...! 스코틀랜드여! 하루키 취향은 최고죠bb
 
로마의 일인자 3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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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은 흥분해서 읽다가 중반 이후부터는 멈춰야만 했다. 《로마의 일인자》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뜻한다. 마리우스의 영웅적 면모와 리더십에 푹 빠져서인지, 게르만 원정 이후로 그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며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다. 기원전 100년은 마리우스가 집정관을 지낸지 여섯 번째 해이다.

 

3권의 초반(기원전 104년, 마리우스 집정관 2기)은 유구르타 왕의 평가로 시작한다. 그는 마리우스를 〈불멸의 정신〉을 가진 이로 칭하며, 술라도 우수하지만 그는 행위에 〈영혼을 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대단한 혜안인지! 유구르타의 말대로 〈전쟁의 신 마르스의 목소리를 듣는〉 마리우스는 게르만 족의 이동을 기다린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상황에서 그는 병사들을 이용해 가도를 건설하고, 도로 보수 등을 시작한다. 다른 지도자였다면 어땠을까? 소설 속에 드러난 마리우스와 술라는 모두 기존 권력에 대한 대항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제3의 시선으로 사건을 파악하도록 한다. 비전투 시기 병사들을 도로 보수 등에 투입함으로써 상태와 지형을 파악하고 더불어 훈련도 함께 한다- 국가의 녹을 먹는 병사들을 놀릴 순 없다는 마리우스의 생각은 합당하지만 당시엔 앞서가는 생각이었다.

 

전쟁에서의 역할 놀이를 즐기던 술라는 게르만 족의 이동을 기다리며 좀이 쑤신다. 그는 아프리카에서부터 생각하고 준비해 온 계획을 마리우스에게 털어놓는다. 게르만인 행세를 하며 동태를 살피는 스파이가 되는 것. 가이우스는 문득 거리감을 느낀다. 실패는 생각조차 않고 성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술라. 그건 반신반인의 혈통이어서일까. 마리우스는 마르타의 예언 속 〈가이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카이사르 집안의 위대한 로마인〉을 떠올린다.

 

원정을 떠난 마리우스에게 로마의 사정을 알리는 것은 루푸스의 편지이다. 루푸스는 친우에게 가족과 가십은 로마 공직생활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로마에 일어난 곡물 위기는 마리우스의 정치적 위기를 불러온다. (로마의 곡물은 대부분 수입한다) 최고의원 스카우루스는 이 사건의 주모자로 재무관 사투르니누스를 찍어 내고,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의 지원을 받아 호민관이 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투르니누스와 그의 친구 글라우키아의 급진성이 이후 마리우스의 발목을 잡게 되며, 그들의 개혁(선동)을 통해 원로원이 시민들의 힘과 분노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게르만 원정으로 돌아와 콜린 매컬로를 감탄하게 하는 것은, 뭉뚱그려 설명되곤 하는 〈게르만 족의 이동〉을 재현했다는 것이다. (이동 경로 지도를 보면 입이 벌어진다.) 20년 가까이 알프스 산맥 등지를 돌아다닌 게르만 족. 그들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작물 재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인구가 늘자, 먹을 것이 부족해져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동의 편이를 위해 일정조건에 맞지 않는 이들은 죽인다. 무리 대부분이 젊은 층) 술라와 세스토리우스의 활약을 통해 게르만 족의 동태를 파악한 마리우스는 원정을 성공으로 이끌고 로마를 구해낸다. 돌아온 마리우스는 〈로마 제 3의 건국자〉이자 명실공히 〈로마의 일인자〉가 된다.

 

마리우스는 지쳤다. 전쟁에서의 승패는 확실하지만, 정치라는 전쟁은 그에게 맞지 않다. 뇌졸중으로 마비가 온 남편을 염려한 율리아의 간호는 그를 로마 정치로부터 차단함으로써 마리우스가 호민관 사투르니누스를 제어할 기회를 놓치게 한다. 사실 그의 모자란 정치력(혹은 단순함, 호쾌함)은 카툴루스에게 게르만 원정의 깃발을 다 넘긴다거나, 사투르니누스의 법적 합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등에서 드러난다. 스카우루스의 말대로 〈마리우스는 정치가가 아니〉라는 점은 결국 〈로마의 일인자〉의 자리에서 그를 끌어내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 정치적 위기 속에 마리우스는 사투르니누스에게 등을 돌리고 원로원의 손을 들면서, 원로원의 오랜 불신을 타개한다.

