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클럽 - 그들은 늘 마지막에 온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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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히가시노 게이고>


 

 탐정의 추리는 완벽해야 한다. 적어도 독자가 읽었을 때 꼬투리를 잡을 만한 어설픔이 없어야 한다. 추리소설은 읽을 때는 술술 풀리지만, 직접 쓰는 작가라면 제법 까다로운 작업이다. 논리력과 사고력, 관찰력, 추리력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이 처음 쓰이면서 인기를 얻은 나라는 서양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 주로 이 세나라에서 추리소설의 거장이자 대표적 작가들이 탄생했고, 그들의 작품은 아직까지도 꾸준히 매니아팬을 두고 있다. 그런 추리형식의 소설이 동양에 상륙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동양에서의 추리소설은 역사가 짧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강대국이 되면서 추리소설 또한 일본인들에게 사랑 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속에서 많은 일본작가들이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추리형식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작품들이 누구나 추리해낼수 있고 뻔히 보이는 과정으로 이야기 전체가 흐지부지해지고 명확하지 않는 것들이 많았고, 너무 폭력적이거나 고어적인 것들까지 가세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일본의 작가들은 추리소설을 포기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일본의, 동양의 대표라고 할만한 추리작가들도 몇몇 배출해냈다. 안된다고 해서 집어쳐 버리면 건진 게 없으니 남을 게 없지만, 붙잡고 늘어지면 그 중에 몇명은 그럴듯한 작품을 써낸다. 다행히 그런 끈기 있는 작가가 일본에 있었으리라.

 

 어쨌든 그런 고로, 서양의 애드가 앨런 포우, 아가사 크리스티, 코난 도일 같은 세계적 명성은 아닐지라도 나름 괜찮은 명성을 지닌 일본 추리작가들이 탄생한다. 일본은 작가보다는 추리작품들이 더 대세라고 볼 수도 있을듯하다.

 

 그에 비해 한국은 순수문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리 커서 그런지 추리소설은 별로 설 자리도 없을 뿐더러 왠지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별로 그렇다할 추리작가가 없다.

 

 그럼에도 서양이나 일본의 추리소설을 읽는 한국인들은 많다. 한국은 순수문학 외의 장르소설, 추리소설, SF등에서 이름을 떨치는 작가가 없다. 한번쯤 이런 책을 낸다 하더라도 다음 작품은 다른 쪽으로 돌아서기 때문에 꾸준히 장르소설이 자리잡기가 힘들고 떳다가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하는 점이 많다.

 

 '히가시노 게이고' 그는 일본의 대표적 추리 작가 중에 한 사람이다. 나는 비록 탐정클럽을 통해 그의 작품을 처음 읽긴 했지만, '용의자 X의 헌신'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 추리작가는 '야마기 세이마루'인데 추리만화 작가이다.)

 

 [탐정클럽]에서 나오는 탐정들은 무척 깔끔하고 간결하며 뒷끝 없고 쿨하다. 그래서 그런지 책속의 문장 또한 그랬다. 탐정 위주가 아닌, 사건 위주로 이야기는 진행되며 탐정은 항상 VIP고객의 의뢰에 의해서 움직일때만 등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건의 후반부에 주로 등장하고 의뢰인이 요청한 일에 대한 조사를 위해 철저히 감시하고 관찰하고 증거들을 찾은 후 하나의 파일로 정리해서 이야기의 퍼즐을 맞추어낸 정황을 건네준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등장할때의 모습이다.

 

 탐정들이 활동하는 모습이나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어 이것을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나 싶긴 하지만, 추리란 원래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서 생각한다는 것이니 기존의 형식틀에서 보았던 탐정들이 사건 현장에 나타나 그 자리에서 바로 관찰하고 증거를 찾아 사실들을 맞추어 상황을 정리해내는 모습과는 조금 다를 뿐 추리소설이라고 할수 있다.

 

 아무도 탐정들이 조사하고 관찰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단지, 그들이 마지막에 의뢰인에게 건네주는 파일을 설명할 때 증거를 찾고 관찰하고 사실을 발견한 내용을 그들의 입으로부터 듣는 것 뿐이다. 글속 인물에게는 그렇지만, 글을 읽는 독자는 쏟아내는 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고.

 

 이렇듯 이야기의 중심은 사건이지 탐정이 아니다. 탐정은 의뢰인에 의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결과를 가져다준다. 이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감이란, 결코 가볍지 않다. 어쨌든 그들이 없다면 이야기는 그냥 사건 그 자체가 되버리는 것이니까. 추리라고 볼 수 없다.

