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일에, 사랑에, 생활에, 모든 것에 무능했다. 눈 닿는 곳마다 나에게서 홱 돌아앉은 등뿐이었다. 그나마 상반기를 버틴 유일한 힘이었던, 생활도 재정비하고 하반기 회사 일도 미리미리 준비해두리라 벼르고 별렀던 여름휴가의 첫날 에어컨이 덜컥 고장 났을 땐 웃음밖에 안 나왔다. 하늘에 대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아 진짜! 나랑 장난해요? 네?

하지만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힘든 시기가 어느새 저 멀리 지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J의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 덕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내 것일 수 없다고 여겼던, 내가 소중하다는 감각과 나를 다시 이어준 한 끼의 식사. 어떤 음식은 기도다.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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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이 유독 생생하게 기억나는 음식들이 있다. (…)
요즘이야 건강에 한결 신경을 쓴 시리얼들이 차고 넘치지만 1980년대 말 당시 시중에 나오는 시리얼들을 두고 엄마가 진심으로 ‘영양이 풍부한 건강식’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지도 않다. 엄마도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야근하고 돌아온 다음 날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불 앞에서 무언가를 지지고 볶고 도마 앞에서 무언가를 썰고 다질 필요 없이 시리얼 광고들이 속삭이는 것처럼 간단하고 건강하게 한 끼를 만들어주는 음식이라고. 적어도 우유라도 먹일 수 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부디 시리얼이 당시의 늘 고단했던 엄마에게도 달콤한 아침잠 몇십 분과 잠시 트이는 숨통을 선물했기를 바란다. 엄마는 한 끼를 거저먹고, 나는 한 끼를 과자 먹고, 두 사람 모두에게 이로운 아침들이었기를.

나의 아침은 원두를 갈며 시작된다. 요즘은 친구들이 마침 비슷한 시기에 좋은 원두를 선물로 잔뜩 보내줘서 세 종류의 원두 중에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커피 호황기를 보내고 있다. 신맛이 나며 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시카고 커피 브랜드인 ‘인텔리젠시아(intelligentia)’의 원두를 고른다. 이름을 의역하면 ‘배우신 분’이라는 점이 약간 비웃김 포인트인데, 커피 맛에 살짝 섞여 있는 자두향이 입안에서 우엉향으로 돌변하는 것도 코믹하게 느껴지는 유쾌한 커피다. 도드라지는 맛 없이 부드럽고 묵직한 커피가 필요할 때는 코로나 발발 직전에 가까스로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온 유서 깊은(무려 1876년에 오픈한) ‘카페 첸트랄’의 원두를, 쓴맛이 그리울 때는 ‘일리’ 원두를 꺼낸다. 고른 원두를 핸드밀에 넣고 가만히 갈고 있으면 자갈 밟는 소리와 함께 하루의 바퀴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하다. 이렇게 커피 내려 마시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커피를 마시려고 하루를 시작하는 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하긴 오직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운동도 다시 시작했으니 전혀 일리 커피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에게 술이 삶을 장식해주는 형용사라면 커피는 삶을 움직여주는 동사다. 원두를 갈면 하루가 시작되고 페달을 밟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디카페인커피를 마시면 하루가 끝난다. 형용사는 소중하지만, 동사는 필요하다. 여행에서도 그랬다. 오로라를 보던 압도적인 순간이나 유빙에 둘러싸였던 꿈결 같은 순간에는 늘 한두 잔의 술이 함께하며 찬란한 빛을 더해주었지만, 그런 순간들 뒤에는 아침마다 마주하는 이국의 낯선 공기를 좀 더 편안하고 친밀한 무엇으로 바꾸어주며 차분하게 하루의 모험을 계획하게 만들었던 한두 잔의 커피가 있었다. 아무리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냈더라도 아침에 마실 맛있는 커피를 생각하면 그래도 내일을 다시 살아볼 조그만 기대가 생기고, 여전히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내다가도 저녁에 자전거를 탄 뒤 마실 끝내주는 커피를 생각하면 아주 망한 날만은 아닐 것 같은 조그만 위안이 생긴다. 오늘도 이렇게 무사히 원두를 갈고 있는 한, 나는 괜찮을 것이다.nn 그리하여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신 앞에서, 술과 커피 중 하나라는 일생일대의 질문 앞에서, 나의 대답은 역시 커피가 된다. 물론 비장의 카드 하나를 계산에 넣어두기는 했다. 위스키를 베이스로 넣는 ‘아이리시커피’. 제아무리 신이라도 아이리시커피가 커피가 아니라고 우기지는 못할 것이고, 나는 위스키를 아주 듬뿍 넣을 것이다.

