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리 데이비드 소로우와 같이 시골로 내려가 오두막을 지어 놓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요즘은 간단하지 않거나와, 홀로 단독의 삶이 아니고서 가치관이 다른 가족이라도 있다면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꼭 핸리처럼 빼다 박은 삶도 좁아터진 여기 이 나라 국토에서도 어렵다. 지형이 악조건의 험악한 산지가 아닌 담에야 원시의 자연 그대로인 곳은 드물기도 하다. 또한 굉장히 디테일하게 토지의 용도 구분이 되어 있어서 아무 곳에서 마구 오두막이라도 신고를 하든 허가를 받아야 집을 지을 수 없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비슷하게나마 소로우처럼 자급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가져 보기도 잠시나마 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부질없는 짓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1800년대 미국의 미개척지나 인접한 땅이야 원시적 자연림이 무지하게 넓은 땅이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땅은 그에 비할 바는 전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젠 약간은 시무룩해졌고, "의기소침이 아니라 의지의 소침이 된 원인"은 가장 토지 확보라는 큰 난관을 넘지 못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땅과 같이 무진장 넓은 땅에 지대가 싸거나 임차료가 거의 없는 땅은 우리나라엔 없다. 강원도 오지 산골로 들어갈까라고 해도 혼자가 아닌 담에는 어렵다. 근교에 적당한 부지는 아직 확보를 못했다. 가장 큰 문제가 땅이었는데, 경매도 찾아 보고 부동산도 다녀 보고 지역이 구석구석도 답사해보기도 했다. 각종 공부를 확인해보고 마음에 드는 적당한 부지는 아직 찾지도 못했고, 설령 조금 마음에 든다 싶은 땅은 여지없이 비싸서 내가 가진 자본력으로는 턱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부동산(아파트나 토지 중심으로)으로 자본적 욕심을 채우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되고 보니, 토지가의 상승은 아파트 가격의 상승과는 사뭇 양상이 전혀 다르다. 땅값은 끝없이 오르기만 했고, 내린 것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파트 가격이야 주택의 공급이나 수요나 혹은 경제적인 여러 변수에 의해서 오르기도 하고 때론 내리기도 하는 변동 폭을 보이기도 하지만, 토지는 일관되게 상승 곡선의 우상향이다. 토지시장이 얼마나 웃기냐면, 무슨 개발 계획 소문 하나만으로도 가격은 벌써 뛰기 시작하고, 이에 등달아 부동산 소개업자들이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는 꼴이다. 실 거래가격도 나날이 오르기만 한다.(요즘은 등기부등본을 보면 최근연도부터는 가격이 대부분 오픈되어 있다.) 그동안 열심히 저축하고 아끼고 급여의 일부분을 차후 토지 대금으로 쓰기 위해 모았으나, 오르는 가격에 도저히 따라잡을 길도 없다. 은행에 이자는 나날이 줄어들고, 토지 가격의 상승은 반비례로 오른다. 월급쟁이가 모으면 얼마나 모을 거라고 꼴랑 몇천몇 억을 가져도 원하는 위치의 땅값에는 한참 못 미친다. 아 자동적으로 우울해지려고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모자란 놈이 된거 같다. 토지는 토지 장사로 부를 축적하고 토지로써 치고 나가지 못했다는 거다. 이른바 땅투기를 하지 못한 탓이 제일 큰 실수가 아니었을까. 와이프가 "어떻게 학교에서 부동산 쪽으로 전공도 했고 평생을 건축 관련 땅에 관한 업무를 했는데 왜 미리 따져 보고 확보할 줄을 모르고 이제 와서 그러냐"라고 타박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단 속담이 나에겐 빈말도 아니다.
대부분 땅 투기하는 사람을 욕하기는 쉽고 시세 차액으로 부를 쌓는 걸 터부시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희들은 "실컷 욕해라. 나는 투기할란다" 이런 식이다. 그래 못한 놈이 바보고 욕해봤자 무슨 소용이라도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은 훌쩍 지나버리고 가격은 나날이 오르고 자본을 모아서 땅을 구입하려니 따라잡을 수 없는 한계를 여실히 들어낸다. '나도 씨바 투기나 할걸. 뭐 잘 났다고 양심 따위에 공정함에 고민하며 투기꾼들을 비난했을까. 못한 놈이 바보'가 된 형국이다. 네가 뭐가 잘났다고 투기꾼을 욕하냐, 못했으면 못한 자신을 탓일 일이 곧 결론이 되어 버린 셈이다. 가고 싶은 지역의 부동산 중개 사무소는 더 이상 찾아가기도 싫다. 전부 도둑놈 같은 세끼들이고 어떻게 하면 복비나 수수료나 더 받아 처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 까딱하다가는 뒤통수 맞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골의 부동산에는 토지 거래 금액에 따른 중개 수수료 요율은 무의미하다는 것쯤은 상식이다. 꼴랑 법률상 정한 수수료 보고 부동산 사무소를 하는 사람은 시골엔 없다. 땅값을 비싸게 부르고 지주가 원하는 땅값의 이상의 금액은 부동산 중개자가 먹는 꼴을 심심찮게 보거나 혹은 과도한 수수료를 아예 대놓고 부르기 일쑤다. 도시 내에 아파트 거래와는 수수료가 전혀 다르다. 그러니 부동산을 거치는 게 자칫 수수료 분쟁의 소지가 될 수가 있는 이유이다. 결국 이세끼들이 부동산 가격을 들입다 올리는 꼴이 된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로 대학병원이 이전 해왔다. 대학병원이 이전 해왔는데 지역 이외의 군 소재지 땅 가격도 오르는 이유가 된다니 얼마나 웃기는 짬뽕이냔 거다. 지하철이 갈 거란 소문과 고속도로가 통과되고 내륙 철도의 역사를 억지로라도 유치하려는 이유가 다 토지 가격 상승의 지대 상승 이론에 여지없이 들어맞는 현상을 그대로 보이는 꼴이다. 그야말로 개발 소재 소문 하나만으로도 평당 몇만 원이 들썩거렸다. 4-5년 전에 가격대를 알고 있던 토지 가격이 거의 두 배가 되는 현상을 보고 있다. 특히 대도시 주변의 시군 지역은 대도시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 대도시 주변의 개발 정보는 시군 지역의 땅값의 동반 상승을 불러온다. 대구에 있던 지방 공항이 군위 의성으로 옮긴다는 소문 하나만으로 군위와 의성 땅값은 상승하고 있으며, 내륙철도와 고속도로 계획으로 성주군 땅값이 올랐다. 이 밖에 청도 영천 경산 이런 대구 주변의 땅값은 놀라울 수준이다.