 

 요즘 사람들 중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어떤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을 때 이런 탐정클럽을 알고만 있다면 사람들은 이들의 깔끔한 활동을 무척 선호할 것이다. 단, 돈이 있어야겠지만.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이 탐정클럽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이 생긴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이 클럽의 탐정을 어떻게 뽑을까. 누가 대빵 탐정일까. 이들의 신상이 전혀 나오지 않았으니, 오히려 미스테리한 이들의 정체가 더 궁금한 것이다.

 

 이런 궁금증을 염두에 둔 작가의 묘한 심리전일지는 모르겠지만 후속편으로 탐정클럽의 활약이 나온다면 아마 독자들은 이번에는 탐정클럽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진 않을까. 생각된다. 일단 독자인 나로썬 그런 셈이다.

 

 보통 다른 추리소설들은 독자로 하여금 머리를 굴려 미리 예상해보게끔 하는데, 이 책은 그런 것은 없었다. 가독성이 뛰어났고 쿨했으며, 재미도 있었지만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이 무엇일까. 글쎄, 거기에 대해선 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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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르, 뚜르 -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40
한윤섭 지음, 김진화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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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이들을 위주로 나온 책은 어떤 책일까? 궁금했다. 컴퓨터와 친한 아이들이 책을 보기나 할까 싶은데, 그런 중에 어른의 시선으로 지은 책은 더더욱 보지 않을 듯했다. 지루하고 가르치려드는 책보단 아무래도 재밌고 보여지는 식의 책을 읽지 않을까. 친구와의 우정을 쌓는 것보다 유학 가서 미래를 위한 스펙을 쌓는 일이 더 중요시되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책을 통해 우정의 중요성을 깨닫고 분단 문제와 조국에 대한 가치관과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게 가능이나 한 일일까 생각됐다.
 

 

 사실, 그런 건 열권의 책을 읽었다 하더라도 실전에서 몸과 마음으로 부딪히면서 겪는 것보다는 마음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책을 읽지도 않고, 경험적인 일도 없다면 그 어떤 사회적 이슈든 문제의식을 가지기가 힘들것이고 고로, 자신의 일 밖에는 관심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만큼 시야도 좁아질 것이고 마음도 좁아질 것이다.

 

 

 지금 사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고, 그런 사회 속에서의 개인들은 사회에 휩쓸려 극적인 이기주의적 행태가 만발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조차도 울타리가 되지 않고 오로지 구성원 개인들의 위주로 각자가 자기밖에 모르는 상태로 자라게끔 알게 모르게 의식이 주입되고 그들은 당연하게 그런 상태로 사회구성원이 된다.

 

 

 아이들도 자기만 알고 어른들도 자기만 안다. 모두 제각기 자기 이익에 맞게 모든 것을 생각하고 거기에서 구성원끼리 뜻이 맞지 않으면 다툼이 일어난다. 이런 다툼은 다소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최소로 마무리지어봤자 서로간의 단절이라는 사회적 문제점을 놓는다.

 

 

 모두가 자기만 알고 자기 이익에 맞게 자기만 편하게 살고, 자기만 알아달라고 할때, 이것이 집단이 된다면 무시무시한 것이다. 개별이기집단. 전혀 타인에 대한 손톱 만큼의 배려나 이해가 없다고 칠 때 사회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타인이 지옥이 될 것이다.

 

 

 사회적 이슈가 될만한 사건들을 훑어보면 이외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과 소통 결여로 인한 비극적인 결과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대에 혹여 가난해질까, 손해볼까 싶어 비참하기 싫어서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겉만 번지리리한 돈이나 명예를 가질 미래의 직업을 구할 스펙 쌓기에 바빠 아무리 뭐라고 해도 타인과의 감성적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들의 귀에는 먼나라 남의 일처럼 들려버리는 수가 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책을 읽고 우정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제로 친구를 사귀면서 가치와 의미를 되새긴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자신의 의견을 가지면서 고민해본다,고 하면 정말 그 아이는  멋진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1을 택할 때, 2를 택하는 용기와 2의 힘을 아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봉주르, 뚜르'에는 아버지의 일로 인해 프랑스의 파리에서 살다가 다시 '뚜르'라는 도시에 가서 살게 되는 봉주가 나온다. 봉주. 프랑스의 인삿말과 닮았다. 그만큼 왠지 프랑스에서의 봉주는 외국인이지만 낯설지가 않다. 이는 어쩌면 봉주에게는 의미 깊은 일을 겪게 될 도시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사온 첫날, 봉주는 자신의 방 책상에 비스듬하게 고개를 꺽어야만 보이는 '사랑하는 나의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 '살아야 한다' 라는 글귀를 보게 된다. 이 나라에서 보는 한글은 왠지 낯설었고, 글귀가 풍기는 뉘앙스 또한 왠지 심상치 않

