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나교는 지나(승리자 또는 정복자)의 무리라는 뜻이다. 승리자란 12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나타붓다를 말한다. 그들이 정복(극복)한 것은 내면의 집착, 탐욕, 오만, 분노 등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자이나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 자이나교는 서인도 뭄바이 지방을 중심으로 60~ 70만 정도의 교도가 있다고 한다. 자이나교의 주요 교리들로 비폭력(아힘사, 육식 금지), 비절대주의, 무소유 등을 들 수 있다.

자이나교는 동기와 목적에 중점을 두는 불교와 달리 행동에 중점을 두는 등 문제 있는 교리, 교주의 능력 차이 등의 이유로 불교에 흡수되었다.(미즈노 고겐 지음 ‘불교의 원점‘ 168, 169 페이지) 오늘 시인 김윤선 님의 시를 통해 자이나교도들이 1년에 하루 단식을 해 그간 먹어치운 음식들과 감정의 거품들을 다 털어버린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

내장에 쌓인 사체의 고통을 지우고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 적은 없는지, 다른 사람의 말을 왜곡하지는 않았는지, 입과 귀와 손을 씻어 말린다는 것이다. 김윤선 님은 절대 채식주의자(vegan)이다. 고대 이집트의 옥수수의 신을 기리는 오시리스 축제가 있다. ˝슬픔과 비탄에서 시작하여 환희로 끝나는 부활 기원의 의식˝이다.(도정일 지음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31 페이지)

살기 위해 오시리스 신의 화신인 옥수수의 목을 따고 밑동을 자르는 불경(不敬)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삶을 참회하는 것이다. 나도 2007년 1월부터 2009년 7월까지 30개월간 육식을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시기와 이상한 어깃장의 시선을 많이 받았다. 네가 착용하는 벨트, 구두 등은 동물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당시 내 결심은 비참하게 밀집 사육되는 동물들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붓다 역시 육식을 했다. 대장장이 춘다가 공양한 돼지고기(버섯 요리라는 말도 있다.)를 먹고 식중독에 걸려 열반에 든 것이다. 관건은 절제에 있다.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는 AI 대살육이 많은 연민과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음은 물론이다. 육식은 신화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득보다 치러야 하는 댓가 또는 전가하는 피해가 크다.

그런데 순간의 쾌락(지금 육식인들로 하여금 고기를 선택하게 한는 동기는 조미료 또는 향신료 맛이다. 날 것 그대로의 고기가 아닌 것이다. 고기는 결국 시신을 먹는 것이다.)을 위해 소화시키기도 어려운 고기를 먹는 것이다. 유당 불내성 또는 유당 분해 효소 결핍증이 있다. 우유에는 탄수화물의 일종인 락토오스(유당)가 들어 있는데 일부 사람에게는 이 물질을 소화시키는 락타아제가 없다.

세계 여러 곳의 문화를 비교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은 연구해야 할 병증은 유당 분해 효소 결핍증이 아니라 유당 분해효소 지속증이라고 말한다고 한다.(이상희 지음 ‘인류의 기원‘ 87 페이지) 섭취된 고기는 리파아제(지방분해효소)나 프로타아제(단백질분해효소)의 도움을 받아 소화된다. 유당분해효소지속증처럼 리파아제/ 프로타아제 지속증도 연구 대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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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번쇄 다기(多岐)한 조선 당파의 실상, 학파가 곧 당파였던 그들의 사정(학파가 곧 당파였다는 말은 저자의 말이지만 저는 조선의 학파는 당파이었음은 물론 종파宗派적이기까지 했다고 생각합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 주자와 그가 체계화한 성리학의 실상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책이란 생각을 하며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었습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이름이 나오는 전설적인 인물이라지요. 어쩌면 전설적이라기보다 신화적이라 해야 마땅할지 모르는 것은 그가 공자나 주자처럼 송자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조선과 시공간적으로 먼 13세기 남송의 학자인 주자의 학문을 조종(祖宗)으로 삼은 송시열로서는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겠지요. 저자는 자신에게 송시열은 호오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 탐구의 대상이라 말합니다.

