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는 두려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낯선 여인의 키스7p)”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게 된 이유다. 체호프 단편집 낯선 여인의 키스책머리에 소개된 주인공 가후쿠의 말이다. 체호프의 희곡을 읽는 내내 겪었던 감정 안으로 이 대사가 들어왔다. 바냐삼촌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포스터를 꽉 채운 붉은 색 차, 화려한 수상 이력 중 '2021칸 영화제 각본상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색 사브(SAAB)를 운전하며,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해 나오는 아내 오토의 대사에 맞춰, 대사를 외우던 가후쿠의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오토와 가후쿠의 대사는 책 읽는 톤으로 일정하다. 도심과 해안 도로를 달리던 붉은 색 사브의 인상과 함께 청각의 이미지가 각인된다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후 이 차 안에 오래도록 머문다그녀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타고 다니고 있다. 시력의 문제가 생기면서 운전을 하지 못하게 된 그는 미사키를 드라이버로 고용하고, 뒷자리에 앉아 여전히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대사를 말한다. 가후쿠가 이 차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신차(新車)들에는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기 때문일까? 영화가 끝나고 표면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차가 상징하는 의미에 대한 생각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빨간 색 이미지와 함께.

 

그는 히로시마 연극제의 프로젝트로 기획된 <바냐삼촌>을 연출한다. 이 연극은 출발 단계부터 감동을 준다. 각국에서 모인 배우들이 자신의 언어로 연기하는 기획이다. 차 안에서 가후쿠가 했던 감정을 뺀 대사연습은 이들의 대본 리딩에도 적용된다. 감정을 제거하고 대사를 연습하는 반복이 오랜 시간 지속되자 연기자들에게서 불만이 제시되지만 가후쿠는 계속한다. 대사가 나에게 각인되고 내 것이 되고 그 대사가 나 자신을 끄집어내는 순간이 올 때까지. 아이러니하게도 가후쿠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연극의 기획 의도는 <바냐삼촌>이기에 더욱 빛이 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체호프의 희곡속 인물들은 각자의 아픔 속에 갇혀 서로의 말에 귀기울이지 못한다. <바냐삼촌>에 등장하는 인물들, 보이니츠키, 소냐, 옐레나 아드레예브나, 세레브랴코프, 아스트로프, 텔레긴 모두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고 고독하다. <바냐 삼촌>을 각국의 배우들이 자신의 언어로, 혹은 수어로 연기하는 무대, 배우들이 서로의 대사를 숙지하고 연기하는 모습은 같은 언어로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어적으로 전하고 있다

 

단지 아내의 성 상대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다카츠키에게서 다른 진실을 들은 후, 그는 당황한다. 그동안 붙잡고 살았던 것들의 무의미함을 느꼈을까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존재였음을 확인하는 것처럼 불행한 순간이 또 있을까? 다카츠키가 연극에서 하차하고 망설이던 그는 다카츠키 대신 주연을 맡는다.

 

날 어떻게 좀 해줘! , 맙소사……. 내 나이 마흔 일곱인데, 만약에 예순 살까지 산다면 아직도 13년이나 남았어! 너무 길어! 내가 어떻게 13년을 견디고 살 수 있겠나?(바냐 삼촌4막 중)”

그는 보이니츠키의 대사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신음한다. 가후쿠는 결국 자신을 끄집어내는 체호프에게 항복하는 중이다.

 

미사키는 현실의 가후쿠에서 소냐이다. 가후쿠의 차를 조용히 운전하며, 체호프의 대사를 듣던 미사키는 자신의 상처를 서서히 드러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서서히 알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은 불행한 어린 시절, 배우자의 외도, 그리고 상실들의 근원에 자리잡은 치유되지 못한 분노와 죄의식에 있음을 알게 된다. 미사키는 산사태로 혼자 살아남을 수 밖에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엄마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했었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사실은 아내를 혼내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가후쿠는 아내가 쓰러진 날 오래도록 차 안에 머물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가후쿠의 오래된 붉은 색 사브는 분노를 억누르고 진실을 회피하고, 과거와 죄의식에 묶여있는, 버리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는 공간이고 심연이다.

 

바냐 삼촌,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살아갈 거예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뎌낼 거예요.(바냐 삼촌4막 중)”

수어로 연기하는 소냐(이유나)의 뒤로 여러 언어로 자막이 올라가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의 희미한 얼굴들을 보며 저들은 자신의 아픔을 떠올리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미사키 홀로 운전하는 빨간색 사브가 강변도로를 달리는 엔딩은 가후쿠가 그 고통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추측하게 된다

나에게도 이 붉은 색 사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있지. 누구에게나 있지.

 

원작 소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드라이브 마이 카. 조금은 각색되었지만 영화를 보고 이 소설을 읽는 것도 좋았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소설들의 장면들, 감정들이 섞여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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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rjfnr 2024-11-13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 먼저보고 책을 접했는데요 ᆢᆢ즐겁게. 읽으시기를 바랄께요.♡♡

그레이스 2024-11-13 18:58   좋아요 0 | URL
다 읽었죠 ^^
하루키스럽다는 생각!
책 읽고 영화보신 분 중에 영화가 잘 안들어왔다는 분도 계시더라구요.
저는 책보다 영화 각색이 더 좋았던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11-13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이라 해서 봤는데,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계속 나오더라고요.
근데 중간에 멈춘 상태예요.
다 봐야 하는데 ㅎㅎ

그레이스 2024-11-13 18:46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그렇게 멈춘 영화가 줄서있지요^^
일단 제가 읽은 바냐 삼촌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었구요. 그래서 무대가 너무 좋았어요.

고양이라디오 2024-11-14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바냐 아저씨>를 읽었습니다. 역시 좋았습니다.

소냐(이유나)의 연기와 마지막 장면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리뷰 감사히 읽었습니다!

그레이스 2024-11-14 11:24   좋아요 1 | URL
같은 감동을 느끼셨다니 넘 반갑네요^^
수어로 연기하는 장면, 정적가운데 손이 부딪치는 소리... 넘 감동이었어요 ^^

고양이라디오 2024-11-14 13:55   좋아요 1 | URL
이유나씨 너무 좋았습니다. 수어 연기 감동이었습니다ㅜㅜ

전야제 2024-11-17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삿짐 정리를 하면서 틈틈이 읽다가 이제서야 댓글을 남기네요ㅠㅠ 주연인 니시지마 히데토시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언젠가 봐야지 하고 아껴두었던 영화인데, 마침 이사도 했겠다 이참에 보려구요ㅎㅎ 그레이스 님의 영화 평론에 반해버렸습니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담백하게 풀어내는 느낌 덕분에 영화 감상이 너무 기대되요. 저번에 부모님 댁 가서 파우스트 가져왔는데, 다음에는 체호프 희곡 전집을 가져와야겠어요. 그레이스님 덕분에 예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을 읽고 싶다는 열정이 마구 듭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4-11-18 10:22   좋아요 0 | URL
그렇게까지 읽어주셨다니 넘 감사합니다.
전야제님 댓글이 더 감동스럽네요.
즐겁고 보람있는 독서되시길 바랄께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