다고 생각한 봉주는 이 글을 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글을 쓴 사람을 찾기 위해 홀로 추리도 해보고 집주인 할아버지에게도 묻지만, 그 방에 한국인이 머물 가능성이 없다는 대답만 듣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봉주는 새로운 학교에서 수업을 받게 되는데, 노랑머리로 염색한 일본인 아이 토시를 만난다. 토시는 왠지 모르게 퉁명스럽고 봉주의 인사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봉주와 토시의 첫만남은 이랬다. 하지만 토시는 봉주를 처음 보았을 때 분명 반가웠을 것이다. 단지 개인사정 때문에 봉주와 가까워지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토시는 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는 토시는 삼촌이 책상위에 남긴 글귀처럼 조국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도 힘든 나이였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위태로워질수도 있기 때문에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비밀을 간직해야 하고 마음껏 사귀고 싶은 친구와 사귈수도 없다. 봉주가 과제로 한국에 대한 발표를 할때 프랑스 아이가 묻는다. 넌 북한과 남한 중 어디에서 온 거냐고. 봉주는 자신있게 자신은 남한에서 왔다고 말하며 북한 사람들은 가난하고 상황이 못되기 때문에 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토시는 봉주의 말에 반박하며 얼마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실랑이를 한다. 딱딱하고 전투적인 현 분단상황에 대한 시선을 이 책에선 순수한 눈 그대로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 보듯이 볼 수 있게 한다.

 

 

 너무 깊게 들어가서 자칫 무거워지지 않고 봉주와 토시의 잔잔한 우정이 시작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감성적인 부분을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계속 만나진 못하지만 여운을 남긴 우정은 그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는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교훈을 주려는 목적은 전혀 없다고 썼다. 마침 아들이 태어났고 아이들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기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이 선사해주는 재미와 잔잔한 감동, 진정성은 아이들에게만 주는 것은 아닌듯 싶다.
 


 '친구가 되려는 순간,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라는 문장처럼 마지막은 여운을 남기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단지 또다른 토시 같은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단현실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또 얼마나 안타까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지 생각해보니 덤덤한 기분이었다.

 

 

 안녕.. 봉주와 토시는 비록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했지만 이 책 제목의 어감처럼 인사를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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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노벨상 이야기 - 천재와 바보의 경계에 선 괴짜들의 노벨상 살림청소년 융합형 수학 과학 총서 32
마크 에이브러햄스 지음, 이은진 옮김 / 살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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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할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일을 이룬 업적에 대해 상을 주는 곳이 있다. 이그노벨상이 바로 그런 상이다. 그런데 이 상을 받게 되면 좋아해야 할까?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답이 나온다. 이 상을 받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상을 받게 되었다면 당사자는 유쾌하지 않을 것이고, 이 상을 받는 것을 목표로 어떤 시도를 해서 드디어 받은 것이라면 당사자는 수상이 영광스러울 것이다.
 

 이런 시상식이 쓸 데 없이 시간 낭비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시상식의 풍자와 해학, 휴머니티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평한 것처럼 너무 웃겨서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재밌지는 않다.

 

 그치만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이런 생각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구나. 라는 색다른 놀라움은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그다지 성과 없어 뵈는 일에도 열정을 가지고 즐기는 사람도 있는데, 무력하고 열정이 식은 내 자신을 발견하고 나면 왠지 분발해야 겠다는 생각도 든다.

 

