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에우리피데스를 알고 계십니까?”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주인공 와타나베가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말하고 있다. 환자는 여자 친구 미도리의 아버지다. 미도리와는 연극사 수업에서 만났다. 미도리가 병실을 맡기고 일을 하러 간 사이, 아버지가 눈을 뜨고, 와타나베는 자기소개를 한다. 참 어색한 만남이다. 이 어색함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소소한 신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환자에게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듯 보이는 이 이야기 가운데 그리스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가 등장한다. 왜 하필이면 에우리피데스일까? 에우리피데스가 즐겨 썼던 데우스 엑스 매키나에 관한 대목에서 작가의 의도를 눈치 채게 된다.

 

그의 연극의 특징은, 모든 사람들이 엉망으로 혼란에 빠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이 정의가 통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이 달성되는 일은 원리적으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카오스가 닥쳐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또 실로 간단하게 풀립니다. 마지막에 하느님이 나타나는 거죠. 그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모든 일이 제대로 해결됩니다. 이걸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부르고 있어요.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에는 노상 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오는데, 이 대목에 이르러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갈리고 있어요.

그러나 만일 현실 세계에 이러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다면 일은 편할 겁니다. 곤란하게 됐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됐다고 생각되면, 하느님이 위로부터 스르르 내려와서 모두 처리해 줄 테니까요. 정말 편할 겁니다. 우리는 대학에서 대체로 이러한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 노르웨이의 숲무라카미 하루키)“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의 멍한 얼굴에서 이해했는지 기색을 찾으며 지껄이는 이 이야기는 그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역시 혼돈에 빠져 옴짝달싹 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주인공이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소설의 마지막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말하던 이 병실 장면과 겹쳐진다.

 

하루끼가 와타나베를 통해 말한 것처럼 이런 장치가 우리 인생에도 있다면, 어떨까? 처음 대답은 없는 편을 선택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구원만이 해결책일 것 같은 인생의 순간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방이 꽉 막히고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 조금 살아보니, 속단과 장담은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시절의 몫이란 생각이 든다. 소포클레스가 누군가 이틀 또는 그보다 더 많은 날들을 미리 내다보려 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트라키스의 여인들943~945)”이라고 노래한 것처럼 장래는 알 수 없으니. 어찌 알겠는가 그처럼 나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바랄 혼돈가운데 빠지게 될지.

 

에우리피데스의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에는 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등장한다. 아울리스에서 신전에 제물로 바쳐진 이피게네이아는 아르테미스에 의해 타우리스족의 땅 타우리케로 옮겨지고 신전의 사제로 살고 있다. 어머니와 그의 정부를 죽이고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던 그녀의 남동생 오레스테스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훔쳐오라는 아폴론의 명령을 받는다. 친구 퓔라데스와 그 땅에 도착하고, 사로잡힌 그들은 이 신전의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한다. 제물의 축성을 담당한 이피게네이아와 오레스테스는 대화 도중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남매는 토아스 왕을 속여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가지고 이 땅을 탈출하기로 한다. 역풍으로 인해 배가 출발하지 못하고 생포될 위기에 처하지만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구해준다.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토아스의 추적을 멈추게 하고 그들을 떠나게 하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괴테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에서는 이 기계적 장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사라졌다. 대신 이피게니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그들을 살리려 하고, 그녀의 지혜와 설득의 힘이 구원으로 이끌고 간다. 그 땅의 통치자 토아스의 마음을 돌린다. 한때 낭만주의자였던 괴테다운 마무리란 생각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는 트로이를 향해 출항하려고 모여든 그리스 연합군의 함대가 바람이 불지 않아 항구에 발이 묶인 상황에서 시작한다. 이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칼카스의 예언이 아가멤논에게 전달되었고, 아가멤논은 그녀를 아울리스로 데려오라는 편지를 보낸 상황이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번복하지만, 메넬라오스가 막아서고, 아울리스에 모여있는 그리스 함대의 압박을 느낀다. 사실을 알고 클뤼타임네스트라가 반대하고, 이피게네이아 역시 아버지에게 애통해하며 간청한다. 아킬레우스 역시 그녀를 구해주겠다고 한다. 이피게네이아의 아버지의 호소에 다시 마음을 바꿔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신전을 향한다.

