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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주식회사 - 진보는 어떻게 자본을 배불리는가
피터 도베르뉴 외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국제관계학과 교수인 피터 도베르뉴는 작가 이자 환경 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요. 특히, 1997년에 그의 저서에서 동남아시아에서의 무분별한 삼림 벌채에서 일본 기업이 자행하고 있는 '파괴적인 수단'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전지구적 경제 상황에 있어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소비지상주의가 사회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는지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다른 공저자인 제네비브 르바론은 영국 셰필드대학의 선임 연구원이자 셰필드 정치경제연구소의 연구원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세계 경제의 노동과 고용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특히, 강제 노동 및 현대 노예와 인신 매매가 관련된 불법적인 비즈니스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유엔과 정부 기관과 연계하여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적법한 노동 기준을 각 기업들에게 이해시키는 데에도 중점을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간단한 서지 정보는 원제, "Prostest, INC"로 지난 2014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3월 도서출판 동녘에 의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국역된 글의 제목인 '저항 주식회사'는 본래 원제보다 저자들이 밝히고자 하는 오늘날 압도적인 세계 경제와 그것에 마땅히 저항해야 할 글로벌 시민 단체 혹은 진보주의자들의 진면목을 아주 여실히 드러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소위 많은 NGO들이 이제는 다국적 기업들의 직접적인 현금 지원 없이는 자신들의 꽤 특별한 활동이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거대 기업의 기부와 같은 사회 사업과 마찬가지로 더 강력하게 자본주의적 논리를 사회 전반에 강화시키는 역할 만을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저자들은 상당한 비판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린피스'와 같은 단체는 다국적 기업들의 막대한 지원이 자신들의 목적과 활동을 위해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며, 이러한 단체들을 이끄는 수뇌부들은 자신들을 위한 막대한 활동비 내지 소위 '특별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여지없이 수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마치 일반적인 기업의 임금 지급 상황과 거의 동일한 것인데요. 거의 대부분이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 이들 단체들이 이 글의 4장에서도 도출되고 있듯, '1980년 이후 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비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은 선명한 도덕적 원칙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이들이 지원금과 관련해서는 거의 '친기업적인 모습'이라는 부분은 뭔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과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저들 단체가 과연 거침없는 신자유주의화에 도덕적 제동을 걸 수 있을지는 확언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 책에 오해를 해서는 안되는 부분은 두 공저자가 단순히 앞선 진보적 단체들이 선연한 원칙을 견지하면서 세계 평화와 자연 보호 혹은 인권을 위해 노력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들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강화시켜 나가는 첨병이 되고 있다는 점, 오직 그 점만을 부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민주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오로지 안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반대의 세력을 '테러리즘'으로 몰아간 3장의 진술과 거침없는 자본주의가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쌍두마차로 사회를 피폐화 시키고, 많은 시민들이 세대를 거치는 동안 쉬이 인정하고 있던 '사회적 삶'을 오로지 개인의 책임만으로 전가시켜 버린 4장의 진술과, 이렇게 '분명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다국적 기업들과 결탁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 논리를 강화시키는 등의 6장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분들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미 이곳에서도 인용되고 있지만 토마스 프리드먼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결코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는데요. 1980년 이후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주요한 국가 경영의 논리이자, 자유 진영의 강화된 자본주의적 요구였던 신자유주의가 사실상 인위적이고 공격적인 정부의 개입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에도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의 시장에 대한 개입을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종의 금기로 보고 있지만 실상은 신자유주의가 정부의 손끝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국가의 복지 지출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은 정부가 '보이지 않는 손'이 노니는 연못을 콘크리트로 더 확장하기 위해 만든 특별한 기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동일한 맥락으로 4장에서는 신자유주의가 더 강화한 '개인주의'에 대해 꽤 면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시민성이 위축되고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등장하자 노동자와 약자들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권리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진술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누군가의 삶을 떠받치게 되는 정신적이고 이상적인 조건과 마찬가지로 개인은 스스로의 경제적 조건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개인주의적 담론과 함께 확산되기에 이릅니다. 자신의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책임이며, 개인의 여타 불행한 상황에 대해 정부와 사회에 결코 채근해서는 안된다는 소위 '극단적인 개인주의화'는 좀 더 과격한 표현을 빌어, 마땅한 사회 부조와 시민에 대한 사회의 의무를 지구에서 퇴출시켜 버렸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여기 공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저항이 실제로 전무했고 이것을 거의 조종했다고 봐도 무방한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각 시민들에게 내면화 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진보 세력의 몰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지구와 전세계의 지속적인 진보를 위해 노력한다는 저 수많은 진보주의적 단체들의 '영리화'도 이에 한 몫을 했는데요. 특히, 1장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들 진보주의 운동들이 자본에 아주 이상할 정도로 '순응'한 것은 전반적인 사회적 책임의 후퇴와 동시에 시민 대다수의 각박한 삶은 기본으로 삶을 전혀 통제할 수 없고, 반대로 '특별한 계층'의 자유 만을 강화시켜 버린 현재의 극단주의적 메커니즘을 잉태했습니다. 여기에는 이러한 '사적 이익화'가 자연스레 공공선을 위한 지점으로 함께 나아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맹종과 함께 말이죠.
