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가 약 5년간 500여 편에 달하는 단편소설을 발표한 후 비로소 작가로서 자신의 창작을 진지하게 고찰하게 된 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p88



단편소설의 엄청난 양에 일단 놀랐다. 책에서 언급한 단편들을 찾아서 읽어보고싶은 맘에 목록을 적어보았는데 거의 50여편에 달했다.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좀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읽었던 책들은 몇 권 보이지 않았다. 출간된 체호프의 책들을 살펴봐도 유명한 작품들이 반복적으로 수록되어 있을 뿐, 다양한 작품을 찾아서 읽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였다. 그런 중에 민음사 북클럽 가입 선물로 받았던 책 중에 체호프의 단편집 <베로치카> 가 있어서 꺼내들었다. 서재를 장식하고 있던 책이 드디어 책장 밖으로 나왔다.


<공포>와 표제작 <베로치카>만이 랑시에르의 책에서 언급된 단편이었고, 읽어보지 않은 작품이라 읽어보기로 했다. 먼저 만난 작품이 <공포>였다.


사소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해 인물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킬듯하지만 , 결국 그 누구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지나가고 만다. 이는 작품 속 "장면들"과 작은 에피소드들이 필연적인 인과 관계를 형성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채호프의 많은 단편소설은 이런 구성을 따른다.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별다는 이유없이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반대로 일이 일어날 듯한 순간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p106


랑시에르는 체호프의 소설의 이러한 소설의 특성을 얘기하면서 <공포>를 예로 들었다. 책에서 한 페이지 정도로 요약된 줄거리를 읽어서인지 금방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 나는 삶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두려워해요.-p 24 '공포' 중에서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려올 때, 그 소리의 정체를 알고나면 비로소 두근거림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어지는 것이 삶일진대 삶을 이해하지 못해 두려워한다면 그 공포는 죽어야지만 사라진다는 걸까? 자신에게 닥친 일을 이해못해 두렵다고 하면서도 문제가 되는 상황을 회피함으로써 문제를 덮어버리는 상황이 등장했는데, 최소한의 살아갈 수 있는 장치가(공포를 벗어나는 장치가)  회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자인 또 다른 등장인물은 친구의 아내와 선을 넘고는 자괴감을 느끼며 공포를 느꼈다. 막상 사랑을 고백하고 매달려오는 여자, 상황을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친구에 대한 공포가 더 현실적인 공포가 아니었을까싶다. 자괴감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날 나는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시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와 그의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 사람들 말로는 그들이 지금도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p41 '공포'중에서



이 마지막 문장을 보면서 랑시에르의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듯했다. 심각한 사건이 있었지만 화자는 떠나고 남은 이의 일상을 그냥 그대로 흘러가고. 세상의 모든 일이 인과관계가 분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이런 구성이 더 현실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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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3-19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호프가 다섯해 동안 쓴 단편소설이 500편이라니, 한해에 백편을 썼다는 거네요 백편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 정도 썼겠습니다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것도 있는가 봅니다 단편소설 나오면 다른 데 실린 소설이 들어가기도 하는 걸 보니...


희선

march 2025-03-25 22:07   좋아요 1 | URL
어떻게 저렇게 다작을 할 수 있을까요? 정말 대단하죠? 열심히 읽어도 얼마 못 읽을 것같아요.
 
형사 부스지마 최후의 사건 스토리콜렉터 97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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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키 요스케 시리즈로 처음 알게 된 나카야마 시치리였다. 부스지마라는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책을 만났다.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 <카인의 오만>에서 만났던 이누카이가 신입 형사로 등장하고 있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읽다보면 이런 재미도 있다. 그 외에도 정말 많은 작품들을 쓰고 있는 작가인데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도 좋아한다. 확실하게 각인된 일본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작가 형사 부스지마> 라는 책을 읽지는 않았는데, <형사 부스지마 최후의 사건>은 <작가 형사 부스지마> 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부스지마가 형사를 그만두고 작가가 되기 전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했다.부스지마는 비호감 말투와 기분 나쁜 웃음 소리, 안하무인으로 무장한 이제껏 본 적 없는 형사 캐릭터라고 했는데,지금까지 만났던 형사와는 결이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결이 다르다는 것이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5편의 단편은 각자 다른 이야기지만 하나로 모아졌다. 최종적인 빌런을 만나게 되는 과정에 있는 사건들이었다. 5개의 단편은 같은 맥락으로 느껴졌다. 첫 번째 단편은 자신의 무능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특히 아무 죄도 없이 하루 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어도 누군가의 분노의 발산을 위한 희생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설 속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어 두려운 맘도 들었다. 그런 범죄자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그 뒤에 있는 배후까지 접근하는 부스지마. 저런 형사가 필요하지싶다.  


