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의 쟁취
표트르 알렉세이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여연.강도은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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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누님이 먼 친척 분의 별세소식을 전해 옵니다.

 

간밤에 몹시도 아프면서 세상을 하직했다고 합니다.

저녁에 문상을 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한 번의 만남이란 인연이더라도,

꼭 한번의 이별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죽음은 절대적인 이별의 본질과도 같기에,

언젠가는 내가 죽어도 세상과 관계와 이별하고

내가 관계한 분들이 죽어도 결국 이별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사에 벌어지는 일들은 꼭히 이별이 없을 것처럼,

더 가지고자 다툼의 연속극을 벌였던 역사였습니다.

폭동이 그랬고 역사가 그랬고 사회가 그랬습니다.

 

어제는 빵의 쟁취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나키즘, 코뮌주의로 대변되는 공동체사회를 저자는

주장했지만 과연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비교가

그 주장에 부합할런지는 납득이 조금 안되더군요.

 

물론, 논리와 이론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런 가능성으로 수 많은 이상주의자들은 노력하고 대항하고

저항하고 싸워 왔습니다.

하지만,역시 인간 심리 저변에 깔린 이기적인 욕망은

절대로 이별할 수 없는 자기만의 생존에

매몰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저항이 있었길래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있었던

바탕도 되었던 긍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 정도 읽었는데 그만 책을 덮었습니다.

이 책은 1892년도에 쓰여졌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익히 생각하던 바에

그 뉘앙스는 계속 이어졌고

또 새로운 논리의 전개는 별로 찾아 지지 않았습니다.

 

1892년의 러시아와 유럽, 독일에서 발생한 코뮌주의 이론,

영국의 제국주의에 자본의 기승. 식민지라는 빼앗음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본이 땅을, 사람을 지배하고 이 지배로 인하여

이익의 극대화를 노리겠다는 꿍꿍이와 별로 다를 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 번 오면 한번은 가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 온 인생은 생존의 굴레 속에서

끈임없이, 영원하 살 것처럼 탐욕을 부리기 때문에

갈등과 착취와 지배가 이루어집니다.

 

대를 물려서 이어지는 자본의 약탈은

결국 다수를 피폐화 시켜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내려 놓음은 누구에게 권리를 보장해주기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자신의 생존에 대한 이기적 탐욕에서

자기 자유를 얻는 것과도 같거든요.

 

내 마음 속에 발생하는 끝없는 탐욕은

무엇으로도 대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번 온 인생 마음 바꾸기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끼게 되지요.

 

사람은 빵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그러나 빵만으로도 살기 싫습니다.

빵이란 것과 자유란 것.

이 두개의 수레바퀴라야 수레는 원하는대로 갈 수 있으니까요.

 

내 인생 내가 원하는대로 가기 위한 조건이 빵과 자유겠지요.

그러나 빵에만 집착할 때, 자유는 달아나버리고 마니까요.

 

PS : 책 평점은 4개에서 하나 뺏습니다.

책 크기는 작고 두께는 넓었어요.

 

책 크기 좀 키우고 두께를 좀 줄이면 좋겠더군요.

책을 왜 이렇게 조그만하게 만드는지 누구편집자 없습니까.

 

좀 알려주세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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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퇴근하는 와이프가

빵을 사왔다.

맛있게 보였다고 했다.


나는 그 즈음에

[표토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의 저서, 빵의 쟁취]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 당신 주려고 빵 사 왔어."

 

나는,

" 빵은 됐고,

자유는 안 팔더나? 

자유를 사 왔어야지.?"라고 했다.

 

"글쎄, 자유 행 티켓은 팔지 않더라"라고 알려 준다.


이 노무 빵,

그 노무 자유.


한 줌의 빵과 한 줌의 자유가 만나는

환상 같은 책을 읽으며 꿈 꾸었다.


단지, 꿈만,,,


빵이냐, 자유냐라고 선택하라면,

나는 자유를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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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05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작게 만드는 단순한 이유가 책 만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

yureka01 2016-08-05 11:57   좋아요 0 | URL
아고..신국판 정도만 되어도 활자 조금 키워도 좋을텐데요..
책을 약간 키우면 두께가 줄어드니 비용이야 큰 차이는 없지 않을까 싶더군요..
책이 약간 작은데 디립따 두꺼우니.. 독서대 끼우기도 참 애매하더군요..
책 읽기 편하게 해도 책 안 읽는 판에 독자가 불편하기까지해서야 .... 아고고..

기억의집 2016-08-05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켄 로치도 빵뿐만 아니라 장미도 필요하다고 빵과 장미를 만들었잖아요~ 유레카님의 빵과 자유를 추구하시는 글 읽으면서 빵과 장미란 작품 생각 났네요!

yureka01 2016-08-05 12:3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장미는 예술적 빛깔이잖아요.
빵과 장미는 빵이란 생존과 장미란 예술이 있어야한다는 것의 상징은 아닐까 싶습니다.

빵과 장미..빵과 자유..^^..

2016-08-05 15: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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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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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2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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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22: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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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2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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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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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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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디션 2016-08-05 15: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두 분 대화, 보면서 든 생각.^^

1. 좀 오글거리는데..
2. 좀 오글거리는데..
3. 음, 범상치 않은 금슬이야.

저희(부부)도 가끔은 오글거린다 싶을 때가 있지만 요즘은 제가 좀 매가리없게 나와서 그런지 영 대화가 부실해요.ㅜㅜ

yureka01 2016-08-05 15:48   좋아요 2 | URL
ㅎㅎㅎ 실제로 보면 제가 너무 퉁명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저얼때 오글하고는 거리가 멀~~~~어서요..ㅋ

비로그인 2016-08-06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빵과 자유 두가지가 함께 공존해야 되겠네요.
yureka01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yureka01 2016-08-06 10:34   좋아요 0 | URL
빵만가지고는 마음이 공허하고
자유만 가지고는 몸이 굶어 허기지죠.

네 그래서 빵과 자유와 장미!~ ㅎㅎㅎㅎ

강옥 2016-08-06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이 열광한다는 텔레비전 프로 `나는 자연인이다`
산 속 오지에서 혼자 자유롭게 사는 삶.
많은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하대요.
이런 저런 간섭 안 받고 지 맘대로 살고싶은 남자들의 야생본능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그 프로.
우리집 모씨도 그러고 싶은 모양이더라구요.
최저생계비만 있으면 나는 살수 있으니 당신은 자연인 해봐~ 지금이라도 가봐~
라고 해도 안 가네요. 차마 못 가는 건지? 고양이 쥐 생각 하느라 ㅋㅋ

yureka01 2016-08-06 10:33   좋아요 0 | URL
막상 남자들 가보고, 해보라면 못합니다.
이래 저래 걸린 게 관계의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신세라는 걸 알거든요....ㅎㅎㅎㅎ
한번 재대로 걸리면 옴짝 달삭 못하거든요..ㅋ

2016-08-07 2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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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0: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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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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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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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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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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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8: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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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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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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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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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8: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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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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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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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6-08-10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으로 쓰신 글보다도 마지막 두분의 대화가 더 책 속의 글 같습니다.ㅎㅎ 저런 대화를 나눈다는 건 아직 낭만이 살아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어 부럽기도 하고, 보기에 너무 좋습니다.ㅎ

yureka01 2016-08-10 08:54   좋아요 0 | URL
아.낭만..낭만주의자가 좋지요..저도 낭만여행자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PS : 오래 전에 사진 블로그에 올려 두었던 리뷰입니다.

알라딘에 링크만 걸어 두었는데 다시 퍼와서 올려 놓겠습니다.

사진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시간 나실 때 천천히 읽어도 됩니다.

 

다시 리뷰를 읽어 보니 오타도 많고, 문맥도 이상한 구석도 보이고,

고칠려니..아 게을러서요..

 

대충 감안해서 걸러서 보시면 될듯합니다.

리뷰 정성 부족이 보이긴 하지만 또 하려니 엄두안나서요.

 

 

 

 

 

부제 : 이미지 생태학에 관한 보고서

 

1 들어가며.