이젠 거의 포기 상태가 되었다. 안 가면 그만이지 반드시 가야 할 이유보다 자본은 부족하다면 포기하는 게 맞다. 특히 토지는 대출하면 안 되기 때문에 가격 상승을 감당할 수준이 안되면 포기하는 게 맞다. 그래 가지 말자. 땅값 상승은 기존에 거주하는 소유자들에겐 좋은 호재이겠지만 결국은 유입인구를 막는 꼴이다. 시골 한번 갈려니 몇억은 우습게 들 바에는 차라리 대구 도심 내의 환금성이 좋은 아파트를 하나 더 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시골 주변으로 인구 분포를 보면 70대 80대 노령층의 급격한 상승과 유입인구가 없이 유출인구만 있을 때 과연 시골의 땅값이 유지는 될지는 모르겠으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듦으로써 발생하는 토지이용이 되지 않을 경우 지역은 급격히 쇠락한다. 지역이 활성화되지 못할 때 유출 요인은 강력해지고 유입인구를 더 막는 꼴이 발생한다. 토지의 지대가 계속 상승할수록 역설적으로 유입인구가 차단될 때 결국 지역의 쇠락은 가속화되는 역설을 막을 방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없다. 토지공개념으로써 토지가 공공적 성격의 수단의 인식보다는 여전히 개인 사유화에 의해서 자본적 욕망의 수단이라면 답은 뻔하다. 마음 같아선 강원도 오지 산골로 찾아 들어갈 수밖에 없는 선택지가 너무 좁다는 게 답답했으나, 뭐 까짓 거 이것도 포기하면 된다. 기필코 가야 할 이유라도 있으나, 반드시 가야 할 목적도 그 가능성의 희박함에 염두에 둘 뿐이다. 자급을 위해서라는 명분도 결국은 자본의 힘 앞에서는 불가능한 시대에 1800년대의 소로우가 살았던 그 시대가 참 부럽다고 해야 할까 여기게 된다.
땅값이 올랐다고 해서, 원하는 땅값이 올랐다고 해서 무지하게 화날 것도 없다. 인간의 욕망에 열난다 해서 뭐 달라질 것도 없다. 아무리 툰베리가 트럼프에게 불화살 같은 눈빛을 쏜다 한들, 다수의 자본은 눈도 끔쩍하지 않을 뿐이다. 지구가 망해서 흡사 봄베이 화산이 터져서 불덩어리가 떨어져서 그제서야 화들짝 놀랄 때까지는 인간의 욕망은 거침이 없고 멈춤이 없을 따름이다. 시골 땅이 아무리 올랐다 해서 내가 화나지 않는 이유이다. 안 가면 그만이고 갈수 없어서 포기하면 그만일 뿐이다. 안 간다 해도 내려놓음 되고 갈 수 없음에 애달파 복장 터져 죽을 일도 아니다. 못 가면 안 갈 것이고 안 가면 여기서 또다른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찾으면 그만이다. 인생이란 의외로 짧다. 못해서 애걸복걸한 마음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하면 편하다. 인생 뭐 별거 없다. 여기가 거기라면 된 거라 생각하면 된다. 인간은 욕망으로 현대에까지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결국 이 욕망으로 발전된 지금의 문명으로 종말을 맞이할지는 알 수도 없다. 방사능이 아무리 뿜뿜해도 사소한 것에 호들갑 떨어도 치밀어 오르는 암덩어리에는 감각을 못 찾다가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화들짝하는 게 우매한 욕망의 몽매일 뿐이다. 아무리 선구자 같은 혜안을 가진 선지자 같은 작가들이 죽어라 부르짖어도 욕망의 터닝 포인트는 못 찾을 따름이다. 각성이란 어디까지나 자신의 종말을 감지할 순간에서 찾아오더라도 올 때까지 신호등은 켜지지 않는다. 후회와 각성은 항상 늦게 찾아오는 뒤늦음의 후회만 남길 따름이다. 희망은 늘 있는 착각으로 사는 것이라 믿는다. 내일이 또 있다고 여겼기에 오늘이 있다. 우리는 스피노자처럼 위대한 인간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까 졸지 마. 소주나 한잔 콸!~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