 

한편 술라는 마흔이 되었다. 욕망과 사랑을 억누르고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술라는 마리우스에 충성하면서도 그로부터 독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아우렐리아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마리우스와 같이 〈대기만성형〉 인물임을 깨닫고 미래의 권력자인 스키피오 2세 등을 구워 삶기 시작한다. 그의 이중성은 주변인들도 깨닫고 있지만 그를 상쇄하는 위험한 매력과 멋진 용모와 혈통, 능력은 결국 그를 로마의 일인자가 되게 할 것이다. 2부인 《풀잎관》은 술라의 이야기다.

 

여성에 관한 대목도 빠질 수 없다. 게르만족 원정에 등장하는 게르만 여성들- 역사의 조연도 되지 않는 그들의 존재..  그나마 술라의 아내가 된 헤르마나의 이야기가 아쉬움을 달래준다. 2권에서 등장한 리비아 드루사는 스키피오 2세와 혼인하는데, 오빠의 명령으로 억눌린 삶을 살았던 리비아는 자신이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유가 주어져도, 그것이 허용됨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루푸스의 조카딸이자, 카이사르 가문의 둘째 며느리 아우렐리아는 인술라(아파트 개념)의 안주인으로서 자리잡는다. 아우렐리아에게 주어진 자유는 그녀가 보다 능동적인 삶을 꾸려나가게 한다. 파트리키로서, 수부라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한 몸에 받는 아우렐리아.. 서민들과 이토록 가깝고 그들의 삶 깊숙이 파고든 이가 있었던가? 그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이 괜히 가이우스가 아닌 것이다. 서민적인 이름과 귀족적인 이름. 수부라의 젖어미들이 그를 키워낸다. 인술라 얘기가 나올 때는 참 즐거웠다. 아우렐리아의 꼼꼼한 매력과 더불어 생각지 못한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1권에 등장한 보밀카르의 살수 데쿠미우스의 교차로 술집이 바로 아우렐리아가 구입한 바로 그 인술라에 있었다!

 

《로마의 일인자》를 읽으며 아주 오랜만에, 가슴이 떨리는 독서를 했다. 기원전 110년에서 100년까지 이탈리아 촌놈이 시대의 부름을 받아, 일인자에 등극하는 과정을 통해 흥미를 넘어 통쾌함을 느꼈다.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는 로마가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갖은 인간상과 정치, 문화를 통해 삶의 여러 면들을 조망하고 현대를 돌아보게끔 한다. 기원전이라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생각보다 더 발전되고 체계적인,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정치와 문명을 이룩했던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출간한 소설인데 벌써부터 후속작 출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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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2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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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은 1권보다 더 재밌다. 출간을 기다리며 공부한 내용들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이 반가웠고, 콜린 매컬로의 필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사실 흥분해서 쓰다가 리뷰가 날아갔는데... 콜린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독자가 모르는 내용도-모른다는 걸 알아채기도 전에- 문장 속에 녹아 든 설명을 통해 깨우치게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1권 안 읽고 2권부터 바로 읽어도 될 정도? 만화책 5권 읽다가 9권 읽어도 이해되는 그런 상황이라고 할까? 최고다.

 

2권에서는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의 일인자〉로 부상하는 과정을 다루는데 아주 흥미진진하다. 로마의 최대 문제인 농지 개혁으로 이어지는 군제 개혁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로마군은 모두 자영농으로 구성된다. 재산을 소유하고, 그를 지키기 위한 사람들에게 군인이 될 자격과 의무를 준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이들이 전사하거나 파산하여, 귀환하더라도 노예가 되어버려 로마의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 원정을 위해 군인이 필요했고, 전통적 방식의 징병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하층민들을 대상으로 〈모병〉을 실시한다. 물론 원로원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남자들이 없는데 어떡하겠는가? (이 대목에서 “안 돼! 안 돼!”를 외치는 의원들의 모습들이 엄청나게 웃긴다.)

 

최하층민들은 의무도 없고, 책임도 없다며 코웃음치는 이들에게 마리우스는 아프리카 원정 성공과 유구르타 왕의 생포로 보답한다. 로마군에 대한 고증도 탁월하고, 설명도 진짜 흥미로운데- 자영농으로 구성된 로마군들은 자신의 노예, 노새, 식량 등을 실은 수레를 가지고 갈 수 있었다. 당연히 행군이 느려진다. 그러나 재산이 없는 최하층민으로 구성된, 마리우스의 노새들(그들이 스스로 지칭하길)은 군장을 지고 행군하니 속도가 빠를 수밖에. 군장 구성물도 혁신적이다.