 

이전 신화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아 삼부작,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에 따르면 이피게네이아는 아울리스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져 죽든지, 구원되어 헬라스에서 불멸의 존재가 되든지, 구원되어 타우리오족의 땅에서 불멸의 존재가 된다. 에우리피데스는 그녀가 죽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라신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을 따르면서, 더 많은 등장인물, 더 많은 변수들을 추가했다. 17세기 사람들에게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아킬레우스와 이피게네이아의 사랑이 이 극을 이끌어가는 한 축이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에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아가멤논에게 존재만으로도 압박이 되었던 오디세우스가 직접 등장하여 트로이로의 출전을 재촉하는 그리스군의 입장을 대신한다. 라신은 여기에 이 극의 반전을 일으킬 인물 에뤼퓔레를 등장시킨다.

 

어쨌든 그리스 신화와 비극에 등장하는 아가멤논의 가정사를 보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의 분노를 산 아가멤논이 딸을 제물로 바치고, 그의 부인 클뤼타이메스트라는 트로이에서 돌아온 그를 죽이고, 딸 엘렉트라는 어머니와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내내 저주한다. 아들 오레스테스는 복수를 위해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한다. 트로이 전쟁은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동생 헬레네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비극 아니 참극이 가능할까?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어떤 일도 벌일 수 있고, 그 욕망으로 인해 이런 비극은 오늘날에도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신탁이나 명예, 미덕이라는 것들로 포장되었을 뿐이다.

 

이피게네이아는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의 지위를 시사하고 있다. 그 여성의 운명은 그 가정이 속해 있는 도시국가와 더 큰 세계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다. 여성뿐 아니라 한 개인을 지배하는 시대정신과 그 정신의 한계는 이피게네이아를 재해석한 라신과 괴테에게서도 볼 수 있다. 개인은 그 정신에 의해 때로 원하지 않는 삶으로 이끌려 간다. 에우리피데스의 이피게네이아도 라신의 에리퓔레도 자발적으로 희생을 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 선택에는 개인이 거스를 수 없는 큰 힘이 작용하고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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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8-21 16: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노르웨이 숲에 저런 대사가 있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한 주 잘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레이스 2023-08-21 16:59   좋아요 3 | URL
제 책이 오래되서 페이지 안 넣었어요.
거의 뒷부분에 있습니다.^^

페넬로페 2023-08-21 17: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부분이 저런 면이예요. 엉뚱하지만 진지한 모습요.
에우리피데스 읽으면 저도 꼭 저 부분 인용하려고 했어요.

그레이스 2023-08-21 17:42   좋아요 3 | URL
^^~♡
어제 상실의 시대 다시 읽었어요.
3번째네요
바쁜데....ㅠ
다시 읽으니 못봤던 것들이 많았네요.

미미 2023-08-21 20: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라신 희곡선>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아가멤논 <일리아드>에서 얄미웠는데 콩가루 집안이었군요?
상실의 시대 3독이라니 그레이스님~^^♡

그레이스 2023-11-08 13:11   좋아요 2 | URL
콩가루집안 ! ㅎㅎ
저도 일리아스에서 아가멤논 별로예요
여기서도 그렇긴한데,,, 그리스 연합군 총지휘관이라는 무게가 느껴지긴 해요.
암튼 갈등하는 그도 별로 맘에는 들지 않죠.
상실의 시대 읽을때마다 다르네요.
발췌때문에 도서관에서 노르웨이의 숲도 빌려봤으니...^^
그런 책이 있더라구요.
제게 자꾸 돌아오는 책이!

라신 희곡집도 좋았어요
잃시찾때문에 페드르(파이드라)도 봐야해요.

cyrus 2023-08-21 2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20대 중반에 문학사상사 판 <상실의 시대>를 읽었어요. 책 속에 에우리피데스를 언급한 대목이 있었군요. 신기해요.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권이거든요. 20대의 저는 에우리피데스를 잘 몰랐을 거고, 그가 쓴 비극을 읽을 줄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

그레이스 2023-08-21 21:0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책을 읽을수록 자꾸 고전쪽을 향해 가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