맞다. 모름지기 하지에는 맥주다. 조금 다른 식으로 접근해봐도 그렇다. 예부터 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하짓날은 감자 캐 먹는 날이고 ‘보리환갑’이다"라는(약간 비문이 아닌가 싶은) 옛말이 전해져올 정도로, 하지는 질 좋은 감자와 보리를 수확할 수 있는 적기이자, 수확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져왔다. 하지가 지나면 보리 알이 잘 영글지 않아 보리가 마르고 감자 싹이 죽어서 그렇다는데, 그래서 ‘보리환갑’과 짝을 맞춰 ‘감자환갑’이라고도 부른다. 그 시대에 비해 부쩍 늘어난 인간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지금은 ‘보리팔순’ ‘감자백세’ 정도로 불러야 마땅하겠지만, 어쨌거나 하지는 보리와 감자의 환갑잔칫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짓날 보리로 만든 맥주를 마시는 건 하지를 기념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맥주 마실 명분이 이렇게 뚜렷하면서 미풍양속적이기까지 한 날이 또 있을까.

이렇게 하지 즈음에 수확을 끝낸 하지보리와 하지감자는 ‘햇보리’ ‘햇감자’라는 이름으로 6월 말부터 세상에 나와 여름 내내 제철음식으로서 한자리를 톡톡히 차지한다. 가장 게으른 방식으로 가장 부지런하게 제철음식을 챙겨 먹는 나에게 여름은 수제맥주와 가마솥감자칩의 계절이다. 하다못해 시중의 공장제 봉지 감자칩들도 6월의 토실토실한 하지감자로 만든 늦여름‒가을 제품이 유난히 더 맛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봉지 감자칩에도 미세하게나마 제철이 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nn 그래서 더욱 나는 감히 맥주와 감자칩, 줄여서 ‘감칩맥’도 여름 제철음식이라고 우겨보고 싶다. 단지 ‘여름이니까 → 시원한 맥주!’ ‘맥주에는 → 짭짤한 감자칩!’ 이런 단순한 도식을 넘어, 영양학적 풍속적 미각적인 가치를 획득한 제철음식이라고. 곧 죽어도 감자를 삶아 먹거나 식당에 들러 감자전을 사 먹을 부지런은 없지만 와중에 감자칩을 주문해 먹는 부지런은 있는, 보리밥을 지어 먹거나 보리차를 끓여 먹을 부지런은 없지만 와중에 맥주를 골라 마시는 부지런은 있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제철음식. 꼭 채소나 과일이나 생선이어야만 제철음식이란 법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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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 전면개정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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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 36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민간인이 되어서 신입사원이 되었던 시절에 읽었던 책 중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있었다. 작가 유시민의 유창한 입담으로 20세기에 일어난 굵직한 사건의 전후 맥락을 짚어서 요약해 준 덕분에 완독하고 충만한 느낌에 빠져서 세계사 공부에 게을렀다.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 게으름을 털어내는 데 개정판이 다시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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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면 좀 안 되나요. 어차피 여행지에서 몇 달 살 것도 아니라면 누구도 수박 속까지 다 파먹을 수 없는데, 그냥 수박 겉만 즐겁게 핥다가 오면 안 되나. SNS를 잠시 끊고 고즈넉한 여행을 즐기는 즐거움과 그때그때 SNS 친구들과 여행의 순간을 활발히 나누는 건 엄연히 다른 종류의 즐거움인데. 뭣도 모른 채 그냥 가보고 싶던 곳에서 먹고 싶은 거 먹고 나오면 안 되나. 그래서 맛이 없었다면 그건 실패한 경험인가. 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정원 사진을 찍고,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미술관에 가면 좀 어떤가. "유명한 스폿에서 사진 한 장씩 박고 가는 게 여행의 전부"면 또 어떤가. 타인이 더 나은 경험을 해보길 진심으로 바라서 하는 조언과, 무작정 던져놓는 냉소나 멸시는 분명 다르다. ‘세상의 빛을 보자’는 게 ‘관광(觀光)’이라면, 경험에 위계를 세워 서로를 압박하기보다는, 서로가 지닌 나와 다른 빛에도 눈을 떠보면 좋지 않을까.

