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 36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민간인이 되어서 신입사원이 되었던 시절에 읽었던 책 중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있었다. 작가 유시민의 유창한 입담으로 20세기에 일어난 굵직한 사건의 전후 맥락을 짚어서 요약해 준 덕분에 완독하고 충만한 느낌에 빠져서 세계사 공부에 게을렀다.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 게으름을 털어내는 데 개정판이 다시 도움이 되었다.
아니, 그러면 좀 안 되나요. 어차피 여행지에서 몇 달 살 것도 아니라면 누구도 수박 속까지 다 파먹을 수 없는데, 그냥 수박 겉만 즐겁게 핥다가 오면 안 되나. SNS를 잠시 끊고 고즈넉한 여행을 즐기는 즐거움과 그때그때 SNS 친구들과 여행의 순간을 활발히 나누는 건 엄연히 다른 종류의 즐거움인데. 뭣도 모른 채 그냥 가보고 싶던 곳에서 먹고 싶은 거 먹고 나오면 안 되나. 그래서 맛이 없었다면 그건 실패한 경험인가. 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정원 사진을 찍고,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미술관에 가면 좀 어떤가. "유명한 스폿에서 사진 한 장씩 박고 가는 게 여행의 전부"면 또 어떤가. 타인이 더 나은 경험을 해보길 진심으로 바라서 하는 조언과, 무작정 던져놓는 냉소나 멸시는 분명 다르다. ‘세상의 빛을 보자’는 게 ‘관광(觀光)’이라면, 경험에 위계를 세워 서로를 압박하기보다는, 서로가 지닌 나와 다른 빛에도 눈을 떠보면 좋지 않을까.
알렉상드르 마트롱이 쓴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와 더불어 존재하는지도 잘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눈앞에 열어줬다. (…)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 안겨준 일차원적인 변화에 한해서만 말하자면, 그것은 다소 뜬금없게도,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게 만든 점이다(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이런 식으로 발현되다니). T와 서재를 합친 7년 전만 해도 철학서가 가득 꽂혀 있는 T의 책장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기호와 기표들의 저장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노자를 만나면서 그 300여 권의 책들이 한꺼번에 생생히 살아나 나의 삶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집에 있는 그 모든 책이, 도서관이나 서점에 갔을 때 얼씬대지 않던 코너의 책들이 내가 읽을 책들로 바뀌면서 인생이 급격하게 유한해졌다. 이 책들은 저마다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품고 있을까. 이 중 몇 퍼센트나 읽을 수 있을까. 마트롱의 책을 몇 번이나 더 읽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에 가능한 한 오래도록, 꼿꼿하게 머물고 싶어졌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 것을 먹고 눈을 보호하며 나를 잘 돌보고 싶어졌다. 어떤 좋은 책들은 사람을 오래 살고 싶게 만든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표시로 밑줄을 그었다.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제목을 따라 한 셈이다. 완독 후 밑줄을 그은 쪽을 다시 들추어 보다 보니 서문부터 쪽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어서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런 줄도 모르고 책에 빠져 있었다.
먼저 읽은 독자들이 고정관념을 깬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소설 내용이 궁금했다. 책을 읽고나니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스포 하지 않으려니 그저 웃음만 나온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냐…) 기존 추리소설의 고정관념을 깼다는 말이 틀리지 않지만 과연 추리소설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작곡가는 하나의 음 다음에 어떤 음을 적어 넣을지 결정하는 일을 한다. 청자는 첫 음으로부터 뻗어나가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겨 느끼고 즐긴다. 창작과 감상, 그 자체의 완결성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
음악을 듣는다는 건 현실과 떨어진 어느 세계를 여행하는 일과 비슷하다. 그런 세계 중에서도 감정적으로 풍부한 재미있는 것이 많은 세계라면 처음 마주했을 때와 두 번 세 번 다시 찾았을 때의 감흥이 다를 것이다. 물론 어떤 마음가짐으로 여행하느냐에 따라서도 보이는 풍경은 바뀐다. 누구와 함께하는지, 어떤 차림으로 어떤 표정을 지은 채 어떤 기분으로 여행하느냐도 마찬가지다. 그 조건을 모두 따져본다면 음악은 도무지 같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그 오래된 음악을 오늘에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