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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바다 - 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1년 12월
평점 :
품절
희망이 있어야 의병도 일어선다
최악의 임금을 뽑는 조사에서 항상 우위를 다투는 왕은? 선조와 인조가 아닐까 한다. 둘 다 끔찍한 전쟁 속으로 백성들을 몰아넣었다. 그 중에 최고봉은 선조가 아닐까.
전쟁 중에 백성들을 버리고, “죽더라도 천자의 나라에 가서 죽겠노라”며 명으로의 망명을 시도하고, 이순신이란 명장을 질투로 죽이려 했으며, 의병장 김덕령에게 말도 안되는 죄명으로 죽게 한 이다.
임진왜란의 중심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식량을 해상로로 보급받으며 치고 올라가려한 일본의 계략을 막은 것도 이순신이었으며, 전쟁의 마지막에도 그가 있었다.
역사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거나 덕후인 이에겐 조금 싱거울 수 있는 책이다.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들일 수도 있고, 자주 봐왔던 무기들과 사진들, 지도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중간 중간 덜 알려진 전투들에 대한 설명들과 마지막에 이순신의 자살설이나 은둔설등에 대해 반박한 부분들이 좋았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부산포해전>이다. 부산포는 왜구의 본진으로 약 500여척의 배가 지키고 있던 곳, 이 곳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테카츠는 이순신이 공격하자, 그에 대한 두려움과 충격 등으로 화병에 걸려 사망한다. 1592년 음력 9월 1일 대승을 거두었고, 이 날을 기리며 양력으로 환산해 10월 5일이 부산 시민의 날이 되었다고 한다.
(김시민 등도 일본에선 두려움의 대상, 그래서 김시민은 모쿠소~ 두꺼비를 타고 일본 정벌하러 오는 모습~ 란 존재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순신의 승승장구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었다.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났고, 순왜인들(일본에 협력)도 돌아왔다. 이런 이순신의 공에 두려움과 질투를 느낀 이가 바로 원균이다. 그는 이순신의 전략에 참여했지만, 뒤에 숨어있다가 왜구의 목을 잘라 수급을 챙기는데만 급급했다. 그리고 이심전심이라고 해야 하나, 원균과 한마음같은 선조 또한 이순신이 반갑지 않았다. 결국 사돈지간인 윤두수와 원균의 짝짝꿍으로 “장문포왜성을 선제공격하자”란 장계가 올라오고, 선조는 승인을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병사들 또한 군량미와 식량 조달을 위해 추수를 하러 떠났고, 왜성(계속되는 내전으로 일본은 왜성을 쌓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 왜성만 쌓는 전문기술자집단도 있었다. )은 너무나 견고해서 수륙에서 함께 합동작전을 펼쳐도 어려울 판이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경험이 부족한 이들을 데리고 참여하였고, 후에 류성룡 등의 반대읍소로 장계는 거두어진다.
그 후 요시라 라는 이중간첩에 의해 “대마도를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요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지만, 가토가 언제 오는지 그리고 대마도와 부산 사이엔 섬이나 함대 정박지도 없어 거의 불가능한 임무였다. 결국 이 임무에 따르지 않는다 하여 이순신은 잡혀 올라오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이순신은 온갖 고문을 당하게 되고, 선조는 그를 죽일 작정이었고 류성룡도 이순신 살리기에 포기상태였다. 그때 정탁이 이순신을 살려야 임금인 선조가 더 돋보일것이란 글을 올려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 정탁은 선조의 심리를 이용한 것 ) 원균은 이순신이 작전을 회의하던 곳에 기생을 들이고, 온갖 악행을 저질러 탄핵이 빗발치지만 선조는 그를 감싸고, 결국 칠전량 전투에서 대패로 원균은 목숨을 잃는다. 이 칠전량 전투로 다시 사기가 오른, 그리고 바닷길을 차지하게 된 일본은, 휴전을 접고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일본은 남해와 전라도 등 일대의 백성들을 처참하게 살육했다. 이 시기에 죽은 백성들, 그들의 베어나간 코와 귀는 무덤을 이루었다.(수급을 위해 목은 무거우니 처음엔 귀를 베게 했다. 조선인 남자들은 귀를 뚫어 장식을 했기에 왜구와 구별이 가능, 그러나 두 쪽을 베어 둘을 죽였다고 속이는 일이 있자, 코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도 일본에는 귀무덤 등이 있고, 불교계 등에서 모셔오기도 했다.) 조선인구의 절반이 전쟁으로 기아로 죽어나갔다.
백의종군한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1:133척으로 맞붙는다.(대부분의 배들은 칠전량에서 침몰하고 불타 배설이 도망가면서 챙긴 12척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 12척도 뒤에 숨어 있었기에 첫 시작은 이순신장군의 배 1척과 왜구 133척의 싸움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스스로를 미끼로 쓴 것 ) 11척은 뒤에서 도망갈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이순신이 빠른 물살 속에서 잘 견디자 두 척이 다가왔고, 그 후 다른 배들도 합세헤서 12:133척으로 대승을 거둔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탈영하여,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서 잡혀 사형당한다.)
명량해전의 참혹한 패배 후, 일본은 이순신의 본가와 아산의 마을을 불태웠고 이 때 이순신의 아들 이면 또한 적장 셋을 죽이며 싸웠지만 죽임을 당한다.
명나라 수군 진린이 뇌물을 좋아하고 욕심이 있음을 알고, 오히려 극진하게 대우하고 수급을 나눠주는 등으로 신의를 얻는다. 그 후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마지막까지 왜구를 처단하다 전사한다.
노량해전에서 고니시는 도망갔고, 시마즈는 겨우 탈출한다. 결국 두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어린 히데요리를 지키기 못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차지하게 된다. 시마즈 가문은 살아남아 훗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며 정한론을 펼쳐, 강화도 조약을 맺는데 큰 역할을 했고, 지금도 일본의 극우세력으로 남아 있다.
진린가문은 명 멸망시 조선으로 이주, 광동 진씨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엄격했다. 부하들과 힘을 모아 새로운 무기를 만들고, 조총을 연구해서 우리만의 조총도 만들었다. 노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장계를 올릴 때 그들의 공도 꼭 기록하려 애썼다.
혹독한 훈련 아래, 무겁고 힘든 노를 저으며, 전쟁의 공포에 맞서 죽을 힘을 다해 싸운 수많은 이름없는 민초들, 그들을 이끈 것은 본인에게도 똑같이 엄격했고 죽음 앞에 먼저 나선 이순신의 공정과 정의로움이었다.
( 화폐 속 인물들을 보면서 웃었던 적이 있다. 덕수 이씨 이순신, 덕수 이씨 이이, 그의 어머니 평산 신씨, 진성 이씨 이황, 전주 이씨 세종대왕, 왜 이렇게 이씨가 많은가, 이씨 종친회에서 뭐라도 한건가 왜 벼와 학만 빼고 다 이씨인가 였다. 그 당시에는 오만원권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성리학을 숭상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500원이 지폐였을때 이순신장군과 거북선이 그러져 있었는데, 어느 순간 500원은 동전이 되면서 학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도 궁금하다. 왜 이순신은 학에게 밀린걸까 )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 당초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칠천량)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 1598년 4월 2일, 사관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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