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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 여행자 - 그는 왜 미친 듯이 세상을 돌아다녔는가?
이언 해킹 지음, 최보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2월
평점 :
미치광이 여행자 불린 알베르의 이야기.
어느 한 시대에만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정신질환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정신질환은 둔주, 정신없이 헤메다 혹은 목적없이 헤메다는 뜻으로 정신병의 일종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 둔주라는 병은 1887년과 1909년 사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만 발생된 질환이다. 작가는 이런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만 정신질환이 나타나는 이유에는 생태학적 틈새가 있음을 말한다.
그 생태학적 틈새란 첫 번째, 의학의 질병분류법이란 진단명 체계안에 들어와야 한다. 결국 이름 지어지고, 질병코드를 얻어야만 그것은 질병으로서의 힘을 발휘하는 것.
두 번째는 낭만과 도덕이란 면과 범죄와 패덕의 면 중간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로는 당연히 질환으로서의 가시성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질환이 주는 고통 뒤에 당대 문화의 해방구 기능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둔주란 질병명, 낭만적 여행자와 부랑자 사이의 중간적 위치, 떠나지 못하면 괴로워하거나 떠나고 싶지 않아도 어느 순간 낯선 곳에 와 있으며 일시적 기억상실증을 겪는 것, 군대문제와 전쟁 그리고 답답한 당대현실에서 훌쩍 떠나고 싶은 이들에게 둔주는 책임을 면제해주는 면에서 해방구 역할을 한다.)
세계최초로 자전거 왕진을 다녔고, 보르도와 파리의 자전거 경주를 기획했으며, 프랑스 체육게의 리더였던 필리프 티시에란 의사가 있다. 그리고 둔주의 첫 사례로 기록된 알베르 다다가 있다.
알베르는 폐쇄적인 시골마을인 보르도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 곳에서 가스정비공으로 일했으며 군대 복역도 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대화 속에서 지역명이 나오면 무작정 걷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리면 낯선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었고, 최면치료를 받으면 기억을 떠올렸다고 한다. 어떨 때는 70km를 걷기도 했다고한다. 군대에서도 몇 번이나 탈영을 해서 잡혀 오고, 또는 스스로 자수를 하기도 했고, 무작정 아프리카로 가는 배를 타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걷게 된다는 그, 그런 그를 티시에는 최면술과 약물 등을 이용해 치료하는 과정을 세세하게 글로 남겼다. 이런 둔주, 즉 미치광이 떠돌이병은 프랑스에서 시작해서 이탈리아 독일로 퍼져갔다.
그런데 왜 미국이나 영국엔 이런 둔주병의 사례가 없는걸까.
프랑스 등은 징집제로, 군 탈영 등을 막기 위해 엄격하게 신분증과 여행증서등을 관리하고 검문했다. 또 부랑아, 떠도는 자들에 대해서도 갱생의 부랑자, 갱생불가의 부랑자 등으로 나누어 관리를 했다. 거기다 이 시기 처음으로 단체관광 등 낭만적인 관광이 대거 유행하면서 그와 반대로 범죄적 부랑아인 하층민에 대한 공포도 커졌기에 통제가 필요했다. 물론 일상의 삶과 평범함이 주는 지루함 등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 둔주란 병명으로 책임을 면제받고 도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이나 영국 등은 여행자에 대한 엄격함도 징병제도 아니었다. 언제든 신대륙이나 식민지로 갈 수 있었던것이다. 부랑아도 많지 않았고 아직 단체 관광 등이 발달한 시기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둔주란, 그저 다중인격의 한 증세로 분류되었다.
전쟁과 군대에 염증을 느낀 젊은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고자 혹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자 했고, 이런 이들 중 누군가는 둔주라는 병명으로 책임면제를 받았으니, 의학적으로 꾀병 여부에 대해 확실히 구분해야 했다. 그래서 프랑스 등에선 둔주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고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초창기 이 둔주병은 히스테리아 (돌아다니는 자궁이란 뜻으로 주로 여성에게 발병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히스테리아가 원인인 둔주병에 걸린 남성은 남성성에 문제가 있고 동성애적 경향이 있다고 추측하기도 했다.)혹은 간질이 원인이라고 보아, 히스테리아는 최면술로 간질은 약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 왜 여성에겐 이런 둔주병이 드문걸까.
만약 발현되었더라도, 길을 나서는 순간 봉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살아남기가 어려웠을 것(알베르의 딸이 일자리를 구하러 갔다가 인신매매 당해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유랑하는 유대인”전설, 그리고 동유럽에서 박해를 피해오던 가난한 유대인과 이민자들의 행렬을 보며 부랑자 공포와 반유대정서가 확산되었고, 티씨에는 최초의 둔주 환자인 알베르를 유대인에 은유하기도 했다. 유랑하는 유대인 전설이란, 십자가를 메고 그리스도가 가난한 유대인 구두장이집을 지날 때, 구두장이가 냉혹하게 “가, 계속 가”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자 그리스도가 “시간의 종말이 올 때까지 계속 가야 하는 것은 바로 너일지어다” 라고 하자, 그 구두장이는 죽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돌게 됐다는 이야기다.
둔주는 우생학이나 유전적 요인과 합쳐져, 미치광이 여행자 혹은 통제 박약, 퇴화로 지칭되기도 했다.
1909년 낭트에서 열린 정신병의사와 신경학자 총회에서 둔주는 더 이상 독립된 진단명이 아님에 동의했고,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둔주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사료, 알베르의 치료 기록 등이 담겨 있다.
군복무와 전쟁, 좁은 지역에서의 배타성과 평범한 매일이 가져오는 지루함은 그 시대 청춘들에게 끊임없이 걷고자 하는 여행하고자 하는 꿈을 키우게 했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세금을 걷거나 노동력 착취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대부분의 서민들은 거주나 이전의 자유를 갖지 못했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그런 신체의 속박에서 벗어났으나, 여전히 국가는 전쟁과 통제로, 그리고 가난이 그들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무거운 어깨와 책임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한번쯤은 내가 아닌 나로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그런 병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나무가 아니기에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기엔, 그들의 발은 자꾸만 걷고 싶어 하고,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 하며, 배를 타고 저 먼 곳으로 나가고자 한다. 비록 텅 빈 주머니로 온갖 고생 끝에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가족에게 외면받기도 하지만, 바람처럼 살아가고 싶었는지도. 그런 이들에게 유전적 질환으로서의 나쁜 혈통, 혹은 부랑아, 게으른 자, 무책임함 등의 프레임을 씌우고, 최면술과 약으로 고쳐 그들이 바라는 일꾼으로 돌아오길, 혹은 다른 이들이 흉내내거나 영향 받지 않기를 바란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알베르의 멍한 눈과 이젠 지쳐 더 이상 원치 않음에도 어딘가로 꾸준히 걸어가고 되돌아오는 그의 병상기록을 보면, 그 시대 고단한 삶들 속 방랑자의 운명은 더 고달팠음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