 

아무튼 아프리카 원정을 통해 영웅이 된 마리우스는 같은 시기, 게르만족과 붙은 로마군의 참패로 유일한 〈구원자〉로 떠오른다. 일찍이 마르타가 예언했듯이- 그에게 전적인 임페리움을 부여하기 위해, 로마 시민들은 법을 고쳐 1) 집정관 연임이 가능하게 하고, 2) 로마에 부재중이라도 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최초로 부재중에 당선된, 최초 연임 집정관이 된 것이다! 전쟁 중 파트리키와 신진 세력 집정관의 알력 다툼으로 8만 대군을 잃은 상황이었다. 그것도 속주 시민들까지 어거지로 끌어모은 전통 로마군이었다! 3권에서는 마리우스의 두 번째 집정관 임기의 게르만 원정이 펼쳐질 것이다!! 유쾌 상쾌 통쾌!!

 

한편 마리우스의 친우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조카딸 아우렐리아가 자세히 소개되는데, 감 잡았다. 왜냐하면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황제가 아니었으나 로마의 첫 번째 황제로 여겨지는 바로 그 카이사르 엄마기 때문이다. 후후... HBO 드라마 《로마Rome》에서도 드러난, 로마 파트리키 여성들의 삶은 아우렐리아와 리비아 드루사를 통해 그려진다. 1권에서 등장한 클리툼나, 니코폴리스처럼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이도 있고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는 여성들도 있지만 리비아 드루사는 말 그대로 집안에 갇힌 애완동물과도 같다. 루푸스에 따르면 의무가 없는 여성들은 책임도 없고, 상식 없는 최하층민 수준이라는 것이다. 나는 분노했지만 어쩌겠는가, 당시에 그랬다는데... 그러나 아우렐리아에게는 구혼자를 선택할 기회, 저택이 아닌 인술라의 삶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다. 4권쯤 등장할 카이사르를 위한 배경 설명이라니 진짜... 인술라 그림과 주변 설명에서 한 번 더 놀란 것이, 아- 콜린 매컬로는 진정 로마를 재현했구나 하는 것이었다. 작가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재무관으로 수직 상승한 술라의 활약도 빠질 수 없다. 송곳니를 숨기고 자세를 낮춘 술라는, 위대한 마리우스의 성실한 재무관으로서의 연기를 성공적으로 해낸다. 술라를 가리켜, 배우라는 표현을 쓴다. 원정을 성공적으로 보좌했지만, 방탕했던 그의 과거는 아직 희석되지 않았다. 귀족으로서, 원로원의 입장을 대변하며 독재를 이끌 술라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는게 포인트다. 마리우스의 경우 하층민으로 이루어진 퇴역군인들을 위한 연금조의 토지개혁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는 나중에 그가 몰락하는데 일조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로마 도로의 찬양도 반가웠다. 얼마 전 로버트 해리스의 《폼페이》를 읽고, 로마 수도교에 대해 공부했는데 로마의 기술은 어마무지하다... 이 소설은 캄파니아 지방의 미세눔, 놀라 등지를 배경으로 하는데 《로마의 일인자》에서 지명을 발견하니 즐거워졌다. 아직 폼페이는 속주 도시가 되기 전이다. 이후 집정관이 된 술라가 정복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무식한(?) 도시 건설은 달팽이 애호가 바기엔니우스의 사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리구리아 오지 출신 기병인 바기엔니우스는 말이 풀 뜯는 동안 누워 소풍을 즐기다 〈냄새〉를 맡는다. 살이 통통 오른 아프리카 달팽이 냄새를! 높은 주상절리 현무암 뒤, 가파른 암벽도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달팽이를 위해서라면!! 산악지대 출신인 그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암벽을 타고 오르는데, 로마인들은 어떻게 했을까? 계단을 건설한다. (!!!)

 

 

아마 분기별로 이 책을 복습하리라 예감한다...

 

 

 

원로원 여러분! 회의장 양쪽의 가운뎃줄과 뒷줄에 앉은 모든 분들! 우리를 이 위기에서 구해줄 사람은 단 한 명뿐입니다. 바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입니다! 그의 이름이 귀족의 족보에 적혀있지 않다는 사실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가 로마인 중의 로마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뭐가 중요합니까? 로마인 중의 로마인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가 우리를 어디로 몰아넣었는지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어디로 몰아넣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이 똥구덩이 속입니다!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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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7-1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2권 읽으셨군요. 뭐 프리리뷰단 중에서 3명 선정헤서 세트 준다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는 틀린듯. 주문하러 고고.~~~

그런데 아직도 예약주문중

에이바 2015-07-17 17:42   좋아요 1 | URL
기네스님 허리업 허리업 지금 3권 보는데 마리우스 넘 멋있어요.. 이 멋진 인물의 말년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서..