2012년 12월 연말, 정신없는 틈을 타서 불로그 이웃으로 부터 또 하나의 책을 선물 받았다. 사전에 '책을 선물 보냈다'는 어떠한 언질도 전혀 받지를 못했고 불쑥 책 한권이 배달 되어 왔었기 때문이다. 이거 자꾸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를 난감함이 컸었다. 책을 보내준 블로그 이웃은 '오래 전부터 한권 보내야지' 라며 벼루었던 참에 연말 선물이라며 보낸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연말 선물치고는 난감한 고마움이랄까 싶었다. 여튼 책을 선물 받는다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임은 틀림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린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책을 받아 들고 보니 수잔 손택의 책일 줄은 몰랐다.ㅎㅎㅎ

 

책 후면에 번역자의 역저평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상당히 어렵다. 글이 어려운 것이라기 보다는 이 책에 나오는 관련 인명과 사진 작품, 그리고 언급된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내가 미쳐 다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 면면들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이책을 이해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이유였다. 이책을 읽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기초적 토대가 되는 지식들이 필요로 한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책이 나오고 나서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그 평가는 '산만하다, 장황하다, 혹은 현학적이다.혹은 글이 반전이 심하다' 라는 것들이 언급되기도 하였던 바, 이 책을 처음 펼쳐 들고 부터 막막한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특히 원문이 아닌 번역 책은 항상 작가의 후기나 역작이 평부터 먼저 읽어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산만함에 있어서 이런 비평가들의 평가가 ""산만함""이라는 대목에 있어서 나의 글쓰기의 특징과 좀 비슷한 면도 없지 않았고 중구난방이며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관련된 것이라면 끌어와서 언급하는 대상의 역활이라는 것도 비슷했다는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도 느꼈다. 이책은 상당히 현학적이다. 더구나 원저자의 느낌을 번역가는 재대로 번역이 된 것인가 에서부터 힘겨웠다. 역자가 사진을 조금이라도 담아 보는 사람이였더라면 사진에 관한 번역이 한결 매끄러웠지나 않았을까 싶었지만 사진의 전문 용어를 찾는 대로 어려웠을 테고 번역가 또한 먼저 번역하면서 관련 문헌과 자료를 일일히 파악하기에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으리라는 고충은 이해될만 하다. 책을 읽을 때도 관련 자료를 찾아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또한 제가 번역서는 그간 자주 본 적이 없었던 이유는 글이라는 것은 원어민이 그 원어로 읽어야 재대로 이해되는 한계는 분명 일정 부분 존재한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책을 보면 중간에 한번 언급하겠지만 서문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도 있다면, 사진에 택스트를 붙이는 행위.<<특히 나처럼 사진에 택스트가 포토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리는 스타일>> 사진이 사진으로써가 아니라 택스트를 강조를 위한 사진은 부차적이라는 문제에서는 완전 짜릿하게 찔림을 이책에서 느낄 수 있었다. 불로그에서 사진 놓고 주절주절 그렸던 이런 행위들이 벌써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고 보면 나도 사진을 담으면서 이런 사조와 분위기를 벗어 날 수 없는 동일감도 동시에 맛볼 수 있었다. ""나만 이렇게 한것도 아니였구나""라는 묘한 기분이랄까. 이를 그녀는 사진보다는 사진아래 택스트 설명이 더 요란스럽다고 표현하였다. 나의 무릎을 아푸게 칠 수 밖에 없었기도 했다. 완전 찔렸다.

 

다시 서문을 이어가면서, 책 한권 읽기 위해서 찾아 봐야 할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고 책에서 언급된 인물에 관한 이야기들, 언급된 영화들 그리고 부재로 등장된 사진들과 사진을 담은 사람에 관한 사전이 밑바탕이 너무나도 부족됨을 느끼게 되었고 이거 하나 하나 찾아 본다는 것이 어쩌면 좋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하였다. 이 책을 한번은 그냥 흩으며 읽었고 두번째는 매모하고 요약하며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그야말로 어지럽다는 느낌처럼 재대로 읽혀 지지도 않았고 활자가 눈에 와서 박히지도 않았다. 작가가 덧붙인 첨언과 역자가 붙인 첨언을 일일히 찾아보니 책 한장 넘기는 것도 어려웠고 읽는 와중에 글 읽기의 맥이 자꾸 끊겼다. 그러나 두번째부터는 메모하면서 요약하고 정리 하면서 읽어보니 차츰 정리되어 갔다. 참고할 만한 문구와 인물들 사진들을 직접 찾아 보고 쓰보므로써 마치 학생이 전공서적을 공부하듯이 읽으며 공부했다. 학교 다닐 때 열심히 시험공부처럼 읽었다. 차후에 블로그에 글을 쓰고 난 후에는 다시 이책에 나온 내용들을 인터넷에 검색하여 구체적으로 하나 하나 찾아 봐야 하는 과정을 남겨 두게 되었다. 여기에 언급한 인물과 사진과 영화들에 관해서 자료가 다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찾아볼 작정이다. 

 

이책은 사진의 전반적인 비평서이다. 사진의 출발부터 이미지가 있을 때부터의 사진 이야기(이미지가 없던 시절을 손택은 플라톤 동굴에 비유했던 것을 아닐까? )를 다루고 그다음으로 미국의 사진 조류에 대한 손택의 전반적인 고찰(이에 그중에서 부재로써 미국 사진을 통해서 본 암울한 이라는 부제목도 있음으로 짐작 할 수 있다.)이였고 그녀가 바라본 예술평론가로써의 자극제였다.

 

그녀(수잔 손택)는 사진이라는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나무 하나 하나를 보면서 전체적인 숲을 보고자 했던 글이었다. 사진을 담는 나로써 이때까지 사진의 전체적인 조류와 사조, 이에 대한 인간이 카메라을 만들고 사진을 담으면서 역사적으로 처음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디게르, 1839년,프랑스) 인간의 사진에 관한 생태계의 글을 읽은 적도 없었다. 원래 뭔가 전공을 하는 사람들의 커리큘럼은 대략 개론서부터 출발해서 그다음은 그 분야의 역사적인 사론을 이어 간다. 그럼에도 나는 개론서는 봤어도 역사서와 이에 따른 비평서는 전혀 본적이 없었다. 하기사 하루 하루 사진 담기 바쁘게 살았으니 1800년대의 사진을 봐도 이해키 어려웠던게 사실이다. 사실 다 알지도 못하며 다 감지 해내기도 힘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진의 전문 비평가는 더더욱 아니였기에 비록 한 문예비평가의 사진 비평서 이지만 이 책을 통하여 그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진 역사적인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때도 그랬구나' 라고 하는 묘한 동일성과 시대적 이질성을 느낄 수 있는 책이였다.

이 책은 총 7편의 소재목으로 나누었다.

1.플라톤의 동굴에서

2.미국 사진을 통해서 본 암울한,

3. 우울한 오브제

4.시각의 영웅주의

5.사진의 복음

6.이미지 - 세계

7.명언모음

이렇게 7편의 챕터로 나누었고 부재에 대한 글을 길게 서술 되어 있다.

 

 

 

2. 소재목을 중심으로 하는 감상 이야기와 요약.

(1) 동굴의 끝부분에서 부터 -

시작부터 겁 먹는다. 책의 첫 구절부터 등장인물이 '플라톤'이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나오는 철학서처럼 좀 고민꺼리가 시작되었기도 하다. 철학서를 보게 되면 소위 쫄게 된다고 한다. 도대체 내가 플라톤을 알면 얼마나 알까만은 이는 고대 서양의 철학이 플라톤에서 부터 출발하는 것에서 첫 시작이었을 않았을 까 싶었다. 플라톤은 나로선 고작 이데아론 밖에  모르는데 사진에 관한 평론서가 고대 서양철학의 시작인 플라톤부터 나오다니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참. 난감하기 이를대가 없다. 이에 손택은 ""순수한 진리의 이미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책은 시작한다. 순수한 진리의 이미지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바로 여기서 이미지 즉 사진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이다. 진리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인지 이거 너무 마음에 들었다. ""플라톤의 동굴""이라고 하니 문제는 동굴이라는 것에 대한 관념은 카메라를 발명하여 사진이라는 이미지를 얻기에 전과 후를 나누었던 기준점이었고 동굴을 나온다는 것은 바로 사진이라는 이미지를 통한 비로소 인류가 어두운 동굴에서 빠져 나오듯이, 이미지를 통하여 세계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과도 같다. 마치 캄캄한 동굴에서 빠져나온 그런 것을 연상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사진이 세상에 나온 전 후를 대비 하고자 하여 서두를 시작을 했다는 말이다. 인류가 사진을 통하여 세상을 비로소 터널을 빠져 나오듯 혹은 장님이 눈을 새로이 뜨듯이, 세계를 이미지의 시선으로 바라 보게 된 이후부터 사진은 수많은 정의를 설명하고 있다. 이미지 시대의 전과 후. 그러면서 그림이라는 회화의 이미지가 아니라 사진으로써의 이미지였으며 인류가 시간의 틈바구니 속에서 사진을 대하는 그 느낌이 여러가지 사례와 작품과 관련영화를 언급하고 삽입시키며 이야기를 전개 시켜 나가고 있다.

