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무대 위에 서면 취해요. 거기서는 나 자신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여기 고향에 온 날부터 걸었어요. 걸으면서 생각했어요. 그리고 내 마음과 영혼이 매일매일 강해져가고 있는 걸 느꼈어요. 이제 알 것 같아요. 코스챠, 작가든 배우든 간에 우리 일에는 내가 꿈꾸었던 어떤 것들도 명예나 성공이 문제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견디느냐, 어떻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을 갖고 버티느냐를 알아야 해요.- p175



열 다섯 살의 이마치가 화장실에 갇혀서 중얼거리고 있던 니나의 대사였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에 나오는 대사라고 했다. [안톤 체호프 탄생 150주년 -  희곡 전 작품 수록] 이라는 문구에 혹해서 구입해두고는 앞에 몇 편만 읽고 멈춘 상태라 <갈매기>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아직 읽지 못했다. 이 대사를 읽고 책을 펼쳐 들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 읽어나가려고 마음 먹고 있는데, 이렇게 만난 김에 희곡 <갈매기>도 한 번 읽어보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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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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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march님이 읽으셔야하는 책인데요.'라는 친구의 톡을 받았다. 제목을 보는 순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은 배우였고, 이름은 이마치였다. 마치는 3월에 태어났다고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이었다. (사실은 12월에 태어났는데 죽을지도 모르니 더 두고보자고 한 아이가 3월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블로그를 개설하려고 했을 때 닉네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생일이 3월에 있으니 march로 하자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지었는데, 20년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러니 이 책은 당연히 읽어야지. 


3월,march. 경쾌한 내용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시간, 기억, 망각,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알츠하이머를 앓게 된 이마치는 배우 생활을 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VR을 이용한 기억 재생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할까? 잊어가는 부분들을 채워나감으로써 알츠하이머를 늦추는 치료법이라고 해야할 것같다. 인간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행복한 일도 있지만,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도 있다. 저 밑 바닥에 묻어놓고 꺼내보고 싶지 않던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게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어머니의 학대,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 남편과의 불화, 딸과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 화려해 보이는 배우의 삶 이면에는 많은 아픔들이 있었다. 배우로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개인사는 결코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를 현재에 두고 과거의 자신을 대면해가는 과정을 아파트로 표현해나가는 과정이 인상 깊었다. 40층의 문이 열리면 40살의 나를, 7층의 문이 열리면 7살의 나를 만나는 설정. 이를 통해 우리는 이마치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고, 이마치는 잊고 있었던 또는 왜곡되어 있었던 과거의 자신을 만났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정말 그때 그랬을까? 그때의 나는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내 편한대로 포장을 하고 넘어가 버렸던 기억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마치는 치료의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래 전 자신을 만나면서 인간 이마치의 빈틈을 메워나가고 있었다. 잊어가는 과거를 붙들어 두려는 VR치료. 실현 가능한 이야기라면 어떤 선택이 현명할까?


VR치료 직후 자해와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경우는 흔했다. 치료가 트라우마를 유발시키느냐고 묻는다면 이마치는 물론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 좋은 기억만 남길 수 없으며, 무작위로 차오르는 기억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매번 새롭게 아귀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VR치료를 중단하는 알츠하이머 환자는 없었다. 자신이 누군지를 잊어버리는 쪽과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쪽. 어느 쪽이나 지옥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지옥을 선택했다. -p239 


이마치는 무엇을 선택했을까? 책의 마지막 장은 서늘한 아픔, 이별의 방식, 존재의 가벼움, 마음의 평화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이었다. 한 편의 시와 같은 서정적인 글은 이 소설을 자꾸 자꾸 곱씹어보게 만들었다.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은 신체의 노화와는 달리 열심히 달려왔던 인생 전체를 도둑맞는 것일 듯하다.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를 옆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가슴 시리게 다가왔던 소설이었다. 작가의 <친밀한 이방인>이 쿠팡 플레이 시리즈 <안나>로 드라마 되었었다고 한다. 인간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가볍지 않은 드라마였기에 기억에 남아있는데, 원작자가 정한아 작가라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정한아 작가의 책, 계속 찾아 읽게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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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3-26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제목 보고 march 님 떠올랐어요 마치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소설에 나오다니... 지금, 아니 예전부터 나이가 많지 않아도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는 듯도 하더군요 환경 때문인 듯도 합니다 나이가 많든 많지 않든 기억이 사라지는 건 힘들 듯합니다 기억이 사라지는 사람은 그걸 모를지도... 그건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이겠네요 연예인은 겉은 화려해 보여도 실제 삶은 힘들겠습니다 사람은 나름대로 힘든 일이 있겠네요