CREBBP 2015-07-17 17:46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예스에서 응모했는데 3명 준다는 거에 혹시 걸릴까해서 기다렸는데 발표도 개인적으로 했는지 소식도 없고 상품은 아직도 예약주문 상태고.. 미치겠네요 ㅋㅋ

에이바 2015-07-17 17:48   좋아요 0 | URL
출판사에서 연락 안왔나요? 기네스님 받으실 것 같았는데요

CREBBP 2015-07-17 17:51   좋아요 0 | URL
그 전에 뭐 상픔 바꼈다고 메일 왔었는데 제대로 읽지도 않고 설레발쳐 상품 고르는 건줄 알고 잘못 메일 보내고... 미운털박혔나봐요. 그 분야에 워낙 전문가 빰 치는 수준의 독자들이 많아서.. 포인트도 많은데 그냥 지르죠 뭐. 근데 20일 출간... 쩝

에이바 2015-07-17 17:56   좋아요 1 | URL
포인트 부자 기네스님ㅎㅎ 세트라서 예약인가요? 원정단은 1권이랑 가이드북 받잖아요. 조금 기다리시다 아니다 싶으시면 2,3권만 지르세요! 예스 응모하신 분이 많아서 연락이 늦어지는 건 아닌지.. 이 책 보면 볼수록 팔 거 많아요 아주 노다지입니다 지금은 빠르게 로마 가도 같은걸 눈으로만 보고 넘어가는 중인데 복습하면서 파고 또 파고.. 제 운명은 운명할 것 같은 예감이.. 위키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어찌나 정리가 잘 돼 있던지 참 놀라워요

스윗듀 2015-07-17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르십니다ㅎㅎ 저도 우수리뷰어 3명엔 못들어서 주문해야하는데 이번달 구매금액이...OTL

에이바 2015-07-17 17:44   좋아요 0 | URL
저도 행복 속에 비명 지르는중이에요. 책만 보면 되는데 파고드는게 문제인듯..ㅠㅠ

CREBBP 2015-07-17 2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학교에서 과제가 주어지면 위키에다가 주제를 입력하고 엉터리방터리로 내용을 입력해 놓으래요. 하루 만에 싸악 말끔하게 전문가 수준의 내용이 편집되어 올라올꺼라고.. 또 빅뱅이론에서인가 쉘던 말고 멤버 중 하나가 심심하면 위키 들어가서 망치는 게 취미라 하잖아요. 엊그제 읽은 정리하는 뇌에서 본 얘기인데 미국에서인가 영국에서인가 한 예술 협회에서 대규모로 돈을 들여 엄청 사람을 사서 그 방면의 모든 표제어들을 다 검토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했대요. 그런데 저자 말이 그러면 뭘하느냐는 거죠. 누구든 맘만 먹으면 들어가서 망칠 수 있는 시스템이 위키인데.. 그럼에도 위키는 자정 능력의 거의 끝판왕을 보여두는 거 같아요. 중고딩들이 판치는 인터넷에서 그러한 일들이 가능한 영미권의 문화가 이럴 땐 부럽기도 하구 말이죠.

CREBBP 2015-07-17 22:04   좋아요 0 | URL
(저 위에서 이어지는 답글)

에이바 2015-07-17 22:59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얘기 들어본 것 같아요 위키작성자들은 자기가 쓴 페이지를 모니터링 하나봐요 좋은 현상이지요ㅎㅎ 어떻게 보면 이거야말로 열정페이?!! 그러고보니 영문위키 모 페이지를 놓고 사이버 배틀이 벌어졌던 게 떠오르네요 -추가: 찾아봤는데 모르겠어요 미국인지 영국 인물 관련한 위키였는데.. 그래도 결론은 위키가 있어 고맙다는 거죠ㅎㅎ 언어공부도 되고요

AgalmA 2015-07-18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로 쓰신 후 작성 좀ㅎ...벌써 몇 번째 날아가신 겁니까...에이바님 필력 아는데 아깝네요

에이바 2015-07-19 10:58   좋아요 1 | URL
흥분해서 북플로 쓰다가요.. ㅋㅋ 아갈마님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좋은 건 얼른 받아들여야지! 하고 목표는 한글파일 2페이지 이내로 잡고 1페이지를 안 넘기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그래서 리뷰는 감상 위주로 쓰고 페이퍼로 한 번 더 정리해야겠다 했지요. 욕심만 많아요ㅎㅎ 글쓰기는 잘 안되고..

AgalmA 2015-07-19 13:14   좋아요 1 | URL
어떤 방식이든 에이바님이 끌리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본인만의 방식이 잡히는 거겠죠~중요한 것은 날리지는 마시라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