 

사진이 세상에 만들어지고 사진을 담게 됨으로써 사진의 아푼 구석을 동시에 그녀는 지적하고 있다. 그녀는 ""예컨데 남에게는 고통이나 불행이더라도 내게는 흥미로움을 주는 상황과 공모하는 행위""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가 그동안 여러가지 사진을 감상하다보면 이런 공모적인 행위와 견줄만한 사진을 너무나도 많이 접해 왔던게 사실이다. 이런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사진을 위해서 휴머니즘을 망각하는 행위들을 말한다. 다이안 아버스(미국의 사진 작가)의 말을 빌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정말 못된 짓 같단 생각이 드는게 내가 중요하는 것중 하나가 바로 못된 짓이다""라고 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행과 불의가 거의 모두 사진에 담기게 되자, 처음에는 충격적이였지만 이 충격이 점점 익숙해져 가고 무디어져 간다는 걸 손택은 일찍이 갈파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젠 왠만한 사진 가지고 놀라지도 않게 된걸 떠 올리게 된다. ""감각의 무디어짐""이라는 것은 흡사 마약처럼 인간이 이미지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점점 더 자극적이고 점점 더 흥분적인 장면을 찾아 다니며 좀더 자극의 농도가 깊어지고 짙어져가는 걸 느끼는게 어쩌면 이렇게 요즘과도 비슷해져 가는 걸까 싶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런 것을 ""둔감된 단련""이라고 표현 하였다. 지난 수 십년간에 걸쳐서 쏟아져 나온 의식화된 사진은 우리의 양심을 일깨워 왔던 것 못지않게, 우리의 양심을 둔감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자극은 더 강한 자극에 대비하는 걸까 라는 사진의 뼈아푼 지적이다.

 

이어서 사진에 대한 개론적 예술론으로써 사진만이 가지고있는 특징을 나열한다. ""애수가 깃들 예술이라거나, 황혼의 예술이라거나, 모든 사진은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는) 예술이라거나, 속절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증언한다""고 했다. 이어서 ""움직이는 동영상보다 사진이 왜 기억하기 쉬운 것인가는 사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의 한 순간을 깔끔하게 포착해 놓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사진 시작하면서 카메라 들고 사진 담아 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끼고도 남을 만한 사진에 대한 감정들이다.

 

그리고 사진의 절대적인 속성. ""시간""이라는 개념을 끌어 들였다. 결국 ""제 아무리 조잡한 사진일지라도 거의 모든 사진의 예술적 수준을 결정짓게 해주는 것은 바로 시간인 셈""이라고 아주 핵심의 정곡을 찌른다. 사진에서 시간을 때 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그녀는 통찰하였다. ""무엇인가와 애정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것의 외양을 보게 되지만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의 기능을 봐야 한다. (내면적, 투시적)그리고 기능이라는 것은 시간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나기에, 시간 속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손택, 그녀도 사진 담았을까 싶은 정도로, 담았다면 어떤 사진을 담았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녀는 또 사진의 한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가짜 전유이자 가짜 강간이듯 그런 싸구려 지식, 가짜 지혜가 될 수 밖에 없고 우리가 사진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한 사진 속의 그 무엇인가의 침묵, 바로 그것이 사진을 매력적이고 도발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했다. 한계의 가슴 아품이 절절하게 다가 왔다. 결국 사진을 담아도 무엇이든 직접 해보지 않고서 사진을 담는 것으로 대신하여 지혜를 터득 할 수가 없다는 것의 한계라는 점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아니였겠나 싶었다. 직접 해보지 못한 경험을 싸구려 내지 가짜라고 여겼고 사진을 실체적이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이어서, ""사진을 통해서 현실을 확인하고 사진을 통해서 경험을 고양하려는 욕구, 그것은 오늘날의 모든 이들이 중독되어 있는 심미적 소비주의의 일종""이라고 정의한다. ""산업화된 사회의 시민들은 이미지 중독자로 만들어 버린다라고 하는 심미적 이미지 중독자인 셈이 되었다""고 설명하며 플라톤의 동굴에서 빠져 나온 현대 인류가 사진을 통해서 산업화된 사회에서 심미적 소비주의자화 되었음을 알려준다.

 

손택의 책은 이처럼 주장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에서 이를 뒷받침 될만한 사례와 인물들의 사진과 영화에서 이를 논리적으로 풀어 나가려고 끌여 들였다. 그런데 이게 하나 하나 찾아 볼려니 하나의 챕터를 읽는데 엄청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마찬가지로 책 전체가 이와 같이 인용 인물 인용사진 인용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도출해 나가며 2장 미국의 사진을 통해서 본, 암울한 으로 전개 해 나간다.

 

 

(2) 미국의 사진을 통해서 본, 암울한, -

두번째 쳅터는 미국에 있어서 초기 사진작가들의 사례를 통해서 미국의 사진에 대한 굵직한 사진의 사조에 대한 설명이 주된 내용들이다. 1839년 사진이 발명된 이후 미국에서 사진 작가들의 치열한 논쟁들과 사진의 소재들 그리고 회화와의 논리적 싸움등으로 미국 사진의 초기 시작부터 이야기가 이어 나간다.

 

우선 "암울한," 미국 사진의 암울을 먼저 떠 올리게 된다. 사진은 역시나 다를까 그 사회적인 밑바탕에 끝없이 자극 받고 인간에게서 그 자극이 표출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미국의 암울함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대두 시켜야 되는 문제이다. 왜 사진을 이야기 하면서 암울함 부터 나오게 된 것일까? 그렇다고 ""미국 사진 = 암울"" 이라는 등식이 공식화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1929년 미국은 이 시기에 대공황을 겪게 된다. 아무래도 이 대공황에서 부터 사진을 바라 보는 시각적인 관점을 달리 하는 전환기가 되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추측<<나의 개인적인 추측일뿐이지만>>이 되었다. 그렇다고 책 어디에서도 아직 미국의 근대 사진이 대공황기에서 격변했다는 문헌을 만난 적이 없었어도 그렇게 느껴 지게 된다. 물론 혼자만의 서투르고 근거를 명확히 댈 수 없는 추측이겠지만 대공황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결국, 대공황이라는 상황이 인간을 끝없이 나락으로 빠지게 하는 크다란 고통적인 상황이라는데 있다. 흔히 ""미국 문명은 서구 문명의 무덤""이라고 손택은 주장한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하였고 그 꽃은 미국에서 피워 낸 이유가 미국이라는 크자란 땅덩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하 자원의 막대한 량이 산업화를 점점 촉진 시켰고 공급과잉되었을 것이고 공급과잉은 결국 소비처를 찾지 못하는 악순환적인 고리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여기서 문득 든 생각은 미국의 대공황은 자료에 의하면 거의 10년 이상, 요즘 일본이 불황기를 10년이상 지속 된다고 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부분이고 은행의 현금은 파산으로 사라져 버리고 주식은 기업이 망하여 종이조각이 되는 현실에서 자산을 가진 중산층을 그야 말로 몰락의 나락으로 빠져 버리는 상태의 뉴욕과, 뉴욕의 거리. 뉴욕의 시민들을 생각해 보면 사진의 격변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은 아니였던가 싶었다. 그래서 암울이라고 서언 하였는지도 모른다.(뭐 내가 작가와 대화 해본 적은 없지만 그랬을 것만 같은 추측이라는 하는 거다)

 

정리 해보자면,  회화적(그림 같은) -> 순수적(자연 풍경 등의 사진들) -> 이상적(비정형적,괴짜주의적) -> 초현실적으로 변천 과정이 나열 된다. 순수적에서 다시 인상적인 괴짜로의 변화는 대체적으로 위에서 언급은 대공황적인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를 대변적으로  그녀는 " 긍정속에 우울함이 잠복해 있다"고 했다. 특히 다이안 아버스이 사진을 가지고 예를 대표적으로 들었다. 정상적(일반 상류층과 중상층 계급의 피사체)이지 못한 괴짜들의 모습의 피사체 속에서 이질적인 모습을 자연 스럽게 대비적 효과로 나타낸 사진을 보면서  ""미국에서 사진의 특유성을 우울함""으로 표현 하였다. 사진 이전의, 혹은 산업혁명 이전의 모습과 구별되는 근대적인 미국의 현실은 ""서구 물질 문명의 무덤""이라 했으며 이에 ""사진은 여기서 초탈 된 초현실주의로 나가고 있다""고 여겼다. "현실적인 것을 초현실적인 것으로 둔갑시켜 버리는 특징이 있는 싸구려 비관주의"라며 날카롭게 비평하였다. 이는 바로 ""사진은 예리한 눈과 재치를 갖춘 절망이라는 이름의 표현이라고 지칭""하였다.

 

일찍이 미국의 산업 사회로 진입하여 여기에서 대공황적인 사건으로 비화된 고통적인 사회 모습에서 사진 작가들은 삐뚤어져 가는 인간성의 경종이자 현대 산업사회가 당면한 인간의 우울적인 내면의 모습을 사진으로 표현하며 이를 극복하려고 무진장 애를 써 왔음을 미국 사진에서 거대한 조류의 흐름에서 읽을 수  있었다.