알렉상드르 마트롱이 쓴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와 더불어 존재하는지도 잘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눈앞에 열어줬다. (…)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 안겨준 일차원적인 변화에 한해서만 말하자면, 그것은 다소 뜬금없게도,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게 만든 점이다(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이런 식으로 발현되다니).

T와 서재를 합친 7년 전만 해도 철학서가 가득 꽂혀 있는 T의 책장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기호와 기표들의 저장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노자를 만나면서 그 300여 권의 책들이 한꺼번에 생생히 살아나 나의 삶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집에 있는 그 모든 책이, 도서관이나 서점에 갔을 때 얼씬대지 않던 코너의 책들이 내가 읽을 책들로 바뀌면서 인생이 급격하게 유한해졌다. 이 책들은 저마다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품고 있을까. 이 중 몇 퍼센트나 읽을 수 있을까. 마트롱의 책을 몇 번이나 더 읽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에 가능한 한 오래도록, 꼿꼿하게 머물고 싶어졌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 것을 먹고 눈을 보호하며 나를 잘 돌보고 싶어졌다. 어떤 좋은 책들은 사람을 오래 살고 싶게 만든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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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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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표시로 밑줄을 그었다.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제목을 따라 한 셈이다. 완독 후 밑줄을 그은 쪽을 다시 들추어 보다 보니 서문부터 쪽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어서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런 줄도 모르고 책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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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24 20: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 평이 다 좋군요. 저도 밑줄 긋고 싶어서 찜 ~ 합니다 *^^*

오거서 2021-11-24 20:36   좋아요 5 | URL
미니님의 평이 어떠할지 궁금하군요 ^^;

scott 2021-11-25 00:33   좋아요 2 | URL
미니님 분명!
영상으로 소개 해주실 것 같습니돠! ^^

미미 2021-11-24 20: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반갑네요!! 오거서님과 같은 책을 비슷한 때 읽었나봐요ㅎㅎ 눈은 이제 좀 어떠세요? 저는 눈에 예민해서 지난번 글 보고 놀라고 마음아팠는데 댓글이 많아서 저까지 보태면 힘드실까봐 달지도 못했어요😭

오거서 2021-11-24 21:00   좋아요 5 | URL
미미님 마음씀이 그대로 전해지고요… 감사하다는 말씀으로 우선 보답하려 해요. 양쪽 눈의 시력 차이가 생겨서 지난 주까지 힘들었지만 이제는 많이 회복했어요. scott님의 조언대로 audible 책으로 듣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전자책과는 다른 신세계더라구요. 미미님과 scott님 등 많은 이웃분들의 도움으로 저의 독서 지평이 넓어지고 있음을 살짝 고백합니다. 감사 드립니다! ^^

페넬로페 2021-11-24 21: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은 밑줄 그은 것만으로도 책 한 권을 다시 읽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책이 그럴것 같습니다.
눈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반가워요^^
저도 북플 친구들 덕분에 신세계를 만나는 중이예요**

책읽는나무 2021-11-24 22: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얼마나 좋으셨음 서문부터 밑줄 긋기라뇨???^^
정말 다들 평이 너무 좋은 책이네요.
시력이 많이 회복되셨다니 다행입니다^^

scott 2021-11-25 00: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몇년 전에 출간 된 림태주 작가의 <관계의 물리학>이라는 책도 좋았습니다.
[우리는 동사의 시대에 태어났는데 어느새 명사의 시대가 삶을 접수해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공부가 배움을 잃고, 만남이 사귐을 잃고, 노동이 땀을 잃고, 삶이 쓸모를 잃어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발효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오거서님의 독서 발효의 시간은
당분간 오!더블로 ^ㅅ^

페크pek0501 2021-11-25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간이군요. 저도 읽은 책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어서 중고서점에 팔 수가 없답니다.
밑줄을 긋지 않으면 읽은 책 같지 않아서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