사실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단순히 어떤 시민 사회의 단편을 변화시키거나 자본주의적 논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 단순히 소수의 몇몇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주류가 되었던 것은 3장의 일관된 진술에서 정부가 사회의 반대 세력을 공권력을 동원해 지속적으로 무력화 시킨 것에 있기도 한 데요. 일찍이 마누엘 카스텔은 시민들이 정부를 향해 투쟁하게 될 때, 먼저 중무장한 경찰 권력에 대해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사회학자의 단순한 언설이 아니라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진보주의적 시민 운동을 사실상 탄압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3장에서 아주 상세히 보여지는 캐나다의 사례는 의미 더욱 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에게는 평범한 민주 국가로 알려져 있는 캐나다가 실로 견고한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했는데요. 이미 캐나다 당국은 각 시민 운동 조직에 '프락치'까지 투입할 정도로 경찰 조직 전반이 잘 갖춰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를 무턱대고 나무랄 부분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만, 정부가 건전한 사회의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경청하지 않고, 듣기 싫거나 가능하지 않다는 의견을 '반사회적인 주장'으로 몰아가며 민주주의의 아주 기본 원칙인 다원주의를 옥죄는 데 있는 것인데요. 더욱이 근래 주요한 정상회담이 된 G20 회의에서 단순한 피켓 시위도 거부하는 각국 정부의 일관된 태도는 뭔가 시민들을 '예비 폭도들'로 싸잡아 인식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아직까지도 범람하고 있는 여러 서적이나 양심적인 방송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철지난 음모론으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분명 꽤 많을 겁니다. 우리가 현재 체험하고 있는 '전세계적 경제화'가 1980년대 이전보다 극적이고 차별적인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했다는 인식적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데요. 이에 단적으로 경제적 자유화에 따른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을 기득권으로 놓고 본다면 이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자원과 수많은 인맥들은 평범한 시민들의 그것보다 극단적으로 불균형적인 상황인 것은 자명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소득을 비롯한 경제 체제 자체로 불균등한 이행이 있는 것인데요. 18세기 이후 축적된 마땅한 시민의 권리 그리고 시민 불복종 운동 등을 사실상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가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체는 우리가 신봉하는 민주주의적 원리에 크게 위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전부 다 차치하고 지금까지는 신자유주의적 이행 자체가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시녀로 만들어 소위 자유 진영의 금기로 만들기까지 했는데요. 따라서 이 글에서의 공저자들이 도출한 논증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아마도 대부분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사이비 민주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보수주의가 지금에서는 진정성이 없는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목도할 미래에는 헌팅턴 류의 터무니 없는 '민주주의의 과잉'이 아니라 그야말로 과두제로 나아갈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전사회에 일으킬 난장은 덤으로 말이죠.
-극단주의자들 혹은 극단주의 정치가 주류 정치에 점차 머리를 내밀고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는 자신들의 이익이 될만한 것에 마땅히 베팅을 하게 될 텐 데요. 이 책의 중요한 통찰로서 2001년 이후 미국을 비롯한 민주 국가들이 시민 연대와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공권력으로, 더욱이 중무장한 병력을 사용해 이를 막아왔다는 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향한 새뮤얼 헌팅턴이 '민주주의의 과잉'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권위주의 국가들이 입과 얼굴로는 민주주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위기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와 좀 더 강력한 공존을 원하는 기득권 정치가 강화된다면 말이죠.
하지만 인권,성평등,사회정의,동물권,환경운동 조직들의 의제와 담론, 그리고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와 제시하는 해법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도전하기보다는 순응하는 경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군대와 민간 경찰을 갈라 놓았던 구분선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희망과 분노, 그리고 참혹함의 사유화는 공동체를 갈가리 찢어 놓아 사회 조직을 지탱하기 어렵게 만든다
가령 여성운동 조직들은 나이키, 골드만삭스 같은 기업들과 협력하여 개발도상국 여성들을 위한 사회경제적 기회 마련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 왔다
유명 브랜드 회사들은 젠더와 여성의 권리 문제를 중심으로 비정부기구와 공동의 기구를 꾸리고 재정을 지원하며 이를 관리하기도 한다
좀 더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무역을 위한 이런 노력들은 이윤 극대화를 우선시하는 사업 모델에 대해서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 공동선을 창출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고 가정하기도 한다. 그 누구도 애덤 스미스가 1776년에 내놓았던 다음 주장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제는 일각에서 말하는 대중 시위에 대한 ‘준準군사적인 경찰 활동‘이 민주주의 체제와 권위주의 체제 모두에서 증가하고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국가가 무역을 자유화하고, 자원을 사유화하며, 외국 기업을 달래 가면서 세계화와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안착시키기 위해 여전히 폭력을 사용한다
2012년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개인에게는 최소 9,000달러, 조직에는 최고 3만 달러까지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경한 처벌로 시위를 범죄화하는 법률에 서명했다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의 득세는 사회적 삶의 사유화를 심화시켰고, 사회적 삶의 사유화는 다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담론은 구조적인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박한다. 그리고 국가정책으로 공동의 책임을 관리해야 한다는 요구를 잠재워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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