 

 

(3) 우울한 오브제 

 

 

곁에서 맴돈다는 뜻의 만보자가 나온다. <<한자가 없어서 난 처음에 만보자가 무슨 의미의 뜻인지 한참이나 궁금해 했다. 즉 만보자(滿步者)란 피사체 주변을 걷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보행자라는 의미 였다.>> 여기서 만보자는 계급적으로 "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들" 이라는 계념의 중산층 계급을 말한다. 최상류층의 에로스의 자유와 최하류층의 에로스적 자유에서 대비된 중산층의 에로스적 자유는 구별 되었다고 보았으며 한편으로는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은 생태적 수준은 동급이라고 봤었다. 그래서 그녀는 ""폭력 현장에서 억압받는 자들 곁에서 맴돌았다""고 표현한 ""아쉬울 것이 없는 자들의 사진적 시선의 눈뜸""을 말한다. 사진 작가들이 대부분은 중산층 계급에 속하고 그들은 ""육감적인 장소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 이 관음적 방랑자가 도구(카메라)를 쥐게 되면 곧 사진 작가가 된다""고 설명한다. "" 지켜 보는 즐거움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감정을 이입하는 데도 뛰어난 만보자는 이 세계가 참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하나는 것을 깨달아 간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인용한 것들을 보면, <<플마틴 런던 거리 해변 1890년>>, <<아놀드 젠드_도찰사진 캔디드 사진>>,<<앗제_매춘이 성행하는 황혼녁의 지저분한 파리의 거리>>,<<브리자이_섹스와 고독의 드라마 사진집 파리의 밤>>등 만보자, 즉 카메라를 들고 있는 ""방랑자들이 바라본 시선들""이다. 또한, 제이콥 리스의 <<나머지 반은 어떻게 살아 가는가>>라는 사진집에서 1890년대 뉴욕의 가난한 사람들을 담았고 여기에는 휴머니즘을 사진으로 드러 내는 도구로 쓰이게 된다고 언급하고 인용하였다.

 

흔히 사진을 하면서 가난한 골목길, 빈곤하고 피폐한 사진의 일년의 레파토리는 이미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 했었다. 오늘날 사진을 담는 사람들의 역시나 비슷한 주제의 오브제가 바로 이런 거라는 것을 난 아직도 여전히 느끼고 있다. 1890년대에서도 빈민가의 소굴, 매음굴, 가난한 약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 대며 그들의 가난과 결핍이 사진의 중요한 주제였다는 사실이 놀라 웠다. '아 그랬었구나'라고 하는 동질감같은 것이랄까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질적으로 카메라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현실 속에서 가난은 더 이상 부보다 초현실적이지 않다"고 하며 즉 다시 말해서 이런 결핍이나 가난이야 말로 거리감을 사진은 극복하기 힘들다 한다. 여기에 대해서 몇가지 사례를 들어 내었다. 미국의 국립유아 노동조사단 소속의 사진 작가들이 아동의 노동에 대한 고발하는 사진과 대공황시기의 농업안전국의 소속 사진 작가들이 미국 농민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사진을 담으며 보고 함으로서 정책 입안자들에게 아동노동과 시골 빈민농민들에게 실질적인 정책을 수립하는데 한편으로는 기여도 했음을 인정하고 있다.그리고, 대륙횡단 철도가 부설되고 이에 인디언의 삶을 까발리듯이 조망한 사진들도 결국은 그 대상 즉 인디언의 삶을 파괴 했다고 간파 했다.사진이 결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두가지 사례에서드러나고 있음을 그녀는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사진의 피사체에 대한 우울한 오브제가 이런 우울한 휴머니즘적인 문제로 부각 되는구나 라는 느낌이랄까.

 

1930년대 극단적인 낭만주의지였던 글래런스 존 러플린등 사진은 자신의 죽음을 향해가는 생명의 천진난만함과 인물사진을 볼때마다 죽음과의 관계를 떠 올린다고도 했다. 퇴패적인 극단의 낭만주의는 결국 사의 찬미처럼 죽음으로 귀결 같기도 했다. 나아가 "" 사진은 폐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18세기 문인들의 취향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켰으며, ""사진의 우발성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라며 작가는 이것을 ""우발적 편린""이라고 이야기 한다. ""사진은 필연적으로 현실과 모종의 거래""라고 하며 끝은 맺는다.

 

우울함의 오브제가 대충 이렇게 요약 정리 되었다.ㅎㅎㅎ 글보면 정말 장황하고 앞과 뒤도 없이 마구 섞여 있기에 정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중산층 계급의 방랑자의 우울한 현실의 절망같은 사진들""이 기억이 난다.

 

 

 

 

(4) 시각의 영웅주의

네번째 챕터에서는 세가지 논점에 관한 의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첫째는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에 대한 글이였고, 두번째는 사진에 붙은 택스트, 사진 설명에 관한 내용이다. 첫째의 사진에 있어서 소위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에 관한 이야기야 사진이라고 한다면 의례적으로 떠 올릴 수 있는 이야기 였지만, 두번째 논의에서 사진에 붙은 택스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 이거 상당히 가슴이 찔리면서 날카로운 비평을 쓰면서도 달갑게 받아 들였다. 개인적으로도 사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택스트를 붙이며 글을 써 왔었던 것인지를 완전 공감하면서 말이다.....그리고 나머지 한가지 역시 사진이 휴머니즘에 관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관한 글 이었다.

 

사진에 있어서 이미지의 본질적인 추구는 아름다움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오늘 저녁에 지는 노을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이 이미지화 된 것인지 막상 현실적으로 오늘 보는 노을이 ""사진처럼"" 각인 되는 주객이 전도 되는 현상까지 이르게 된 핵심 요인은 아름다움으로 귀결 된다고 여겼다. 특히 그녀는 아름답게 미화된 것 처럼 "위조된 사진은 현실을 왜곡한다"고 여겼다. 이처럼 리얼리즘의 개념 까지 사진으로 인하여 바꿔 버린 것이 사진은 현실의 단순한 기록 이기 보다는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기준이 바꿨다는 것이다. 이에 브로통의 말을 인용한다. ""카메라는 겉모습을 모방하는데 탁월한 눈먼 도구""라며 지적한 것은 어쩌면 사진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사진 이전의 시대와 사진 이후의 시대에 사진적인 시각의 기준. 이것이 바로 사진의 영웅주의에 빠지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라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렇듯 사진이 발명된 이후에 새로운 시각을 담기 위해서 1890년대 부터 구미의 사진 작가들은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전 세계를 이미지  백화점 식으로 나열 하고자 했던 그 사진 작가의 모험담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된다. 한장의 사진을 담기 위해서 눈내린 곳에서 열시간을 있어야 했다는 무용담은 어떤 시각의 영웅주의는 아니였을까. 아름다움을 담고자 새로운 시각을 도출해내고 이를 영웅화 시키낸 사진은 현재에도 무수하게 많이 봐오는 사진 종류들이 이렇게 설명 되어 지는구나 라는걸 아주 절절하게 다가 온다.

 

이어서 그녀는 ""카메라는 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수 있도록 해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고 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 하며 보는 행위를 부추키며 보는 행위 자체를 바꿔버렸다"'고 논점을 찍는다. ""사진은 회화와 끝없이 싸우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회화에서 현실을 필사하는 것에서 부터 해방시켜 회화의 추상성을 더 발전하는 소명을 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여기서 내가 무척이나 찔러던 부분. 사진에 대한 설명과 택스트에 대한 문제가 나온다. 웨스턴의 말을 인용해서 ""사진은 눈 뜬 장님들에게 이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 줬다""고 여겼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대두 된다. 특히 ""어디에 위치 하느냐에 따라서 사진은 보는 각도가 달라진다""고 했다.여기에서 여러가지 사례를 제시 한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사진이라든가, 잡지에 실려 있는 사진이라던가, 경찰서 조서서류에 들어 있는 사진이라던가, 사진은 사진 이였지만 사진이 어디에 있는 가에 따라 우리는 사진을 바라보는 관념이 전혀 달리 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사진아래 어떤 설명글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사진을 보는 시각이 전적으로 달라진다는 지적은 가슴이 아푸게 다가 온다<<이걸 의도라고 부연 설명이 되었던간에>>. 물론 요즘 처럼 인터넷 모니터에서 보는 사진과 겔러리에 크게 인화되어서 걸려 있는 사진도 사진이겠지만 위치에 따라 이렇게 바라 보는 각도가 다르게 여겨진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사실이라고 이야기 해 준다. 따라서 사진 밑에 있는 택스트에 따라서 사진을 보는 시선도 분명 달라진다는 것에 대한 예시를 그녀는 부각 시켰다. 램브란트 해부학 교습하는 그림과, 체 게바라의 시신의 사진과 비교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흔히 " 사진 보다는 그밑에 적혀 있는 택스트의 입을 빌려 말한다""고 하였으며 ""사진보다는 사진설명이 더 요란스러운 법""임을 강조한다. 이대목에서 나도 사진에 대해서 얼마나 요란스럽게 택스트로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완전 초공감을 하고, 이 비평으로 만나는 글에서 나의 사진과 사진 설명의 글은 모든 택스트에서 짜릿한 지적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오래전 그때의 사진 작가들도 '택스트를 붙혀 왔구나'라며 나 또한 사진 설명에 문학적인 시의 은유를 더 한다던가 길 글의 문장을 써낸다는 것이 전혀 새로운 시도는 아니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진은 의미의 시각에서 불명확성으로 상대적으로 무엇과도 잘 어울린다. 특히 문학적인 표현과 사진이 이렇게 또 잘 어울림을 강조한다.