번쇄다기한 역사책을 쉽게 읽는 마법의 지름길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리학이란 큰 틀로 사태를 보는 것도 의미 있는 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공자의 말씀보다 공자에 대한 주희의 해석을 절대시한 송시열과, 공맹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윤휴의 대립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알다시피 공자는 주나라를 본받아야 할 나라로 보았습니다. 송시열은 주나라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흥미롭게도 주나라와 조선을 이어준 것이 공자와 주자의 유교(장인용 지음 '주나라와 조선' 7 페이지)였지요. 저자는 북벌주의자라 할 효종의 죽음으로 조선은 송시열 등이 주도하는 극심한 문치의 나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151 페이지) 이 부분에서 말해야 하는 사람 역시 송시열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북벌을 주장했지만 실상은 효종의 북벌론에 반대했는데 그 이론적 근거가 되어준 것이 바로 주희의 이론이었지요. 송시열은 숙종대에 이르러 종묘에 효종의 신주를 영원히 모시자고 주장함으로써 예송논쟁 때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공격을 받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잡고 효종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확실히 밝혀두려 했지요.(330 페이지)

저자는 이를 계책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제가 생각한 것은 자기부정이란 말입니다. 광해군이 법적인 모후였던 인목대비에게 불효했다는 이유로 반정을 일으킨 인조(와 그 일파)가 소현세자의 빈인 며느리 강빈을 부친상에 가지 못하게 한 것은 저자의 말대로 심각한 자기부정(63 페이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명분을 중시해 명을 받들고 청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두 차례의 호란을 자초했지요. 물론 선조의 무능과 시대착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송이 칭기즈칸이 금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을 압박해 오는 난세에 명분과 절의(節義)를 중시한 성리학을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대안으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맹난자 지음 '주역에게 길을 묻다' 62 페이지)

효종이 일찍 죽지 않고 송시열이 일찍 죽어 북벌이 현실화되었다면 조선은 어떤 상황을 맞았을까요? 송시열이 받아들여 정치에 적용시키려한 성리학은 너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새로 익힌 단어들은 많습니다. 인견(引見), 입대(入對), 봉사(封事) 등등...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으며 지혜로 은나라를 상대한 주나라(우궁좌묘가 아닌 궁궐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을 두는 좌묘우사는 이 주나라의 지혜의 산물이지요.), 명과 청 사이에서 현실외교를 펼친 광해군 vs 명분에 치우쳐 나라를 위기에 빠트린 선조, 주자 유일주의로 나라를 경직과 혼란의 당쟁으로 몰고간 송시열 등의 대립구도를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분명한 시사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는다는 주이불비(周而不比)란 말로 송시열과 그 일파를 비판합니다. 송시열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니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였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고 이는 챽의 제목이기도 하지요.

송시열이 그토록 닮고자 했던 주희(朱熹)가 심혈을 기울여 공부한 주역은 변화와 흐름을 중시하는 학문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변화에 민감했던 주희는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인 밝을 희(熹) 즉 밝음을 어두울 회자가 들어 있는 회암(晦庵)이란 호로 중화하려 했지요.

잘 알다시피 주역(周易)의 역은 변화는 물론 그 변화를 낳는 이법(理法) 자체를 의미합니다. 송시열은 변화가 아닌 불변의 이법만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수선한 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상황과 인물들에 좀 더 익숙해지면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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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이다. 마침 오늘은 일요일이다. 일월 일일 일요일이란 말을 조용히 되뇌어본다. 만트라(진언) 같이 느껴지는 말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결국 흘러갈 것이다. 문제는 정체(停滯)이다. 2016년은 문화유산해설사 공부를 위해 그 어느 해보다 서울을 많이 찾은 해이다. 

 

서울은 그 유래에 있어서 몇 가지 시나리오를 갖는다. 어떤 것이 정설인지 관계없이 나는 지금의 서울이란 말이 좋다. 시인 릴케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는 말('말테의 수기')을 했지만 적어도 공부를 위해 찾는 서울은 참 좋다.

 

전쟁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경복궁, 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남산한옥마을, 북촌, 선정릉, 한양도성 등을 수업을 통해 만났고 개인적으로 덕수궁(이중섭전), 세종문화회관(호안 미로전) 등을 찾았다. 다시 진언 같은 일월 일일 일요일이란 말을 되뇌며 나의 2017년이 그 부드러운 유음(流音)처럼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흘러가길 기도해본다. 아니 그렇게 흐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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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7-01-01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록 사람이 그어놓고 만든 시간이긴 하지만, 2017년 한 해도 생각하신 일 모두 이루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구요 ㅎㅎ 저도 문화공연이나 전시 때문에 서울 가는데 참 좋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01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러시군요. 서울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되네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님도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맞으시길 바랍니다...
 

