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러면 좀 안 되나요. 어차피 여행지에서 몇 달 살 것도 아니라면 누구도 수박 속까지 다 파먹을 수 없는데, 그냥 수박 겉만 즐겁게 핥다가 오면 안 되나. SNS를 잠시 끊고 고즈넉한 여행을 즐기는 즐거움과 그때그때 SNS 친구들과 여행의 순간을 활발히 나누는 건 엄연히 다른 종류의 즐거움인데. 뭣도 모른 채 그냥 가보고 싶던 곳에서 먹고 싶은 거 먹고 나오면 안 되나. 그래서 맛이 없었다면 그건 실패한 경험인가. 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정원 사진을 찍고,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미술관에 가면 좀 어떤가. "유명한 스폿에서 사진 한 장씩 박고 가는 게 여행의 전부"면 또 어떤가. 타인이 더 나은 경험을 해보길 진심으로 바라서 하는 조언과, 무작정 던져놓는 냉소나 멸시는 분명 다르다. ‘세상의 빛을 보자’는 게 ‘관광(觀光)’이라면, 경험에 위계를 세워 서로를 압박하기보다는, 서로가 지닌 나와 다른 빛에도 눈을 떠보면 좋지 않을까.
알렉상드르 마트롱이 쓴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와 더불어 존재하는지도 잘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눈앞에 열어줬다. (…)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 안겨준 일차원적인 변화에 한해서만 말하자면, 그것은 다소 뜬금없게도,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게 만든 점이다(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이런 식으로 발현되다니).
T와 서재를 합친 7년 전만 해도 철학서가 가득 꽂혀 있는 T의 책장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기호와 기표들의 저장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노자를 만나면서 그 300여 권의 책들이 한꺼번에 생생히 살아나 나의 삶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집에 있는 그 모든 책이, 도서관이나 서점에 갔을 때 얼씬대지 않던 코너의 책들이 내가 읽을 책들로 바뀌면서 인생이 급격하게 유한해졌다. 이 책들은 저마다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품고 있을까. 이 중 몇 퍼센트나 읽을 수 있을까. 마트롱의 책을 몇 번이나 더 읽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에 가능한 한 오래도록, 꼿꼿하게 머물고 싶어졌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 것을 먹고 눈을 보호하며 나를 잘 돌보고 싶어졌다. 어떤 좋은 책들은 사람을 오래 살고 싶게 만든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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