 

방적 공장에서 착취당하는 아동 노동자들을 보면서 중간 계급의 사진의 시선으로 맞닥드린 끔찍한 현실을 보면서, ""단기적으로는 감각을 자극하고 장기적으로는 처음 받았던 충격의 감각을 중화(단련되어 가는)시켜 버리는 불감증""의 시선을 얻고 이것이 사람들이 말해 왔던 ""신선한 시각""이였으며 ""시각의 영웅""이라고 그녀는 주장 하였다.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사진과 벽없는 미술관화 된 사진의 피사체는 소비품으로 격하되고, 미적 논쟁 꺼리로 격상 되어 버렸다""고 이야기 한다. 이어서, 사진은 눈길을 끄는 순간이나 아름다운 피사체의 지극히 이질적인 피사체를 휴머니즘이라는 관념아래 허구적으로 조화시켜 한자리에 모을 수 있으며, 이는 휴머니즘으로 대하면 모두 똑같다고 갈파한다. ""사진의 흥미, 충동은 결국 공허한 휴머니즘""이라고 했다. 사진이 지닌 최고의 소명은 인간에게 인간을 설명해 주는 것. 그러나 정작 사진 자체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고 한다. 로버트 프랭크는 ""진정으로 동시대를 기록하고 싶다면, 앞으로는 시각적 효과에서 설명을 배제 해야만 할 것""이라고 하면서, ""사진에서 설명을 배제 시키라""고 주장했다. 다이안 아버스 또한, "" 사진은 비밀에 대한 비밀이다. 사진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 할수록 당신이 아는 것은 줄어 든다. 즉, 이야기를 할수록 사진은 더 모호해 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사진에서 그렇게 주절주절 그렸던 것들은 결국은 더더욱 모호한 이야기를 배열한 자기의 모순과 결핍만 부끄럽게 부각 시킨 셈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서 ""사진 작가에서 휴머니즘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된 이유는 휴머니즘이야 말로 사진 산업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혼란(진실과 아름다움을 둘러싼 혼란) 이 혼란을 교모히 감춰주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사진의 휴머니즘을 설명 하면 할수록 더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그녀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난 여기서 사진과 관련된 이 비평서에 매력에 점점 빠져 들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5) 사진의 복음.

챕터 4번째에서 사진의 설명, 즉사진에 대한 밑에 적힌 택스트에 대한 비평을 포함했다면, 이번 다섯번째 사진의 복음이라는 챕터에서는 사진에서 자신을 포함시켜야 할 것인지 배제시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논쟁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챕터 서문에서 화이트 마이너의 글을 인용한 부분에서 난 완전 머리에 망치로 맞는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 작가는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것 (자신이 담는 사진에) 사진을 투사한다. 더 잘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 자신이 바라 보고 있는 모든 것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고 했다. 이 말은 나에게 적용시켜 보자면, 내가 나무를 그렇게 담아 대면서 그 나무를 나의 자신과 동일시 하거나 나 자신을 피사체에 투영시켜 온 사진 버릇에 대해서 이미 그들도 오래전 부터 이야기하며 논쟁을 하여 왔다""는 뜻이였다. 기!막!혔!다!. 나아가 오셀 애덤스는 ""자동기관총 쏘아 대듯이 사진을 찍어 대면 심각한 결과가 빛어질 수 밖에 없으며 좋은 사진을 찍을려면 피사체를 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라고 했으며 ""찍기 이전과 찍기 이후에도 머리속에 이미지를 이미 연출되어 있어야 한다""고 브레송은 주장했다. 이처럼 화이트 마이너는 사진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자아를 투영 시켜야 됨을 주장하였고, 풍경을 찍더라도 그 풍경에는 ""자신의 내면의 풍경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손택은 ""사진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진 작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진이 용감한 주관성<<여기서 주관성이라 함은 사진 작가의 자아의 관념이 포함되어 있는 주관성>>을 쫓게 해주는 도구라면 사진가가 가장 중요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모흘리 나기는 작가에게 ""자아를 배제하라고 요구""하였다. 다시 말해서 로버트 프랭크도 ""사진에서 자아를 배제하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순전히 관찰자적인 시선을 전재하고 냉정한 시선과 순수한 눈길을 염두한 시선을 피력하였으며 스티글리츠는"" 자기 내면의 등가물처럼 사진을 담으라""고 했다. 결국 글을 길었지만 <<자아의 배제냐, 자기 내면이 반영이자 범례냐>> 라고 했던 논쟁에서 손택은 이 두가지의 논점인 ""자신과 자아의 배제""와 ""자신의 포함""을 양립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것을 설명한다.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성을 겸비한 사진. 이거 참 사진 이상론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그다음 문제는 카메라의 물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비평하였다. 요즘들어 필름이냐 디지털이냐 라는 논쟁을 했지만 손택이 바라본 사진의 시대는 흑백이냐 칼라냐 라는 문제로 싸웠다. 이와 관련해서 흑백은 회화를 의식한 사진이였음을 지적하고 흑백 이미지를 더 선호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다. 사진을 회화에 접목시켜 내려 했던 치열한 사진 예술관은 다음과 같이 나타 난다. "" 만약 오늘날의 사진 작가가 자신이 예술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 이유는 자신이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사진이 예술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흑백을 고집하였던 브래송조차 나중에는 칼라의 필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카메라의 메카니즘의 발전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래도 사진이 한편의 예술화를 집착했던 초기 작가들의 예술론을 치열하게 이해할만 하다. 그래서 손택은 예리하게 비판한다. ""사진은 천박한 것에 구애하고 조잡한 것에 호의적이고 적위적이고 야심의 상업주의라는 보수에 능숙히 결합하고 일상에서 볼수 있는 명백한 진리를 외면한 채 급진적인 척할 뿐, 반동적이고 앨리트주의적이고 속물적이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예술과 뒷거래를 하며 예술을 문화적 기록으로 뒤바꿔 버렸다""고 했다.

 

또한, ""사진은 가장 진부하고 지루한 제재의 피사체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능력을 가장 잘 돋보이게 해 준다""고 예찬한다. ""굉장히 진부한 것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며 이런 사진의 묶음(사진집이나 연작집) 안에서 병치하며 나쁜 사진과 좋은 사진의 구별은 모호하고 미술에서 진품이나 모조품이냐의 차이와 구별되며, 시간의 침식으로 인한 지루하고 진부한 것들이 변형되어 아우라를 얻게 된다""는 설명이다. ""회화나 시는 단순히 오래 되었다고 가치가 오르는 것과 별개로 사진은 아무리 조악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세월을 타기만 하면 충분히 감동적이고 흥미로워지며 그러므로 세상엔 나쁜 사진은 없다""는 이유를 조목조목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한다. 사진과 시간이 두개의 수레바퀴 위에 실린 ""진부와 지루함""이 새로운 흥미꺼리로 둔갑시켜 내는 사진의 힘을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사진은 무한히 절충적이며 이에 문학과 절충하여 사진이 주가 되든 시가 주가 되든 관계없다며 두개의 관념적인 양립도 손택은 허용하고 있다.(이대목에서 무척 반가웠다. 용서 받을 수 있구나 라는 안도감!)

 

이 챕터의 다음의 논쟁에 관한 비평으로는 ""사진과 회화와의 관계와 다툼""에 대한 글이다. 여기에서 사진과 회화에 관한 관계는 개인적으로는 빼버렸다.(물론 읽기는 다 읽었지만) 간략히 요약정리 하자면, 회화는 회화를 감상하는 자로 하여금 일정한 사전 지식과 수준을 요구하지만 사진은 그런 지식의 유무와 관계없이도 관찰자로 하여금 별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사진은 회화를 포괄해버린다고 주장하였다. 회화나 문학 등 사진을 담아 참조하지만 사진은 회화나 문학의 설정등을 전혀 고려하지 하지 않거나 참조 하지 않는 것으로 이를 포괄한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회화를 감상하는데 있어서 문학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는 미리 기반되는 "아무런 준비나 지식이 없다면 회화(문학도 포함)자체의 가치와 탁월함이 전달 될 수 없다""고 보았다. 하기사 제벌집 싸모님 아줌마들이 뭐시기 눈물이라며 수백억하는 가치의 그림도 이미 그 가치에 대한 해석을 하지 못해 쩔쩔 매는 사람들이 아무리 그림을 보더라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진과 회화의 경쟁은 별로 큰 없이가 없다고 보았다. 사진의 대중성과 카메라의 보급의 현대의 미디어의 역활은 회화의 물감과 캔버스의 역활에 대해서 이미 경쟁 자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잔은 ""이제 모든 예술은 사진이 되기를 갈망한다""고 다섯번째 챕터의 결언을 맺었다.