 또,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 시대가 팽배한 이때, 평소에 재미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 중 누군가에게 돈도 되지 않는 일에 뭘 그리 열정을 쏟느냐는 핀잔을 듣던 사람들은 자신이 즐기는 것 그 자체의 의미를 찾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책에 나온 역대 이그노벨상 수상자들의 업적을 보면 그다지 일상생활에 필요할만한 것들은 없다. 특히 경제 부문 수상자들을 보면 나라 경제에 불편을 끼치는 바람에 국가적, 자국민적 손실을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쁜 결과로 인해 상을 받은 이그노벨상 수상자들은 고의가 아니게 상을 받게 되었고, 하나같이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시상식에 나와 상을 받고 재밌는 퍼레이드로 관객과 함께 즐기는 사람은 이 상을 받기 위해 시도한 실험들과 분석을 해서 독특한 결과를 인정받은 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말 그대로 이런 이그~! 적인 요소를 재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나는 창조의 일탈이 때론 전례없는 창조의 길을 찾게 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떠올려보면 아인슈타인은 처음에 미친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 아이디어는 기대할 게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내의 방귀 냄새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던 남편이 냄새가 나지 않는 속옷을 만들었다는 이그노벨 수상자의 아이디어는 그럴듯하게 생각되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만일, 냄새도 안나고 방귀 소리도 나지 않는 속옷을 개발한다면 제법 인기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일반 속옷처럼 착용하기 거추장 스럽지 않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필터 같은게 달려 있어 표시 나는 속옷을 착용한 채 밖을 돌아다닐 순 없는 일이니까.

 

  그건 그렇고, 이 상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다 보니 '요네하라 마리'의 발명마니아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녀 또한 [발명 마니아]라는 책속에서 펼쳐놓은 재밌는 상상과 독특한 발상으로 이그노벨상을 수상하기에 전혀 손상이 없을 인물이었는데 말이다. 이그노벨상 또한 생존해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가?

 

 때론, 이런 책은 기분 전환의 매개체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재밌게 읽고 조금 생각해보고 다시 하던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왠지 모든 사물을 보고 느끼는 것이 전과 다르게 호기심이 가고 다른 시각으로 봄으로써 여태까지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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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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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는 언어의 힘을 믿는 작가이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언어는 힘인 동시에 한계이다 - 318p

 언어는 내면을 포괄할 수 없다. 내면은 말들이 머물지 못하는 곳으로 사람을 이끈다. 삶의 대부분이 어그러질 때, 단어들도 추락한다. 나는 내가 가졌던 단어들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내가 가지지 못했던 단어들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9p

 '마음짐승'은 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헤르타 뮐러의 내면이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무엇을 보았던가. 그녀의 글은 시적이고 문장은 짤막하다. 시는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던가. 그녀는 어그러지는 현실 속에서 보고 느낀 것을 글을 이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읽혀지는 게 아니라 보고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한 것이다.

 매개체가 언어였지만, 언어는 한 인간이 느낀것을 보여지는 것에 한계가 있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 본문중

 그래서 그녀의 글은 설명이 따로 없다. 그저 심상과 현실을 언어의 힘에 의지한 채 시간에 맡겨둔다. 이 글이 어떤 것에 대해 쓴 글이라는 사전지식 없이 읽다보면 읽는 자의 입장에서는 난해한 부분을 배제할 수 없다.

 '마음짐승'은 '했다', '들었다' 식으로 문장들이 끝나는 것이 많다. 그대로 전하는 방식이다. 작품 속에 주인공들의 감정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서술을 통해 충분히 그 감정을 짐작할 수 있다. 독자로부터 그 감정을 판단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문장은 주인공의 일인칭 시각에 의해 서술된다. 현실이라면, 한 개인이다. 한 개인과 그 개인을 둘러싼 인물들이  부당한 사회의 가운데에서 겪게 되는 폐해와 그 폐해로 인한 심적, 육체적 고통을 보여준다. 그녀의 글이 한국인에게는 남일 같지가 않을 것이다.

 한국 또한 독재치하의 세월을 보내면서 인권과 기본 자유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전체주의 사회속에서 공포와 불안에 떨며 글을 썼던 헤르타 뮐러는 정부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자 독일로 망명했다.

 그녀의 작품속에는 과거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녀의 작품과 함께 보면 좋을 작품이 조지오웰의 '1984'이다. 1984는 마음짐승과 비슷한 체재의 사회가 등장한다. 그안에 조금 소설적 요소가 가미된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루마니아에서 독일로 망명한 년도는 1987년도다. 작품 '1984'보다 3년 뒤이다. 그녀가 살던 년도는 오웰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게다가 조지오웰이 '1984'에서 전체주의적 지배 양상을 묘사하면서 자유를 박탈 당하는 비인간적인 현실을 비판하는 데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제도를 소재로 인용했는데, 뮐러는 그 시절 공산주의 시대였던 독일로 망명했다. 그래서 그녀는 독일로 탈출해서도 고통받았던 것이다. 나치 무장친위대로 징집되었었던 아버지, 나치의 몰락으로 변화와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던 그녀의 어린 시절은 자못 어두웠을 것이다.

