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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쟁취
표트르 알렉세이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여연.강도은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6년 5월
평점 :
오늘은 누님이 먼 친척 분의 별세소식을 전해 옵니다.
간밤에 몹시도 아프면서 세상을 하직했다고 합니다.
저녁에 문상을 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한 번의 만남이란 인연이더라도,
꼭 한번의 이별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죽음은 절대적인 이별의 본질과도 같기에,
언젠가는 내가 죽어도 세상과 관계와 이별하고
내가 관계한 분들이 죽어도 결국 이별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사에 벌어지는 일들은 꼭히 이별이 없을 것처럼,
더 가지고자 다툼의 연속극을 벌였던 역사였습니다.
폭동이 그랬고 역사가 그랬고 사회가 그랬습니다.
어제는 빵의 쟁취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나키즘, 코뮌주의로 대변되는 공동체사회를 저자는
주장했지만 과연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비교가
그 주장에 부합할런지는 납득이 조금 안되더군요.
물론, 논리와 이론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런 가능성으로 수 많은 이상주의자들은 노력하고 대항하고
저항하고 싸워 왔습니다.
하지만,역시 인간 심리 저변에 깔린 이기적인 욕망은
절대로 이별할 수 없는 자기만의 생존에
매몰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저항이 있었길래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있었던
바탕도 되었던 긍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 정도 읽었는데 그만 책을 덮었습니다.
이 책은 1892년도에 쓰여졌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익히 생각하던 바에
그 뉘앙스는 계속 이어졌고
또 새로운 논리의 전개는 별로 찾아 지지 않았습니다.
1892년의 러시아와 유럽, 독일에서 발생한 코뮌주의 이론,
영국의 제국주의에 자본의 기승. 식민지라는 빼앗음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본이 땅을, 사람을 지배하고 이 지배로 인하여
이익의 극대화를 노리겠다는 꿍꿍이와 별로 다를 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 번 오면 한번은 가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 온 인생은 생존의 굴레 속에서
끈임없이, 영원하 살 것처럼 탐욕을 부리기 때문에
갈등과 착취와 지배가 이루어집니다.
대를 물려서 이어지는 자본의 약탈은
결국 다수를 피폐화 시켜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내려 놓음은 누구에게 권리를 보장해주기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자신의 생존에 대한 이기적 탐욕에서
자기 자유를 얻는 것과도 같거든요.
내 마음 속에 발생하는 끝없는 탐욕은
무엇으로도 대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번 온 인생 마음 바꾸기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끼게 되지요.
사람은 빵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그러나 빵만으로도 살기 싫습니다.
빵이란 것과 자유란 것.
이 두개의 수레바퀴라야 수레는 원하는대로 갈 수 있으니까요.
내 인생 내가 원하는대로 가기 위한 조건이 빵과 자유겠지요.
그러나 빵에만 집착할 때, 자유는 달아나버리고 마니까요.
PS : 책 평점은 4개에서 하나 뺏습니다.
책 크기는 작고 두께는 넓었어요.
책 크기 좀 키우고 두께를 좀 줄이면 좋겠더군요.
책을 왜 이렇게 조그만하게 만드는지 누구편집자 없습니까.
좀 알려주세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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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퇴근하는 와이프가
빵을 사왔다.
맛있게 보였다고 했다.
나는 그 즈음에
[표토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의 저서, 빵의 쟁취]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 당신 주려고 빵 사 왔어."
나는,
" 빵은 됐고,
자유는 안 팔더나?
자유를 사 왔어야지.?"라고 했다.
"글쎄, 자유 행 티켓은 팔지 않더라"라고 알려 준다.
이 노무 빵,
그 노무 자유.
한 줌의 빵과 한 줌의 자유가 만나는
환상 같은 책을 읽으며 꿈 꾸었다.
단지, 꿈만,,,
빵이냐, 자유냐라고 선택하라면,
나는 자유를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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