 

(6) 이미지 - 세계

본 쳅터는 마지막으로 이미지와 관련한 인간의 해석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플라톤시대 이후로 부단히 ""이미지라는 허구에 대해서 벗어 나려고 시도하라며 본질에 천착하기""를 요구 하였지만 현대는 그 반대로 더더욱 ""이미지""가 강화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의 사진은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해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현실을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많이 생산될 것이고 소비될 것이라고 내다 봤다. (물론 플라톤 시대에는 사진이 그림이었겠지만) 결국 "인물을 아주 세밀히 묘사한 그림과 인물을 담은 사진을 비교하면 선택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플라톤에서 포이에르바하<<1804~1872, 독일 유물론철학자, 헤겔과 마르크스를 잇는 좌파 철학자>>까지 현실을 옹호하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이미지를 단순한 외양으로 여긴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에 들어가려고 이미지를 만들었던 신성한 시대와 장소에서 우리를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주는 신성화의 일부였다""고도 했다. 그리고 ""사진은 피사체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그 연장(延長)이며 피사체를 소유,(관념적 흠모로써의)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라며 이에 대해서, 히틀러를 추종하는 자들이 사진으로 된 엽서를 주렁주렁 걸고 서 있는 사진을 예시로 들었다. 실제로도 자기가 믿는 인물이나 좋아하는 인물의 사진을 자기가 생활하는 주변에 걸어 놓는다던지, 시골집 안방에 액자에 가족 사진이 걸렸던 것이라던지, 지도자의 인물 초상사진을 벽 중앙에 걸어 둔다던지, 하는 일련의 사진을 걸어 놓는 행위를 보면 쉽게 이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그녀가 말하는 신성화된 사진을 의미한다고 본다.

 

특히 ""사진은 글로 통해서 꿈꾸지 못한 막강한 통제력""을 예로 들었다. 전쟁의 정찰용 사진이나 천문사진과 같이 별자리 사진이라던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극미시적 세포 사진이라던가 하다 못해 여권에 증명 사진조차도 사진이 우리의 현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이 된 권력에 이용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현실적으로도 사진이 주는 힘은 강력하다고 볼 수있다고 그녀는 여겼다. 이제는 사진이 소수의 제작자 손에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의 손에서 직접 생산되고 소비되는 환산의 분포는 가히 천문학적으로 많다. 그러므로 결국 ""사진이 피사체를 통제하고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녀가 확실히 현대가 이미지의 시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고 보았던 점은 정확하다. 사람들 개개인으로 들어가서도 이는 사진이 주술적인 관념의 시작으로 보았다. 흔히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그동안에 함께 담았던 사진을 찢어 버리거나 이별 했을 때 사진을 함부러 버릴 수 없는 일종의 주술과 신성의 애착같은 사진은 이제는 특별한 것도 아닌 시대는 아니였던가.

 

가끔 이런 혼동은 자주 겪는다. ""흔히 현실이 영화를 닮아 가는지 영화가 현실을 내포하듯이에 대한 구분 조차 명확하기 않는 이미지의 소비시대이며, 산업화된 나라의 사람들은 존재를 사진을 통해서만 현실적이 된다""고 했다. 영화의 예시가 현실이 될 수 있고 현실의 현상이 영화에 반영되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오래전 영화에서 ""달여행""이라는 무성영화가 나왔다. 그 때의 영화의 상상과 영화의 가정과 스토리가 결국 달 착륙이라는 현실로 나타 났음을 볼때 그녀의 이런 주장은 신빙성을 확신시켜 주기에 좋은 범례는 아닌가 싶었다.

 

현실이 복잡해 질수록 현대 산업사회의 고독과 소외, 결핍과 갈구가 강할수록 ""그에 상응하는 열정과 단순화된 것이 사진 촬영의 중독성으로 나타난다""고 여겼다. 한편으로 나 개인적으로도 사진 촬영에 중독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지 않겠나. 그녀는 이를 "일종의 현실에 탈출구""로써의 사진 역활이라고 보았던 이유에서 사진이라는 현대사회에서의 이해라는 측면은 부정하기 어렵기도 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여행객들의 의무가 되어 버린 듯한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실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겐 사진을 수집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준다""고도 했다. 사진을 찍고 모으고 해서 요즘처럼 개개인의 모니터에서 뿌려지는 이미지의 영상을 보고 즐거워하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미지를 찬미하고 이미지에서 위로 받고 이미지를 부추키고 이미지에 대체하는 셰계를 만들고 있다고 꾀뚫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가면서 카메라 안가지고 가고 사진 안찍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면 이해된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지의 형태로 아무리 소유한다고 한들 이것이 현실적인 것의 비현실성과 거리감을 다시 체험한다""고 꼬집는다. 이것을 그녀는 ""사진의 페러디이자, 시간이 가져온 결과의 페러디""라고 불렀다. 이어서 사진과 전쟁과의 관계라든가 재앙과 사진과의 관계를 설명하며 실제 상황보다 사진은 더 극적인 요소가 더 충격적이고 실제보다 강하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의 사진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주루룩 나오게 된다.

 

또한 "독창적인 사진 작가의 사진과 일반의 객관적인 기록으로써의 사진은 별 구분이 없다""하며 본 쳅터를 마무리 하였다.

 

3 마치면서...

수잔 손택은 이 서평을 뉴욕타임스 1973 - 1974년에 걸쳐 기고 하였다. 현재 디지털 이미지가 난무하고 핸드폰 마다 카메라가 한대씩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그녀가 주장했던 이미지의 사진이 얼마나 앞으로도 그 세력을 확장할 것인지 유추도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진에 있어서 자아 실현과 더불어 세계의 현재를 좀더 직시하고 집중하고 몰입하되, 이미지에 매몰되어 이미지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대지 말것을 권고 하지는 않았을까 싶었다.

 

앞으로도 우리는 전과 비교 할수 없을 만큼 더 많은 사진을 생산해 낼 것이고, 사람들은 사진에 몰입할 것이다. 카메라 회사는 나날이 새로은 매카니즘의 신기술로 이미지를 발전 시키며 앞으로 어디까지 발전 하리라고는 예측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발달과 더불어 우리의 사진에 있어서 점점 ""이미지화된 사진의 허구적 세계에 집착을 경계하여야"" 한다. 이미지의 통제로써 하다 못해 주민등록증의 사진이 없다면, 여권에 사진이 없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이미지의 직접적인 통제를 현실적으로도 받고 있는 현시대를 꼬집었다.

 

언젠가는 사진이 하나의 바코드화되어 기호로 저장되는 홀로그램사진 처럼 3D의 입체감을 가진 통제된 사회에서 이미지의 역활은 사람을 더 옥죄게 할 것이 자명하며 앞으로도 더더욱 강화 될 것이라고 내다 봤던 그녀의 미래적 통찰은 부정할 수가 없다.

 

요즘 책을 읽느라고 사진을 전혀 담지를 못했다. 사진 찍으로 가는 것도 무척 좋아하지만 책을 만나는 것만큼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일은 없다. 누구는 뭘그리 돈도 되지 않는 쓸데없는 것들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가지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빵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빵만으로 세상을 살 수없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빵만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다수라 할지라도 소수자는 빵만으로 살 수 없는 마이너 같은 사람도 세상엔 많다. 하루의 일용할 양식과 따뜻한 온돌방이라면 긴긴 겨울밤 책으로 머리를 굴려 보는 것도 범죄처럼 나쁜 일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이번에 블로그 이웃이 보내 준 책으로 사진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도 해보고 앞으로 이책이 어떠한 영향을 개인적으로 미치게 될지는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히 책을 접하며 정리해 보고 공부해 보면서 이미 오래 전에 누군가가 내가 ""사진에 대해서"" 고민했던 것처럼 그녀도 이런 사진의 고민과 분석과 해석을 하며 고민했던 것과 같은 동지적 동질감에 대해서 무한한 감사를 전해주고 싶다. 결국 이책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미지라는 사진에 대한 ""생태학적인 보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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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1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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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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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04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의 관점에 관한 책인 것 같네요.^^; 전문가들은 사진을 어떤 관점으로 보며, 고민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yureka01 2016-08-04 11:31   좋아요 2 | URL
사진의 전반 나아가 사진과 관련된 사회적인 비평서입니다...사진쪽에서는 이런 비평서 책이 많이 없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4 1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제가 수잔 손택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아직 읽어보질 못했네요. 올해 안으로 읽어봐야 겠습니다..

yureka01 2016-08-04 13:58   좋아요 0 | URL
사진 비평서가 그나마 몇권없는데 사진찍다보니 읽게 되었습니다.

2016-08-04 15: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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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16: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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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5: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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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5: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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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11: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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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1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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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16: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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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16: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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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5: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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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5: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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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1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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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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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6-08-04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잔 손택-그런 작가도 있었어? 라고 솔직히 자백합니다 ㅋ
아침에 저 아래 `찰나의 행복`을 보고 나갔는데
오후에 오니 또 장문의 포스팅이....
정말 열심히 가꾸시네요. 블로그를. 서재의 달인이 아무나 되는 거 아니겠죠.
그 정성과 열정에 손바닥이 뜨겁도록 박수를 보냅니다 ^^*

yureka01 2016-08-04 16:50   좋아요 0 | URL
여류비평작가치고는 사진판에서 꽤나 유명했지요..
아마 손택만큼 사진 비평서에 버금하는 책도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굉장히 현학적이면서도 현대 미국의 지성으로도 손색없는 작가였거든요..