 시대속에서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지녀야 했을 죄의식의 짐과 그 나라 국민이기 때문에 지배층으로부터 통제와 강압을 겪으며 공포에 떨어야 했던 과거를 그녀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가슴에서 글로 탄생했다. 그녀는 안정을 보장해주는 도피처를 찾지 못했다. 시대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개인이 겪게 되는 절망은 작품 전반에 우울적 요소를 부여한다. 희망을 선뜻 찾기 힘든 곳에서 그들은 여러 개인들 속에 있는 '마음짐승'을 확인한다. 그리고 공포의 쓰나미가 지나간 뒤에도 그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사람들에게 과제를 부여했다. 후에도 잊지 못하는 지난날의 아픔은 사람들의 기억과 무의식적 행동에서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휴우증을 만들어낸 것이다.
 
 구름 한 점마다 친구가 들어 있네
 공포로 가득한 세상에서 친구란 그런 거지
 어머니도 원래 그런 거라 하셨네
 친구야 아무렴 어떠니
 진지한 일에나 마음을 쓰렴

                           - 겔루 나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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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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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위를 나르는 ’날치’, 거북이 손을 닮았다하여 ’거북손’, 손암 선생께서 벌레’충’을 붙이신 ’군소’ 같은 낯선 해산물과 갈치, 숭어, 고등어, 홍합, 병어, 김, 고둥, 돌돔, 성게, 우럭까지. 거기에 더해 정확히 알 바 없는 ’인어’에 이르기까지 바다가 대한 ’자산어보’ 이야기가 냄새를 머금고 독자를 기다린다.

 

 어릴 때 외할머니가 고동을 손수 잡아 오셔서 익혀먹곤 했었다. 어릴 땐 고동이 제법 흔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고동이 비싸 배부르게 사먹기가 힘들게 되었다. 아마 그때 고동을 잘 먹어서 변비로 고생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속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날치의 나는 장면인데, 날치에 대해 네이버검색을 해보니, 정말 아가미가 날개같이 생겨서 물고기가 새로 진화하는 과정의 생명이 날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가에 산 적은 없지만 부산에 산 덕택이라 그런지 회와 생선은 내게 익숙하다.

 

 

 생선을 좋아해 한때는 생선킬러라는 별명도 있었지만, 또 희안하게 회는 그렇게 잘 먹지를 못한다. 먹기는 먹지만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정도라 해야 하나.

 

 

 또하나, 책속에서 발견한 의문점은 삼치를 저자는 무척 맛있는 생선이라 하였지만, 구워 먹어본 나의 식성에는 맞지 않았다. 근데 나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입에 맞지 않았던지, 가족들은 구워놓은 삼치는 손도 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입맛은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어쩌면 책 속에 있는 맛에 대한 식평도 주관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손암 선생께서 하신 식평과 저자가 한 식평이 달랐지싶다. 그럼에도 일치하는 식평은 조금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제목이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이다. 사람은 마음이 허할 때 무언가를 채워넣고 싶어한다. 스트레스 받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먹을 것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면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기는커녕 살만 찌고 독소만 채운다. 바다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말들 한다. 근데 더 생각해보면, 사람들 중에 바다를 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물은 싫어해도 바다를 보는 건 좋아한다.

 

 

 바다 앞에 서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숭고함과 장엄함에 대한 감탄으로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된다. 그 상태에서 싱싱한 바다의 생명들로 내 배를 채우면 나 자체가 싱싱해지는 느낌이다. 사실 바다의 생명들 또한 인간의 입장에서야 음식이지만, 입장을 달리하면 즈그들도 우리와 평등한 존재다.

 

 

 다만, 인간은 먹이사슬에서 제일 상위에 얹혀져 있으니, 필요한 만큼은 그들이 먹이가 된다. 그러니 그들은 고마운 존재다. 언제나 고마움을 잊지 않을 때 바다는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것 같다.

 책을 보노라면, 바다내음과 당장 생선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시키는 것 같은 착각에 들곤한다. 그만큼 바다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각에 새겨져 있는 자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자궁에서 자라지 않는가. 자궁속은 바다와 마찬가지의 아늑함과 고요함, 생명의 수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러니 우리가 바다를 볼 때 편안함과 잔잔한 설레임을 지니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에 인어이야기는 미스테리하지만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부분이었다. 저자의 원고를 읽고 딸이 그렸다는 인어그림은 유쾌했다.   

 

 -> 요그림



 

 

  -> 박제된 돗돔이라고 한다. 입큰 사람같이 생겼다. 내가 알던 아줌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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