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스님의 성불을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날 수 있음에 대단히 부럽기까지도 합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기도 합니다. 불교가 어디 한국 것만도 아닌데 어디에서든 부처님의 가르침과 화두와 수양에 있어서 장소가 특별히 더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한국을 떠나게 된 이유가 느끼시는 것처럼 너무 일반적이고도 고질적이고 쉽게 바꿀 수 없이 토착화된 현상에 대해 진절머리 난 것이 많았겠지죠. 자본에 찌든 종단과 신도. 돈 내고 복을 쌓는 듯이 기복신앙적 돈복 기도를 매매하는 행위들. 종교적 승려로써 전혀 자질도 없는 무늬만 중질하는 무리들. 승려가 세속의 양아치보다 못한 모지리들. 외국인들의 선입견이 가득 담긴 승려의 이질감과 끼리 문화들. 군대의 상명하복같은 상하관계.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현대와 맞지하는 격식과 구질한 형식들. 일일히 다 열거조차 못할만큼 이 밖에도 많을 것입니다.
문제는 말이죠. 이런 현상들이 비단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장악된 이념이자 가치관이었던 것입니다. 특정 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스스로 내부적으로 각성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그방식의 낙후됨으로 여전히 이어지는데 어떻게 외국 스님인들 아무리 주장해도 바꿀 수가 없을 것입니다. 화두로 깨우침이라는 것도 현실 생활의 깨달음조차 실천되지 못하는 행동력에서 불교적인 참선이 무슨 소용이 될 수 있으며 쓸모가 있을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또한, 이런 인간사의 종교적인, 일상적인 부조리와 불합리들에 있어서 빚어낸 현상은 꼭 한국적 토양에만 적용시킬 것만도 아닌 어쩌면 인간 사회의 구성된 형태만 다를 뿐 그 본질적인 문제는 얼추 비슷할 것입니다.
스님은 그래도 일반 승려보다는 1%에 속하는 그야말로 불교적 금수저의 대표격이었어요. '하버드'라는 한국사회에서 가진 착시현상에 걸맞는 색안경에 아주 돋보이는 분이었거든요. 하바드가 아니었드라면, 사부격의 스님이 어디 사찰 이름 없는 주지였다면, 과연 스님이 가진 스펙으로 조계종의 케이스에 아주 돋보이는 모양새는 아니었겠는가 합니다. 그만큼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일반 승려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배려를 받았던 것입니다.
어느 종교치고 스님이 주장하는 그런 모습이 아닌 종교가 거의 없습니다. 무슨 조직을 만들었을 때는 인간사에 빚어지는 부조리함은 늘상 따라 다녔더란 말이죠. 깨닫음과 참선이 꼭 불교적 교리형식에 억매일 것까지도 없이 스스로 하면 하는 것이고, 말면 마는 것일 뿐입니다. 누릴 만큼 누리고 배려 받을 만큼 받은 그간의 성직자 생활에서 거에 걸맞는 것 이상으로 가진 셈이었습니다.
벽안의 외국 백인 남성의 하바드 석사 출신이 계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뉴스거리 였고 화제를 집중시키는 홍보효과는 극대화 된 조계종에서 어느 정도는 이용했을 계연성도 많아 보였고 또한 이에 거절할 것도 없었거든요.물론 그때는 모르셨겠지요.
어느 종교이든 비슷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이 최대의 가치이자 물신이 종교입니다. 순수한 척을 해도 사찰의 넓이와 치장을 보면 돈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고, 교회의 첨탑 십자가가 높을 수록 자본은 그만큼 침투되어 타락 오염도를 나타내는 지표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 산 구비구비 들어가 토굴 같은 암자하나 거처해 놓고 오늘도 수행에 정진하는 보이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목사 월급조차 한푼없이 날팔듯이 사랑의 헌신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고 숨어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환멸스럽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이제는 다 내려 놓고 그런 정진을 하고 사랑을 배푸는 분들이 발산하는 가치를 찾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어느 지역 어느 나라를 간다한들 잡을 생각은 없지만 꼭 그런 분을 만나셨으면 합니다.
진짜는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25년 정진했다는 분이 엉덩이에 진물 한 번 안나고 참선을 찾겠습니까?
결국 껍데기만 보았던 것은 아닙니까?
불교는 찾는 종교지요. 섬기는 종교가 아니잖아요.
견성한다는 말의 뜻이 오늘따라 크게 와닿네요.
한국 불교의 1%짜리 진짜를 찾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