이게 뭐라꼬 열심일것도 없죠..
이런 현상이 잘해서라기 보다는 결핍증상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식의 부족.
심리적 허기.
일상의 결여.

네 저는 배불러서는 그닥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지금행복하자 2016-08-04 1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렵다는 말에 집에 고이 모셔놓고 있는 책입니다. 왠지 각 잡고 읽어야할 것 같아서요~~~~~ 조만간 들어야할것 같은 느낌이 스멀스멀 밀려오는군요..

yureka01 2016-08-04 20:42   좋아요 0 | URL
사진을 한창 공부할 때라서 두번 읽었던 걸로 기억납니다....ㅎㅎㅎ
 

 

북극해의 얼음은 해마다 줄어들고,

 

 

 

해마다 연 평균 기온은 올라가고.

 

 

 

 

 

그린랜드의 빙하는 매년 급격히 감소하고,

 

 

 

 

얼음이 녹으니 해수면은 점점 상승하고.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은 금세기에서 지구역대 최고치로 치닫고 있다.

 

 

이처럼 객관적 데이타는 현실에서 거짓말도 하지 않고

실제 현상에 대한 수치는 그래프의 높낮이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고생대, 중생대 거쳐서 수억 년 동안 서서히 지구를 뒤덮었던 식물들이

지각변동과 고압 고열로 농축이 된 화석에너지가

200년도 안되게 일제히 뿜어 내게 되었으니

지구 온도 에너지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자본은 에너지를 사용한 시간 단축의 욕망으로 들끓고

화폐의 숫자가 늘어나는 속도와  비례해서

지구 온도의 뒤틀림이 누적하며 오른다.

 

온도의 불균형은 어느 지역은

말라가서 사막이 되고,

어느 지역은 과도한 비로 물에 잠기고

폭풍은 크기와 압력을 더 키우는데,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결핍의 풍요로움을

편리함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

아이는 낳아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으며 대를 이어 갈 수 있을까.

 

 이 순간의 찰나에서 행복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미래라고 시간이 담보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도 음악은 작곡 되어져야 하고,

붓은 캔버스 위에서 일렁이는 풍경에 춤을 추듯이 뿌려져야 하고,

카메라 셔터 막은 열었다 닫히며 순간으로 들어 오는 빛을 감광 시킬 수 있는 행복.

이것마저 사치는 아닐 것이다.

 

살믄 얼마나 산다꼬,

지금의 열정이랍시고 노력하라고만 하기에는

지구의 찰나는 겨를도 없을 텐데 말이지.

 

살면 얼마나 살 것이라고???

 

------------

 

1. 찰나 : 불교 용어. 극히 짧은 시간을 말한다.

 

2. 시집은 그래도 시인들이 많이 읽어 준다.

시인들 끼리 서로 돌려가며 십시일반으로

서로의 시집을 탐독한다만은,

사진집이나 사진에세이책은

사진가들에게서도 외면 받기 일쑤다.

하기야 그러니 사진책이 거의 잘 나오질 않는 이유가

아닐까.

 

사진가분들...사진 책 좀 많이 사주시라.

자기 사진 가지고 자뻑이나 하지 말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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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3 13: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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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3 14: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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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3 14: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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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3 15: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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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3 14: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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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3 15: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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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03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글에 자뻑하는 시인도 있습니다. 페이스북에 알게 된 시인 한 분 있었습니다. 그분은 시나 단상을 하루에 서 너편 정도 올립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는데, 다른 분들의 글은 잘 안 보는 것 같았어요.

yureka01 2016-08-03 15:07   좋아요 1 | URL
ㅎㅎㅎ 자기 시 자뻑형도 없기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시인들이 다른 시인의 시집을 그나마 제일 많이 사주는 분들이잖습니까요.


알라딘에 보니 세일 판매지수가 있던데..
시집은 그래도 사진집이나 사진관련 에세이보다는 더 많이 보는 거 같았습니다.

사진가의 자기 사진 자뻑하고 비교가 안될듯 ㄷㄷㄷ.

사진 안찍는 분들에게 사진집 봐달라 소리는 하기 어렵지만,
우째 사진가들이 사진책을 거의 안보는 희안한 현상이 ㄷㄷㄷㄷㄷ

왠만한 시집은 그나마 세일지수가 1000을 넘던데,
사진집은 30이라니. ㄷㄷㄷㄷㄷ


2016-08-03 16: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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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3 16: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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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3 16: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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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3 16: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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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09: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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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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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15: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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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17: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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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없다. 인간과 세계를 향해 뻗은 촉수에 슬픔이 묻어나오지 않는 이들을 '시인'이라 칭했던 역사는 없다. 인류가 지구에서 그 삶을 영위해온 첫 시작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노력으로도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그리움이 시인을 존재케 했다. 허연은 그걸 아는 사람이다. 허니, 시인인 그가 차안(此岸)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일.

- 허언 시인 -

 

사람들은
옆집으로 이사 가듯 죽었다
해가 길어졌고
깨어진 기왓장 틈새로
마지막 햇살이 잔인하게 빛났다
구원을 위해 몰려왔던 자들은
짐을 벗지 못한 채
다시 산을 내려간다
- 위의 책 중 '사십구재' 중 일부

 

'죽은 이의 이름을 휴대폰 주소록에서 읽는다.

나는 그를 알 수가 없다.

죽음은 아무에게도 없는 어떤 것이니까.

신전의 묘비를 읽도록 허락된 자는 아무도 없으므로.'
- 위의 책 중 'Nile 407' 중 일부

 

--------------------------

 

아직도 나는 휴대폰이 지우지 못한 이세상 사람이 아닌 분의 번호가 있다.

 

분명, 그 번호는 통신사에게 회수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아무도 모르는 누군가가 전 주인의 번호로 다시 쓰고 있을 것이다.

 

번호가 이동되었듯이, 사람도 이생과 저생으로 이사를 간다는 시인의 시가 마치 신전의 묘비의 문구를 읽는 기분이 든다.

 

한편으론, 이 세상에서 저 피안으로 떠남은 서러운듯해도 결과론적으로는 서럽지 않는 약간의 부러움도 뒤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침에 떠지지 않는 눈을 뜨고 간밤에 더위로 내내 뒤척이다 잠이 어떻게 든지도 모르게 든 것과 같은 죽음이 다시 아침에 환생되어 지난 밤의 편했던 자신도 모르게 빠져 버린 잠처럼 기억도 나지 않는데 아침에야 몸은 또 움직이라고 살아가라고 일어나라고 지시를 받는 명령서에 산다는 시간의 계약서에 묵시적 계약같다.

 

지루하고 식상하고 남발되고 우울한 것들. 그런데 내키지 않는 시간의 스펙타클함은 짜릿짜릿하고 지치며 게으르고 싶은 욕구조차 망가지게 한다.

 

아무래도 이 시집을 보면 우리들의 삶이 오십 보 백보인 것과 같이, 오십 미터 앞에서 백 미터 앞에 있는 그들을 바라 보고 있는 거 같았다.

 

아 역시..시인이 말하는 시인의 자격증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다고 시인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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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1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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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11: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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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1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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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1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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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2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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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8-02 23:48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만큼 사유의 코드가 퍼즐 맞추듯이 딱딱 맞아서 좋습니다.
공유감 연대감..그리고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좋은 거니까요.
아시죠.일상 상활에서는 전혀 이야기 할 수없는 주제를 논의 할 수 있어서 오히려 제가 더 반갑습니다....늘 감사드리고요..ㅋㅋㅋ

강옥 2016-08-02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 부른 사람은 좋은 글을 못 쓴다, 그 말이겄지예?
안온한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이 우예 좋은 글을 쓰겄어예?
더븐데 휴가도 안 가시고 책메 파묻혀 지내시는갑다요.
유레카님도 현대판 간서치???

yureka01 2016-08-02 11:07   좋아요 0 | URL
글은 밥이죠...
허기져야 밥을 먹거든요..글도 마찬가지겠지요..
허기진 삶의 시간을 채우려 드는 것...글쓰기 아닌가 싶습니다.

먹기와 쓰기..관계^^..


ㅎㅎㅎ 간서치로 살믄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정도로는 간서치 자격없죠.ㅋㅋㅋ

우끼 2016-08-02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아간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시인을 설명하기에 조금 덜 정확하다 생각합니다.. 시인이 골라서 내보인 언어를 읽고 그를 시인이라 인정하는 것은 독자라고 볼때, 독자는 왜 그를 시인으로 인정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독자도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지만 슬픔에 밀려 때때로 그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은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순간. 사람들과 대화를 해도 서로 정확한 점을 지적하기 어려운 순간이 시를 더 잘 느낄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시인의 도움을 받고서 시인에게 감사하는 거라고 하면, 결국 시인은 독자에게 필요한 어떤 감각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입에 바른 , 이상화된 말보다도 나를 정확하게 알아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듯, 시인을 독자가 사랑하는 까닭은 독자의 삶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그의 언어를 동경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끊임없이 슬픔을 느끼면서도 슬픔에서 다른 행복을 느끼려고 발버둥치는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망 속에 파묻혀버린 사람이 아니라. 어떤 감각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삶 자체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시인이라면, 단지 슬픔만이 아니라 거기서도 적확한 행복을 찾아내기를 바라요..저는 조에부스케와 릴케를, 그런 차원에서 좋아합니다.

yureka01 2016-08-02 11:27   좋아요 1 | URL
아고..좋은 지적입니다..ㅎㅎㅎㅎ
말씀하신 그게 시인이 쓴 시가 역할을 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런 시인의 슬품에서 동질감..공유감..연대감을 느끼는 힘....

