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없다. 인간과 세계를 향해 뻗은 촉수에 슬픔이 묻어나오지 않는 이들을 '시인'이라 칭했던 역사는 없다. 인류가 지구에서 그 삶을 영위해온 첫 시작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노력으로도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그리움이 시인을 존재케 했다. 허연은 그걸 아는 사람이다. 허니, 시인인 그가 차안(此岸)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일.
- 허언 시인 -
사람들은
옆집으로 이사 가듯 죽었다
해가 길어졌고
깨어진 기왓장 틈새로
마지막 햇살이 잔인하게 빛났다
구원을 위해 몰려왔던 자들은
짐을 벗지 못한 채
다시 산을 내려간다
- 위의 책 중 '사십구재' 중 일부
'죽은 이의 이름을 휴대폰 주소록에서 읽는다.
나는 그를 알 수가 없다.
죽음은 아무에게도 없는 어떤 것이니까.
신전의 묘비를 읽도록 허락된 자는 아무도 없으므로.'
- 위의 책 중 'Nile 407'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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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는 휴대폰이 지우지 못한 이세상 사람이 아닌 분의 번호가 있다.
분명, 그 번호는 통신사에게 회수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아무도 모르는 누군가가 전 주인의 번호로 다시 쓰고 있을 것이다.
번호가 이동되었듯이, 사람도 이생과 저생으로 이사를 간다는 시인의 시가 마치 신전의 묘비의 문구를 읽는 기분이 든다.
한편으론, 이 세상에서 저 피안으로 떠남은 서러운듯해도 결과론적으로는 서럽지 않는 약간의 부러움도 뒤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침에 떠지지 않는 눈을 뜨고 간밤에 더위로 내내 뒤척이다 잠이 어떻게 든지도 모르게 든 것과 같은 죽음이 다시 아침에 환생되어 지난 밤의 편했던 자신도 모르게 빠져 버린 잠처럼 기억도 나지 않는데 아침에야 몸은 또 움직이라고 살아가라고 일어나라고 지시를 받는 명령서에 산다는 시간의 계약서에 묵시적 계약같다.
지루하고 식상하고 남발되고 우울한 것들. 그런데 내키지 않는 시간의 스펙타클함은 짜릿짜릿하고 지치며 게으르고 싶은 욕구조차 망가지게 한다.
아무래도 이 시집을 보면 우리들의 삶이 오십 보 백보인 것과 같이, 오십 미터 앞에서 백 미터 앞에 있는 그들을 바라 보고 있는 거 같았다.
아 역시..시인이 말하는 시인의 자격증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다고 시인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