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으래비 한국희곡명작선 120
최기우 지음 / 평민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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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희곡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행복합니다. 다만, 주위에 희곡만을 놓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주절거릴만한 상대가 없다는 이유로 이러한 행복은 자유롭게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입니다.

최기우의 희곡 <정으래비>는 ‘사농공상도, 반상 귀천도 없는‘(20쪽) 대동계를 조직하고 ‘천하를 어찌 어느 한 사람의 것이라 하겠는가.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요, 천하의 천하이기 때문‘(28쪽)에 왕위의 세습을 부인했던 혁명적 사상가 정여립과 그가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서를 시작으로 1589년(선조 22년)에 동인계 인사들의 대대적인 처벌이 단행된 기축옥사를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희곡 <정으래비>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지만, 이야기의 전체적 흐름은 민중을 대변하는 걸인들의 장면들로 채워집니다. 최기우 작가의 색깔이랄까요. 그의 희곡들은 역사적인 소재가 많지만, 역사를 풀어가는 것은 역사적 인물이기보다는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잊혀진 인물, 즉 민초, 민중들이 그 중심을 이룬다는 특색이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내용, 탁월한 구성, 뛰어난 연극성... 뭐하나 나무랄 데 없는 작품의 완성도는 비단 희곡 <정으래비>에 국한하여 칭찬할 일이 아닙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지만, 최기우 작가의 대부분의 희곡들이 다 그러합니다. (아니, 제가 지금까지 접한 최기우 작가의 희곡들은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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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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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_키건
#맡겨진_소녀

98쪽.

100쪽도 채우지 못한 적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가슴을 찡하게 누르는 감동의 무게는 수 천 쪽의 백과사전보다 수십수백배는 더합니다.

웬만해서는 정동적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저는 최근 만난 클레어 키건의 두 소설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전에 소감을 올렸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그랬고, 이번의 <맡겨진 소녀>가 또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에 관심 이상의 마음이 불쑥 들었는데, <맡겨진 소녀>를 거치면서 그 마음은 도저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동경으로 자리매김하고 말았습니다.

클레어 키건은 백 년에 한 번 나오는 작가라는 평을 받을 만큼 뛰어난 작가로 불립니다. 1999년 첫 단편집인 <남극>을 필두로 24년간 단 4권의 책만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일궈낸 이력의 면면을 보자면, 첫 단편집 <남극>은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을 수상했고, 2007년 두 번째 작품 <푸른 들판을 걷다>는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출간된 가장 뛰어난 단편집에 수여하는 에지 힐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 세 번째 발표한 <맡겨진 소녀>는 데에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과 더불어 《타임스》에서 뽑은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 선정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발표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오웰상을 수상하고,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책표지 작가소개 내용을 참고)

소설 <맡겨진 소녀>는 책 제목에서처럼 한 소녀가 엄마의 먼 친척에게 맡겨져 어느 여름 한 때를 보내는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소녀는 작품에서 직중화자인 ‘나‘이며, 나를 맡게되는 먼 친척은 킨셀라 부부입니다. 소설은 이 셋이 그려내는 이야기입니다.

소설 <맡겨진 소녀>의 특징 중 하나를 꼽자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현재형 시제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이야기가 없지는 않지만, 작품은 시종일관 당장 눈 앞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합니다. 그래서 소설 <맡겨진 소녀>는 시간차 없이 그때그때 작중화자인 나, 소녀의 시선과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 참 매력적입니다.

...

작품 속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 살짝 소개합니다.

학교 지붕 교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선 복권을 팔고자 두 남자가 킨셀라 부부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찾아온 사람에게 킨셀라 아저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한테 애가 없다고 해서 다른 집 애들 머리에 비가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지.˝ (47쪽)

그 말이, 그 마음이 마냥 따듯합니다. 이 장면은 클레어 키건의 다른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펄롱이 비 오는 날 땔감을 주우러 나온 아이를 차에 태워 비를 피하게 하고 자신의 주머니에 든 동전을 쥐어주는 장면과 닮아있습니다. 작가의 작품 속 중심인물들이 하나같이 따듯한 심장을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닐 듯합니다. 작가가 바라는 어른의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짐작이지만, 그럴 것이라 믿게 됩니다.

...

📖 27쪽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 73쪽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
어느 날

내 마음에 온도를 높이고 싶을 때,
슬며시 어깨를 도닥여주는 작은 위로가 필요할 때,
혹시라도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을 때...

클레어 키건을 찾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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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주인은 천하에 있거늘 천하를 어찌 어느 한 사람의 것이라 하겠는가. 천하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천하는 만백성의 것이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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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도, 여자도, 농민도, 상민도, 노비도, 백정도 밥을 골고루 나눠 담아야 세상 살맛이 나지 않겠소. 공깃밥 한 그릇에 세상이 담겼으니, 밥이 평등할 때 세상도 평등한 것이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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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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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_키건
#Claire_Keegan
#이처럼_사소한_것들

진부한 표현이겠지만,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에 작은 조약돌이 첨벙 일으키는 파동과도 같은 소설입니다. 그러나 그 파동의 여파는 이처럼 사소하지만은 않습니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펄롱은 ‘아내 아일린과 딸 다섯과 함께 시내에 사‘(18쪽)는, 석탄•목재상입니다.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15쪽)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근면함으로 채워 넉넉하지는 않을지라도 장대비에 땔감을 주우러 나온 아이에게 ‘차를 세우고 태워주겠다 하고 주머니에 있던 잔돈을 좀 줄‘(20-21쪽) 여유 정도는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펄롱의 일상은 이렇다할 큰 변화가 없는 그저 그런 삶입니다. 그렇게 사소한 듯한 삶이 나름으로는 펄롱의 사소한 행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흔을 바라보는 펄롱에게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44쪽) 고민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펄롱에게 어느 날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수녀원으로 배달을 나간 펄롱은 수녀원에서 ‘바닥에 엎드려서 구식 라벤더 광택제 통을 놓고 걸레로 둥근 모양을 그리며 죽어라고 바닥을 문지르고 있‘(50-51쪽)는 아이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 중 한 여자아이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펄롱과 펄롱에게 닥친 하나의 사건이 맞물리면서 전개되는 이야기이며,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선택 앞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낸‘(책 표지) 소설입니다.

...

📖 119쪽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읺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

💭
이 소설이 주는 감동은 첫 번째 독서보다는 두 번째 독서에서 더욱 강렬했습니다. 나에게는 그랬습니다. 저는 ‘강렬‘이란 단어로 소설에서 받은 감동의 정도를 표현했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 어느 상황에서 받은 정서적 충격의 크기나 깊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 내 삶을 돌아보고 지금의 나를 살피도록 부추기면서 펄롱의 삶을 관통하는 가치적 판단과 선택에 대한 지극히 보통의 고뇌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과정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독서의 어느 도중이거나 후에 오는 것도 아니라 독서의 시작부터 마지막, 그리고 그 이후까지 이어지는 동시간적 시간, 그러니까 펄롱과 함께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소설에서는 ‘평범‘으로 번역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보통의 사람과 그 사람의 보통의 삶이 겪는 고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고뇌는 충동적이거나 극단적인, 또는 보통 이상이거나 이하의 것이 아닌 그야말로 나와 같은 보통이자 평범한 존재들이 그러하듯이 평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평범이 그 무엇보다도 고귀하게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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