그런거 있죠..

행복하니 슬프고..슬퍼서 행복한 인생이라고..ㅎㅎㅎ

댓글 아주 잘봤습니다.~~^^.

2016-08-02 1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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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1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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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1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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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2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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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1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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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2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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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2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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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3 0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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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6-08-03 0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는 제가 유일하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요새 겨우 박인환이나 백석 같은 분들의 평전을 읽고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뭔가 가슴이 타는 듯 먹먹하네요.

yureka01 2016-08-03 08:50   좋아요 1 | URL
문장의 아름다움,,,정수는 시가 아닐까 싶어서 저도 시를 재대로 모르지만 읽으려 합니다.ㅎㅎㅎ^.^...

나와같다면 2016-08-03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마 휴대폰 번호를 지우지 못하는 그 마음을 알것같습니다

yureka01 2016-08-03 21:46   좋아요 0 | URL
번호를 지워 버리면 영영 기억마져 사라질 거 같았습니다..
 

 

먼저, 스님의 성불을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날 수 있음에 대단히 부럽기까지도 합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기도 합니다. 불교가 어디 한국 것만도 아닌데 어디에서든 부처님의 가르침과 화두와 수양에 있어서 장소가 특별히 더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한국을 떠나게 된 이유가 느끼시는 것처럼 너무 일반적이고도 고질적이고 쉽게 바꿀 수 없이 토착화된 현상에 대해 진절머리 난 것이 많았겠지죠. 자본에 찌든 종단과 신도. 돈 내고 복을 쌓는 듯이 기복신앙적 돈복 기도를 매매하는 행위들. 종교적 승려로써 전혀 자질도 없는 무늬만 중질하는 무리들. 승려가 세속의 양아치보다 못한 모지리들. 외국인들의 선입견이 가득 담긴 승려의 이질감과 끼리 문화들. 군대의 상명하복같은 상하관계.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현대와 맞지하는 격식과 구질한 형식들. 일일히 다 열거조차 못할만큼 이 밖에도 많을 것입니다.

 

문제는 말이죠. 이런 현상들이 비단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장악된 이념이자 가치관이었던 것입니다. 특정 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스스로 내부적으로 각성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그방식의 낙후됨으로 여전히 이어지는데 어떻게 외국 스님인들 아무리 주장해도 바꿀 수가 없을 것입니다. 화두로 깨우침이라는 것도 현실 생활의 깨달음조차 실천되지 못하는 행동력에서 불교적인 참선이 무슨 소용이 될 수 있으며 쓸모가 있을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또한, 이런 인간사의 종교적인, 일상적인 부조리와 불합리들에 있어서 빚어낸 현상은 꼭 한국적 토양에만 적용시킬 것만도 아닌 어쩌면 인간 사회의 구성된 형태만 다를 뿐 그 본질적인 문제는 얼추 비슷할 것입니다.

 

스님은 그래도 일반 승려보다는 1%에 속하는 그야말로 불교적 금수저의 대표격이었어요. '하버드'라는 한국사회에서 가진 착시현상에 걸맞는 색안경에 아주 돋보이는 분이었거든요. 하바드가 아니었드라면, 사부격의 스님이 어디 사찰 이름 없는 주지였다면, 과연 스님이 가진 스펙으로 조계종의 케이스에 아주 돋보이는 모양새는 아니었겠는가 합니다. 그만큼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일반 승려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배려를 받았던 것입니다.

 

어느 종교치고 스님이 주장하는 그런 모습이 아닌 종교가 거의 없습니다. 무슨 조직을 만들었을 때는 인간사에 빚어지는 부조리함은 늘상 따라 다녔더란 말이죠. 깨닫음과 참선이 꼭 불교적 교리형식에 억매일 것까지도 없이 스스로 하면 하는 것이고, 말면 마는 것일 뿐입니다. 누릴 만큼 누리고 배려 받을 만큼 받은 그간의 성직자 생활에서 거에 걸맞는 것 이상으로 가진 셈이었습니다.

 

벽안의 외국 백인 남성의 하바드 석사 출신이 계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뉴스거리 였고 화제를 집중시키는 홍보효과는 극대화 된 조계종에서 어느 정도는 이용했을 계연성도 많아 보였고 또한 이에 거절할 것도 없었거든요.물론 그때는 모르셨겠지요.

 

어느 종교이든 비슷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이 최대의 가치이자 물신이 종교입니다. 순수한 척을 해도 사찰의 넓이와 치장을 보면 돈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고, 교회의 첨탑 십자가가 높을 수록 자본은 그만큼 침투되어 타락 오염도를 나타내는 지표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 산 구비구비 들어가 토굴 같은 암자하나 거처해 놓고 오늘도 수행에 정진하는 보이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목사 월급조차 한푼없이 날팔듯이 사랑의 헌신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고 숨어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환멸스럽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이제는 다 내려 놓고 그런 정진을 하고 사랑을 배푸는 분들이 발산하는 가치를 찾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어느 지역 어느 나라를 간다한들 잡을 생각은 없지만 꼭 그런 분을 만나셨으면 합니다.

 

진짜는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25년 정진했다는 분이 엉덩이에 진물 한 번 안나고 참선을 찾겠습니까?

결국 껍데기만 보았던 것은 아닙니까?

 

불교는 찾는 종교지요. 섬기는 종교가 아니잖아요.

견성한다는 말의 뜻이 오늘따라 크게 와닿네요.

 

한국 불교의 1%짜리 진짜를 찾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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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01 14: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레카님이 현각 스님의 비판한 내용이 사회 전체에 자리잡은 문제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우희종 교수의 입장을 들어보면 현각 스님이 일반 승려보다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금수저’라는 표현이 현각 스님을 처음 아는 분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각 스님 논란을 중립적으로 보는 기사가 많지 않았어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8578501

현각 스님이 예전부터 종단에 건의하면, 종단은 외국인 스님이 한국 불교 분위기를 잘 몰라서 물어본다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합니다. 스님 입장에서는 한국 불교의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여러 차례 건의를 해봤지만, 돌아온 건 종단의 미온적인 태도였죠. 스님은 종단에서 소외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yureka01 2016-08-01 14:53   좋아요 2 | URL
네 물론 알죠.그럼요..아마 떠나겠다고 발표하기까지 많은 건의와 노력 있을 것이 자명한 일이죠.
가볍고 쉽게 떠난다는 말할 분도 아니었기도 하죠.
그래서 지적한 끼리 끼리 문화도 많은 작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같은 종단에서도 불교 특유의 도재식의 파벌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그런 문제에서 굳이 스님뿐만아니라 많은 분들이 느끼는 점이죠.

그런데 스님은 떠날 곳이라도 있으니 다행입니다만,
떠날 수 없는 스님들은 또 어쩔까 싶기도하거든요.

스님의 일상은 늘 떠남이 수행의 모습이었죠.
온다간다 말없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게 한국 불교의 수행자들이 그랬죠.
떠난다는 말없이, 한국불교의 지적이었더라면 ....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지요.

25년간 한국 불교 승려로 있어도 늘 이방인처럼 살았어야 할 그의 고뇌도 엿보이는 부분이었습니다.
아무튼 참 안타깝습니다. 외국인으로써 한국의 고승반열에 오를 수 있는 덕망을 가진 분인데 말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1 15: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종교 영역, 정치 영역, 사회 영역 모두 윤리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yureka01 2016-08-01 15:40   좋아요 1 | URL
자본주의 시대니까 아무래도 자본이 곧 신으로 모셔지겠죠.
욕망과 결합된 신은 전방위적이라는 현상..아닐까 싶습니다.

마이클 센델 교수의 책 제목처럼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많아질 수록,
돈이 신격화될 것이겠죠.....

stella.K 2016-08-01 17: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분의 행보가 궁금하긴 합니다.
떠나면 어디로 가실 건지 알려진 게 있나요?
종교라는 게 역사와도 맞물려 있지 않나 생각해요.
불교도 종교개혁이 필요한 싯점인 것 같습니다.

yureka01 2016-08-01 17:54   좋아요 1 | URL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 게 수행자의 예의더라구요..ㅎㅎㅎ
맞습니다..지금 종교가 추구하는 게 물신이라서.....
위로가 되지 못할듯..

2016-08-02 0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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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2 1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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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2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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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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