 

CIA는 세계 3대 요리학교의 하나인 Culinary Institute of the America의 약자이다. 그곳에서 유학한 뒤 귀국해 요리와 미술을 주제로 칼럼을 쓰다가 그림책까지 내게 된 최지영. 요리와 그림의 관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내 관심은 그가 미술서를 탐독하고 갤러리를 제 집 드나들 듯 오가며 애정을 키워 나간 끝에 미술 교양서를 썼다는 사실에 닿아 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세잔이다. 그는 사과를 많이 그린 화가이다. 그런데 그를 보며 그림과 먹을 것의 연관성을 논할 수 있는지 자신하지는 못하겠다. 세잔은 사과를 먹을 것으로 보고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잔은 참으로 다양한 색깔의 사과들을 그렸다. 세잔은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사과들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각도를 형성하는 화폭에 공존하는 그림들을 그렸다.(이정우 지음 ‘세계의 모든 얼굴’ 94 페이지)

 

세잔은 모델들에게 심한 부동성(不動性)을 요구했다. 세잔은 초상화 하나를 그리는 데도 백 번도 넘게 모델을 세웠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의 후기에는 주로 아내의 초상과 자화상이 주를 이룬다. 세잔은 모델에게 사과처럼 가만히 있을 것을 요구했다.(전영백 지음 ‘세잔의 사과’ 238 페이지) 이 글만 보면 세잔이 사과를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사람 대신으로 활용한 것으로 알겠지만 세잔에게 사과는 그런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다.

 

궁금한 것은 앞서 이야기한 ‘그림의 맛’의 저자(갤러리를 제 집 드나들 듯 오갔다는..)가 갤러리에서 어떤 걸음을 걸었을까, 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미술관 안에서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걸으라는 말을 했다.(요한 이데마 지음 ‘미술관 100% 활용법’ 25 페이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을 보기 위해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을까?

 

카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관(棺)을 닫기 전 어머니와의 마지막 인사를 거절했다. 반면 세잔은 생트빅투아르산을, 자신의 예술적 뜻을 이해해주고 끊임없이 후원해주었던 어머니의 장례가 있던 날에도 찾았다.(전영백 지음 ‘세잔의 사과’ 375 페이지) 세잔은 그 산에 오래 머물려 그림을 그렸다. 차이가 있다면 ‘그림의 맛’의 저자는 그림을 공부한 것이고 세잔은 화가여서 한 군데 오래 머물러야 했다는 점이다.

 

세잔은 빛에 반사된 산이 아닌 산의 존재감 자체를 그리려 한 화가라 말해진다. 대상을 입체적으로 조합한 뒤 분할하는 등의 방법 등으로 그림으로써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은 실재하는 생트빅투아르산과 사뭇 다른 모습이 되었다. 실재보다 그림을, 대상보다 표상을 중요하게 여긴 결과일 것이다. 그간 너무 소원(疎遠)했던 세잔을 통해 현대 미술로 진입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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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금요일 네 분께 경복궁 해설을 했다. 내가 치른 첫 full 해설이었다. 광명 출신의 네 여자 분인 그분들은 여중 또는 여고 동창들이었다. 그 분들 가운데 미술대학을 졸업한 분이 눈에 띄었다. 나이보다 10년 정도는 젊게 보이는, 모델을 해도 좋을 것 같은 그 분은 놀랍게도 최근 몇년간 마음 고생 때문에 얼굴이 많이 상한 것이라고 했다. 골프 때문에 팔꿈치가 아파 약을 복용하는 그 분을 보며 한 친구가 저 사람은 결혼 때문에 미술을 포기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내가 그 분에게 골프에서 힘 빼는데 삼년이란 말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사실이라 답했다. 그 분은 큰 근육을 쓰는 골프 때문에 그림의 섬세한 필치를 포기하게 되더라는 말도 했다. 힘 빼는데 삼년이란 말을 물은 것은 내가 힘을 뺀 스윙에 비유될 법한 쉬운 글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네 분들 가운데 문화 해설사가 있다. 그리고 올 여름 췌장 수술을 받은 분도 있다.

 

내년 봄 다시 경복궁 또는 다른 궁 해설을 통해 그 분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김소연 시인의 ‘목련 나무가 있던 골목‘이란 시가 생각나 해설사분께 보내 주었다. 나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봄이 올 때까지 주먹을 펴진 않을 겁니다 내 주먹 안에/ 당신에게 줄 밥이 그릇그릇 가득합니다 뜸이 잘 들고 있/ 습니다 새 봄에 새 밥상을 차리겠습니다 마디마디 열리는/ 따뜻한 밥을 당신은 다아 받아먹으세요˝

 

모두 이 추운 겨울을 잘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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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31 0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벤투님^^ 올해 하반기는 경복궁 해설에 올인하셨던 거 같아요^^? 좋은 공부였을 거 같아요.
올한해 뜻하신 계획은 잘 마무리 되셨는지...
내년도 건강히 읽고 생각하며 쓰는 인간으로 또 함께 하길 바랍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벤투의스케치북 2016-12-31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새벽에 오셨네요. 올 한 해도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신 agalma님! 말씀대로 경복궁에 많은 애정을 쏟았습니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어느 해보다도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합니다. 감사합니다... agalna님도 건강, 건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