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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ㅣ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만엔 원년의 풋불
(1. 만엔원년~ 1860년 에도 막부시대 말기의 연호,
2.풋볼 ~주인공 증조부의 동생이 일으킨 만엔원년의 농민봉기를 본따 청년들을 모아 만든 풋볼팀이지만 당연히 풋볼이 목적은 아니다. 만엔원년과 소설 속 1960년대가 닮은 듯 교차하는 느낌. )
오에 겐자부로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김지하 관련 글에서였다. 일본인 작가인 그가 김지하 구명운동에 열심이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1994년 갑자기 서점에선 그의 책들이 연달아 급하게도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가 노벨상을 탄 해였다.
1935년생, 진보와 평화주의자, 반전을 외쳤던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와는 또 다른 세상의 상실을 보여주었다. 상실감 뒤에서 그는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 그리고 선한가에 대한 의문을 담았고, 고통을 이해하며 구원받는 이들의 모습을 그렸다.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책은 <사육>이었다. 1994년도 출판에 정가 5500원.
그리고 <만엔 원년의 풋볼>은 그 책과 배경이 닮았다. 그가 어린 시절 자랐던 시코쿠의 산속 고향마을의 모습과 풍습에 대한 묘사때문일 것이다.
작은 부락은 결국 폭력이 난무하고 용인되는 그래서 무너져 가는 작은 국가이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배척이 낳은 폭력 또한 작은 전쟁이다.
안보투쟁에 참여했다가 머리를 맞은 후, 기묘한 모습으로 자살한 친구.
백치와 같은 아이를 낳고, 넋을 놓아버린 알코올 중독자 아내
안보투쟁에서 전향해 미국으로 <우리 자신의 치욕>이란 연극공연을 하러 떠났다가 돌아온 동생 다카시와 그런 다카시를 추종하는 호시오와 모모코.
그들은 각기 다른 기대와 속셈으로 예전 고향땅을 밟는다. 여전히 낡고 페쇄된 그 공간에선 그들의 증조부 동생이 일으켰다는 만엔 원년의 봉기가 전설처럼 구전된다.
그리고 스스로 맞아 죽기를 택한 그들의 S형.
다카시는 증조부의 동생과 S형에 자신을 대입하며, 스스로 비참해지길, 증조부 동생처럼 봉기를 일으키고, 약탈을 부추기며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고, 그래서 자발적 처벌을 원한다.
“형수님보단 내가 이 골짜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슬슬 폭동도, 폭동에 가담한 자기 자신들도 지겨워진 상태예요. 그래서 폭동의 모든 악을 나한테 미루고 나서 나를 때려죽이면, 모든 것을 속죄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자도 있겠지요. 그리고 그건 사실이고요. S형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속죄양이 되면 아주 많은 일이 단순해지겠지요.” 476쪽
“그렇다. 너는 진실을 말했다.” 550쪽.
골짜기의 눈들이 진실을 덮은 듯 보이지만, 곧 눈은 녹고 진실은 드러나겠지만, 그 진실 또한 진창이 되어 더럽혀지고 왜곡되어 버릴 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당했던 아이들의 무차별적인 돌팔매, 외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 조선인에 대한 약탈 등이 작은 산골마을에서 휘몰아치면, 젊은이들은 피를 흘리고 나이 든 이들은 젊은이들을 속죄양 삼아 다시 삶을 이어간다. 위선과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폭력성 , 모모코의 말처럼 인간은 선한 존재일까.
불가촉천민의 모습으로 온갖 일들의 원흉으로 지목되며, 흉흉한 일들과 분풀이의 대상이었던 조선인구락부 출신의 백승기의 슈퍼마켓을 습격해 얻은 음식들을 쌓아두곤, 조선인들은 당해도 싸다고 말하던 주인공의 유모이자 거대 여인이 된 진, 결국 진은 통조림들 속 단백질 등의 과다섭취로 점차 말라가며 죽어간다. 마치 쇠락해가는 이 마을을 다시 부흥시킬 신령처럼 여겨지던 거대한 진이, 다시 말라가며 죽어가는 모습은, 이 마을의 현재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다카시가 젊은이들에게 불어넣은 바람은, 무언가 달라질 듯 한 기대를 갖게 한다.
주인공의 삶은 힘겹다. 가장 친했던 친구의 죽음과 백치 아이와 아내의 텅 빈 위스키가 흘러내릴 듯한 붉은 눈동자. 그래서 그는 작은 구덩이에 안착하며 죽음을 기다리지만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보기로 한다. 눈이 쌓인 산골마을에서도 그는 증조부의 동생이 웅크리고 있던 작은 구덩이에 몸을 누인다. 두 번의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도 그는 스스로를 추스르고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온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기대를 걸어본다. 아프리카의 저 거대한 회색 코끼리의 느긋한 걸음을 상상하며.
(“누구나 다 죽는 법이라네. 그리고 100년만 지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이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캐내려고 하지 않아.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죽는 게 제일이지.” 기묘한 방식으로 자살한 친구의 할머니가 남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