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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ㅣ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일반인을 위한 교양서적이라고 하지만, 일단 『이중나선』이라는 제목에서 전문분야의 아우라가 느껴져 선뜻 뽑아서 펼쳐보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몇 페이지를 읽다보면 왜 교양서적이라 했는지 알게 된다. 왓슨이 크릭과 함께 DNA구조를 밝혀내는 과정을 쓴 것인데, 그 과정이란 것이 과학적 지식이 아닌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계에 기울어져 있어서 흥미롭다. 잠깐씩 나오는 생물이나 화학 물리학적인 지식을 모르더라도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과학고 지망하는 중학생이나 과학에 흥미를 갖고 있는 고등학생을 위한 준비도서로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왓슨과 크릭과 모리스 윌킨스 세 사람은 1962년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았다. 1953년 <네이처>지에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여정의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그의 글쓰기 능력 뿐 아니라, “내가 보기에 프랜시스 크릭은 그리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다.(25p)”로 시작하는 왓슨의 글은 사람에 대한 탐구와 관계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한다. 과학 역시 인문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만난 35세의 크릭은 머리 좋고 통찰력 있는 사람이었으나, 아직 무명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떠들어 대기 좋아하고, 의견이 같지 않을 때는 그 즉시 직설적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독특한 성향의 사람이었다. 그의 이런 거침없는 성품 때문에 연구소의 동료들은 그와 거리를 두었고, 그가 재능을 보일 때마다 기분 상해 했다. 이런 성품에도 불구하고 왓슨이 크릭과 함께 한 것은 관심이 같았음을 알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했으며, 크릭이 자신의 성품이 약점임을 알고 고민하고 있는 인간적인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크릭이 물리학을 떠나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6년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라고 한다. 그 전에는 DNA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왓슨과 함께 이 DNA 연구를 위해 캐번디시에서 팀이 꾸려졌을 당시 그 구성원들 간에는 인간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영국 물리학자 모리스 윌킨스와 크릭이나 왓슨과는 그들을 지배하는 문화와 정신의 차이가 있었다. 이들 간의 성격 차이도 장애요소였다. 윌킨스의 조수 로잘린드 프랭클린과의 갈등 역시 연구의 중요한 변수였다. 윌킨스의 조수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이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결정학자인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X선 회절법으로 찍은 사진을 이 ‘DNA 나선 구조’ 가설을 입증하는 자료로 쓰이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이것은 그들의 연구에 있어 접근 방법과 신중함의 창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적수는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이다. 당시 50대의 폴링은 과학계에서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노벨상을 의식하고 이 DNA 연구에 속도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 폴링의 알파 나선과 그의 연구가 왓슨과 크릭을 의기소침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긍정적 자극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폴링 역시 경쟁의식 때문에 섣부른 발표를 하게 되었고, 그의 이론은 허점을 갖게 되었다.
한 가닥의 나선에서 이중나선 이론으로 발전하고 다시 그 3차원적인 나선 구조를 찾는 이들의 길은 몇 번의 희열과 절망의 순간들을 거친다. 이 이중 나선의 결합에 있어 뼈대의 위치가 바깥쪽에 위치하게 하고 이 두 나선구조를 이루는 뉴클레오티드의 염기, 퓨린 유도체(아데닌, 구아닌)와 피리미딘 유도체(티민, 시토신)의 차이를 발견함으로 결합의 문제 해결은 결과를 놓고 보면 간단함에도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은 몇 번의 실패와 좌절이 있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리고 모형을 만들고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들이 만들어 놓은 장난감 블록처럼 생긴 구조물은 오늘날 컴퓨터 3D프로그램으로 쉽게 구현할 수 있는 형태지만 당시만 해도 철제 모듈을 만들어서 조립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 조립된 모형의 이중나선을 이루는 뉴클레오티드의 연결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 이중나선은 왓슨과 크릭의 생물, 화학, 수학적 지식이 동원된 가설 모형이지만 이 구조를 증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윌킨스의 회절 사진이다. X선 회절법을 이용해 찍은 DNA사진은 왓슨과 크릭의 논문이 실리는 <네이처>지에 다른 논문으로 함께 실렸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윌킨스가 아니라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다. 의견 차이와 불화로 프랭클린이 팀에서 나가면서 자신의 자료를 모두 넘겨주었고, 윌킨스가 이 사진을 논문에 싣기 전 왓슨과 크릭에게 제공하면서 이들이 이중나선 연구와 결과에 확신을 하고 속도를 내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폴링에 대한 견제가 이런 절차의 무시를 가져왔다고 본다. 사실은 프랭클린의 업적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수여할 때 그녀가 아닌 윌킨스의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3902768?sid=105
파인만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우리는 자주 과학적 성과만 바라보지, 그 뒤에 있는 과학자들의 윤리와 인격, 성품이 그 성과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게 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이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경쟁을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았고, 신문에 보도된 기사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 경쟁은 모리스 윌킨스, 로잘린드 프랭클린, 라이너스 폴링, 프랜시스 크릭,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이 벌인 것이었다.(24p)"
왓슨이 크릭과 함께 하지 않았다면, 케임브리지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당시 라이너스 폴링이 이 DNA 연구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프랭클린이 이들과 불화하지 않았다면, 피터 폴링이나 휴 헉슬리와 같은 동료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왓슨이 학교의 권고대로 연구를 중단하고 박테리오 파지 연구에만 몰두했더라면 등등 수많은 변수들이 ‘이중나선’을 다른 연구실 다른 과학자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
그 수많은 변수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 그런 면에서 과학은 인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