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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번쇄 다기(多岐)한 조선 당파의 실상, 학파가 곧 당파였던 그들의 사정(학파가 곧 당파였다는 말은 저자의 말이지만 저는 조선의 학파는 당파이었음은 물론 종파宗派적이기까지 했다고 생각합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 주자와 그가 체계화한 성리학의 실상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책이란 생각을 하며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었습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이름이 나오는 전설적인 인물이라지요. 어쩌면 전설적이라기보다 신화적이라 해야 마땅할지 모르는 것은 그가 공자나 주자처럼 송자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조선과 시공간적으로 먼 13세기 남송의 학자인 주자의 학문을 조종(祖宗)으로 삼은 송시열로서는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겠지요. 저자는 자신에게 송시열은 호오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 탐구의 대상이라 말합니다.
번쇄다기한 역사책을 쉽게 읽는 마법의 지름길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리학이란 큰 틀로 사태를 보는 것도 의미 있는 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공자의 말씀보다 공자에 대한 주희의 해석을 절대시한 송시열과, 공맹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윤휴의 대립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알다시피 공자는 주나라를 본받아야 할 나라로 보았습니다. 송시열은 주나라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흥미롭게도 주나라와 조선을 이어준 것이 공자와 주자의 유교(장인용 지음 '주나라와 조선' 7 페이지)였지요. 저자는 북벌주의자라 할 효종의 죽음으로 조선은 송시열 등이 주도하는 극심한 문치의 나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151 페이지) 이 부분에서 말해야 하는 사람 역시 송시열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북벌을 주장했지만 실상은 효종의 북벌론에 반대했는데 그 이론적 근거가 되어준 것이 바로 주희의 이론이었지요. 송시열은 숙종대에 이르러 종묘에 효종의 신주를 영원히 모시자고 주장함으로써 예송논쟁 때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공격을 받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잡고 효종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확실히 밝혀두려 했지요.(330 페이지)
저자는 이를 계책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제가 생각한 것은 자기부정이란 말입니다. 광해군이 법적인 모후였던 인목대비에게 불효했다는 이유로 반정을 일으킨 인조(와 그 일파)가 소현세자의 빈인 며느리 강빈을 부친상에 가지 못하게 한 것은 저자의 말대로 심각한 자기부정(63 페이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명분을 중시해 명을 받들고 청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두 차례의 호란을 자초했지요. 물론 선조의 무능과 시대착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송이 칭기즈칸이 금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을 압박해 오는 난세에 명분과 절의(節義)를 중시한 성리학을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대안으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맹난자 지음 '주역에게 길을 묻다' 62 페이지)
효종이 일찍 죽지 않고 송시열이 일찍 죽어 북벌이 현실화되었다면 조선은 어떤 상황을 맞았을까요? 송시열이 받아들여 정치에 적용시키려한 성리학은 너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새로 익힌 단어들은 많습니다. 인견(引見), 입대(入對), 봉사(封事) 등등...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으며 지혜로 은나라를 상대한 주나라(우궁좌묘가 아닌 궁궐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을 두는 좌묘우사는 이 주나라의 지혜의 산물이지요.), 명과 청 사이에서 현실외교를 펼친 광해군 vs 명분에 치우쳐 나라를 위기에 빠트린 선조, 주자 유일주의로 나라를 경직과 혼란의 당쟁으로 몰고간 송시열 등의 대립구도를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분명한 시사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는다는 주이불비(周而不比)란 말로 송시열과 그 일파를 비판합니다. 송시열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니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였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고 이는 챽의 제목이기도 하지요.
송시열이 그토록 닮고자 했던 주희(朱熹)가 심혈을 기울여 공부한 주역은 변화와 흐름을 중시하는 학문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변화에 민감했던 주희는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인 밝을 희(熹) 즉 밝음을 어두울 회자가 들어 있는 회암(晦庵)이란 호로 중화하려 했지요.
잘 알다시피 주역(周易)의 역은 변화는 물론 그 변화를 낳는 이법(理法) 자체를 의미합니다. 송시열은 변화가 아닌 불변의 이법만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수선한 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상황과 인물들에 좀 더 익숙해지면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입니다. 감사합니다...