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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허클베리 핀 -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깊이 읽기 ㅣ 주석 달린 시리즈 (현대문학) 1
마크 트웨인 지음, 마이클 패트릭 히언 엮음, 박중서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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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페이지에 지나칠 수 없는 경고문이 있다. 그런데 이 주석 달린 책은 버젓이, 사륙배판의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해설과 주석으로 채우고 있다. 각 페이지 마다 소설 본문보다 더 많은 주석이 달려 있다. 삽화, 신문기사, 당시 풍속, 작가노트, 비평가들의 해석 등. 이렇게 많은 의미들을 생산해내는 소설 맨 앞부분에 이런 경고문을 써놓은 트웨인의 유머가 더 빛난다. 어쨌든 이 정도 분량의 주석에 인용된 글을 쓴 사람들은 모두 총살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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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이야기하듯이 쓰려했다는게 작가의 말이지만, 독자는 이전까지는 문학에 사용되지 않던 흑인 노예들의 언어, 비속어들, 사투리들을 담아서 구현하려 했던 미국사회를 읽게 된다. 물론 번역본에서는 이러한 뜻을 알기 어렵지만, 이 주석책에서는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헤밍웨이는 “현대 미국 문학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했다. 1982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워싱턴 대학에서 강연하는 조건으로 『허클베리 핀』의 저자의 고향인 해니벌에 들를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미시시피 강이야말로 마크 트웨인이 지닌 힘의 원천(206p)”이라고 했다. 이 기념비적인 소설을, 나는 너무 일찍 가볍게 읽었었다.
아버지의 학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체벌, 복수 등 폭력이 당연시 되고 있는 사회다. 헉을 문명인으로 만들려는 시도와 훈육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권력을 보여주고 있다. 술주정뱅이 아빠의 폭력과 과부댁의 과보호로부터 도망가는 헉과 다른 곳으로 팔려갈 처지로부터 탈주하는 짐은 잭슨 섬에서 우연히 만나 미시시피 강을 따라 여행을 한다. 미성년자와 도망친 노예의 뗏목 여행,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 오히려 헉은 관찰자이자 화자가 되어 그들이 들르는 마을과 사람들을 서술하고 있다. 헉의 시선으로 당시 미국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몬태규와 캐플릿가를 연상하게 되는 오래된 ‘숙원(宿怨)’ 관계인 두 집안의 폭력을 목격한 헉은 뗏목으로 돌아오며 “나는 그놈의 숙원에서 결국 떠나올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다(509p)”고 말한다. 그리고 뗏목이 “얼마나 자유롭고 느긋하며 편안한 장소(509p)”인지를 역설한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뗏목 여행 중 만나게 된 자칭 왕 과 공작이라는 두 사기꾼과 동행은 그들의 여행을 더욱 위태한 모험가운데로 몰아간다. 그들에게 속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욕망을 보게 된다.
이 여행의 결말을 위해 톰 소여가 등장한다. 정말 우연한 조우다. 아마도 그래서 트웨인은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총살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고 웃었다. 짐에게 자유를 주고, 헉을 폭력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작가의 방법이다.
트웨인은 이 작품을 가리켜 자연의 건전한 '마음'(heart)과 잘못 훈련된 사회의 병든 ‘양심’(conscience)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다. 실제로 헉은 도망노예인 짐과 동행하는 것은 과부댁의 소유물을 훔친 배은망덕이라는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사회로부터 오염된 양심을 가짐으로 얼마나 인간다움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사회로부터 멀어지면서 헉은 그 절도행위 때문에 벌을 받는다면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결심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두 사람의 여행 중 백인 소년과 도망 노예라는 권력관계와 사고의 전복이 이루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물살에 휩쓸려 서로 헤어진 후, 걱정하고 있는 짐을 속인 헉에게 짐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느냐고? 내가 말해주고말고. 내가 애써 노를 젓느라고, 그리고 너를 찾느라고 힘이 들어서 잠이 들었을 때만 해도 내 가슴은 아주 찢어지는 것 같았는데, 그건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더 이상 내가, 그리고 이 뗏목이 어떻게 될지 도무지 몰랐으니까. 근데 내가 잠에서 깨어나보니 네가 돌아와 있고, 그것도 안 다치고 멀쩡하니 어찌나 감사한지 눈물이 다 날 정도였고, 여차하면 무릎 꿇고 너의 발에다가 입이라도 맞추고도 남을 마음이었지. 근데 네가 기껏 생각한 거는 어떻게 하면 거짓말로 이 짐 영감을 놀려먹을까 하는 궁리였다 이거지. 여기 위에 있는 건 ‘쓰레기’야. 뭐가 쓰레기인고 하니, 자기 친구의 머리에다가 흙을 끼얹어서 친구를 창피하게 만드는 놈들이 쓰레기란 말이야.(443p)”
헉은 “어찌나 민망한 마음이던지”라고 하지만, 통렬한 교훈을 얻는다. 노예도 감정과 존엄이 있는 존재임을. 헉은 움막으로 가서 짐에게 몸을 낮춘다.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진심 앞에서는 그 누구도 맥을 못 춘다. 짐이 마음을 드러냄으로서 헉은 짐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된다.
이 여행은 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여정이다. 노예해방이 선언되었어도 여전히 미국 아프리카인들은 그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헉에게는 생체권력으로부터의 탈주다. 자유를 향하는 존재를 억압하는 권력이 그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질서가 존재하는 사회 안에 반드시 정의가 구현된 것은 아니다.
여행은 끝이 났다.
보르헤스는 미시시피 강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에 자기 손가락을 담그고 말했다.
“자, 이제 여행은 끝났습니다.(2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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