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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오오카 쇼헤이는 소세키가 초기의 작품을 쓰기 시작한 시기(1905년)에는 ‘소설’도 ‘시’도 아닌 ‘문(文)’이라고 해야 할 장르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소설가 나쓰메 소세키』1988) 소세키는 초기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비슷한 글인 『런던탑』을 잡지 <호토토기스>에 사생문으로서 실었다.(『나쓰메 소세키 집성』 가라타니 고진)
사생문寫生文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글’이란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내부나 외부의 영향 없이 글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 ‘영도의 에크리튀르’라고 할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외에 『도련님』, 『풀베개』 등은 사생문의 요소가 있다.
소설로 읽기에는 플롯이 단순하다. 고양이가 그 주인과 주인을 찾아오는 미학자, 철학자, 과학자 등 지식인들의 대화와 삶을 관찰하고 평하다가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다. 이 고양이의 죽음도 연재를 마치기 위한 것이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허무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플롯으로 짠 그물은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오색빛깔의 물고기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작가가 건져 올린 문文이다.
감정을 빼고 묘사하고 있지만 그 문장 안에서 작가의 생각과 마음을 발견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생문이다. 고양이는 서재에서 낮잠을 자며 가끔을 읽다 만 책에 침을 흘리는 면학가인 체하는 주인을 엿본다. 위장이 약한 주제에 밥은 배터지게 먹고, 소화제를 먹고, 책장을 펼치고 두세 페이지 읽다가 졸고 책에 침을 흘리는 주인의 일과를 관찰한다. 작가 자신인 고양이가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인 구샤미를 바라보는 솔직한 표현에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진실이 담겨 있다. 연약한 몸에 갇힌 지식인, 허세 가득한 모습을 솔직하게 내보이고 있는 작가의 자기고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학자연(學者然)하면서 책을 몇 줄 읽지도 못해 졸고 있는 주인과 사람들을 비웃었다.
“나는 얌전히 앉아 세 사람의 이야기를 차례로 들었는데, 우습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인간이라는 족속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놀리고,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웃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에 기뻐하는 것 말고는 별 재주가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108p)
읽어가면서 고양이가 점점 주인과 동일시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항상 해학이 있다. 고양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쥐를 잡아 정체성을 증명하려다 주둥이와 꼬리를 물린다. 이 우스꽝스러운 사건과 주인의 낭패가 평행을 이룬다.
"주인은 얼마 전 철학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생각인 양 늘어놓았다.
“대단한 일이 벌어졌는걸. 어쩐지 야기 도쿠센 같은 소리를 하는군.”
야기 도쿠센이라는 이름을 듣고 주인은 화들짝 놀랐다."
(450p)
곰보자국의 얼굴을 거울로 들여다보는 주인을 보며 자신의 외모도 그리 훌륭하지 않음을 은근하게 밝히는 고양이의 말에 흐흐하며 웃게 된다.
"주인은 하나밖에 없는 거울을 아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울은 원래 좀 무서운 느낌이 드는 물건이다. 깊은 밤에 넓은 방에 촛불을 켜두고 혼자 거울을 들여다보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 집의 딸이 처음으로 내 얼굴에 거울을 들이 밀었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집 주위를 세 바퀴나 돌았을 정도다. 아무리 대낮이었다고 해도 주인처럼 이렇게 열심히 들여다본다면, 자기도 자신의 얼굴이 무서워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다지 기분 좋은 얼굴은 아니다.
잠시 후 주인은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 추레한 얼굴이군.”"
426p
시간이 갈수록 고양이 눈에 포착된 주인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두 비웃었지만 서재에 박혀 두문불출하던 혼자만의 시간에 생각은 깊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근대 일본 사회에서 할 일을 못 찾은 잉여 지식인들 구샤미와 미학자 메이테이, 철학자 야기 도쿠센, 이학자 간게쓰 이 네 사람의 허튼소리처럼 보이는 대화에는 골계가 있고 어리숙한 말에서 아픔을 찾는 귀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의 이해관계에 깊은 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네. 이러한 자각은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하루하루 예민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일거수일투족도 자연스럽게 할 수 없게 되지.…… 잠을 자도 나, 가는 곳마다 이 내가 따라다니니 인간의 언동이 인공적으로 곰상스러워질 뿐이지. 자신도 갑갑해지고 세상도 고통스러워질 뿐이야.…… 요즘 사람들은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를 생각하니까 자연히 탐정이나 도둑놈과 마찬가지로 자각심이 강해지지 않을 수 없네. 하루 종일 두리번두리번, 살금살금, 묘에 들어갈 때까지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심정이지. 문명의 저주야. 한심한 일이지.”
581~582p
주인의 반영인 고양이도 차츰 보는 눈이 달라져 간다. 고양이는 관찰로, 주인은 서재에서 통찰을 얻고 있다.
"무사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612p)
고양이는 이들의 대화에서 슬픔을 읽어낸다. 관찰은 끝났다.
신변잡기의 가벼운 대화는 세상을 두루 돌아 죽음을 주제로 마치고 그들은 흩어진다. 생을 논하다보면 죽음은 끼어들고 대화에 마침표를 찍는다. 고양이가 물독에 빠져 죽는 것처럼 죽음은 갑작스럽고 때로 어이없다. 생과 사는 고양이가 뛰어오르지 못한 12cm의 간격처럼 가깝다.
구샤미의 서재 모임은 나의 모임과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지식인 과잉생산시대 잉여 지식인들이 모여 만들어졌던 인문학 공동체도 생각이 난다. 함께 모여 공부하고 강의하고 글을 쓰며 성장한 그들이 경험했다던 예기치 않은 기쁨을 떠올린다. 어쨌든 사람은 사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