희선

march 2025-03-26 23:16   좋아요 0 | URL
희선님도 그런 생각을 하셨군요. 너무 간단히,직관적으로 지었던 닉네임이었어요. ㅋㅋ
예전엔 잘 보이지 않았는데, 수명이 길어진 탓일까요? 주변 친구 부모님들 중에도 알츠하이머 걸리신 분들이 많아요. 무서워집니다. 무겁지만 재미있게 읽었어요.

2025-03-26 0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26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3월엔 내 생일이 있다.

친구와 아들로부터 책 선물을 받았고,

딸과 친구에게서 꽃 선물을 받았다.

꽃 향기가 가득해서 좋고, 거기다 책 향까지.

계속 3월이었으면 좋겠다.


친구 선물


아들 선물


도서관은 내 책 창고






여성의 날 딸이 보내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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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3-26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드님이 고른 책은 march 님이 좋아하실 듯하네요 체호프와 인상파라니... 꽃도 다 예쁘군요 봄에 만난 꽃은 더 반갑겠습니다 삼월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남은 삼월 즐겁게 편안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희선

march 2025-03-26 23:11   좋아요 0 | URL
제가 골라서 알려줬어요. ^^ 체호프 단편들 안 읽은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에요. 집 안에 꽃이 가득하니 화사해서 좋아요. 자꾸 보게 되네요. 세월 너무 빨라요. 담주면 4월이라니...희선님도 남은 3월 잘 보내세요.^^

2025-03-26 0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26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민선진 2025-03-26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향가득한 행복이 느껴집니다 ^^

march 2025-03-26 23:13   좋아요 0 | URL
정말 꽃이 있으니 기분이 좋아져요. 예쁜 것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웃게 되고~
오늘 나가니 벗꽃이 제법 많이 피었더라구요. 꽃 향기 가득한 봄,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래요.^^
 
















특히 운명과 조우했을 때 겁에 질리거나 마음속의 격한 동요에 굴복하는 인물들도 있다. [베로치카]에 등장하는 젊은 통계원 아그뇨프가 그런 사례다. 그 또한 순간의 부름과 마주하게 된다.-p67


한 사람은 도피하고, 다른 사람은 머물지만, 두 사람 다 각기 다른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때로 한순간에 결정된다. 이는 포드고린의 사례와 같으며 ,[공포]의 주인공이나 [베로치카]에 등장하는 젊은 통계원 아그네프에게도 적용된다. 동일한 이야기가 불과 며칠 만에 인생을 압축하여 그려질 수 있다. -p108


*같은 책인데도 아그뇨프,아그네프로 다르게 표기되고 있다.

소설 <베로치카>에서는 아그뇨프로 쓰여있었다. 


<베로치카>에서 주요 장면은 아그뇨프가 베로치카로부터 생각지도 않았던 사랑 고백을 듣는 장면이었다. 그 마음을 받아들여야 하나 잠시 고민하지만, 결국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공포>에서 화자가 느꼈던 감정과 <베로치카>에서 아그뇨프의 감정에는 차이가 있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갔다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내 감정을 타인에게 강하게 어필하지도 않고, 물러날 줄도 알고, 두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마무리가 깔끔했다. 복잡한 감정들이 오가긴 하지만 각자가 잘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맘에 든다. 랑시에르는 '두 사람 다 각기 다른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한다.'라고 했지만 오안벽하게 원하지 않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음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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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9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25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체호프에 관하여 - 먼 곳의 자유
자크 랑시에르 지음, 유재홍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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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길라잡이로 체호프의 단편을 읽어나가보려고 한다. 체호프 작품들에 대한 심도깊은 견해를 참고하면 작품을 읽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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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9 15: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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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5 22: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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