어라 혹시 무서워졌어? 이제 와 그러면 안 되지. 사람을 죽이겠다고 결심한 순간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걸 각오했어야지.p62


이렇게 당연한 것을 범죄자는 알지 못한다. 두 번째,세 번째 단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화를 푸는걸까? 그 사람들도 정말 누구못지 않게 노력해서 원하는 것을 얻었던 사람일뿐일텐데. 확실하게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이에 대한 복수라면 측은지심이라도 들 수 있겠지만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었을 때는 용서받지 못할 각오를 해야할 것이다. 네 번째 단편에서는 치매 노인의 온전치 못한 기억을 이용해 정의의 사도나 되는듯 살인을 교사하는 무서운 사람도 등장을 하는데, 그 사람조차도 누군가에 의해 교사를 받은 사람이었다. 앞선 네 단편은 다섯 번째 이야기로 전부 수렴하고 최고의 빌런을 마주하게 된다. 사건 해결 과정에서 만난 부스지마의 수사방식은 통쾌했다. 



어떻게 저렇게도 남이 건드리지 않길 바라는 상처를 쑤시는 건지 아소는 감탄한다. 여느 형사라면 용의자의 죄악감이나 공포심을 자극하는 심문을 하지만 부스지마는 상대의 가면을 한 꺼풀씩 벗기는데 주력한다. -p 260



최고의 빌런을 법적으로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행한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을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부스지마는 지금까지 봐왔던 캐릭터랑은 분명 차별화되어 있었다. 호불호가 있겠지만 나는 '호'. '작가 형사 부스지마'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알게 되었는데, 작가로서 부스지마는 어떤 활약을 펼칠지 <작가 형사 부스지마>도 읽어봐야겠다. 인터넷에 대한 폐해, 공감되는 부분이라 옮겨둔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할 것같다. 


세계가 이어지고 개인이 자유롭게 발신할 수 있다는 게 인터넷이 근사한 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건 악의와 열등감의 증폭 장치이기도 하거든, 적절한 문해력과 자제심이 없으면 화상을 입어.-p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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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3-14 0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사는 안 해도 작가를 하면서 형사를 도와주기도 하더군요 부스지마가 작가가 되어서 그런지 작가나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나 출판 일을 말하기도 해요


희선

march 2025-03-17 23:54   좋아요 1 | URL
희선님 읽으셨군요. 나카야마 시치리는 희선님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참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아요.
 
인생이 묻고, 톨스토이가 답하다 - 내 인생에 빛이 되어준 톨스토이의 말
이희인 지음 / 홍익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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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작품으로 배우는 인생의 지혜. 톨스토이의 작품세계와 인생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알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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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모차르트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7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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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탐정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는 친구가 선물로 보내준 <언제까지나 쇼팽>으로 처음 만났다. 책이지만 음악이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할 거라는 친구의 말 그대로 읽는 내내 음악을 듣고 있는듯했다. 한 권씩 읽어가면서 매력에 빠졌고 기다리는 시리즈가 되었다.  <이별은 모차르트>의 출간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미사키가 이번에는 어떻게 등장을 하고 어떤 활약을 보여줄 지 기대가 되었다. 미사키는 후반부에 나타나 생각보다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임팩트는 강했다. 

<언제까지나 쇼팽>에 등장했던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 사카키바 류헤이가 중심인물이었다. 6년 전 쇼팽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 그의 인지도는 높아졌다. 엄마 유카, 매니저인 톰, 레슨을 맡고있는 시오타 세 명이 류헤이를 든든하게 받혀주고 있었다. 톰은 인지도를 더 높이고, 류헤이의 실력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전국 투어를 기획했다. 전국 투어를 앞두고 데라시타라는 프리랜서 기자와의 인터뷰를 하게되는데, 테라시타는 연예계에서 독과 같은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거짓 뉴스를 퍼뜨리고 소속사에게 돈을 갈취하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악랄한 수법에 목숨을 버리는 연예인도 있었다. 류헤이가 앞이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척 연기를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첫 공연에서 아쉬운 연주를 보이고 말았다. 그런 테라시타가 류헤이의 연습실에서 총상을 입고 죽은 시체로 발견되면서 류헤이는 살인 용의자가 되고 수사를 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류헤이는 6년 전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미사키를 떠올리고 도움을 요청했고, 미사키는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요즘 특히 거짓정보에 휘둘리는 많은 상황들을 마주하고 있다.  테라시타같은 사람의 말 한 마디, 조작된 정보를 그냥 믿어버리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을텐데, 우리는 그 속에서 단단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듯도 하다. 

사고 정지라고 하지.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깊이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거든. 그런 사람들은 누군가가 말한, 자못 있을 법한 근거 없는 헛소문에 편승해 떠들어대는 것이 편하고 마치 옳은 일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기 때문이야. 그들은 류헤이 군보다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야.-p83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음악에 관한 소설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전국투어 연주곡이 모차르트였다.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23번 A장조 K.488 을 연주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음악을 같이 들어봤다. 귀에 익은 곡이었다.클래식에 가까이하고자 노력하는 정도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류헤이가 곡을 해석하는 모습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클래식 애호가라면 이 부분을 어떻게 읽어낼까라는 궁금증도 들었다. 이 시리즈의 재미있는 점은 음악가를 제목에 내세워 스토리를 구성한다는 것인데, 다음 편으로 <지금이야말로 거슈인>(2024년 일본 출간),<전해줘 차이콥스키>(예고) 를 만날 수 있다니 기대가 된다.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라고 한 것에 비해 미사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범하지만 겸손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냉철하고, 참 매력적인 캐릭터임을 한 번 더 각인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미사키의 매력을 엿볼 수 있는 대화 한 부분을 소개한다면, 

"미사키 씨는 질투 같은 거 안 하세요? "
"질투의 다른 이름은 동경입니다. 동경하는 걸 싫어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남을 저주한다고 제게 이득 되는 건 하나도 없고요."-p275~276


류헤이가 앞이 보이지 않는 피아니스트이다보니 장애에 대한 관점들도 종종 등장하는데, 이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얻은 무언가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더 큰 것이 보통 사람 아닐까? 또한 하나를 잃는다고 다른 하나가 반드시 주어지지는 않으니까. 류헤이는 하나를 얻었고,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기쁨이 되었다. 음악과 함께하는 류헤이는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다.

신은 류헤이에게 빛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풍부한 소리를 내려줬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저 평면적으로만 들리는 소리도 류헤이의 귀에는 입체적인 울림으로 들린다. 명확한 의미를 지닌 음소들이 겹겹이 쌓여 자아내는 음색을 들을 수 있다. 무언가를 잃어도 다른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세상은 만화경과 같아서 한 가지 면만 존재하지 않는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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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3-13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야기에는 미사키가 좀 나중에 나왔네요 언제 나오는 거야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거슈인》은 이번 해에 문고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가끔 책이 나왔는지 찾아봐야 하지만, 잊어버리는군요

실제 속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네요 그런 걸 잘 알아봐야 할 텐데...


희선
 
죽음을 걷는 여자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6
메리 피트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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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작가. 클래식 추리소설이라는 글에 끌렸다. 긴장감은 그다지 없었지만 마지막 한 방은 있었던 소설이었다. 이런 조용한 전개도 나쁘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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